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삶 느린 생각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1 - 15 回 |
꽃을 배우고 짐은 가볍게 ‘작은 소유’의 시대 생각해야 |
⑮ 성장 · 평등과 ‘지구살림’의 경제
사회복지가 커다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쟁점은 복지 비용을 어떻게 마련하는가 하는 것이다. 시비의 대상이 됐던 일의 하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증세 없는 복지”를 말한 일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복지에 비용이 따르되 그것을 최소한으로 하겠다는 방안을 간략하게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금 제도를 정비하고 그 허점을 찾아 세금의 총액을 늘려 복지비용에 충당하겠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으로써 참으로 실속 있는 복지가 가능하겠느냐 하는 의문이 나온다. 그리고 누진세나 법인세 등의 대폭 강화 등을 포함한 조세제도의 대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중요한 사실은, 정당이나 정치 이념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복지제도의 필요에 대해 합의가 있다는 것이다. 의견의 차이가 격렬한 논쟁과 대결이 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정치 논쟁의 관행이지만, 이러한 합의-합의를 인정하지 않는 합의가 생겨난 것은 그 필요의 절실성이 전달된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가 극단적인 생존 투쟁의 상황을 벗어난 지점에 이른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조금 더 합리성이 확립된 상태에서는, 이러한 합의는 세부 사항의 조정으로 일정한 타협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불평등이 자본주의 위태롭게 해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것은 한국이 복지 면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에 들어가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표는 국가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수치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하고 있는 바 인간적 고통에 대한 대책을 우리가 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하여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를 향해 우리가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지난 연말 네이버의 ‘열린 연단’에 고려대 고세훈 교수의 ‘평등과 복지’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었다.
고 교수가 인용하는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빈부의 격차를 재는 지니 계수가 0.415 (2011년 수치)로 OECD 34 개 국가 중 아래로부터 다섯째의 자리에 놓인다. 이 열악한 상황은 정부의 사회적 지출에 의해 시정될 수도 있는 것인데, 한국의 사회적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에 비교해 OECD 국가들의 평균 지출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숫자들은 조금 전에 말한 바와 같이 국가의 국제적 위상, 그리고 우리 사회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사회 전체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복지와 평등의 문제를 철저하게 다각도에서 검토하고 있는 고 교수의 글이 그 서두에서 여러 이론가의 견해를 인용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불평등이 민주주의는 물론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의 시정은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인 것이다.
긴축이냐, 재정 지출 확대냐 논란
복지 지출에 반대하는 입장은 그것이 경제 활성화를 지연할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독일이 주도해 유럽연합(EU)은 경제 회복 방안으로 그리스를 비롯해 공사 부채 문제가 큰 남유럽의 여러 나라에 긴축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진보주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나 조셉 스티글리츠는 금융위기 사태 이후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대책은 긴축이 아니라 정부에 의한 재정 지출이라고 주장해 왔다. 담보에 시달리는 주택 보유자, 사회기반시설, 사회안전망 등을 위해 재정 지출을 늘린다면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정부 지출 확대만을 정책으로 내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1월 그리스 정권을 장악한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의 시리자(급진좌파연합) 정책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케인스의 경제 사상에서 유래하는 이러한 제안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이 돌아가면, 결국 그것은 소비를 늘게 하고 소비가 투자를 자극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고 교수는 강연에서 “가난한 사람은 돈을 쓴다”는 말을 농담처럼 내놓고 있다.
