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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 속에서 만난 우리 孝의 모습
제자가 묻는다. ‘효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공자의 대답. ‘무릇 효는 덕의 근본이라.’
효의 바이블, <효경>의 첫 문장이다.
공자의 이 말은 동양 사람에게는 관념적인 설교로서가 아닌, 모든 생활의 기본 규범으로 존재해왔다.
그리고 시간의 나이테가 차곡차곡 새겨질 동안, 우리네 가치관의 한구석에 오롯이 각인된 ‘효’.
우리 삶의 거울인 예술 작품 속에서는 ‘효’의 모습이 어떻게 각인되어 있을까. 그 새김은, 때로는 은근하고 때로는 명징하다.
엄마의 집에 가다,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에서는 뿔뿔이 흩어져 살던 삼남매가 엄마의 집으로 모여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에게 엄마의 집은 단순히 숙박 해결의 장소가 아닌, 마음의 치유를 찾는 구원의 장소다.
그 구원은 ‘밥’으로 구현된다.
신용 불량자에, 월세 보증금은 밀린 방세를 충당하느라 한 푼도 남아 있질 않고, 아내는 집을 나가버린 마흔여덟 늙다리 사내 ‘나’에게 엄마가 전화를 건다. 요금이 밀려 겨우 수신만 되는 전화기다.
“자고 있었니?”
“아니요. 일어났어요.”
“밥은 먹었어?”
“네.”
“밖에서 일하는 사람은 잘 먹고 다녀야 한다.”
“알고 있어요.”
“닭죽 쑤어놨는데 먹으러 올래?”
서너 번 전화하면 반드시 한 번쯤은 등장하는 레퍼토리. 메뉴는 대개 닭죽이나 잡채, 콩국수 같은 평범한 엄마표 음식이다. 낭떠러지 끝에 몰려 있던 늙다리 아들은 매번 거절하던 초대에 “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엄마 집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엄마 집엔 이미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받은 보상금을 사업한답시고 날려먹은, 쉰두 살에 120kg, 전과 5범의 형 ‘오함마’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곧이어 바람을 피우고 이혼당한 여동생 ‘미연’ 과 그녀의 딸까지 들이닥친다.
삼남매가 몇 십 년 만에 엄마 품 안으로 돌아와 복닥복닥 한 살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엄마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구원인, 자식들에게 ‘밥 먹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삼겹살을 필두로, 돼지갈비나 제육볶음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상에 오르고, 닭볶음탕이나 백숙, 불고기에, 소의 사골을 구해와 들통에 한나절씩 고아대 자식들에게 먹인다. 삼남매의 얼굴엔 기름기가 번들거린다.
급기야 아침에 삼남매가 삼겹살을 구워 먹는 동안 엄마는 점심에 먹을 돼지불고기를 재우는 동시에 한쪽 들통에선 사골을 고는 지경까지 이른다.
엄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휴, 어릴 때 고기 한 번 제대로 못 먹이고 정부미만 먹였으니 애들이 부실해서….”
세상에 나가 패배하고 돌아온 자식들이 모두 어릴 때 잘 거둬 먹이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늙은 엄마의 사랑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어린 제비새끼들처럼 받아먹기만 하는 중년의 삼남매는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알까? 단연코 아니다, 아직까지는.
엄마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엄마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주인공 ‘나’.
생각해보면 엄마의 사생활은 물론 성격에 대해서도 별반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부모님 살아생전엔 깨닫기 어려운 법이다. 모든 일은 때가 있다지만 이렇게 타이밍이 어긋나는 관계도 있을까.
세월은 흘러, 사고를 치고 해외로 떴던 큰아들 오함마가 ‘나’에게 전화를 건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지만 목적은 하나, 엄마의 안부가 궁금해서다.
“엄마는 잘 계시니?”
오함마가 물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못하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 작년에 돌아가셨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 오함마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가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한동안 흐느끼던 오함마는 울먹이며 말했다.
“미안하다… 엄마한테 미안하고… 미연이한테도 미안하고 너한테도 미안하고….”
그는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울먹이며 계속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의 눈 앞엔 커다란 덩치의 그가 어린애처럼 몸을 떨며 흐느끼는 장면이 그려졌다.
