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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31일 마지막 달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덥다 나는 60녀전에 그당시 어린나이에 6살에 한글을 깨우쳤다 모두가 나의 어머님이 알려주신 덕분이다 당시 내어머님은 경기도 수원에서 살으셨다 그당시에 엘리트다 예쁘고 날씬하고 키도컷다 당시164센티였다 지금시대에 는 어림없는 소리지만 엄마는 일본어랑 한문 한글은 물론 모두 잘하신다 그당시 미스코리아 경기도 후보로 나가셨다 정말예뻐서 당시 흑백 사진관에 엄마의 약간 지라시 머리( 약간의 중간 긴머리) 고데. 파마하고 옆선 .앞으로 .뒤로. 흑백의 독사진이 사진관 쇼인도우에 거의 두세장 이상은 모델로 진열되어 있었다 어린나도 보았다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못생겼냐고요 저요 아버지랑 똑같어요 내아버지 보고 싶으면 거울로 나를 쳐다 보라고 하네요 엄마와 외삼춘 이모가요 엄마 닮었으면 내.인생관도 바뀌는데 이런 우라질 ...사이다 크으으와 내가봐도 내아버지랑 같다 늙어가면서 더 닮어간다 거기다 성격까지 똑같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는 웃은적이 있다 내어머님 나이는 지금 현제 2019년에 나이가 89살이시다 이화학당 (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 ) 출신이시다 당시에 신여성이었다
엄마의 학창시절 교복입고 머리는 길게땋고 사진 찍으신것을 당시 멋쟁이들이 입으시는 일명 벼로도라는 양장.기지로 신신옷을 입으시고 다니시고 했던것을 사진으로 보았다 그뿐이 아니다 당시 실크.양단 .비단옷도 .많으시고 어림잡아 신신결혼식 들러리로 함께 찍은 당시엔 모두흑백사진이 200장이 넘는다 학창시절 사진을 세어.보면서 감상하다 고만 둔적이있다 정말 그녀 엄마는 아름답다 내어머니의 모교를 이렇게 나이먹고 내가 소개할줄은 언감생신 꿈에도 몰랐다 모두가 엄마가 어린시절 글을 일찍 깨우쳐준 덕분이다 나는엄마에게 전화로 물었다 "엄마 이화여전이(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다 ) 지금부터언제 세워진것이에요 .? 하고 물으니 엄마는 갑자기 뜬금없이 이상하셨는지 하시는 말씀이 "이놈아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냐 가만 있자 아마도 130년은 넘었을거다 130년은 넘었지 이놈아 아픈데는 없는겨 너도 나랑 같이늙어가는구나 이그 내가오래사나보다 ,하시고는 용인에 사시는 엄마는 전화를 끊으셨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아니 내가 잘못들었나 하고 내귀를 의심하고 언능 급해서 스마트폰 네이버로 들어가서 보니 엄마.말씀이 맞었다 이화 학당은 세운지가 133년이나 되었다 나는 울.엄마가 늙으시는것이 너무 아까웠다 젊은시절의 예쁘셨던 엄마 부잣집 딸이었다 그당시 외.할아버지는 경기도 수원에서 방직공장을 크게 하셨다 같이 운영하신게 비단 양단가게 국수공장과 같이 오늘날 커다란 포목 직영점도 같이 하시고 과수원도 크게 하셨다 엄마는 공부를 하여 외할아버지의 사업을 같이 도우셨다 나도 어린시절에 기억이나요. 6살까지 외가집에서 지랐다 년.년생의 여동생들과 아버지의.전근.으로다