경제학자들이 제안하는 지출과 소비 확대 정책은 일단 보통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제는 분명한 예측을 허용하지 않는 분야다. 서로 다른 정책적 처방이 나오는 것도 반드시 서로 다른 계급적 이익이 작용하는 때문만이 아니라 경제학이 아직은 정밀과학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와 같은 국외자가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옳을 수는 없다. 다만 오늘날 경제는 모든 사람의 삶의 근본이 돼 있기 때문에 국외자도 어떤 느낌을 가질 수는 있고 국외로부터의 견해나 질문이 등한시됐던 측면의 문제를 새로 생각하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도덕의식이 질서 유지의 축 될 수도
고 교수의 강연이 끝난 다음 필자는, 무례를 무릅쓰고, 청중의 질문에 참여했다. 질문은, 어찌하여 경제는 소비의 증대를 중요시하는가, 상식적인 관점에서는 소비의 생활이 아니라 근검절약하는 생활이 삶의 덕목을 지키는 삶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또 경제의 관점에서 표현되는 저출산과 인구 감소에 대한 우려는 참으로 옳은 것인가도 물었다. 몇 년 전에 작고한 노르웨이의 환경 철학자 아르네 네스는 오늘의 세계 인구가 그 10분의 1 정도로 주는 것이 환경 친화적인 삶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질문은 그것을 마음에 두고 한 것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의 일부는 강연 원고에 나와 있다. 소비라고 하면 쉽게 연상하게 되는 것은 과잉 소비 또는 과시 소비와 같은 것 또는 적어도 낭비로 간주할 수 있는 물자의 소비이다. 그러나 실제 고 교수가 말하고 있는 소비는 사람들의 삶의 필요를 충당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삶의 필요란 생존을 넘어 교육 · 의료, 실직자나 노년의 사회 보장 등에 관계되는 필요를 포함한다.
다른 경제학자의 경우에도 그러하지만, 소비생활의 활성화를 말하는 데에는 경제의 움직임에 대한 과학적 이론 이외에 도덕적 관심이 들어 있다. 이론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사실관계에 못지않게 이론가의 도덕적 지향이다. 고 교수가 한국의 경제 상황에 있어서의 불평등을 논하면서, 세계적으로 높은 한국의 자살률 · 이혼율 · 저출산율 · 교통사고 사망률 등을 거론하는 것도 인간적인 삶의 조건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이 항목들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부정적 1위와 관련해, 그 배경으로 취약한 공동체적 유대감을 언급하는 것도 그것을 말한다. 경제적 불평등이 핵심 문제라고 하면, 이것을 시정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 법적인 조처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관료체제의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공직을 맡는 사람에게는 사회적 · 도덕적 질서를 지키려는 본능적인 도덕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여기에 전제된다. 그리하여 그러한 공적 도덕의식이 시장경제와의 길항 속에서 인간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하나의 축이 될 수 있다고 고 교수는 생각한다.
그러한 균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제 질서가 참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질서가 될 수 있을까. 고 교수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윤리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교수의 저서 덕의 상실의 한 주제가 경제적 효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윤리적 담론의 소멸이라는 것을 전한다. 매킨타이어 교수의 생각은 상당히 비관적이라고 하겠지만, 이에 대해 고 교수는 낙관적 비전을 갖는 것이 현실적 필요라고 말한다. 비관해 봐야 그것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비관도 현실 진단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의미 있는 직업’ 갖는 것이 가능한가
최근 미국의 한 인터넷 매체에는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마르크스주의 인류학 ·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의 회견기가 나와 있었다. 오늘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오늘의 문제로서 경제 성장도 이야기하지만, 그는 이에 더해 환경 문제 그리고 경제 문제 속에서 완전히 잊힌 인간 소외의 문제도 거론한다. 소외와 관련해 그는 사람들이 직업을 갖는 게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의미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마르크스는 공장 노동에서의 인간 소외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하비 교수는 그전에는 철강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그래도 그들의 노동에서 위엄과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서비스업의 직장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그러한 직업들이 철저하게 상업화된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 부재의 관료적 조직의 한 부분이 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업의 많은 부분이 추상화된 때문이다. 많은 일이 인공지능 · 로봇으로 대표하는 기술 변화로 인해, 물질의 실체성이 없는 작업이 된 것이다. 관료화되고 상업화된 일에는 지식과 문화의 작업도 포함된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도 두루 확인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만큼 지식과 문화가 양적으로 측정되는 생산품으로 또는 상업적 · 대중적 인기 품목으로 간주되는 곳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교육이 스펙 쌓기가 된 것도 그렇다. 얼마 전 젊은이가 골프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 사회적 진출에 도움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골프와 같은 스포츠마저도 그 자체로 즐기는 일이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토지와 공동체까지도 상품화
하비 교수는 지식이나 교육도 그러하지만, 토지와 공동체까지도 상품이 돼버린 것이 오늘날이라고 말한다. 생활의 환경으로 원시적 자연을 선호했던 미국의 시인 게리 스나이더는 “숲은 수확물이 되고/ 자연은 놀이터가 되고/ 대중은 돈이 되는 것/ 그것이 장사하는 사람의 자연관” 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세계에서 지구적 삶- “지구의 살림 (Earth Household)” 을 찾는 것은 허구의 순환 속을 맴도는 일이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낙관적으로 그의 자손들을 향해 “통계 숫자의 산이 한없이 높아 가고” 사람의 삶은 아래로 처지는 것이 오늘날이지만, 때가 되면, 다시 풀이 자라는 들녘이 나타날 것이고, 거기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늘 함께하며,/ 꽃을 배우고/ 짐을 가볍게 하라” 는 시구를 남기고자 한다.