여기서 밝히는 반전 하나. 사실 이들 삼남매는 배가 다르고 씨가 다르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지만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 속 자식들은 저를 키운 어머니에게 마음으로 효를 다한다. 키워준 어미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한 걸음 늦은 그날,
피천득의 <그날>
소설 <고령화 가족>의 오함마와 마찬가지로,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중 가장 큰 것은 부모의 임종이리라. 불러도 대답 없는 육신 앞에서 자식은 평생 불효자가 되고 만다.
고(故)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은 그의 수필 <그날>에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불효자’가 된 그날을 이야기한다.
발단은 중국 작가 노신의 ‘아버지의 병환’이라는 글이다.
“아버지는 이제 숨을 거두실 거다. 어서!” 했다.
나는 “아버지! 아버지!” 소릴 내서 불렀다.
“더 크게. 어서.”
“아버지! 아버지!”
평온하던 아버지의 얼굴은 긴장되고 눈이 약간 움직이며 괴로워했다.
“아 어서 또, 빨리!”
나는 “아버지!” 또 계속해 불렀다.
최후의 숨을 거두실 때까지. 지금도 오히려 그때의 내 목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문득 그것이 내가 아버지에 대한 최대의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 노신 <아버지의 병환> 중에서 -
금아는 이 글을 읽으며 50여 년 전 그날, 엄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서사 아저씨와 함께 기차에 올라탄 그날을 떠올린다. 평양 가까이 있는 강서까지 가는 동안 차창을 내다보며 울고 또 우는 어린 작가는, 차창 밖 멀리 엄마 소 옆에 서 있는 어린 송아지가 부럽다.
그러나 엄마가 머물던 집에 뛰어 들어갔을 때, 엄마는 아들이 집에 온 것도 모른 체하고 누워만 있다.
넓적다리를, 팔을, 힘껏 꼬집고 또 꼬집어도 꼼짝도 않는다.
엄마는 어린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의식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날 밤 시골 사람들이 울다 엎드린 채 잠이 든 소년을 일으키며 나쁜 아이라고 야단하던 것도 기억난다 했다. 과연 엄마가 의식이 있을 때 서둘러 찾아와 아들이 꼬집는 걸 아셨더라면, 그것이 진정한 효도였을까?
작가는 노신의 글을 읽으며 어쩌면 부모가 저 세계로 떠나는 길에 미련이 남도록 하는 것이 불효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찌 생떼같은 자식을 떼어놓고 저승으로 가는 길이 편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남은 자식들의 마지막 불효인 셈이다. 그러나 작가는 마지막을 이런 뉘우침으로 마무리한다. 엄마가 의식이 있어 내가 꼬집는 줄이나 아셨더라면 ‘나도 마지막 불효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을’ 하고 생각해본다.
불효라도 좋으니 어머니의 저승 가는 길을 잠시라도 붙잡고 싶은 아련함일까.
이때 그의 나이 겨우 열 살이었다.
언제까지나 든든한 언덕일 것만 같은 사람. 그 이름은 바로 어버이다.
최근 ‘효’라는 단어가 자칫 고루하고 완고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여기서 공자의 말을 다시금 기억해보자. ‘효는 덕의 근본이니, 이는 곧 인격의 기본인 것’이다.
잃어버림과 잊어버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첫 문장이 이렇게 섬뜩할 수 있을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평화로운 사색의 시간에 책을 집어든 독자는 이 첫 문장을 접하고 나면 자세를 고쳐 앉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 누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 된 상황에서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엄마를 부탁해>는 이렇게, 초반부터 으르렁대는 들짐승처럼 독자의 정수를 파고든다. 느닷없는 공격은 노련한 작가의 계획된 기질이다. 소설은, 대놓고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고백하는 데서부터 불효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엄마의 남편과 자식들은 엄마를 잃어버린 후에야 한자리에 모여 날 선 칼날을 서로에게 벼른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지극히 옛날 방식인 전단지 제작이다. 시간을 죽이느니 뭐라도 해보자 싶은 심정 때문
이다.
실종 신고를 내고, 주변을 뒤지고, 인터넷에 올린 것만으로는 엄마를 찾는 데 너무 소홀한 것 아니냐는 질책을 받을까 두려운 심상도 자리 잡았을 터. 그런데 잃어버린 엄마를 찾는 전단지를 만들면서, 엄마의 존재는 오히려 안개 속으로 멀어진다. 1938년으로 알고 있던 생일은 호적상의 문제로 사실은 1936년생이었으며, 아버지 칠순 때 찍은 가족사진 속의 엄마 얼굴은 미용실에서 지나치게 멋을 내 오히려 낯설다.
