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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음악이흐르는 추억속으로 원문보기 글쓴이: 하나수
![]() 길은정 (가수·1961 - 2005) 1984년 '소중한 사람'으로 데뷔. MC와 DJ로 활약하며 80년대 청춘스타 중 한명으로 손꼽혔다. '가요톱10', '뽀뽀뽀' 등의 진행을 맡았으며 1992년에는 MBC연기대상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6년부터 암으로 투병생활을 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라디오를 진행했다. ![]() 김광석 (가수·1964 - 1996) 1984년 김민기의 음반 '개똥이' 에 참여하면서 데뷔. 통기타와 하모니카의 음유시인. '동물원'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 이후 솔로로 전향했으며 포크음악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서른즈음에', '사랑했지만', '일어나'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으며 1994년에 한국노랫말대상 좋은노랫말상을 수상했다. ![]() 김민수 (가수·1985 - 2008) 2005년 먼데이 키즈 1집으로 데뷔. 남성 듀오 '먼데이 키즈'로 데뷔했으며 풍부한 성량과 가창력으로 사랑받았다. 3집 앨범 발표 직후에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사고사했다. ![]() 김성재 (가수·1972 - 1995) 1993년 듀스 1집으로 데뷔. 1993년 등장한 힙합 듀오 '듀스'의 멤버. 친구인 이현도와 함께 듀스로 활동하며 1990년대 초반 X세대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 대중성과 음악성을 인정받았으며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가장 주목받던 신예였지만 1995년 해체했다. 1995년 11월 첫 솔로앨범을 내며 성공적으로 복귀했지만 이 앨범이 유작이 됐다. ![]() 김성찬 (배우·1954 - 1999) 1973년 MBC 공채탤런트 6기로 데뷔. 드라마 'TV손자병법'의 여포역으로 잘 알려져있다. '야망의 세월', '수사반장' 등의 드라마와 '바람불어 좋은 날', '천재선언' 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감초연기로 주목받았다. 항상 밝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배우였지만 1999년 '도전 지구탐험대' 촬영 중 말라리아에 감염돼 사망했다. ![]() 김영임 (배우·1980 - 2008) 2000년 캐스트넷 공개오디션으로 데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의녀 어진역으로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렸다. 영화 '강원도의 힘', '말죽거리 잔혹사' 등과 드라마 '쾌걸춘향', '대장금' 등에 출연했다. 송혜교의 뒤를 이어 '청하' CF모델로 발탁되고 연극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에서 백설공주역을 맡는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배우였다. 드라마 '하얀거탑' 출연 도중 유방암 발병으로 초반에 중도 하차했다. ![]() 김정호 (조용호·가수·1952 - 1985) 1973년 '이름 모를 소녀'로 데뷔. 70년대를 풍미한 천재뮤지션. 싱어송라이터가 등장하기 시작한 7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 '님' 등 포크송을 대표하는 곡들을 히트시켰으며 감수성을 자극하는 주옥같은 가사로 사랑받았다. 활동 중에도 폐결핵으로 고통받았다. 명창이었던 외할아버지 박동실과 어머니 박숙자 등 외가의 영향으로 국악을 가요에 접목하려고 시도했다. ![]() 김주승 (배우·1961 - 2007) 1983년 MBC 16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 1984년 드라마 '첫사랑'에서 황신혜의 상대역을 맡으며 꽃미남 탤런트로 큰 인기를 모았다. 이후 80년대 멜로의 왕자로 불리며 90년대 초반까지 지적이고 도시적인 이미지로 인기를 이어갔다. 드라마 '애정의 조건', '야망의 세월' 등에 출연했으며 장영자의 사위로 알려졌다. 1997년 발병한 췌장암을 극복하고 방송에 복귀해 제18대 한국방송연기자협회장을 역임했다. ![]() 김창익 (가수·1958 - 2008) 1977년 그룹 '산울림'으로 데뷔. 1980년대에 인기를 구가하던 그룹 '산울림'의 드러머. '아니 벌써', '어머니와 고등어', '가지마오' 등 포크송과 동요풍의 멜로디로 당시 자유로움과 젊음을 추구던 젊은 세대들에게 사랑받았다. 실제 큰형인 김창완과 둘째형 김창익이 산울림의 멤버. 각자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꾸준히 공연을 이어왔다.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사고사했다. ![]() 김현식 (가수·1958 - 1990) 1980년 1집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데뷔. 1980년대의 천재뮤지션. 언더그라운드 가수였으며 포크, 발라드, 블루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사랑받았다. 방송을 싫어해서 얼굴없는 최고의 가창력 가수로 알려지기도 했다. '사랑했지만', '비처럼 음악처럼' 등 수많은 히트곡들을 남겼으며 간경화로 사망한 뒤인 1991년, 유작 앨범 '내사랑 내곁에'가 골든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 나운규 (감독·배우·1902 - 1937) 1925년 영화 '운영전'으로 데뷔.