1960년.4.19 혁명 일어나서 학생과 국민이 우리집 뒤지속에 숨고 시내버스 탈취해서 굉장히 많이 타고가고 태국기가 날리고 경찰 군인이 뒤쫒고 불이나서 모두타고 모두 같이 격은 이몸이다 난 수원 시내에서 살었으니 그날의 참상을 보았다.우리집다락 뒤지.커다란 항아리안에도 숨고 했다 모두 자유 때문이다.당시.어른.학생들이. 어린나는 무서웠다 부잣집딸인 엄마의 음식들은 모두 고급요리.이고 항상 나는 그렇게 먹고 살었으니 난 어떤집이던 거의 항상 그렇게 먹고 사는줄 알었다.시집을 와서 그대로 하니 엄마의 음식은 부식비가 많이 들어간다 남편은 우리 이렇게 살면 금방 쪽박찬다고 식사때마다 투덜대고 잘만먹는 사람이 이런 "아니 지가 언제 돈벌어.주었니 ,하고 속으로 내가 웅얼거린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넉넉치 못하게 사는 나는 현실의 벽에 부딕친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아침이슬,먹고 사는것이.아니다.현실이다.미쿡말로 (레시피) 재료 값이 현실에 서는 내게 이런 쮸쮸 비싸요 그래서 결혼해서 여자의 활동과 가꾸는것은 능력있는 남편을 만나야 된다 엄마는 김장을 하셔도 항상 사골를 고아서 김장을 하시고 송편은 꿀과 첨깨를 볶아 넣으시고 과일과.생선은 .낙지.이면수라고 항상 기본으로 냉장고에서 않떨어진다 내새끼들은 어려서 친정가면 외.할머니네서 살고싶다 한다 냉장고에 먹을것이 많다고 슬픈 나의 자화상이다 내가 국민학교 (오늘날 초교)시절 당시3- 4학년이었을거다 내밑으로 여동생이 년년생으로 4명이나 있던 그시절에 엄마랑 시장엘 같지요 내가 잊지도 않어요 기억에 시장에서우연히 엄마의 친척 오빠를 만났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 순희 아니냐 오랬만이구나 그런데 옆의 아이는 니동생이니 누이가 언제 막내를 낳으 셨니 , 농담이다 그분의 말씀이 그리고 나를 쳐다보시니 엄마는 친척 오빠에게 하는말씀이 " 아녀요 오빠 내딸이에요 큰딸.이에요 오복아 외삼춘에게 인사드려라, 하시길래 나는"안녕하세요 , 하고 그를 쳐다보니 처음 보는 낮설은 얼굴이다 내게는 그는 깜짝 놀라면서 다시엄마를 쳐다 보시더니 당시 그남자는 50대후반 인것 같았다 갑자기 길거리에서 막 울면서 그분은 하신다는 말씀이 "아니 그렇게 예쁘던 니가 이렇게 험하게 늙어 가다니 아이고 순희야 하고 또 우신다 나이드신 남자가 길거리에서 나는 의아아 했다 길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는것도 모르고 그분은 엄마의 손목을 잡고 한참 우셨다 어린나는 두분을 쳐다보고 지금까지 못잊는다 어린시절의 그날을 불쌍한 우리엄마 나는고맙게 생각한다 엄마를 내.엄마지만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오로지 희생만 하고 살으신 내어머님이 지금 그 나이에도 내가 엄마라 불만섞인 말투나 어쩌다 욕을 아이들에게 하면 나를 혼내신다 여자가 그게 무슨 말투냐고 하신다 그러시는 어머님 엄마는 구한말 개혁시대가 시작하였을때 다니신 이화 학당의 ( 오늘날의 이화여자대학교 ) 소개를 지금부터 잠깐 하고 갈께요 아래 보세요 엄마의 말씀과 함께 퍼온글이에요