경제와 사회가 한 번에 이러한 자족적 유대와 자연과 작은 소유로 되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것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짐을 가볍게 하라.” 검소한 삶은 소비를 줄이는 경제적 절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하는 물질을 제한해 그 진실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성장의 경제학, 평등의 경제학의 논의를 듣고 있다 보면 그에 더해 ‘지구살림’의 경제학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 중앙선데이 | 제415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5.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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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자유와 존중-파리 테러 그리고 ‘갑을’ 대결 |
민주주의도 극단화되면 근본주의 될 수 있다 |
⑭ 자유와 존중-파리 테러 그리고 ‘갑을’ 대결
지난 7일 있었던 프랑스의 풍자만화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편집 집필진 총격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국내외 언론에 충분히 많은 보도와 논평이 실렸다. 그러나 그 사건은 오늘의 세계 그리고 그것에 연결하여 우리의 사정을 살펴보는 데 되새겨볼 만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참혹한 테러 사건이 일어나서 아니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발표된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발표자가 살해되는 세상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일 수는 없다. 그 사건을 규탄하고 희생된 언론인에 공감을 표현하는 운동이 크게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11일 파리의 중심 광장들에서 있었던 집회와 행진은 이러한 비판과 공감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파리의 ‘라 플라스 드 라 레퓌블리크- 공화국광장’에 모인 사람의 수는 100만에서 150만에 달했고, 이는 프랑스 역사상 또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해방 기념 집회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집회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비슷한 집회가 열렸다. 그 참석자까지 합하면 군중의 수는 360만에 이른다고 한다. 베를린 · 런던 · 워싱턴 · 몬트리올 등 서방의 여러 도시에서도 항의 집회가 있었다. 이렇게 열린 군중대회는 테러 공격에 대한 규탄에 많은 사람이 생각을 같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는 조금 관점을 달리한다면 반테러 전선을 형성하여 하나가 된 서방 세계의 힘을 보여준다.
집회의 규모는 한때 유명했던 국제정치 개념인, ‘문명의 충돌’을 연상하게 하고 그것이 무력 충돌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을 준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물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페인 총리 등 서방의 주요 국가 지도자들이 이번 집회에 참여한 것도 이러한 느낌을 강화한다. 물론 집회에 참석한 정부 대표가 모두 서방에서 온 것은 아니다. 이들과 함께 행진에 앞장 선 정치 지도자에는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팔레스타인의 마흐무드 압바스 자치정부 수반,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서방 세계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도 이들은 이번 사건과의 관계에서 서방과 이해를 일치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부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군중대회에, 그것도 국경을 넘어 참여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목소리를 높여 그들의 요구를 내거는 대중 시위는 정치 표현의 관행이 되어 있지만 정권을 담당하고 있는 정치 지도자가 그러한 방법으로 입장을 밝히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군중의 요구에 응답하는 경우도 정치 지도자의 임무는 그 인과관계를 규명하고 현실적 실천 방안을 밝히는 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 테러 규탄 집회, 양자택일을 강요
