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절망과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
『살고 싶다는 농담』은 작가 허지웅이 2018년 혈액암의 일종인 악성림프종이라는 큰 시련을 겪은 뒤, 인생에 대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시각을 가지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쓴 신작 에세이다. 저마다 자신만의 무거운 천장을 어깨에 이고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 기대어 쉴 곳 없이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25편의 이야기들을 담았다. 전작 『나의 친애하는 적』 이후 4년 만에 발표하는 이번 신작에서 작가 허지웅의 삶의 해석은 더 예리해지고, 사람을 향한 애정은 더 깊어졌다.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쳐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불행을 탓하는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자칫 더 큰 피해의식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불행한 현실 탓에 나만 이렇게 억울한 상황에 놓였고, 불행하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절망감의 악순환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껴안고 공생하며 함께 인생을 버텨나가야 하는 감정으로서 불행을 인정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이 책은 죽음과의 사투 끝에 삶으로 돌아온 작가 허지웅이 힘겨운 현실에 시름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단단한 조언이자 결국 오늘도 버티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따뜻한 위로다.
상세이미지
저자소개
《필름2.0》과 《프리미어》, 《GQ》에서 기자로 일했다. 에세이 『버티는 삶에 관하여』, 『나의 친애하는 적』, 소설 『개포동 김갑수씨의 사정』, 60~80년대 한국 공포영화를 다룬 『망령의 기억』을 썼다.
목차
들어가는 글
Part 1.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
천장과 바닥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
만약에
당신 인생의 일곱 가지 장면
8층으로 돌아가다
기억 1 - 존 허트, 나는 사람입니다
Part 2. 삶의 바닥에서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
믿지 않고, 기대하지 않던 나의 셈은 틀렸다
미시마 유키오와 다자이 오사무의 전쟁
선한 자들이 거짓말을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우리끼리 싸운다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스스로 구제할 방법을 찾는 사람들에게
삶의 바닥에서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
기억 2 - 김영애, 그녀는 아름답고 위태로웠다
Part 3. 다시 시작한다는 것
바꿀 수 있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
기억 3 - 조지 로메로, 절대 멈추지 않았던 사람
가면을 벗어야 하냐는 질문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이름
보통사람 최은희
순백의 피해자는 없다
불행을 동기로 바꾼다는 것
포스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바란다는 말
책 속으로
가장 어둡고 깊었던 그 밤을 버티고 몇 개월이 지났다. 놀랍게도 아프기 전보다 훨씬 건강하다. 얼마 전 그런 생각을 했다. 가장 힘들었던 그날 밤을 버티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왜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옆에 있어달라고 말하지 못했나. 말했다면 그 밤이 그렇게까지 깊고 위태로웠을까. 나는 언제나 뭐든 혼자 힘으로 고아처럼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인간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오래 ... 더보기 가장 어둡고 깊었던 그 밤을 버티고 몇 개월이 지났다. 놀랍게도 아프기 전보다 훨씬 건강하다. 얼마 전 그런 생각을 했다. 가장 힘들었던 그날 밤을 버티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왜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옆에 있어달라고 말하지 못했나. 말했다면 그 밤이 그렇게까지 깊고 위태로웠을까. 나는 언제나 뭐든 혼자 힘으로 고아처럼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인간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오래 버틸 수 없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면,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증명해낼 수 없다. 나는 행복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매대 위에 보기 좋게 진열해놓은 근사한 사진과 말잔치가 행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아마 행복이라는 건 삶을 통해 스스로에게 증명해나가는 어떤 것일 테다. 망했는데, 라고 생각하고 있을 오늘 밤의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말해주고 싶다.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_ 13~14쪽,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결론에 집착하는 건 가장 피폐하고 곤궁하고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안식처다. 나도 거기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죽음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는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동안, 나는 죽음 이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_ 23~24쪽,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 태어난 청년들은 이기는 경험을 쌓는 일이 비교적 수월하다. 스스로 형편이 불리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무엇보다 몸을 이기는 경험을 쌓아나가자. 출발선이 다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몸을 이기는 경험을 대신 쌓는 것이다. 이기는 경험을 쌓는다는 건 언제 힘을 주고 뺐는지, 언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는지 근육의 쓰임과 호흡의 감각을 기억해내는 것과 같다. 지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뭐가 진짜 이기는 거고 지는 건지조차 구분이 어려워진다. 되는 놈만 늘 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이겨본 사람만이 다시 이길 수 있고, 지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요컨대 끝까지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들자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년이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안 할 텐데 바보같이’라는 마음이 앞섰다. 마흔두 살의 나는 점점 ‘그때의 나라면 지금 이렇게 안 할 텐데 바보같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나이 든다는 것은 과거의 나에게 패배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과 같다.