퍼온글 * ( 지금의 이화여전이 라는 여학교가 1886년 한국최초의여성선교사 메리스크렌턴 ( maryscrnton,1832~1909년 ) 은 이나라에 조선여인들의 교육의 길을 열었다 이화여고 .이화여대. 이화학당 . 스크렌턴 대부인 ( 함께온 며누리와의 구분된 호칭이다) 당시기품을 지닌 미국인의 신여성이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후에 1872년 남편과 사별한 그는 1885년 미국감리교 여성해외 선교회의 파송으로 의사인 외아들 웰리엄스크랜턴(wiliiambenton scranton,1856-1922)아들과함께 한국에온다 새터를 잡고 곳곳에 건물을 세운그녀는 왕성한 사업을 벌린다 이 익남는 사업이겠어요 한국최초의 여성병원 보구여관 을 설립했고 동대문감리교회. 아현감리교회 .성동감리교회을 .섭립했다 이땅에 여생을 바친 그녀는 대한민국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원에 묻혀있다 여기까지 퍼온글 * 스크렌턴대부인은 조선이라는 미개한 이나라에 문명이라는 샘물을 펑펑 만들어 주시고 어둡고 기약없는 이땅에 희망과 배움의 선구자로 헤쳐나갈길을 뻥뚤어 주신 그이름도 찬란한 스크랜턴 대부인 비록 고인이시만 존경합니다 스크랜턴 대.부인 배움에 길을 인도하신 그분 오늘날 대한민국여성의.학식의.대모다
각자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본인 즉 자아를 발견하고 또한 미개한 여성들을 학문의 길로 인도하고 세상에 횟불이 되었다 나 또한 내엄마에게 어린시절 6살꼬마때에 못먹고 못살고 가난한 대한민국에 전쟁이 휩쓸고 간 그자리에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우리나라였다 당시에 당시나 지금이나 국민을 앞세워 좌파 .우파 .당파싸움은 똑같다 여전하다 그당시 어린 나는 한글을 배워 아주요긴하게 사용을 잘하고 살고있다 그런데 한글이 영어보다 더 어렵다 요.근래에 몇자글을 써보니 띄어쓰기 .자음 .모음 에서 ( 띄어쓰기는 정의가 없는것 같다 애매 무효하다 ) 너무 어렵다 ㅋㅋㅋ 지금것 그냥 살은것이 후회스럽다 어지럽다 요즈음엔 핸드폰 (손 전화기 ) 를 누구나 대한민국의 인구는 거의 평균나이 6살부터 폰을 각자 가지고 다니지만 60녀년전엔 각 가정에 전화기도 없던시대다 장사하는 가게도 전화기없는 집이 수두륵 했다 사실이다 관공서에나 있었다 가난하고 어둡고 문맹시대에 밥굶은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냥 그런대로 사람들은 살었다 모두 좋았다 오늘은 나의어린 시절에 우리동네 요즘 말로 반건챙이 점박이 광혜오빠 이야기를 할라구요 나는 내동갑 국민학교(초등) 점박이 광혜네 옆집에 살었다 이사를 왔다 수원에 살던
저는11- 12살인지 용인으로 아버지의 뜻대로가 아니라 엄마때문에 부득이 수원에서 용인으로 이사를 가게되었다 용인 김량장리 라는 그러니깐 용인 시내랍니다 시내의 한복판에 주택에서 살게 되었다 바로 앞에는 상점들이 있었다 그중에 행길옆에 점박이 광혜네 집이 있었고 점박이 광혜네는 광혜의 엄마가 아버지랑 보신탕집을 하여 근근 히 살었다 광혜는 동기간이 그당시 나이가 광헤오빠 나이가 대략 21-24살이고 언니는 20대인것 같았다 그리고 광혜가 12살 바로아래 남동생이 5-6세 그밑에 동생이 더 있었다 총 삼남이녀 인것 같었다 당시 집집이 아이들은 보통 7-9남매였다 남아선호 사상때문에도 그렇고 농경사회라 자식은 태어날때 지애미 뱃속에서 나올때 저먹을것은 가지고 나온다고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살었고 