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 한국 영화의 원전으로 알려진 영화 '아리랑'을 주연, 감독했으며 '풍운아', '사랑을 찾아서', '벙어리 삼룡이' 등을 제작했다. 감독이자 배우였고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리랑 3'은 한국 최초의 유성영화이다. 지병인 폐병으로 고생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영화제작에 힘썼다. ![]() 남정임 (이민자·배우·1945 - 1992) 1966년 영화 '유정'으로 데뷔. 1960년대 1세대 트로이카 여배우 중 한명. 데뷔작을 흥행시키며 신데렐라처럼 등장해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대표 여배우이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중 결혼과 함께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했다. '만선', '역마', '웃음소리' 등 25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89년 유방암 진단을 받은 뒤 투병했으나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 박광정 (배우·연출가·1962 - 2008) 1992년 연극 '마술가게' 연출로 데뷔. 연출가로 먼저 데뷔해 연기로 영역을 넙힌 개성파 배우. '비언소', '칠수와 만수' 등의 연극을 연출했으며 드라마 '사랑을 그대품안에'에서 개성있는 조연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주연작인 영화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로 국제 이머징탤런트영화제 등에서 남우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폐암으로 투병하면 자미막까지 연극을 연출하고 드라마에 출연했다. ![]() 배호 (배만금·가수·1942 - 1971) 1963년 1집 '두메산골'로 데뷔. 60년대 말 특유의 저음과 절절한 가창력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린 전설적인 가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 등을 히트시키며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지만 젊어서부터 신장병으로 고생했다. 5년간 300여 곡을 남기며 노래를 향한 열정과 투혼을 보여줬다. 신장염으로 입원한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 변영훈 (배우·1966 - 1993) 1989년 KBS 12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 90년대 대표적인 훈남 배우. '검은 양복', '청춘극장' 등의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드라마 '분노의 왕국'에서 왕손역으로 주목받았다. 다수의 드라마와 영화에 캐스팅되며 전성기를 누리는 듯 했지만 영화 '남자위에 여자' 촬영 도중 헬기 추락사고로 사고사했다. ![]() 서재호 (가수·1981 - 2004) 2002년 그룹 '7Dayz' 1집으로 데뷔. 남성 3인조 보컬그룹 '원티드'의 멤버. 그룹 '7Dayz'로 데뷔해 신인이면서도 실력있는 라이브 가수로 인정받았다. '7Dayz'는 1집 발표 후 해체했지만 이후 '7Dayz'의 멤버 셋이 결성한 그룹 '원티드'로 복귀했다. 가창력과 음악성을 인정 받으며 활동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고사했다. ![]() 서지원 (박병철·가수·1976 - 1996) 1994년 1집 앨범으로 데뷔. 어려서는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했다. 가수 데뷔 전 모델로 일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훤칠한 키와 미소년같은 외모로 주목받았으며 1집의 '또 다른 시작'을 히트시키며 단숨에 아이돌 스타로 떠올랐다. 2집 앨범 발표 직전에 숨졌지만 곧 발표된 2집 앨범은 신드롬을 일으키며 인기를 끌었고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 석광렬 (배우·1968 - 1994) 깔끔한 연기와 강렬한 눈빛으로 사랑받았던 하이틴 스타. 피아노를 치며 CM송을 부르는 모 의류회사의 CF를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드라마 '남자는 외로워', '한쪽 눈을 감아요' 등에 출연했으며 '남자는 외로워'의 촬영을 마치고 귀가 하던 중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졌지만 생전의 본인 의지대로 7명에게 장기기증을 하고 사망했다. ![]() 손창호 (감독·배우·1952 - 1998) 1970년 MBC 탤런트로 데뷔. 70년대 영화 얄개시리즈에 출연하며 하이틴 스타로 사랑받았다. 익살스러운 연기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렸으며 1990년에는 영화 '동경 아리랑'으로 영화감독에 데뷔했다. 평소 당뇨와 만성신부전증으로 고생했으며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 다큐프로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 안재환 (안광성·배우·1972 - 2008) 1996년 MBC 25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 서울대 출신으로 드라마 '엄마야 누나야', '똑바로 살아라' 등을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06년 이후 사업가로써 바를 오픈하고 신발 사업을 벌이기도 했으며 2007년 개그우먼
정선희와 결혼해 화제를 모았다.