사례금을 얼마로 할지도 남은 이들에겐 고민이다. 100만원으로 하자니 찾는 성의가 덜해 보일 것 같고, 300만원도 마뜩찮다. 결국 500만원으로 사례금을 정하고, 각자 일을 하는 틈틈이 전단지를 돌리기로 시간을 나눈다.
그렇게 해서 언제 엄마를 찾아?
날 선 실랑이가 이어지면서, 순간순간 모면하듯 봉합해온 일들이 툭툭 불거진다. 소리를 지르고 담배를 피우고 문을 박차고 나간다. 성질을 부리면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
“그러는 너는?”
서로 입을 다문다. 엄마를 잃어버린 책임을 물으며 스스로 상처를 입는다.
엄마는 왜 서울역에서 사라진 걸까.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은 생각을 깊이 해보면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뜻밖이라고 말하는 일들도 곰곰 생각해보면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엄마를 잃어버린 건 정말,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남은 이들의 일상에 잃어버린 엄마의 흔적이 불쑥불쑥 찾아든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큰딸에게 엄마의 흔적은 ‘장미 묵주’로 다가온다.
언젠가 시골집 부엌에서 아침 댓바람부터 무를 깔고 문어를 쪄서 선 채로 집어 엄마 입에 넣어주던 날.
엄마는 느닷없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가 어디냐고 물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나라에 가거든 장미 묵주를 하나 구해다 달라고 무심하게 부탁한다. 너는 어디든 갈 수 있지 않느냐며….
한평생 제 식구 보살피느라 집 밖을 못 벗어난 까막눈 어미의 소원이었다. 딸은 잃어버린 엄마를 찾던 중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로마행 비행기를 탄다. 바티칸 시국에서 장미 묵주를 사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걸 엄마에게 전해줄 수나 있을까? 차마 하지 못한 한마디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
생일상을 받으러 상경한 늙은 엄마의 실종이라는 충격적이고 참담한 사건. 그러나 사실 가족은 엄마를 잃어버리기 전, 이미 ‘잊고’ 있던 건 아닐까.
딸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아버지로, 화자를 바꿔가며 이어지는 처절한 고해성사.
심문하듯 휘몰아치는 지난날의 잘못들.
신경숙은 책 말미 ‘작가의 말’에서 원고를 탈고한 후 맨 먼저 한 것은 시골집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본 일이라고 수줍게 고백한다.
마침 헛간에서 마늘을 까던 어머니.
당신은 아마 그 마늘로 김장을 해서 딸에게 보낼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의 이유,
영화 <애자>
영화 <애자>에도 딸이 제 어미에게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여주는 장면이 있다.
암이 재발해 병원에 입원한 엄마가 먹고 싶다던 한 점 회. 엄마와 딸은 낚싯대를 드리우고 횟감을 낚아 올린다. 부산 여자들의 호쾌한 야식이다. 회를 입 안에 넣고 딸은 묻는다.
“뭐 또 하고 싶은 거 있나?”
“있으면 해줄라꼬?”
“말해봐라. 내 돈 들어가는 거 빼고는 뭐든 다 해줄게.”
“그럼 네가 해줄 게 없네.”
머쓱한 딸은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병든 엄마에게 애자는 급기야 술까지 권한다. 다음 날 아침 주치의에게 호되게 혼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기쁜 소식이 날아든다.
혈당만 낮아지면 수술을 받을 수 있단다. 안심한 딸은 병상 곁을 잠시 떠나는데….
그런 애자에게 엄마가 쓴 쪽지 한 장.
퍼뜩 와. 어메 심심해.
불량 학생에 싸움꾼이던 딸과, 고집 빼면 시체인 엄마의 행복한 찰나다. 그러나 평화로워 보이던 투병 생활은 서서히 끝을 향해 흘러간다. 철없는 아들의 사업 때문에 수술 비용을 모두 내어준 엄마는 천천히, 고통스럽게 진행될 병을 기꺼이 맞이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 엄마를 이해 못하고 밖으로 나돌던 딸은 퍼뜩 오라는 엄마의 쪽지를 주머니에서 다시 발견하곤 병원으로 뛰어오지만 엄마는 이미 마음의 정리를 마치고 퇴원해버렸다.
