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메시지 20051017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개인도, 민족도, 국가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하고 인간 왕을 원하면서부터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봅니다.
언제나 인간들은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구약에서도 그렇고 신약에서도 그렇습니다.
훌륭한 목사가 좋은 것이지 하나님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생각대로 따라줄 때 요구대로 해줄 때 좋은 것입니다.
대통령도 등 따뜻하게 해주고 배부르게 해주면 좋아 합니다.
목사도 사람 귀에 솔깃한 말을 해주어야 훌륭한 목사입니다.
그런데 어제 우리가 생각한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나는 떠난다.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아래서 나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세상에 속해 있고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이런 말씀만 하시는 하나님을 좋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요구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어 지니까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것이 조건적 사랑입니다.
내 기준 내 뜻에 맞추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초기 신앙이 전부 자기에게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못하실 것 같으면 자기의 생각대로 해버리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에 잘 먹고 잘 살줄 알았던 웰빙시대의 기대가 무너지니까 자기 생각대로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돌라오멜 연합군 롯의 문제도 하나님하고 상의 했습니까?
소돔성 멸하겠다고 하니까 옷자락 붙잡고 사정이나 하고
이삭은 어떻고 야곱은 어떻습니까?
내 아버지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하는 조건 적입니다. 자기조건 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안 해주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우상적 개념이지 존재적 개념이 아닙니다.
너는 가만히 있고 내가 비는 대로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필요할 때만 찾아가고 그리고 꼭 찾아 가야 될 명절이나 어떤 때가 되면 돈 조금 준비해서 주문할 것 잔뜩 적어서 가지고 갑니다.
마치 시장에 가면서 목록 작성해서 가는 것처럼
왠지 맞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이라고 하는 하나로 뭉쳐야지 각각의 요구를 하나님께 제시하면 흩어집니다.
하나로 합치려면 하나님의 듯에 맞추자 이것입니다.
제각각 자기의 요구하려면 자기 하나님 만들어 놓고 그 하나님께 각자가 알아서 빌면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라.
하나님의 뜻 왜? 하나님의 뜻이 선하시고 온전하고 그분이 기뻐하시니까
거기에 맞추던지 아니면 각각의 생각에 맞추던지
주가 다스리신다 할렐루야! 신정통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부해서 실패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 다섯째 날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다섯째 날의 땅에 속한 사람들과 싸워서 이겨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이 세상 나라를 통치하게 되는 날이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정통시 시대입니다.
우리는 그 때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그 대를 위해서 준비하고 있고 훈련하고 있고 이길 각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자기중심 적인 사람들, 자기 생각대로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과 끝까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모아야 합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입니다.
먼저 마음과 뜻과 몸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하나로 모이는 것입니다.
오늘 147절 8절, 9절입니다.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여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살리소서
주의 말씀, 주의 말씀
리드바레카 베이므라테카 주의 말씀 주의 말씀
147절에도 ‘카담’ 이라는 동사를 쓰고 있고 148절에서도 같이 쓰고 있는데 같은 피엘형입니다.
147절에서는 전에 라고 해석을 했고 아래는 깨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카담’ 이라는 동사는 쑥 내밀다, 앞서다, 예측하다, 재촉하다인데 여기서는 재촉하다라는 말이 맞습니다. 피엘형에 있어서는
새벽이라는 바네세프라는 이 단어가 황혼도 되고 새벽도 됩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새벽도 아니 날이 밝아오기 전의 어슴푸레한 시간입니다.
동이 트기 이전의 징조나 조짐이 보일 때를 네세프라고 합니다.
새벽녘이 되면 대개 눈이 뜨이고 잠이 깨이는데 그 전입니다.
수도사들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절에서 수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4시에 일어나서 염불을 하고 우리 기독교는 조금 늦게 시작을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렇게 부흥한 것도 아마 새벽기도의 열심 때문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새벽기도는 한국교회 뿐일 것입니다.
바네세프 미명이 트기도 전에 재촉합니다.
무엇을 하려고요? 부르짖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특히 ‘사바’ 라는 동사 자체가 소리높이 외치다, 소리치다, 부르짖다.
특히 이 동사는 자유롭게 되려고 요청할 때 쓰는 동사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바이블웤스로 공부를 할 예정입니다.
지금 사바라고 하는 동사는 욥기서에 많이 나옵니다.
간구하다, 부르짖다. 라는 뜻으로 주로 쓰입니다.
어디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 때, 풀려나고 싶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특히 새벽에는 잠이라고 하는 것에 묶여있고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행이 말끔하게 일어나면 좋은데 그렇지 않을 때를 네세프라고 합니다.
그래서 네세프는 몽롱한 상태를 네세프라고 합니다.