_ 34~35쪽, 〈다시 시작한다는 것〉
여러분의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기만이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죽지 못해 관성과 비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은 여지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_ 45~46쪽, 〈천장과 바닥〉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정한 거리감이라는 게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열 보가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반보가 필요하다. 그보다 더하거나 덜하면 둘 사이를 잇고 있는 다리가 붕괴된다. 인간관계란 그 거리감을 셈하는 일이다.
이 거리감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늘 전자기력을 떠올린다. 세상에는 인력과 강력, 약력 그리고 전자기력 이렇게 네 가지 힘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내 손이 키보드를 그냥 통과하지 않고 누를 수 있는 건 전자기력 때문이다. 전자기력은 ‘나’를 ‘나’라는 형태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든다. 이를테면 고슴도치의 가시 길이나 〈에반게리온〉의 ‘AT 필드’처럼 내가 나라는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인 것이다. 너무 외롭다고 해서 아예 걷어버리면 나라는 형태가 허물어진다. 반대로 타인이 너무 두려워 보호막으로 두텁게 에워싸면 속절없이 너무 멀어져버린다. 요컨대 타인과의 거리라는 것은 바로 나의 보호막과 너의 보호막의 두께를 어림잡아 더하는 일이다.
삶에 있어 큰 사고라고 할 만한 최근의 일을 통과하면서, 나는 나의 가시와 보호막이 터무니없이 길고 두터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길이와 두께는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오랫동안 비대해져왔다. 그래서는 애초 타인과의 정확한 거리를 셈하는 게 무의미하다. 어떻게 해도 서로의 말이 닿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이다. 나의 셈은 틀렸다.
_ 106~107쪽, 〈믿지 않고, 기대하지 않던 나의 셈은 틀렸다〉
자기 삶이 애틋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오해받는다고 생각한다. 사실이다. 누군가에 관한 평가는 정확한 기준과 기록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평가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결정된다. 맞다. 정말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두고 누군가는 자신을 향한 평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그걸 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한다. 반면 누군가는 끝내 평가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과 주변을 파괴한다.
_ 141쪽,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기댈 수 있는 신적 존재도, 제도적 안전장치도 없이 혼자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피폐해진다. 싸우기 위해 거칠어진다. 불신만 남는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사람들끼리도 상대를 증오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상대에게서 발견했을 때, 우리는 공감과 이해보다 질타와 선 긋기를 우선하기 마련이다. 버티어 살아남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끝내 우리가 싸웠던 어둠 안에 갇히고 만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남은 탓에, 타인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잊은 것이다.
끝까지 버티고 싸우되 피폐하고 곤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선의를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하며 서로를 도울 것. 〈쓰리 빌보드〉는 자력구제를 위해 일어선 사람들 사이의 선한 의도와 행동 그리고 연대만이 〈디어 헌터〉나 〈쳐다보지 마라〉와 같은 비관적 결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_ 162~163쪽, 〈스스로 구제할 방법을 찾는 사람들에게〉
제노모프는 영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괴물이다. 괴물은 돈이 된다. 제노모프처럼 성공적인 괴물은 돈이 될 뿐만 아니라 장르가 되고 산업이 된다. 모든 괴물이 성공하는 건 아니다. 실패한 괴물은 조롱거리가 된다. 하지만 제노모프처럼 성공적인 괴물도, 실패하여 웃음거리가 된 괴물도 똑같이 피해갈 수 없는 게 있다. 실제 괴물을 연기하고 있는 사람에 관한 무관심 말이다. 2000년대 전까지 모든 괴물 캐릭터는 사람이 직접 연기했다. 그렇다. 거기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괴물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괴물을 연기한 배우들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혹은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누구나 사랑했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 이상하리만치 쓸쓸한 말년을 보냈던 사람들. 정말 하나같이 외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 그에 대한 이야기를 꼭 남기고 싶었다. 그 이름들을 기록하고 싶다. 이 이름들은 기록될 가치가 있다. 이건 평생 동안 괴물에 매료되어 살았던 자가 그들에게 바치는 소박한 헌사다.
_ 229~230쪽,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이름〉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할 수밖에 없다. 불행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태도는 낙심이나 자조, 수동적인 비관과 다르다. 오히려 삶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주도하겠다는 의지다. 이는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황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준다. 당장의 감정에 파묻혀 스스로를 영원한 피해자로 낙인찍는 대신 최소한의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두고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요컨대 객관적으로 불행의 인과관계를 바라볼 수 있게 돕는다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내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보다 더 큰 오만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고 제일 불행하고 제일 아프다는 생각에 둘러싸여 웅크리고 있는 게 쉽고 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대개의 경우 주관적인 인상에 불과하다. 실제 벌어진 일과 다르다. 갈등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를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둘 다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당했는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생각하려면 객관화가 필요하다.