그런 엄마를 찾아간 딸의 오열.
“대체 와 그라는데! 와 그라는데! 엄마야. 수술 받자. 수술 받고 우리 딱 1년만 같이 살자, 응? 수술 안 받으면 석 달도 힘들단다.”
“니 힘 안 드나?”
“힘들다. 힘들고 미치겠다.”
“그란데 와 엄마를 안 보내주는데.”
“내 힘들다고 엄마 보낼 수 없잖아. 나 이래 아무것도 못해보고 그냥 보낼 수 없잖아.어?”
“수술 받으면 그냥 1년이 아니고 억수로 힘든 1년을 보내야 한다. 내 살아 있는 동안 이 미친 짓거리를 또 해야 한다고. 와 그걸 모르노?”
“내 한다. 내가 하면 되잖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가 하면 되잖아… 엄마야….”
돌아오는 길, 엄마는 드디어 수술을 결심한다. 그리고 조건을 내건다. 그동안 결혼도 하고 유명한 작가도 되라는…. 엄마가 자식에게 바라는 평범한 소원이다.
하지만 노화된 혈관 때문에 결국 수술실에서 손써볼 도리도 없이, 엄마는 조용히 남은 생을 정리하기로 한다. 모녀는 드라이브를 하고, 맛있는 밥을 사 먹고, 목욕을 하고, 같이 잠들지만, 엄마와 딸의 삶의 이정표는 이미 엇갈려 있다. 엄마가 가는 길을 속울음을 참아가며 지켜봐야 하는 딸은 차마 엄마를 보낼 수 없지만, 엄마는 또 한 번 부탁을 한다.
“보내도.”
엄마는 기어이 핏줄을 떼어놓고 혼자만의 길을 떠나고야 만다.
“에미 먼저 가서 미안해.”
떠나는 이도 미안하고 보내는 이도 미안한, 절절한 이별의 순간.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야 그 소중함을 드러내는 존재인 ‘엄마’는, 자신을 편히 보내주려는 마지막 딸의 효도를 마음으로 전달받았을까.
뻔하디뻔한 최루성 영화로 치부하기엔, 그 속에 박힌 한국인의 끈적한 정서가 오래도록 가슴에 밟힌다.
글 전희영(방송작가)
일러스트 김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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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가족.
줄거리
혼자 사는 어머니 집으로 나이 값 못하는 철없는 자식들이 모여든다. 일단 시작부터 장남 한모는 엄마 집에 얹혀사는 중이었다. 건달 짓을 하며 사사건건 욱하는 성격에, 40이 넘은 나이에 아직도 엄마가 밥을 챙겨 줘야 하고 유치하게도 동생을 괴롭히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다음으로 차남인 인모가 엄마의 집에 합류한다.
부인이 바람나서 이혼 직전인데다가 영화감독인데, 흥행에 실패해 자살을 시도하려던 중, 어머니가 와서 닭백숙 해 놨으니 와서 먹으라는 전화를 받고, 그 길로 자살 시도를 중단하고, 어머니 집으로 향하면서 그 집에 그대로 눌러 앉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던 중, 뜬금없이 집에 여자 아이 민경이 집에 등장한다. 알고 보니 여동생 미연의 딸이었다. 조카의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몰랐던 형제는 천청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미연이 또 다시 이혼을 해서 이 집에 들어와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인모가 들어옴으로써 이미 방이 찼는데, 미연이 들어오면, 앙숙인 한모와 방을 함께 써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형제는 어떻게든 매제인 장 서방을 설득해서 미연을 나가게 만들기 위해 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장 서방과 만남에서 ‘그 여자는 피가 더럽다’는 말을 듣곤 장 서방을 벽돌로 내리찍고 돌아온다.
그렇게 삼남매와 버릇없는 민경까지 한 집에 모여 살게 된다. 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다투고 사소한 일에도 늘 시비를 건다. 어머니는 화장품을 팔며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매일 같이 삼겹살을 구워준다. 그러다 미연의 세 번째 남자친구가 등장한다.
미연의 결혼식이 예정되면서 가족들은 예비 사위까지 포함해서 여행을 가게 된다. 여행 중, 다른 사람들과 미연이 시비가 붙는데, 앙숙이지만 그래도 오빠라고, 편들면서 맞서 싸운다. 어머니는 그런 모습마저도 가족끼리 서로를 위하는 게 보기 좋다며 좋아한다.
