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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영성 축사사역 스크랩 ☞ 이미지로 받는 성령의 음성
복음의키 추천 0 조회 114 10.02.09 14: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image)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습니다(창 1:27).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정보들도 역시 이미지로 전달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도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실 때 비유를 들어서 가르치셨습니다.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하지 않고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 까닭은 듣는 회중 때문입니다. 주님 곁에 몰려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린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지식수준이나 자라온 배경이 다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각각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일정한 기준에 맞는 사람들의 집합체가 아니기 때문에 직설적인 화법은 모든 사람들을 다 이해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비유에는 ‘은유’와 ‘풍유’로 크게 나뉩니다. 은유(隱喩)란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화법이며 예를 들면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귀가 있으며, 풍유(諷諭)란 본뜻은 숨기고 비유하는 말로 숨겨진 말뜻을 암시하는 방법입니다. 주로 속담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런 비유를 사용하는 태도는 판단을 듣는 사람에게 맡기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전할 때 그 듣는 대상이 당시 주님 곁에 몰려온 그 사람들만 아니라 후에 올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 시대에 적용되는 직설법을 피하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정보를 받는 주된 수단 역시 비유의 일종인 꿈과 환상입니다. 이 두 가지는 이미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며,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접근할 때 주로 이미지를 사용해서 정보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지를 통한 느낌이라는 의사소통의 수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성령의 언어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과 접속하게 되면 우선 매우 낯설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나타나심만 해도 우리는 무척 의아해 합니다. 기름부음이 강한 집회에서 경험하는 바이지만 성령의 나타나심이 우리의 상식 수준에서 크게 벗어납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 이해가 부족한 경우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공항교회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웃음’이나 초락도기도원에서 일어나는 ‘나뒹구는 현상’ 등입니다. 이런 현상들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은 성령의 이해에 있어서 인격적인 면만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항상 독특하고 예외적임을 우리가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배경은 역시 비유와 같은 이치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단순하게 깨달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많은 묵상이 필요하고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원천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하듯이 영적 증거로서의 나타나심에 대한 이해 역시 다양한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결론으로 고정하려는 태도는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사소통의 다양성이 이미지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image)대로 창조된 인간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성품도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미지는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성령의 음성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그 음성은 비유이며, 이미지인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음성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잡한 신호체계라는 점을 우선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양한 비유로 말씀을 풀어갔듯이 성령은 다양한 신호로써 이미지로 우리들에게 전달해 줍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꿈과 환상입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 대부분은 이런 복잡한 암호를 포함하는 이상(revelation)을 보았습니다. 사도 요한 역시 마지막 성경인 계시록을 아주 복잡한 이상으로 본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꿈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들을 기록한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과 실제로 그 꿈을 꾸었던 당사자의 꿈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루이스 세이버리는 주장합니다. 그는 ‘복음서 기자들이 꿈을 꾼 사람들에 의해 이미 상징적으로 해석된 꿈을 마치 실제의 꿈처럼 기록했다’고 주장합니다(Louis Savary 'Dream and Spritual Growth' 1999).

이미지로 전달되어 오는 성령의 정보들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미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들과 묵시서들을 통해서 상징에 관한 해석법을 배울 수 있으며, 이 원리를 개인적인 꿈에 적용시켜서 그 의미를 확장시켜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매일 꿈을 통해서 이미지를 보고 느끼는 법을 배우도록 배려합니다. 자신이 꾼 꿈을 자신이 해석함으로써 해석력을 기르게 되며, 이것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통해서 오는 느낌을 정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지와 생각은 성령께서 그 뜻을 전달하는 주된 통로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신이 필요하고, 자신에게 전달되어 오는 신호를 읽어낼 수 있는 요령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은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하는 개인적인 일입니다.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까닭이 개인적인 해석을 위한 것이며, 그런 바탕에서 볼 때 꿈과 환상 역시 개인적인 해석원리를 확보할 수 있을 때 유용한 것이 됩니다. 개인적인 해석력을 길러내는 일에 있어서도 역시 공통적인 원리는 무시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개별적이면서도 집합적이듯이 이미지를 읽어내는 일 역시 이런 원리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제공되는 이미지는 우선 자신에게 적용될 사항이며, 주님과의 친밀함을 누리기 위한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시는 이미지를 자신에게 철저하게 적용해서 다루는 일을 우선해야 하며, 이미지를 타인에게 적용하는 계시적인 의미로 확대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적어도 3년 이상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훈련을 한 후에 타인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정보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기술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곳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던 배경인 것입니다. 유대 신관에서 하나님의 호칭은 아버지라는 세속적인 호칭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곳으로 인도함을 받아 경험한 바는 하나님은 자신의 아버지였습니다.

이미지 확장을 통해서 우리는 계속 이어지는 이미지에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상상은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계속 이어지는 생각과 느낌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없는 영적 세계로 깊이 이끌려가게 되며, 그 과정에서 말로는 표현하기 쉽지 않은 느낌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바울이 지적한대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것들’(unspeakable gifts)입니다(고후 9:15, 고후 12:4). 우리는 이런 영적 경험을 통해서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그 시작은 이미지를 따라 가는 영적 여정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들 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이끌림을 따라서 그 깊은 곳에 이르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은 ‘포괄적인 느낌’(comprehensive feeling)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라는 구절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문자대로 하나님이 뚜렷한 음성으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선지자에게 들려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부분적으로 맞습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두루마리를 보여주면서 그것을 먹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두루마리를 먹었을 때 꿀같이 달았습니다(겔 3:2). 그 두루마리에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읽고, 먹었습니다. 이 표현은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는 기술의 포괄성에 대한 눈을 뜨게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말씀을 들려주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포괄적 느낌’이란 전체의 의미가 전달되는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인 말씀이 아니라 단편적인 비유 또는 이미지(환상)가 제공될 뿐이지만 그것을 받은 사람은 면밀하게 검토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포괄성을 우리는 구체성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본문의 한 구절을 제목으로 정했다면 그 주제를 2~30분의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글로 다시 구성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설교한다면 설교자는 이 주제를 자세하게 설명해서 듣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살을 붙이는 것입니다.

포괄적 느낌을 받은 후에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지를 묵상하면서 풀어내는 기술이 있어야만 신실한 신앙생활이 가능해집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침착해야 하겠다는 느낌이 들어온다면 우리가 그 느낌을 풀어내어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는지, 어떤 상황에서 침착해야 할 것인지,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유익을 얻게 될 것인지를 묵상하면서 찾아내는 과정이 우리 몫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포괄적 느낌을 풀어내는 기술이 생기면 예언자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미지는 그 속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이미지를 볼 때 들어오는 느낌과 생각을 제공 받게 되며, 이어지는 일련의 이미지들을 통해서 말씀의 폭을 넓혀가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 이미지에 이어서 들어온 생각들이 에스겔서 3장에 기록된 말씀들입니다. 그 당시 에스겔은 기록된 말씀과 같은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에스겔이 환상을 보고 난 후에 깊은 묵상을 통해서 그 때 받은 느낌과 생각들을 다시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성령의 음성을 듣고 난 후에 많은 시간을 드려서 다시 정리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을 실수 없이 훌륭하게 해 낸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수도 없이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는 극히 소수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장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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