_ 257~258쪽, 〈불행을 동기로 바꾼다는 것〉
가장 어둡고 깊었던 그 밤을 버티고 몇 개월이 지났다. 놀랍게도 아프기 전보다 훨씬 건강하다. 얼마 전 그런 생각을 했다. 가장 힘들었던 그날 밤을 버티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왜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옆에 있어달라고 말하지 못했나. 말했다면 그 밤이 그렇게까지 깊고 위태로웠을까. 나는 언제나 뭐든 혼자 힘으로 고아처럼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인간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오래 버틸 수 없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면,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증명해낼 수 없다. 나는 행복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매대 위에 보기 좋게 진열해놓은 근사한 사진과 말잔치가 행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아마 행복이라는 건 삶을 통해 스스로에게 증명해나가는 어떤 것일 테다. 망했는데, 라고 생각하고 있을 오늘 밤의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말해주고 싶다.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_ 13~14쪽,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결론에 집착하는 건 가장 피폐하고 곤궁하고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안식처다. 나도 거기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죽음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는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동안, 나는 죽음 이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_ 23~24쪽,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 태어난 청년들은 이기는 경험을 쌓는 일이 비교적 수월하다. 스스로 형편이 불리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무엇보다 몸을 이기는 경험을 쌓아나가자. 출발선이 다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몸을 이기는 경험을 대신 쌓는 것이다. 이기는 경험을 쌓는다는 건 언제 힘을 주고 뺐는지, 언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는지 근육의 쓰임과 호흡의 감각을 기억해내는 것과 같다. 지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뭐가 진짜 이기는 거고 지는 건지조차 구분이 어려워진다. 되는 놈만 늘 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이겨본 사람만이 다시 이길 수 있고, 지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요컨대 끝까지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들자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년이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안 할 텐데 바보같이’라는 마음이 앞섰다. 마흔두 살의 나는 점점 ‘그때의 나라면 지금 이렇게 안 할 텐데 바보같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나이 든다는 것은 과거의 나에게 패배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과 같다.
_ 34~35쪽, 〈다시 시작한다는 것〉
여러분의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기만이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죽지 못해 관성과 비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은 여지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_ 45~46쪽, 〈천장과 바닥〉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정한 거리감이라는 게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열 보가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반보가 필요하다. 그보다 더하거나 덜하면 둘 사이를 잇고 있는 다리가 붕괴된다. 인간관계란 그 거리감을 셈하는 일이다.
이 거리감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늘 전자기력을 떠올린다. 세상에는 인력과 강력, 약력 그리고 전자기력 이렇게 네 가지 힘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내 손이 키보드를 그냥 통과하지 않고 누를 수 있는 건 전자기력 때문이다. 전자기력은 ‘나’를 ‘나’라는 형태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든다. 이를테면 고슴도치의 가시 길이나 〈에반게리온〉의 ‘AT 필드’처럼 내가 나라는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인 것이다. 너무 외롭다고 해서 아예 걷어버리면 나라는 형태가 허물어진다. 반대로 타인이 너무 두려워 보호막으로 두텁게 에워싸면 속절없이 너무 멀어져버린다. 요컨대 타인과의 거리라는 것은 바로 나의 보호막과 너의 보호막의 두께를 어림잡아 더하는 일이다.
삶에 있어 큰 사고라고 할 만한 최근의 일을 통과하면서, 나는 나의 가시와 보호막이 터무니없이 길고 두터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길이와 두께는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오랫동안 비대해져왔다. 그래서는 애초 타인과의 정확한 거리를 셈하는 게 무의미하다. 어떻게 해도 서로의 말이 닿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이다. 나의 셈은 틀렸다.
_ 106~107쪽, 〈믿지 않고, 기대하지 않던 나의 셈은 틀렸다〉
자기 삶이 애틋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오해받는다고 생각한다. 사실이다. 누군가에 관한 평가는 정확한 기준과 기록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평가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결정된다. 맞다. 정말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두고 누군가는 자신을 향한 평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그걸 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한다. 반면 누군가는 끝내 평가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과 주변을 파괴한다.