이번 파리 모임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빠졌다. 미국 그리고 유럽 현지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불참에 대해 비난하는 여론이 일자 백악관 대변인은 대통령의 행차를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이유라고 설명하였다. 집회에는 대통령 대신 주프랑스 미 대사가 참석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보다 복잡한 입장이 여기에 관계되어 있을 수도 있다. 뉴욕타임스의 파리 특파원은 마호메트 만평을 비롯, 이슬람의 성스러운 가치들에 상처를 입히려 한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를 “사려가 없고, 천박하고, 상업적 동기에서 나온 것” 이라고 평했다.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미국 특파원 패트릭 바너스는 이러한 평이야말로 사려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1월 11일자). 동시에 그는 미국의 주요 신문의 정책이나 문화적 배경을 설명한다. 풍자와 비판의 자유는 미국에서도 중요한 전통이 되어 있지만 이 특파원이 보기로는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들은 이 점에서 철저하지 못하다. 이들은 ‘의도적이거나 아니거나, 종교 집단을 욕되게 하거나’ ‘종교적 심성을 상하게 하는’ 보도를 피하려 한다. 이것은 전통과 역사적 체험이 다른 데서 관계된다.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의 전통을 계승한 나라로서 종교의 정치 개입을 철저하게 배제하려 하고, 미국은 정교분리 원칙을 내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교도주의의 영향하에 있다. 이번 파리 공화국광장의 집회에서 표현된 것은 테러리즘에 대한 분노,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의 감정이면서 동시에 ‘자유 · 평등 · 우애’ 등의 민주주의 이념 수호의 의지다. 그중에 표현의 자유가 가장 앞세워진 것은 물론이다. 미국에 비교할 때 프랑스의 민주주의 이념은 철저히 반종교적 또는 세속주의적이다. 언론의 자유는 종교에 대한 배려를 포함할 수 없다. 역사적 업적으로 간주되는 이념들은 프랑스의 민족적 정체성을 정의한다. 거죽으로 표현되지는 아니하면서도 이번 집회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프랑스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이렇게 정의된 정체성에 기초한 민족주의적 열정이다.
그러나 이념과 단합이 현실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피에르 이브 보도와 니콜라 위브 정치학 교수의 일간 리베라시옹에 실린 기고문에 따르면(1월 12일자) 글의 제목대로 단일한 통합이 정치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번의 집회는 많은 정치 이슈에 대한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한다. 집회의 구심점이 된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는 모두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는 샤를리다’ 또는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고, 그에 따라 ‘감정/정치, 국민 단합/정당 투쟁, 솔직/회유, 표현의 자유/몽매, 문명/야만, 선/악’ 중 하나를 선택하여 적과 우군으로 갈라서야 한다. 그러나 정치의 본령은 두 교수의 생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 안에 정치 표현의 다양한 방식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파리 집회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자는 집회다. 그것은 다양한 견해를 허용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 점에서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번의 집회와 관련하여 자주 등장하는 구호 하나는 ‘톨레랑스(관용)’다. 표현의 자유는 상충하는 견해를 너그럽게 볼 것을 요구한다. 마호메트를 희화하는 것도 관대하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관용은 다른 사람이나 집단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믿음과 가치 그리고 그 바탕에 있는 종교적 심성을 고려하는 것인가?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하는 중국 신화사(新華社)의 논평에 따르면(1월 12일자·중국실시보) 샤를리 에브도의 마호메트 풍자는 조잡하고 무자비하다. 필요한 것은 “타자의 종교와 신앙에 대한 보다 큰 존중”이다. “지난 몇 해의 끊이지 않는 전 지구적 갈등은 관용과, 이해와 상호 존중이 부족한 데 기인한다.” (중국은 왕이 외교부장을 파리 집회에 파견하였고 외교부 대변인을 통하여 신회사의 논평은 신화사의 견해일 뿐이라는 것을 밝혔다.)
신화사의 주장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중국 정부는 신장위구르의 이슬람과 끊임없는 긴장 관계에 있다. 최근에도 무슬림(이슬람교 신자)이 사살된 일이 있고, 중국 정부는 무슬림에게 얼굴을 가리는 베일과 긴 수염을 금지한 바 있다. 그리고 또 위의 신화사의 주장은 타자에 대한 존중은 언론 자유의 제한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의 모순이 없는 정치 주장을 찾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현실은 하나의 원리로 단순화되지 않는다. 위에 말한 프랑스 정치학 교수들은 파리 집회에 참석한 정부 수뇌들 가운데 권위주의 정부의 수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번 테러범들의 범행이 불우한 사회적 환경에 관계된다는 것을 밝히는 보도도 적지 않다. 범인들은 알제리계 프랑스인으로 사회적·경제적 차별 속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어렵게 보냈던 사람들이다.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1월 15일자) 그들의 배경이 되는 소수민족의 실업률과 청년실업률은 각각 20%와 46%가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이데올로기는 쉽게 불우의식으로부터의 탈출구가 된다.