동네에 미장원을 하는 수자라는 여자가 있는데, 원래 한모가 짝사랑하던 여자다. 인모는 그 미장원에 머리를 자르러 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 후 한모가 인모의 영화 실패를 언급하며 그의 자존심을 건드려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인모는 한모를 골탕 먹이기 위해 여자를 꼬여서 여행을 간다. 한모는 여행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다.
인모는 매일 삼겹살을 구워주시는 어머니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그러다 우연히 어머니가 어떤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고, 어머니가 부적절한 행위로 돈을 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영화감독으로써의 재기도 쉽지만은 않다. 별 볼일 없는 감독인 그에게 들어오는 작품이라고는 노골적인 에로 영화들뿐이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그런 영화를 찍지는 못한다. 그러던 중, 한모가 민경의 팬티를 뒤집어쓰고 있던 모습(미장원 여자를 잊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고 말한다.)이 인모에게 발각되면서 세 남매는 갈등이 극에 달하고, 한모는 자살시도를 한다. 그동안 집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던 민경은 그만 가출을 하고 만다.
민경의 가출을 계기로 삼남매의 복잡한 가족 관계 폭로전이 일어난다.
장남 한모는 세 남매의 아빠라고 알고 있던 남자의 전처가 데려온 자식으로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고, 미경은 엄마의 외도로 낳은 자식이었다. 인모는 얼마 전에 목격한 엄마의 부적절한 행위에 대해 폭로한다.
한모와 인모는 각자 민경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인모는 그토록 찍기 싫었던 에로 영화를 찍기로 하고, 선금을 받아 그 돈으로 민경을 찾아 나선다. 한편, 한모는 교도소 시절 같은 방에 있었던 일명 약장수가 새로 오픈하기로 한 불법 도박장의 바지 사장을 하라고 부탁 받고 있었는데, (결국, 나중에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가라는 것이다.) 그 동안 피해 다니다가 민경을 찾아주는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한모는 민경을 찾아서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집을 나가게 된다.
이후 미연이 결혼이 확정되자 어머니가 미연의 결혼식에 식장에 같이 들어가 달라며 미연의 친부를 데려오면서, 인모가 어머니의 부적절한 행위의 대상으로 의심했던 할아버지(영감 구씨)가 바로 미연의 친부인 것이 드러난다.
한모는 바지사장으로 도박장을 운영하다 약장수가 한모의 뒤통수 칠 계획을 얘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된다. 이에 한모는 약장수가 가지고 있던 도박장 소유권과 관련된 서류를 빼돌려 처분하고 해외 도피를 계획한다. 미연의 결혼식에 들려 사진을 찍고 한모는 떠난다. 그러나 약장수는 인모를 납치하여 한모를 협박한다.
인모는 한모의 행방을 밝히라며 고문을 당하지만, 끝까지 말하지 않고 죽을 각오를 밝힌다. 이 때 한모가 돈을 들고 등장하고 인모 대신 칼을 맞는다. 이때 인모가 자신의 아내의 불륜 상대를 심각하게 다치게 했던 것을 한모가 대신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들어가는 것이 밝혀진다.
인모는 에로 영화를 찍는 감독으로, 미연은 결혼한 남편과 옷가게를 하고, 민경은 춤을 배우고, 엄마는 영감 구씨와 새 살림을 차리고, 한모는 사모하던 수자와 결혼하고 함께 일한다. 그들은 각자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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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 피천득
그날 (어머니 돌아가시던 날)
읽던 글을 멈추고 자기의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있다.
또 과거를 회상하다가 글에서 읽은 장면을 연상하는 적도 있다.
나는 "아버님의 병환"이라는 노신의 글을 읽다가 오십여 년 전 그날을 회상하였다.
엄마가 위독하시다는 전보를 받고 나는 우리집 서사 아저씨와 같이 평양 가까이 있는 강서라는 곳으로 떠났다.
나는 차창을 내다보며 울었다. 아저씨가 나를 달래느라고 애쓰던 것이 생각난다.
울다가 더 울 수 없으면 엄마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또 울었다. 그러다가 울음이 좀 가라앉았을 때 나는 멀리 어린 송아지가 엄마소 옆에 서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웬지 그 송아지가 몹시 부러웠다.