이것을 박차고 일어나서 부르짖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을 바라고 말씀만 사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하고도 싸워야 하는 것이 이 잠 때문에 내가 주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제쳐놓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주일날 메시지가 존재성에 대하여 어제는 존재성이라는 것은 꼭 함께 있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함께 하고 싶으신가 하는 원하시는 것인가?
그래서 애절한 간절함을 역설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으나 본마음은 그러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믿으려는 유대인들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거기서도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무엇에 묶여 있어서 사로잡혀 있어서 거기에서 풀려 나와야 합니다.
말씀 안에 들어와야 되는데 죄 가운데 묶여 있는 것입니다.
항상 죄를 생각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왜 카담 동사를 썼느냐? 왜 네세프라는 단어를 썼느냐? 왜 사바라는 동사를 썼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네세프를 물리치는 것이 카담입니다.
그 다음에 주의 말씀만을 사모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담과 사바 동사는 동시에 나와야 합니다.
잠 아 불러가라 너는 나로 하여금 주의 말씀을 사모하지 못하게 하는 자로다.
밤 짐승들은 꼭 낮에 잡니다.
야행성 동물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서 바아사베야라는 데서 접속사가 붙는가?
여시서도 기원문입니다. 부르짖기를 원하나이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야할 동사입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랍니다. 소망합니다.
여기서 기다리다. 라고 하는 것은 창8장12절에서 쓰이는 것처럼 7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니 다시는 그들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더라.
7일을 기다린다는 것은 제발 이제는 물이 감해서 네가 돌아오지 마라. 그래야 우리가 나가니까 하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삼상10:8에서도
7일을 기다리라 이것을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7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꼭 이레 이야기가 나옵니다.
148절 내 눈이 여기서는 아스므로트라고 해서 아주 거의 한 밤중 8104에서 유래 했습니다.
샤마르는 지키다, 보호하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지키고 집중하고 붙잡기 위해서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직 밤중에 파수꾼들이 지키는 그 시간입니다.
네세프나 아스므르라나 비슷한 내용인데 네세프는 천체 상황을 말하는 것이고 아스므라는 야경꾼들이 지키는 그 시간 입니다.
그 시간에 내 눈이 벌떡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기위해 라시아
라시아가 무엇입니까?
묵상하려고, 대화하려고, 생각하려고
지금 147절에서는 야할이라는 바라다라는 동사를 썼고
148절에서 시하라고 하는 부정사를 썼습니다.
야할 소망하고 바라는 것이 내게 오면 그때부터 그 말씀과 대화를 나누고 그 말씀을 묵상을 하고 그 말씀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 생활입니다.
그러니까 149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서 내 소리를 들으소서
사실 시하라고 하는 것은 속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는 것은 은밀하고 조용한 중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가 어떻게 거기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히 이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은 하나의 기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입니다.
특별한 분들만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시편을 7대대서 가운데 꼭 한권으로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개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신앙이 무엇이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참이고 원칙인가 하는 것입니다.
매일 교회 다니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목사 설교 듣고 나올 때 잊어버리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의 직접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119편 공부하면서 매 절마다 나오는 말씀이 주의 말씀, 주의 규례, 주의 계명 전부 주의, 주의 뒤에 가서 2인칭 접미사가 뒤에 다 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는 것인가 하면 그분으로 하나로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과 나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언제나 그분과 나 일대일 관계입니다.
그래서 오경역사 다음에 시가입니다.
우리가 욥기서를 보면 욥이 가족들과 그렇게 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말로 풍지 박산이 되어 버립니다.
그랬다가 곤고한 신세가 되어서 세 친구들과 만납니다.
그 많은 논쟁 속에서도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해결이 됩니다.
이것이 욥기서 입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일시적으로 주신 선물입니다.
언제든지 가족과 재산을 다 풍지 박산을 시켜버리실 수 있다 이것입니다.
욥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풍지 박산 시킨 그것이 복도 될 수 있고 풍지 박산을 시킬 수도 있어서 세상적인 것들은 그것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허락 없이는 그렇지 않지만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세 친구와 만나서 주고받고 하지만 해결이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해답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아예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복 있는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하며 산이 흔들려 바다에 빠질 지라도... 다 그런 말씀 아닙니까?
잠언은 무엇이냐면 세상에 살면서 이 말씀을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말고 이 말씀을 삶의 기본으로 삼아라는 철학서입니다.
전도서는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 시간에 자는데 우리 일어나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 특별히 잘 하는 것 아닙니다.
옛날에 이 저자도 그랬습니다.
우리보다 더 일찍 일어났습니다. 네세프는 우리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도둑도 이 시간에 올 도둑이 없고 도둑은 이미 벌써 다 도망을 갔습니다.
왜 이 때 카담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 때 시험에 들고 그 때 어려움에 처합니다.
바네세프에서 아스므로트일 때 우리는 그 때 카담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도 승리합시다.
패배하지 말고 승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규례를 따라서 나를 살리소서.
이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돈 좀 못 벌고 손해나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 입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