갑을 갈등은 세속적 가치 절대화의 현상
모순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신화사 논평에 언급된 상호 존중이라는 말은 중요한 정치 개념이고 인간 이해의 개념이다. 이번의 파리 집회에는 ‘자유·평등·우애’라는 구호가 나온다. 이러한 구호를 다시 내거는 데는 오늘의 집회가 계몽주의 이성의 원리의 정치적 실천,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이어지는 정치 실천의 계속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 관점에서 그것은 일체의 권위주의, 또 표면적 명분이 되는 종교를 비롯한 정신적 가치에 대한 투쟁을 요구한다. 개인의 존엄성은 계몽 합리주의의 계획에도 포함되지만 거기에서 개인이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 그리고 집단이 받드는 정신적 가치의 존엄성에 대한 고려는 쉽게 묵살된다. 그것이 목표하는 것은 삶의 철저한 세속화다. 여기에 대하여 ‘상호 존중’은 자유의 이념에서 주장되는 단자화(單子化)된 개인을 넘어 개인 간의 규범적 거리를 고려하면서 상호성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집단주의의 획일화된 개인은 더욱 상호 존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중요한 것은 예의였다. 예의는 상호 존중의 외면적 표현이다. 예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행동 양식이고 사회 매체다. 그 기초에는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들어 있다. 물론 예의는 이러한 기초에서 분리되어 공허한 상투어와 관행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상적으로 말하여 상호 존중은 그러한 이해와 표현에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베크의 이슬람교 주제의 소설 『복종』은 그 출판이 이번 테러 사건과 겹쳐 말썽이 되었다. 소설의 취지를 하나로 말하기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서평에 의하면 소설의 한 주제는 이제 계몽주의적 세속 시대가 끝나고 종교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거기에는 정신성도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라는 관찰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 존재의 정신적 측면에 대한 고려가 없게 된 민주주의가 모든 인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도 극단화되면 다른 이념들처럼 근본주의가 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많이 이야기되는 소위 갑을 관계에서 생겨나는 갈등은 바로 정신적 규범이 사라지고 세속 가치의 지배가 절대화된 시대의 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거기서 인간관계는 개인 의지와 개인 의지의 대결이 되고 궁극적으로 억압과 굴종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문제는 다른 자리를 빌려 더 길게 논의하여야 할 사항이다.
- 중앙선데이 | 제411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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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제의 해결은 경제 안정을 위한 필수적 방법 |
⑬ 큰 문제, 작은 해결책들
그 크기를 정확히 저울질할 수는 없지만 큰 사건들이란 인상을 주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보도되고, 그러한 사건들은 삶의 환경 전체에 불안감을 증대시킨다. 최근의 ‘땅콩 회항사건’, ‘청와대 문건 유출사건’,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 등이 그러한 사건들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사회문화, 정부의 기강, 체제의 건강에 대한 불안을 증대시키는 증후로 우리 마음에 작용한다.