![]() 양종철 (희극인·1962 - 2001)
1987년 KBS 4기 공채 코미디언으로 데뷔. 코미디 프로 KBS '쇼 비디오 자키'의 한 코너인 '도시의 아이들'에서 물방개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역시 코미디 프로인 '유머 일번지'의 간판 코너 '회장님 회장님'에서는
"밥 먹고 합시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코미디언 심형래와 함께 어린이영화에도
자주 출연해 친근한 이미지로 인기가 높았다.
![]() 유니 (허윤·가수·1981 - 2007) 아역배우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면 1996년 KBS2의 청소년 드라마 '신세대 보고서 어른들은 몰라요'를 통해 본격적인 연기자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예명은 이혜련.
이후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연기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2003년 1집 앨범을 발표하면서
가수로 전환했다. 예명을 유니로 바꾸고 가수로 활동 하던 중 3집 발표를 앞두고 숨졌다.
![]() 유재하 (가수·1962 - 1987) 1984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키보디스트로 데뷔. 단 한장의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남긴 후 교통사고로 숨졌다. 클래식과 재즈를 접목시켰던 이 앨범은 발매초기에는 외면
받았지만 사후에 보기드문 명반으로 재평가 받기도 했다. 유작 음반 수익금으로 시작된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수많은 실력파 가수들을 발굴해냈으며 유재하는 아직도 많은
가수들이 존경하는 가수로 손꼽는 싱어송라이터로 기억되고 있다.
![]() 윤심덕 (성악가·1897 - 1926) 우리나라 개화기를 주도했던 여성 예술가.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이다. 성악가로 활동하다가 연극배우로 전향했으며 일본에서 대중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당시 문학가였던 유부남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동반자살해서 한국과 일본에 큰 화제가 됐다.
윤심덕이 취입한 노래 제목이기도 한 '사의 찬미'는 1991년에 윤심덕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이기동 (희극인·1935 - 1993) 1970, 19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언. 땅딸이 이기동으로 잘 알려진 코미디언 1세대이다. MBC의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땅딸이 이기동과 늘씬 미녀 미스 권’으로
권귀옥과 콤비를 이뤄 인기를 끌었다. 배삼룡과 자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쿵따라닥닥 삐약삐약,
닭다리 잡고 삐약삐약"과 같은 유행어가 유명하다. 1980년대 중반에는 음료업체 기동산업을 만들고
사업을 했다. 당시 출시한 '기동사와'는 그의 애칭을 따 땅딸이사와로 불리기도 했다.
![]() 이언 (박상민·모델·1981 - 2008) 2006년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로 배우 데뷔. 씨름 선수 출신으로 1997년 전국체육대회 금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1999년에 모델로 데뷔해 두각을 나타내다가 케이블 방송에서 주목받으며
사랑받았다. 배우 데뷔 이후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최강칠우' 등을 통해 TV에서도 실력을
검증받았다. 모델과 배우를 겸하면서도 양쪽 모두에서 인정받는 유망주였지만 오토바이 사고로
안타깝게 숨졌다.
