꼬맹이 시절,닷새마다 열리는 장날은 신천지였다.
동네에 서점이 없던 시절(허기사, 지금도 없다),장날 길바닥 좌판에서는 참고서도 팔고 '소년 중앙' 어린이용 잡지도 팔았다.
철 지나 이월된 길바닥표 잡지에서 우주 소년 '아톰'도 만났고,입에서 무시무시한 불 뿜어대는 머리 셋 달린 龍(용)도 만나
무서움에 떨면서 흥미 진진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기도 하였다.
한달에 한번,어머니 치마자락 붙잡고 책 보게 해달라고 칭얼댔던 기억이 새록 새록 피어 오른다.
국민학교 후문 아래 뻘건 쇳물 녹여 호미,낫,소시랑,부엌칼등을 만들던 대장간의 망치소리가 지금도 기억난다.
인삼도 팔고 지네도 판 뚱보 할아버지도, 배추.무.상추 씨앗을 팔았던 오째 아버지의 모습도 선하다.
한모퉁이,비단가게 처마 끝에서 흰 가래떡에 고구마 조청을 팔았던 두 명의 할머니도 보고 싶다.
코흘리개 입에 맞게 자른 가래떡을 조청에 팍 찍어 내,어린 입맛을 황홀하게 한 어릴적 최고의 먹거리였다.
한세기 지나 사랑한 여인한테 고구마 조청을 해달라고 부탁했지만,어려워서 그 시도조차 못했다.
게다가,연필 자국 선명한 신문지 돌돌 말아 한 숟가락 푹- 떠서 소금 뿌린 번데기와 국물은 코흘리개 기억에는 일품이었다.
엿목판을 앞에 메고 채캉 채캉 둔탁한 엿가위 소리는 안 팔려 엿장수의 울적한 심정을 달래듯 소리 높인다
"가락 굵고 유허고 쫄깃쫄깃해유~
양념만으로 닷푼어치나 넘는 깨엿유~
늙은이 해소에 허기 재우는 콩엿유~
엿 사유. 엿을 사유. 찹쌀엿이유~
아저씨 엿치기 한 번 해유~"
입담 좋은 약장수도 있다.
"자,약이 왔습니다.
오늘 한내장에 갖고온 약은 무슨 약인가 하면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바르면 찌꼬 잘 낫는 약입니다.
그러니 한번 오셔갔고 약을 사가시랍니다.잘 보세요"
머리에 두종 이마에 상종 눈에 나는 안질 입에는 구종
얼굴에 나는 안종 코에는 비종 배에는 복종 똥구녕 나는 치질
바르면 낫고 안 바르면 안 낫는 거
물에 데고 불에 데고 바르면 잘 낫는 거 오늘 여기서 나왔습니다.
사시자면은 시중가보다 더 싸게 여러분께 노나 드리겠습니다.
"잘 헌다" "잘 나간다. 어차" 추임새 띄우는 소리가 여기기서 들린다.
"잿물 사리다 양잿물 사하 예~ 잿물 비누요 양잿물 비누요~"
양잿물 장수 목청도 원님따라 가듯 덩달아 높아가고 있었다.
음~매 음~매 우시장옆 뜨거운 김 모락 모락 피워 오르는 영호네 소머리 국밥집도 떠오른다.
우리네 할부지들이 소 코뚜리 말뚝에 묶어 놓고
막걸리 한 잔에 기분 좋게 취하신 그 목로주점 정겨운 영상도 떠오른다.
'엄마야! 옷 사줘! 옷 입을 거 없단 말이야~'
'니 애비 노름해서 거지다.니 팔아서 사주래?
"길가다 양놈 돈 지갑 줍으면 모를까 엄마 돈 없다'
눈 오는 날 때때옷 가게 앞, 머리 기계충이 허옇게 핀 딸과 엄마의 길가 댓거리가 떠오른다.
남자애들은 박박 깍고 여자애들은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한결같은 헤어스타일이 생각난다.
그 엄마 손에는 돈 된다고 모아온 머리카락이 신문지에 한 웅큼 보이기도 했다.
한내장에 나오면 새로운 물건을 접하고 자주 못 보던 친척을 만나 얘기꽃을 피운다.
그리고 혼담이 오가는 장소로는 안성마춤이다.쉰 넘은 세대는 장터를 통해 평생 배필을 찾기도 했다.
그런 사돈의 경우 불과 이,삼십리의 거리 안에서 성혼이 이루어져 한동네 이혼은 말도 안 됐던 시절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른 아침부터 온 동네 축제 같았던 장날 풍경이 쓸쓸해졌다.