그게 사실인줄 알고 살었어요 오늘은 광혜오빠와 광혜이야기로 할까해요 점박이 광혜는 여자아이가 불행하게도 오른쪽 눈옆으로 오백원짜리 동전만한 까망점이 동그랗게 있다 예쁘게 생긴 얼굴에 조물주도 참이다 그래서 광혜를 모두들 점박이라 부른다 광혜도 점박이라 부르면 싫어하더니 현실을 어느순간부터 받어드렸다 아이들은 이름이 엄현히 존재하는 광혜를 대놓고 광혜랑 말다툼이라도 하면 어김없이 점박이라고 대놓고 그런다 질색을 광혜가 해도 이그 오늘은 어린시절의 착한 광혜랑 나의이야기를 할라 한다 언능 하라구요 그대 뜸들이지 말라구요 덥다구요 알었어요 사실 그시대 50-60년전에는 가난한 우리나라에는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이나라 불쌍한 백성들
대한민국의2분의1은 거의 문맹인이였다 광혜네 식구들도 모두 문맹인이였고 그시대에 동네 아이들중엔 그래도 나이에 비해 내가 키도 좀크고 한글은 거의모두 알고 있었다 내가 한글 잘.읽고 잘.쓴다는 소문이 났어요 똑순이라고 ㅋㅋㅋ사실 조금 과장좀 했어요 모두 내어머님 덕분이다 ㅋㅋㅋ 그 소문이 점박이 광혜오빠에게 알려졌다 어느 늦은봄날 우리 어린아이들은 용인읍 ( 지금은 시가됨)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그또래에 아이들이 성당 앞길에 모여서 오재미. 고무줄.놀이.딱지치기 등을 하면서 재미있게 놀고있는 오후였다 대략 2시좀 넘어서 였던것같다 누가.나를 부른다 어떤남자가 누구인가 쳐다보니 광혜 큰오빠였다 용인성당도 광혜네 집.옆이었다 나는 잘못도 없는데 이상하다 하고 어린나는 광혜오빠를 쳐다보고 안같다 대답도 안하고 무서운 사람 같았다 키는중키에 바지는 나팔 바지에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점 넒어지는 바지 당시유행이다 ) 머리엔 찍구(포마드)를 왕창 바르고 번뜩거리는 머리를 가지고 목은 거북목에 나를 불러도 나는 그냥 살살 못들은척 하고 피했더니 광혜오빠는 '야 오복아 왜 그러니 내가 너에게 무얼 잘못한거 있니, 하더니 광혜를 크게 소리로 부른다 광혜는 큰오빠의 부르는 소리에 언능 "오빠 왜 그래 무슨일이 있어요 ,하면서 얼른 달려간다 둘이서 뭐러고 중얼거리고 그러더니 내쪽으로 광혜는 뛰어 오면서 점박이 광혜는 나를 부른다
"오복아 이리와봐 우리오빠가 편지좀 써달래 ㅋㅋㅋ, 광혜는 웃으면서 나에게 말한다 나는 가만히 듣고있다 "야 너도 한글 알잖니,잘알잖니 한글 니가 써주어라 싫어 .하고 나는 그들을 쳐다보니 광혜오빠가 웃으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고 손짓을 한다 이리 오라는뜻으로 난 속으로"징그럽게 생긴 저오빠가 왜그러지 머리는 찍구를 발라 번질하고 바지는 판타롱 나팔바지에 목에는 금목걸이를 굴게 디롱 디롱 차고 이런 어린 마음에 징그럽다 . 하고 속으로 기분이 나빴다 "지동생도 한글 알고 있는데 하고 집으로 왔다 금방 광혜가 찿아왔다 그녀는 "오복아 너 우리오빠가 편지좀 써달래 하고는 .나를 데릴러온 모양이다 해는 늦은 봄오후 3-4시쯤인것 같었다 지금생각하니 사실 지금부터 50-60년전에는 부모도 한글 모르는 부모들이 엄청 많었다 국민의 50-60%가 무학자 문맹인이였다 그렇다고 국민하교 들어간다고 모두 선생님이 한글을 알려주는것은 아니고 나쳐럼 부모에게 한글을 깨우쳐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이 드물다 아주 수업을 못따라 가는 학생이 많아서 나머지 학습이라는것 학교에 방과후에 남어서 나머지 공부라고 보충수업이지요 참 많이도 했다