![]() 이은주 (배우·1980 - 2005) 1997년 선경 스마트 학생복대회에서 은상으로 데뷔. 드라마 '백야 3.98'에서 심은하의 아역으로 주목받았으며 드라마 '카이스트'에 출연하며 인기를 모았다. 영화 '오! 수정'으로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며 영화에도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이후 영화와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활약했는데 특히 드라마
'불새'는 크게 성공하기도 했다. 이지적인 외모와 폭넓은 연기력으로 정상급 여배우로 사랑받았다.
![]() 임성민 (배우·1956 - 1995) 1977년 TBC 탤런트 18기로 데뷔. 1980년대의 대표 미남배우였다. 체육학과 출신으로 뛰어난 체격조건과 서구적 마스크로 사랑받았다. 장미희와 함께 영화 '사의 찬미'로 청룡영화제 남우,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드라마 '폭풍의 계절',
'사랑의 굴레' 등에 출연했으며 1995년 드라마 '사랑과 결혼'에 출연 도중 지병으로 하차했다.
![]() 터틀맨 (임성훈·배우·1972 - 2008) 2001년 3인조 혼성그룹 거북이로 데뷔. 인기 그룹 거북이의 리더였다. 2005년 4월 심근경색으로 한 차례 쓰러졌지만 2006년 바로 재기했다. 그룹 거북이는 유쾌하고 발랄한 멜로디와 가사로 사랑받아온 댄스그룹이었다. 터틀맨 임성훈은
그룹내에서 랩을 담당했으며 대부분의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했으며, 1집때부터 '사계', '빙고' 등이
많은 인기를 끌었다. 5집앨범을 내고 활동하던 중 지병인 심근경색이 재발해 숨졌다.
![]() 장덕 (가수·1962 - 1990) 1975년 '꼬마인형'으로 데뷔. 국내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알려져 있으며, 친오빠 장덕과 함께 듀오 '현이와 덕이'로 활동 했다. 중학교 2학년때 만든 '소녀와 가로등'은 1977년 진미령이 부르며 제1회 MBC국제가요제에서
입선하기도 했다. 연기에도 재능을 보여 10여편의 하이틴 영화에 출연했으며 솔로로 전향한 이후에는
정수라, 이선희와 함께 여성 가수를 대표했다. 1989년 발표한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유작앨범이 됐다.
![]() 장현 (가수·1955 - 1990) 1975년 '꼬마인형'으로 데뷔. 친동생인 가수 장덕과 함께 친남매 듀오 '현이와 덕이'로 활동했다. 데뷔 이전 부터 미8군 무대에서 동생 장덕과 함께 '드래곤 랫츠'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현이와 덕이'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장덕이
솔로가수로 전향한 후에는 코아기획이라는 음반 매니지먼트 회사를 세워 동생을 지원하는 한편
사업가로 변신했다. 설암으로 투병 생활을 했으나 끝내 병을 이겨내지 못했다.
![]() 장진영 (배우·1974 - 2009) 1992년 미스코리아 충남 진으로 데뷔. 1997년 드라마 '내 안의 천사'로 연기활동을 시작했으며 1999년에는 영화 '자귀모'를 통해 영화배우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특히 영화 '소름'과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두번 수상하며 연기파 배우로도 인정받았다. 2008년 위암 판정을 받고 1년여 동안
투병했지만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2007년에 출연한 드라마 '로비스트'가 마지막 작품이 됐다.
![]() 정다빈 (정혜선·배우·1980 - 2007) 2000년 SBS시트콤 '돈.com'으로 데뷔. 시트콤 '논스톱2', '논스톱3'을 통해 인기를 얻기 시작했으며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후 영화 '그놈은 멋있었다' 등을 흥행시키며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맑은 이미지와 귀여운 외모가 특징으로 장래가 기대되는 주연급 여배우 중 한
명이었다.