_ 141쪽,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기댈 수 있는 신적 존재도, 제도적 안전장치도 없이 혼자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피폐해진다. 싸우기 위해 거칠어진다. 불신만 남는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사람들끼리도 상대를 증오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상대에게서 발견했을 때, 우리는 공감과 이해보다 질타와 선 긋기를 우선하기 마련이다. 버티어 살아남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끝내 우리가 싸웠던 어둠 안에 갇히고 만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남은 탓에, 타인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잊은 것이다.
끝까지 버티고 싸우되 피폐하고 곤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선의를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하며 서로를 도울 것. 〈쓰리 빌보드〉는 자력구제를 위해 일어선 사람들 사이의 선한 의도와 행동 그리고 연대만이 〈디어 헌터〉나 〈쳐다보지 마라〉와 같은 비관적 결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_ 162~163쪽, 〈스스로 구제할 방법을 찾는 사람들에게〉
제노모프는 영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괴물이다. 괴물은 돈이 된다. 제노모프처럼 성공적인 괴물은 돈이 될 뿐만 아니라 장르가 되고 산업이 된다. 모든 괴물이 성공하는 건 아니다. 실패한 괴물은 조롱거리가 된다. 하지만 제노모프처럼 성공적인 괴물도, 실패하여 웃음거리가 된 괴물도 똑같이 피해갈 수 없는 게 있다. 실제 괴물을 연기하고 있는 사람에 관한 무관심 말이다. 2000년대 전까지 모든 괴물 캐릭터는 사람이 직접 연기했다. 그렇다. 거기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괴물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괴물을 연기한 배우들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혹은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누구나 사랑했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 이상하리만치 쓸쓸한 말년을 보냈던 사람들. 정말 하나같이 외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 그에 대한 이야기를 꼭 남기고 싶었다. 그 이름들을 기록하고 싶다. 이 이름들은 기록될 가치가 있다. 이건 평생 동안 괴물에 매료되어 살았던 자가 그들에게 바치는 소박한 헌사다.
_ 229~230쪽,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이름〉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할 수밖에 없다. 불행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태도는 낙심이나 자조, 수동적인 비관과 다르다. 오히려 삶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주도하겠다는 의지다. 이는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황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준다. 당장의 감정에 파묻혀 스스로를 영원한 피해자로 낙인찍는 대신 최소한의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두고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요컨대 객관적으로 불행의 인과관계를 바라볼 수 있게 돕는다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내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보다 더 큰 오만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고 제일 불행하고 제일 아프다는 생각에 둘러싸여 웅크리고 있는 게 쉽고 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대개의 경우 주관적인 인상에 불과하다. 실제 벌어진 일과 다르다. 갈등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를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둘 다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당했는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생각하려면 객관화가 필요하다.
_ 257~258쪽, 〈불행을 동기로 바꾼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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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오늘도 버티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위로
작가로, 또 방송인으로 다양한 매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 허지웅이 4년 만에 새 책으로 돌아왔다. 2019년 8월, 항암 치료를 끝내고 건강해졌다는 소식을 알려온 것이 불과 1년 전인데 그새 책 한 권을 엮을 만큼의 글을 완성했다. 그는 여전히 부지런히 글을 쓰는, 글로써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다.
생사를 오가는 큰 시련을 겪고 난 뒤여서일까. 신작 『살고 싶다는 농담』을 읽다 보면 저자의 필력도 말투도 여전한데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딘가 모르게 따뜻하고 간절하다. 전작들을 통해 줄곧 나와 세계 사이의 거리, 각자의 인생을 버티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오던 저자는 그러나 이번 책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나 혹은 나를 둘러싼 세계가 아닌, 저기 있는 당신을 향해 말을 건넨다. 저마다 자신만의 무거운 천장을 어깨에 이고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 기대어 쉴 곳 없이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이번 신작에 담았다.
“사람들은 아프기 전과 후의 내가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뭐가 달라졌다는 것인지 조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로 써서 말하고 싶은 주제가 달라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나는 언제 재발할지 모르고, 재발하면 치료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항암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래서 아직 쓸 수 있을 때 옳은 이야기를 하기보다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남기고 싶다. 회복한 이후에 쓴 모든 글이 그랬다.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하지 않기를 바라고 불행하거나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안 그래도 상처받을 일투성인 세상에 적어도 자초하는 부분은 없기를 바란다.” (217쪽)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오늘 밤의 당신들에게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저자는 1부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에서 인생의 큰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을 투병 경험 이후로 달라진 자신의 생각들을 솔직하게 써 내려간다. 그동안 혼자 힘으로 고아처럼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으나, 돌이켜보니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는 것. “너무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남은 탓에, 타인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잊은 것”이라는 고백. 저자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 도움을 기대할 곳 없는 가난한 청년들이 자신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돕는 일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가 시작한 것이 삶이 힘겹고 아픈 사람들이 보내온 고민 사연 메일에 일일이 답장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다 답장을 보내기엔 메일의 양이 너무 많아지자 고민 사연을 들어주는 음성 사서함을 열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중 일부는 저자가 진행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 〈허지웅답기〉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고, 또 일부는 이 책에 담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 사연을 들으며 저자가 가장 중요한 해법으로 찾은 것은 바로 ‘불행을 인정하는 것’이다.