여기저기서 코들은 왜그렇게 누런코가 많이 나오는지 훌지락 거리면서 국민학교 (초등 학교) 학생수가 도시는 3000명 에서 2500명이었고교실이 모자라서 오전 오후반이 항상있었다 남자 아이들은 까까머리엔 도장부스럽에 기계충이라는 피부병에 이상한 전염병도 많었다 병들면 그냥죽는시대 였어도 집집마다 아이들은 참많다 가난한 농경사회에 당시 인구는 많지 무었이던지 아나그로그식 이다 슬로우킥 가난하고.미개한 이.나라였다 요즘 태어나서 사는 아이들은 모른다 시대의 변천사다 그당시 밥굶은 집이 어디 한두집이 었던가 그래서 나온 인사법이 만나면 식사 하셨어요.다 요즘아이들에게 그런소리 해봐요 "아니왜 밥을 굶어요 라면이라도 삶어먹지요 바보에요, 한다 라면도 원래 없던시절이고 6.25 전쟁후 몇년지난시절에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누구던지 산다는것은 고생이고 고행인 시절에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의 꽃은 피었나보다 그러니 집집이 아이들이 고물거렷다 할수없이 나는 광혜에게 시달리다 광혜오빠의 연애 편지를 써주기로 한날 광혜네 방엘 같다 방엔 온갖 잡동사니로 널려있고 점박이 광혜오빠는옷도 많었다 알록 달록한 옷도많다 모두 당시 유행의 패션을 따라가고 있었다 나는 광혜네 마루에 앉아서 광혜오빠가 부르는 데로 글씨를 썼다 모두 거짓의 장르다
연애 편지의 내용인즉 지금도 내가 안 잃어버리는 장르가 있다 내 나이를 먹어 늙어가도 내용인즉 그러니깐 광혜오빠가 부르는데로 나는 문장을 쓰는 것이었다 편지의 내용이 옥자씨 안녕하세요 ? 저는 옥자씨 따문에 오늘도 잠을 못자고 날밤을 꼬박 새우고 밥도 못먹고 이렇게 가슴이 많이 아프니 옥자씨 나를 한번 만나주세요 옥자씨 보고 싶어요 답장좀 주세요 옥자씨 어제.지나 가시는걸 보니 머리엔 예쁜 리본이 옥자씨와 잘맞는것 같아요 저를 꼭 만나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박광일 올림 추신 꼭 만나 주세요 할 이야기가있어요 추신은 꼭 넣는 광일오빠다 웃긴다니깐요 그리고는 우편으로 보내는것은 광일오빠목이다 어린나는 광혜오빠가 부르는데로 쓰긴 썼어도 정말 너무 이상했다 내용이 아니 모두 거짓말 투생이다 어쩌다 광혜네 가면 오빠는 밥만 잘먹더구먼 꾸역.꾸역 양푼에 비벼서 .커다란 입으로 잘만 넘긴다 씹지도 않는가보다 꿀떡 하고.웃긴다 나는 속으로 잘생기지도.않은 광혜오빠다.미친놈이다 하고는 그언니는 내눈에는 이쁘지도 않고 그저 그렇구먼 이상한 광혜오빠다 하고는 연애 편지를 끝내니 광혜오빠가 수고했다고 십원을 준다
지금돈으로 환산하면 2000원이 조금 않되는 당시엔 큰돈이다 광혜랑난 그돈울 받어서 구멍게게로 직행 우리는 신앙촌 이라는 상표의 카라멜 2개에 십원주고 사서 광혜랑 같이 맛있게 달콤한 카라멜을 나누어 먹었다 ㅋㅋㅋ 그때 준돈은 광일 오빠가 우리에게 준 미끼의 돈이였다는 것을 나는 그순간 어린것이 무얼 아냐구요 아무튼 어린 나는 그후로 광혜오빠의 연애 편지를 수백장을 약1년넘게 써주었다 그래도 그는 한글을 끝까지 않배우고 그후로 1녀년있다 옥자언니랑 결혼식을 했다 당시 소문에 옥자언니는 19살이라고 한다 광일 오빠는 23-4살정도였다 당시 혼인은 누구나 거의 구식이다 당연이 그랬다 지금으로 말하면 당시 그게 당연 한것이고 예식장은 없었다 아예 당시엔 좀 넒은 마당에서 색시 머리에 족두리쓰고 양볼엔 연지곤지 빨갛게 찍고 신랑이랑 맏절하고 만인에게 공개적으로 알리는것이다 즉.성생활하고.자식낳고 열심히 가정꾸리고 산다의 의미를 알리는것이다 아름답다 그시절이 어린 내가봐도 그랬다 참 구경꾼도 많었다 어른,아이들 모두 같이다