기차는 하루 온종일 달렸다. 산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평양은 참 먼 곳이었다.
오후 늦게야 평양에 도착하였다. 기차에서 내려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서행 역마차를 탔다. 텁석부리 늙은 마부는 약수터에 와 계신 서울댁 부인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안됐다는 듯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늙은 말은 빨리 달리지를 못하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느린 말이었다. 이렇게 느린 말은 오랜 후에, 내가 커서 읽은 "데이비드 커퍼필드" 속에만 나온다.
바키스라는 시골 마차 마부도 어린 데이비드에게 불행한 엄마의 소식을 미리 알려준다. 윤이 나는 긴긴 머리, 그리고 나이보다 젊어보이는 데이비드의 홀어머니, 그도 아름다운 엄마였다.
소설을 읽고 있던 내 눈에서 더운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나는 데이비드와 같이 울고 있는 것이었다.
강서 약수터 엄마가 유하고 있던 그 집 앞에서 마차를 내리자 나는 "엄마" 하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어갔다. 엄마는 눈을 감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내가 왔는데도 모른 체하고 누워 있었다.
나는 울면서 엄마 팔을 막 흔들었다. 나는 엄마를 꼬집었다.
넓적다리를, 팔을, 힘껏 꼬집고 또 꼬집었다. 엄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 얼굴에 엎어져 흐느껴 울었다. 엄마의 뺨은 차갑지 않았다.
나는 이때의 안타까움을 수십 년 후에 내가 본 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에서 다시 느꼈다. 주인공의 이름은 물론 배우의 이름도 잊어서 그저 '아이'라고 부르겠다.
그 아이는 많은 고생을 겪은 뒤에 마침내 엄마를 찾게 된다. 그러나 "엄마!"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을 때 엄마는 자기 아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얀 시트와 같이 엄마는 모든 기억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때 그 아이의 표정! 그 아이의 눈 속에서 나는 어린 나를 다시 발견하고 울었다. 그래도 그 아이의 엄마는 얼마 후 다시 기억을 회복하였다.
우리 엄마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의식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나는 울다가 엎드린 채 잠이 들어버렸다.
그날 밤 시골 사람들이 나를 일으키며 나쁜 아이라고 야단을 하던 것이 기억난다.
엄마는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숨을 거두시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 엄마는 얼굴 화장을 아니 한 것은 물론 색깔 있는 옷이나 비단을 몸에 대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이쁘다고 하면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죽은 아빠에게 미안하고 무슨 죄라도 짓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수절을 의심하며 바라다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엄마는 늘 건강이 좋지 못하였다. 아빠가 밤마다 꿈에 찾아온다는 말을 하였다.
엄마는 나날이 여위어갔다. 엄마는 저고리 옷고름에 달던 은장도를 밤이면 머리맡에다 놓고 잤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녹용을 넣은 보약을 지어다 잡숫기도 하였다. 그것도 효험이 없었다. 양의의 치료를 받기 위하여 남대문 밖에 있던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을 하였지만 거기서도 건강은 회복되지 못하였다.
마침내 엄마는 약수를 먹어본다고 강서로 갔었던 것이다. 아마 자기가 세상 떠날 것을 알고 고향인 평양으로 가시지 않았나 한다. 평양 사람이 타향에서 죽게 되면 머리를 평양쪽으로 두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내가 아까 읽고 있던 노신의 글 "아버지의 병환"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연부인은 경문 사른 재를 종이에 싸서 아버지 손에 쥐어드리며 나보고 "아버지" 하고 불러드리라고 재촉하였다. "아버지는 이제 숨을 거두실거다, 어서!" 했다. 나는 "아버지! 아버지!" 소릴 내서 불렀다.
"더 크게, 어서."
"아버지! 아버지!"
평온하던 아버지의 얼굴은 긴장되고 눈이 약간 움직이며 괴로워했다.
"아 어서 또, 빨리!"
나는 "아버지!" 또 계속해 불렀다. 최후의 숨을 거두실 때까지.
지금도 오히려 그때의 내 목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문득 그것이 내가 아버지에 대한 최대의 잘못이었던 것을 깨닫는다.
엄마가 의식이 있어 내가 꼬집는 줄이나 아셨더라면 '나도 마지막 불효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을' 하고 생각해 본다.