물론 큰일이 없는 안정된 사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없이 많은 사람이 살고 한없이 많은 요인이 얽혀 있는 사회에는 늘 사건이 있고, 변화가 있어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일어나는 사건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보도매체의 발달로 사건 보도가 많아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사회 변화-그것도 여러 복합적 요인이 얽혀 드는 사회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긴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 사회 상태에 대한 불안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사건들을 증후적인 일로 받아들이면서 사회 전체의 상태를 진단하는 것은 사람들의 사회 인식의 관습이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생활의 범위-말하자면 동네와 같은 범위를 넘어 보다 큰 테두리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 왔다. 바로 나라나 국가는 이러한 테두리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테두리를 이룬다. 이상향 또는 유토피아에 대한 꿈은 이 테두리 전체를 이상화해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회 전체가 문제가 있다고 느껴질 때 더욱 강력한 이상이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의 이상이 현실 역사의 과정으로 실현된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이와 비슷하게 자본주의적 근대화론-가령 월트 로스토의 『경제발전의 단계』와 같은 것은, 그 부제 ‘반공산주의 선언’이 말하고 있듯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해 풍요사회의 도래가 역사의 현실일 수 있다는 것을 이론화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말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은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정연한 계획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줬다. 그런가 하면 자본주의적 발전이 드러내는 여러 사회적 · 인간적 · 경제적 모순은 자본주의의 풍요도 쉽게 인간적 풍요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혁명론을 촉발한 원인은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에 있다. 그리고 이 모순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유민주주의 관점에서도 이 모순은 해결을 요구한다. 현실 사회주의 실패가 보여 준 것은 그 해결이 하나의 정연한 계획에 의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현실 진단 전부가 타당성을 잃었다고만은 할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작은’ 사건들이 사회 그 자체를 넘어가는 불안감을 가지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사회의 전체적 기반이 불안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파시즘 · 전통 사회주의가 대안 될 수 있을까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리처드 D 울프가 최근 한 인터넷 논단에 발표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분석은 현대 경제의 문제점을 전체적으로-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간 문제와 관련해, 보다 넓게 살펴보는 데 일단의 도움을 준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전체 체제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가 생각하는 것이 혁명론이 아니라 부분적 수정의 방안이라는 점이다. 그가 지적하는바 성과와 함께 문제-근본을 흔드는 커다란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 현대 경제라는 점은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큰 인간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이 또 다른 문제를 배태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는지 모른다.) 자본주의 경제가 가져오는 문제-주로 사회적 · 인간적 문제가 커지기 시작하면 거기에 대한 극단적인 정치 계획이 등장한다. 그러한 대안적 체제 혁명을 구상하는 것이 파시즘이나 ‘전통적’ 사회주의이다. 그것은 시장의 경제 체제를 국가가 통제하는 체제로 바꾸고자 한다. 파시즘은 국가가 자본가와 합작해, 그리고 전통적 사회주의 체제는 국가 관료조직을 통해 생산 · 분배 · 소비 등의 문제에 새로운 해결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전체주의적 계획은 이미 과거에 실패로 끝났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다시 발호하고 있는 증후들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울프 교수는 생각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 있어서도 이러한 경향들이 대두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원천적 문제-그러면서 주기적으로 악화되는 문제로 인한 것이다. 문제들에 대해 자본주의는 그 나름의 자기 수정책을 가지고 있다. 세금 누진제, 최저임금제, 독점 규제, 관세 등을 통해 시장과 분배를 조정하려는 정책들이 그러한 시정책의 일부다. 서구식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체제는 이러한 보완책을 조금 더 강화한 것이다. 그것은 생산수단의 소유나 자원과 생산품 분배 등의 기능을 대체로 시장에 맡기면서 정부의 사회정책을 강화해 시장 기능을 조정하고, 재정통화정책으로 경기 순환의 문제를 완화하려 한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러한 수정책들이 별로 성공하지 못했기에 유럽과 미국에 다시 파시즘과 ‘전통’ 사회주의가 대안으로 대두되고 있다는 것이 울프 교수의 판단이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자본주의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정파 갈등, 정당정치의 부패 등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그의 생각으로는 기업이 생산활동을 아시아 · 남아메리카 · 아프리카 등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된 데 있다. 그에 따라 기업과 금융의 이익은 극대화됐지만 고용, 사회복지 혜택, 직업 안정성, 임금 등은 전혀 향상되지 못했다.
울프 교수가 제안하는 대안은 기업 체제, 그리고 거주 공동체의 적극적인 민주화다. 그는 보다 작은 기업들의 조직화에 기초해서만 대기업이 성립돼야 한다고 본다. ‘노동자가 자결권을 행사하는 소기업’들이 산출하는 부(富)가 정부의 기초가 돼야 한다.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결정들은 이러한 소기업과 민주적인 공동체와 상호 협조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것은 생산 · 기술 · 잉여이익 · 투자 등에 관한 결정들을 포함한다. 울프의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는 생산시설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민주적 결정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개발도상국으로 생산지가 이동하는 것을 방지해 노동소득의 배당률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과 사회의 새로운 체제에 대한 울프 교수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것을 평가하는 데 가장 큰 난점은 그의 제안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진 경제 지역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선진 지역의 자기 방어적인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울프 교수의 제안의 의의는 기존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해결하지 않고는 지속될 수 없는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고용문제에 둔감한 정부 경제혁신 정책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그의 제안이 부분적인 시정책이고, 열려 있는 공론의 광장에서 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비슷하게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생각들은 다른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우리 정부는 경제 혁신을 위한 새로운 정책들을 발표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고용 문제는 그렇게 주목 받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여기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워싱턴 소재 경제정책연구센터 창시자의 한 사람인 딘 베이커 교수의 고용정책에 관한 제안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장하준 교수도 이 연구소에 관계하고 있다.)