혼인식이 지금이나 엣날이나 형식이 무엇이 중요한가 서로 마음이 중요하지 그래도 그시절엔 부부는 일심동체 였지만 오늘날엔 이심동체 이고 동상이몽이다 즉 같이 살어도 마음은 각자라는 뜻이라는것 잘.아시지요 그때엔 마당엔 커다란.국수솟 걸어놓고 동네사람들 오가는사람들 지짐질 한것 수육에 잔치국수 삶아 고깃국에 말아 주고 먹고 술마시고 그날은 거지들도 하루종일 짱박어놓고 잔치집에서 푸짐하게 먹고논다 그러니깐 모두에게 관대하다 그날 많큼은 우습기도 하고 그.연애 편지소문으로 어린 나는 당시 나보다 12-15살 더먹은 동네 오빠들의 연애 편지 단골이 되었었다 동네 문맹인 오빠들에거 인기짱이였다 당시엔 조그마한 내게 엄마가 일찍 한글을 알려준 고마운 엄마 덕분이다 당시 난 글을 또박 정석으로 썼다 반듯하게 국어공첵칸안에 꽉차게 글씨체가 에쁘게 ( 굴림으로 ) 썼다 그러니 친구오빠들 사이에 오복이가 연애 편지 잘쓴다고 소문이 금방 났었다
그당시 내가 3-4학년때 생각으로 쓴 연에 편지내용 몇줄 장르를 넣어볼께요 ㅋㅋㅋ 시작할께요 * 정막이 주마등 쳐럼 펼쳐오는 이밤 나래를 펴고 잠을 청해햐 할 이시간에 넒은 들판의 야생말이 되어 당신에게 달려갑니다 사랑하는 영자씨 보고 싶군요 당신을 언제 내가 만날런지 그날이 손꼽아 기다려 지네요 그대 보고 싶군요 .그러면서 내용을 넣는 것이지요 장르는 별의별 말이 다아 있어요 모두 거짓말이다 여자를 꼬실라니 모두 거짓말이다 많었어요 당시 여자들 이름 끝자는 모두 아들자 자에요 잘 살으라고 아들같이 이런저런 장르가 생각나고 응용하던 그시절 모두 내어머님과 아버지의 동화책 읽으라고 사다주신 덕분이고 어린시절 읽었던 동화. 만화책. 덕분입니다 그런데 글을 써보니 한글이 엄청 어렵더라구요 읽는 데로 닿소리와 쓰는데로의 정석 즉 자음. 모음에서 .장르글에선. 받침이 .빠지고 .띄어쓰기.등 이그 어렵던데요 영어가 더쉬운것 같어요 않그런.건가요.쉽군요
차라리 영어나 배울것을 나의 인생관이 바뀌었을 턴데 오늘날 이렇게 쪽박을 차고 살을줄은 몰랐지 이런된장 영어를 배웠으면 편안한 삶을 살을 턴데 꼬부랑 글씨가 부와 명예를 같다주는 줄은 몰랐지 부모님은 일찍알고 계셨길래 영어를 그렇게 가르킬라 하신것을 미안하고 죄송하다 내.아버지에게 항상 지금 현재에 대한민국의 강경화 여성.외무부장관 영어를 너무 잘하여서 외교부 장관이 되신줄 알고있다 물론 또다른 스펙도 있겠지만 모태는 영어다 영어를 잘하면 출세한다 미국사람은 좋겠다 돈이 모자라면 정부에서 달라는 팍팍 찍어 내보내고 자국어도 말하는 대로 돈이 되니 돈받고 영어도 원어민 영어라고 외국으로 나가서 학원에서 팔잖아요 모국어를 사실 영어의 모태는 인도 유럽어족에 영국제도 .오스트레릴리아.북아메리카쪽에선 제일언어로 사용한다. 6.대양에서 다양하게 파생되어 나같다.한다 물론미국으로도 강대국에서 태어난 미국사람들은 인간으로서 행운이다 부럽다 사실 국내에서 호텔이고 음식점등 원만한 좀값어치 있는 물건 파는곳에서는 간판이 영어권이다 그래야 고급스럽다나 어쩻다나 아름다운 우리나라말 어디에 미국국적을 가지고 살면 얼마나좋을까 뭐라구요 길가다 많이 모인 운집장소.마트에 물건 사러 가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구요 그렇다 뉴스에선 며칠에 한번씩 미국에 총기사건이 연일 핫.뉴스거리다 점박이 그녀 광혜도 국민학교 졸업하고 2-3년있다 어떤남자랑 수여선 기찻길옆 허스럼한 방에서 어린것이 동거를 한다고 소문이 났다 그후로는 잘모르겠다 나는 학교 다니고 모르고 있었고 그후로는 어디로 같는지 아마 광혜오빠에게 시집간 옥자언니는 개고생하고 살었을것같다