고통 없는 삶은 없듯이, 불행하지 않은 사람도 없다. 그러나 불행을 탓하는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자칫 더 큰 피해의식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불행한 현실 탓에 나만 이렇게 억울한 상황에 놓였고, 불행하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절망감의 악순환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불행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껴안고 공생하며 함께 인생을 버텨나가야 하는 감정으로서 불행을 인정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할 수밖에 없다. 불행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태도는 낙심이나 자조, 수동적인 비관과 다르다. 오히려 삶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주도하겠다는 의지다. 이는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황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준다. 당장의 감정에 파묻혀 스스로를 영원한 피해자로 낙인찍는 대신 최소한의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두고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요컨대 객관적으로 불행의 인과관계를 바라볼 수 있게 돕는다는 것이다. (…)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당했는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생각하려면 객관화가 필요하다.” (257~258쪽)
불행이 있다면, 거기 반드시 희망도 함께 있다
언젠가 빛을 발할 당신의 그날을 기원하며
저자는 2부와 3부에서 다양한 영화 속 인물과 실존 인물들의 사례를 들어 ‘불행을 탓하는 일’에 몰두하는 인생이 얼마나 안타까운 결말로 흘러가는지를 보여준다. 미국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피해의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불법 행위들을 자행하다 탄핵 직전 사임한 닉슨, 1890년대 아일랜드의 천재 작가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동성애 혐의로 피소되어 몰락한 뒤 연인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몸부림치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 오스카 와일드, 뛰어난 재능에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결국 다스베이더로 흑화한 아나킨 스카이워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불행과 피해의식이 어떻게 우리 인생을 또 다른 불행으로 밀어넣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불행한 일들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매우 운이 좋은 소수를 제외하면 여러분은 노력한 만큼 인정받지 못할 것이고 가치를 부정당할 것이다. 억울할 것이다. 내 가치를 누군가 알아봐주길 갈망할 것이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치를 인정받는 것처럼 보인다. 행복해 보인다. 적어도 SNS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절망이 커져간다. 하지만 절망에 먹혀서는 안 된다. 절망이 여러분을 휘두르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피해의식에 점령당해 객관성을 잃는 순간 괴물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평가에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 평가와 스스로를 분리시켜야 한다. 마음에 평정심을 회복하고 객관성을 유지하자. 그것이 포스가 말하는 균형이다. 언젠가 반드시 여러분의 노력을 알아보고 고맙다고 말할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끊임없이 가다듬고 정진하고 버틴다면 반드시 그날이 온다.” (273쪽)
이에 대한 반대 사례로 저자는 니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랑했던 여인과 친구로부터 처참히 버려진 뒤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아편에 빠지는 등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 참혹한 밑바닥에서 기어코 올라와 필생의 역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니체. 저자는 삶의 모든 괴로움을 불행의 탓으로 돌리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불행을 직시하고 객관화하는 데에서 극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과거는 변수일 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의 삶을 결정짓는 것도 아니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불행을 다스린다면, 그리고 그걸 가능한 오래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이 얼마든지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보다 단단하고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리라 생각한다. 희망이 없다, 운이 없다, 는 식의 말로 희망과 운을 하루하루 점치지 말라. 희망은 불행에 대한 반사작용과 같은 것이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 반드시 희망도 함께 있다. 부디 나보다 훨씬 따뜻하고 성숙한 방식으로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며 함께 내일을 모색해나갈 수 있는 어른이 되길. 그리고 행복하길.” (26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삶을 버텨내는 용기에 대하여
저자가 전작에서부터 줄곧 강조해온 화두는 ‘버티는 삶’이다. 이번 책에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버티고 버티는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이들에게 이 한마디를 전한다.
“여러분의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기만이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죽지 못해 관성과 비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은 여지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45~46쪽)
불행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나기에 각자의 불행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본인만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섣부르게 이야기하지 않는 대신, 불행을 감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다만 한번 더 버텨볼 것, 살기로 결심할 것을 당부한다. 이 책은 작가 허지웅이 힘겨운 현실에 시름하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단단한 조언이자 결국 오늘도 버티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따뜻한 위로다.
북소믈리에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