군에서 제일 컸던 고덕중학교의 1,500명의 학생이 이제는 200명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농협 하나로 마트로 가고,상인들과 장돌뱅이들의 한숨은 늘어 간다.
동네 구멍가게를 다 잡아먹고 있다.
상인들의 설 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다.
시장터의 빈곳도 자꾸 늘어만 간다.
벼랑 끝 사람들의 기분을 알 것 같다.
동네 입구, 시장 길목 가까이에 버스 차표를 팔던 우리 집
가게이기 전에 동네 주민들이 서로의 안부와 정보를 함께 나누며
소주 한 잔,풍년초 담배 한대 나누던 토론장이었고,낯선 이의 길 도우미가 되어 주었던 사랑방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송방 주인들이 가난의 고통을 연기로 잊게 해주는 새마을,수연,풍년초,청자.수정,백조,솔등
구름초, 담배를 떼가기도 했던 하치장이었다.
그랬던 곳이 이제는
하루에 한 번 서울 가던 고속 버스도
하루에 두 번 대전 가던 시외 버스도
하루에 세 번 천안 가던 직행 버스도 발길 뚝- 끊은 지 오래다.
무작정,그 때가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동네보다 더 큰 예산,천안,공주,대전으로 나가야 하고,더 많은 것을 보아야 한다.
하지만,시장으로서의 기능이 점차 사라진다는 것은 안타깝다.
아기 울음소리가 줄어든 그 자리에
어눌하게 말하는 베트남,필리핀,조선족 아가씨로 채워진다해도
어르신들만이 늘어갈 뿐~적막강산이 되어 가고 있다.
젊은 이팔청춘들이 도회지로 떠나고 나니
이제 한내 장이 3일,8일 장이건만 며칠 장인지도 모른다.
장터 아줌마는 누가 누구네 식구인지 다 안다.
외상을 달아도 부끄럽지 않았다.
'얼마쥬?'"더 줘유~" 흥정하는 대신 '근디,돈 없슈?' "외상 쥬~"
미안한 얼굴로 머리 극적거리는 대신
계절 바뀔 때마다, 봄맞이 여름맞이 특별 할인 상품을 사는 게 마음 편해진 세상.
채소 전, 땀에 쩔은 앞치마의 장터 아줌마가 얹어주는
하나 더 듬(덤)보다,떨이 물건보다는 부가세와 소득세를 면제 받아
상품에 태그(꼬리표) 붙어 있고,one 플러스 one이 더 편해진 세상
가격과 편리함을 유일 잣대로 삼지 않아
경쟁의 바람에 힘 없이 퍼득거리는 사이
담뱃가게와 과일전 어물전,양은전,포목전과 합덕옥,백화옥,서산옥,홍성옥 선술집과
당구장, 양복집,이발소,전파사, 이불집이 소리없이 사라졌다.
유리창에 얼룩덜룩 미처 다 떼지못한 스티커 자국만 남은 비~인 가게가 늘고 있다.
가격과 서비스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문 닫은 이웃이 늘어만 가고 있다.
어쩌다 외부인이 차량 이끌고 와서 한내 장터에서 물어보고 가는 것은
시장 아래에 위치한 '고덕갈비' 한 집 뿐이다.
더러,주도가들은 고희가 지난 양조장을 찾기도 한다.
술꾼이라면, 한 둬 병 사서 집에 감춰두고 마실만한 '고덕막걸리' 맛이
왜정때부터 지금까지 년년이 그 맛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이런 저런 대책은 있었다.
다만,인구 매년 줄어들어 신통한 것이 없었을 뿐이다.
반듯하게, 장옥의 지붕을 씌워 비가림을 해주어도
장터의 장돌뱅이의 넘쳐나는 이야깃 거리도 얇아지고
예산군에서 상품권을 만들어도 한번 떠난 발길은 쉽게 돌아오지 않고 있다.
영원히 우리 곁에 있으리라 착각하고
서두르다 넘어지고 머뭇거리다 놓쳐버리고
한눈 팔다가 잃어버린 고덕장의 모습이다.
첫댓글 아,,,,,..우리나이가 되면 추억으로 사는가 싶다....... 한내장터도....... 6학년4반 교실도 ....... 숫검정이 되도록 놀던 운동장도..........
울언니 카페구나? 언제 이런글를 썼댜 창식오라버니 글솜씨가 있는줄 몰랐네 옛날 고덕장터 가 훤히보이는것 같구나 지금의 고덕은 너무 썰렁하고 쓸쓸해 그래도 울엄니는 그곳이 좋아서 떠나질 못하시고 혼자서 쓸쓸히 사시는거 볼때 맘 아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