왜냐고요 광일이오빠는 발랑까진 놈팽이였다 한여자.가지고 않될꺼여요 지금 생각하니 착한남편은 아닌것 같다 그후에 옥자언니는 광일오빠의 말에 속아서 인생길이 고달픈 투쟁하면서 사는 여전사가 된것같다 옥자언니는 어머나 광일오빠에게 속아서 자기만 사랑한다니깐 얼라리 광일오빠를 믿고 그냥 앞만보고 가라고 광일 오빠에게 시집을 같다 백마탄 왕자님.인줄알고 착각이다 젊은날에 돌이킬수없는 판단이 그녀를 울라라 땡땡 당시엔 이혼이란 없었다 일부 다체제 이고 남자의 세상이지요 돈많 있으면 여보란듯이 첩을 들이는.시대였다 아들 못낳도 첩을 들이고 어머나 지금 시대는 여인 천국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법도 성폭행. 성추행. 성추문.등 중에 하나라도 법망에 걸리는남자는 인생을 거의 망친다 금자탑으로 쌓은 직장도 잃고 이런 이그 예전에는 웬만하면 장가를 모두 같다 남자면 그냥 조건없이 여자들이 와서 굳이 말없이 부부 인년맺어 자식낳고 악착같이 모두 잘살어서 노총각 노쳐녀가 없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오늘날엔 나홀로족 투생이다 여기저기 어쩌냐고 너무 교육을 잘가르켜서 내가 나를 너무 잘알어서 이리저리 따지다 보니 결혼을 못하고 나홀로족 투생이다 그러니 인구가 감소하지 옥자언니 미안해요 그러니 나는 더 미안혀요 옥자씨는 바로 시집을 같다
내어린시절에 점박이 광혜오빠의 연애편지부터 우리 외삼춘의 연애편지 봉자언니에게 배달을 했다 그후에 외삼춘은 신식으로 용인극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하객에게는 흰설탕 1키로짜리를 답례품으로 전달헸다 당시엔 설탕도 귀했다 외삼춘의 연애시절에 봉자언니네랑 서로 마주보고 행길 하나 건너로 살면서 연애편지는 아이러니컬 하게 내가 이틀에 한번 하루에 한번씩 날라.주었다 재미있다 외삼춘의 연애 편지를 뜯어 몰래 읽어보면 모두 거짓말이다 내용인즉 보고싶다 눈을 .감어도 .떠도 .아니 바로 길.건너서 서로 마주보고 하루에도 몇번씩 만나면서 웃기는 외삼춘이었다 지금 외삼춘 나이가 올해로 82-3살이시다 동네오빠들의 연애편지와 답장이오면 나를 불러 읽어달라하고 그러면 나는 어린것이 편지의 답장을 읽어주면 가만히 듣고있다가 앉아나있지 이 오빠들은 어린내게 바짝 다가온다 편지를 읽는데에 정신이 나간 나는 깜짝 놀라서 멀리 떨어져서 읽어 주곤 했다 모두가 초초했었나 보다 편지내용인즉 어떤것은 잊으라는둥 보기싫다는둥 내.이상형이 아니라고 하면서 잊으라고 하는 글을 수도없이 글에 담아 있다 그런글은 애쳐럽다 나는 그런 답장을 읽어줄때에 가슴이 아픔을 느낀다 감정은 나이하고 아무관계가 없다 거의 다않다 그렇다 얼른 내용을 먼저 훌터보고 답장이온 주인공의 .오빠에게.읽어준다 어린 나는 차마 못.읽어주고 거기서 글을.응용을 한다