영혼 없이 일을 하고,
영혼 없이 사람을 만나니
가장 중요한 때
가장 중요한 것을 못 보거나 놓치고 맙니다.
혼을 담아야 비로소 제대로 보이고
뜨겁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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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진화 과정의 실재 우리는
기억의 재임을 반복하는 우주공간에 살고 있습니다.
자연의 파동이 우리의 몸을 치유합니다.
살다 보면 친절과 미소가 나를 지성체로 만들고
천연상태 숨쉬는 자연의 에너지로 만족이 옵입니다.
세포는 주파수 파동의 도움을 받게 수명연장 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한결같이 움직이는 것이고,
죽어 있는 것들은 한결같이 묵묵부동 입니다.
지극히 한정된 삶을 사는 우리인류는 진화의 목적에 이끌려
힘든 것을 좋와서 일부러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것 입니다.
내 몸속 자기 부정적 경험
수 천년 정보가 변화하고 바뀌는 자기 업에 매인 과정인것 입니다.
지성체라는 부자환경이 어버이를 섬기도록 입니다.
내 몸은 우주 세포 늘 하루에 반복하는 힘
그 움직임을 먹음어 부자원소 나는 나타남의 실체 입니다.
환영의 실재란 없다는 것이며 나의 실현으로 영적 물질이라는 것,
그 수천억만년의 씨앗이 대물림을 반복하는 문명의 진화다.
늘 오늘에 대처하도록 어버이로 나타나는 것 입니다.
따라서 고난이라고 하는 크고 작은 역경이 오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그렇게 격는 한평생, 한평생의 삶,
기억이 저정되는 혼이기에 영이 이동되는 시공간은 광자대입니다.
컴퓨터 하드디스크 기능과 같습니다.
항성과 행성이 없어지고 나타나 듯
원소의 진화 과정에 환영으로 다시 나타나는 실체 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이 이별도 했다가 또 다시 반복 윤회하는 것은
암흑 물질 또는 원자흭 에너지실체의 문재입니다.
반복하도록 진화에 대처하는 물질 현원이기에
몸과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있고 없고,입니다.
광대하다의 존재의식은 무조건 있는 것이기에
다양성을 수용하기위해 나는 필요성입니다.
힘든 날은 없었습니다! 결핍의 느낌이 그러합니다.
다 좋은 날로 진화며 천당에 의한 복종이 긍정입니다.
인격이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
즉 - 우주세포가 몸에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
영적 본능의 사람인지,사회중심 멸종단계 유인원 상태인지 입니다.
우주의 평창은 지구만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기에
천체가 숨쉬기 위해 항성과 행성이 터지듯
우리 생각도 각기 다른 주장으로 여러 문재를 겪 습니다.
빛이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의 원인과 목적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답은 무엇입니까?
풀어야 할 문제에 있기에 감당해야 할 생존 아니던가요?
문제는 푸는 것, 즉 원인을 밝히는 것에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숨은 정신이며 육체가 죽음을 격지 않고는
영이 허물을 벗고 저장되어 나타나는 진화에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소망은 없는 것입니다.
몸을 구성하는 몸 세포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창조되는 이유
사라짐의 반복을 거듭하고 피어나도록 빈 공간의 명령입니다.
나는 물이다의 지성체 나는 빈 공간의 주인이다의 지성체,
그렇게 우리의 복종하는 마음으로 지성체 입니다.
물려줄 것이 있는 진화, 반복하는 것은 빠르다에 스승입니다.
현 인류의 진화가 그래서 이렇게 빠르게 가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가야하는 것에 우리는 물질원소이기 때문 입니다.
여기에 도피할 수 없는 영은 없습니다.
수 천억만년 계속 있는 죽음 안에서 창조에 동화되는 진화,
계속있는 발견들로 인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입니다.
따라서 신을 위해 선량해 지려고 종교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지성체인 내가 선량해지면 신들이 내 속에 있기 때문에
나는 저절로 선량해 지는 신성한 우주입니다.
한번 배우고 또 다시 재 지각을 반복하도록 격는 진화는
숨쉬기위해 시너지 주파수 파동의 공간에
우리의 몸은 배풀기위해 두려움이 없는 홀로그램 존재입니다.
죽은 세포가 살아나도록 주자 하자 쓰자입니다.
몸이 컴퓨터 본체라면 영은 기억장치 해드디스크처럼 입니다,
무위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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