![]() 정은임 (아나운서·1968 - 2004) 1992년 MBC 아나운서로 데뷔. 1992년부터 진행한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을 통해 라디오 DJ로 잘알려져 있다. 당시 PC통신에서 팬클럽이 생길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나운서를 위해 생긴 최초의 팬클럽이었다. 영화음악
방송임에도 불구하고 각종 사회문제를 소신있게 다뤄 많은 고정 청취자의 사랑을 받았다.
2004년 출근길에 차량 전복사고를 당해 숨졌다.
![]() 차중락 (가수·1942 - 1968) 1966년 그룹 키 보이스 리드보컬로 데뷔. 1961년에는 미스터 코리아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룹 키 보이스의 전성기를 이끌다가 1967년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을 번안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으로 큰 인기를 끌며 솔로 가수로도 성공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가수 배호와 함께 동시대를 양분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1년 여 만에 뇌염으로 숨졌다.
![]() 최병걸 (가수·1950 - 1990) 1970년대 최헌, 김훈, 조경수와 함께 최고의 트로트 가수였다. 1971년부터 살롱가에서 노래를 부르며 인기를 얻었으며 1972년 안혜경과 함께 포크 듀엣 '찹스틱(훗날 '늘 둘이'로 개명)'을
결성하며 데뷔했다. 1974년에는 '정성조와 매신저스'에서 싱어를 맡기도 했으며 1975년 '찬비'로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미녀 탤런트 정소녀와 듀엣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1978년 '난 정말 몰랐었네
'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 최진실 (배우·1968 - 2008)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한중록'으로 데뷔. 데뷔 초 깜찍한 외모와 함께 CF퀸으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1990년대 영화와 방송을 넘나들며 출연하는 작품마다 흥행에 성공할 정도로
당시의 최고 여배우였다. '국민요정'으로 불리며 친근한 이미지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한때 침체기를 겪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도 주연 여배우로서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MBC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이 마지막 출연작이 됐다.
![]() 추송웅 (배우·1941 - 1985) 1963년 연극 '달걀'로 데뷔. 극단 '자유극장'에서 활동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연기자로 불릴 만큼 연기력을 인정 받은 배우였으며 1977년 '빨간 피터의 고백'을 성공시키며 흥행성도 인정받았다. '빨간 피터의 고백'은 카프카의 단편
'어느 학술원에 제출된 보고서'를 각색한 모노드라마로 추송웅은 기획, 제작, 연출, 연기, 분장을
도맡아 1인 5역을 해냈다. 이 작품으로 추송웅은 국내에서는 모노드라마 붐이 일으키고 흥행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 하길종 (영화감독·1941 - 1979) 1972년 영화 '화분' 감독으로 데뷔. 1970년대에 활약한 천재 영화 감독. '바보들의 행진', '병태와 영자' 등을 흥행시켰다. 미국 UCLA에서 영화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교수이자 평론가, 번역가, 영화운동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UCLA 졸업
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은 MGM영화사의 '메이어 그랜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미국 영화과
학생 중 4명에게만 주는 상이었다.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된 '병태와 영자'가 상영 중이던 겨울
뇌졸중으로 숨졌다.
![]() 하수영 (가수·1948 - 1983) 1968년 '사랑은 홍역'으로 데뷔. 1976년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최고 디스크 판매 기록을 세웠다. 긴 시간을 무명의 가수로 살롱가를 전전했지만 데뷔 이후에는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로 많은 사랑받았다. 모두 4장의
음반을 남겼지만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가 가장 잘 알려져있으며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남편들의
애창곡으로 사랑받고 있다. |
첫댓글 새삼 인생 무상을 느끼게 하는군요. 정말 좋아 했던 가수, 배우들도 많이 있어 더욱 안타깝습니다.
제말이 그말입니다! 길은정,추송웅씨등등 정말 좋아 했었는데...., 먼저 가신님들의 명복을 빌어 봅니다^^
새
놀랐어요 이런분들이 언제 돌아갔지

몇분 빼고 몰랐네요 
옛날이 그립고 생각이 많이 나는 분들이죠^^ㄳ
글올려 주심은 감사합니다
될수있으면 말씀에 관련에서 글을 올려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