그당시 어린내가 그런생각이 어떻게 했는지 나는 조금만 내용을 바꾼다 내용인즉 여자에게 온편지를 "조금만 기다리세요 식구들알면 혼나요 눈치 않체게 .등으로 기다리라고 하면서 읽어준다 긍정의 마인드로 ㅋㅋ기다리세요 그러면 오빠들은 되게 좋아하면서 웃고는 다시 반복해서 읽으라는 그 소리를 수없이.한다 순진했다 당시 사람들은 순수하고 사실 상대도 답장도 글씨가 엉망이다 누구의 손을 빌렸겠지요 상대도 같은 문맹인이였지요 남아선호 사상시대에 남자인 아들도 못가르키는 집에서 여자를 공부 가르킨다는것은 아휴 특별한 집안 아니고는 생각도 말어야 했다 아무리 공부를 하고 싶어도 연애 편지의 내용은 모두꼴랑 거짓말인데 무식이란 말 그대로 나를 죽이는것이다 무식이 동네오빠들 광일오빠.채봉오빠. 남도오빠 . 휘성오빠. 훈오빠.경식오빠.그들도 지금 82-5살을 넘었거나 안죽고 살어 있으면 옛생각은 하겠지 오빠들 글은 몰라도 자식들 낳고 남편의 책임.감으로 가정 잘 이끌고 한.세상을 잘 살었겠지 이세상을 그게 인생이고 삶이라오 오빠들 당시 꼬맹이 연애편지 써주던 나를 장오복을 기억은 하는지 조그마한 계집애 오복이를 "뭐라고요 모두 잘있다구요
두명은 죽었다고요 그.오빠들이 누구에요 언제 돌아 가셨는데요 대한민국은 왜세의 침략으로 36년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자 바로 3녀년의 전쟁으로 남북의 분단으로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이땅에 꽃을 심어준 동네오빠들 자식을 낳고 가정을 꾸리고 가진것 없어도 열심히 살은 오빠들 그날의 어린 오복이 땜에 다시 피어나네 동네 오빠들의 사랑의 연애 편지 땜에 당시나 지금이나 연애 편지는 상대를 꼬실라 하는 언어.장르는 모두 거짓이지만 그녀들은 그말에 녹아서 또다시 인생을 맏기고 찌찌고 볶고 산다 삶의 정착역으로 간다 모두들 안녕 ( 나도 )그런 인간중에 하나였다 시집 못갈까봐 미친년이지 내가 잠시.내.영혼이 나.같었나보다 그래서 이렇게 가난과 .싸우면서.나를 달랜다 다 늙어서 ㅋㅋㅋ 돌고 도는것이 속고 속는것이 인생으로 비유해야지 어쩌냐구요 불교에서 하는말이있다 윤회라고 초기엔 기독교에서도 윤회를 가르킴 돌고도는 것이 인생이고 뭐.그런 내용이다 다시태어나도 윤회다 진리는 어찌보면 비슷하다
후기 : 나이를 먹어가니 새록 새록 .초록.어린시절에 추억이 자꾸떠올라서 글로 옮길라 하니 아니 왜이렇게 문장이 길어지는지 내딴에는 간단 명료 하게 문장을 줄일라 해도 않된다 수필에서 문장이 길면 파이라는데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무식해서요 그대 무명의 노년 장미자 줌마 글이라고 할까요 심심할때 읽어보세요 그냥 어린시절의 타이 머신을 타고 까망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부웅 하고 떠나 가봐요 그대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점박이 광혜는 살어있는지 광혜오빠는 지금쯤 나이가 아마도 살어계시면 83-4살 정도다 광혜오빠는 무얼하시다 은퇴를 하셨는지 보신탕집을 부모님에게 이어받어 운영을 하신건지 옥자언니랑 백년해로 했는지 모두궁굼해서 얼마전에 찿아가보니 그장소는 서울같이. 명동이 되어 있었다 내가살던집도 높은 빌딩이 서있다 서글프다 변하지 말고 있어야 되는것이 내살던 제이의 고향인데 보고싶구나 점박아 광혜야 어디사니 다시 친정엘 가면 순애에게 물어봐야지 오늘은 안녕 벌써 새벽이네요 헉
2019 8 8 새벽 4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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