그는 한 인터넷 논단에서 미국이 실업자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고용을 현실화하고자 한다면 독일의 예를 참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제안의 핵심은 노동 분담의 개념이다. 즉 같은 일을 두고 그것을 많은 사람이 나눠 가질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있는 직장에서의 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가능하다. 간단히 생각하면, 이것은 노동자 임금의 감봉을 의미하거나 기업의 임금 지출 부담 가중화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노동시간의 단축으로 노동자가 잃게 되는 임금 손실을 정부로 하여금 보상하게 하자는 기획이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부담은 어떻게 처리되는가? 고용이 줄지 않고 불어나면, 정부의 실업자 수당 지급이 줄어든다. 이뿐만 아니라 고용 증대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더 많은 세입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노동 분담을 통한 완전고용정책은 어느 쪽에도 부담을 늘리지 않는다. 이런 제도하에서 독일의 노동자들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가족 휴가, 병가, 몇 주일의 휴가를 즐길 수 있다.
독일의 현재 상황은 베이커 교수의 제안을 그대로 뒷받침한다. 여러 연구기관의 통계를 인용하고 있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21세기 들어 가장 낮은 경제지표를 기록한 2005년을 벗어나 현재 독일은 최고의 고용률을 누리고 있다. 그에 따라 늘어난 세수가 340억 유로다. 동시에 피고용자의 사회보장기금 기여액도 크게 늘어 150억 유로 정도가 됐다. 실업수당 · 주택보조금 등의 사회보장 지출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정년 후의 연금이나 건강보험 기여는 어느 때보다 튼튼한 기반 위에 서 있게 됐다. 위에 든 숫자들의 의미를 여기에서 정확히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정부의 세입이 늘어나고 사회보장 지출이 준 것은 틀림없다. 그러면서 베이커 교수가 말하는 바와 같이, 독일인들은 안정된 직업과 여가를 즐기게 됐다고 할 수 있다.
베이커 교수의 보고에 의하면 이미 많은 나라가 이러한 정책을 취하고 있고, 미국에서도 그러한 정책을 채택한 주들이 있다고 한다. 비슷한 사회경제정책들로서 이와 다른 여러 가지 예를 들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스위스에서 한 사람에게 매월 2600달러를 지급하는 방안을 내년에 국민투표에 부친다고 한다는 뉴스만 언급해 본다.
이러한 제안이나 사실들이 말해 주는 것은 사회 문제 해결이 경제 안정을 위한 필수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시점에서 정녕코 이념이나 정파를 초월한 시대의 과제가 아닌가 한다. 그러한 과제가 풀리면, 문화의 문제나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도 보다 쉬운 일이 될 것이다.
- 중앙선데이 | 제407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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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의 올가미’에 갇혀 이상적 가치 도달 못한 고르비 |
⑫ 정치 현실과 이상
지난 8일 독일 베를린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을 기념하는 강연회가 열렸다. 행사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등이 참석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독일의 통일과 공산주의 블록의 와해 과정에서 커다란 고비가 된 사건이었다. 이러한 세계사적 전환의 핵심에 서 있던 사람이 고르바초프였다. 이 행사에서 그의 연설은 당시 자신의 심정과 오늘의 세계정세에 대한 진단을 살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것은 우리에게 정치 행위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한다.
위에 말한 두 개의 사건, 베를린 장벽 붕괴나 공산 블록의 와해는 여러 가지 일이 누적됨에 따라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연설에서 독일 통일의 경과를 말하면서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역사적 전환도 나중에 보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예정됐던 일로 보일 수 있다” 며 자신을 비롯한 소련 지도부의 결정이 일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무력 충돌과 유혈을 동반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상황에 대한 “현실적이고 책임 있는 판단” 과 “결정” 이 있었던 것이다.
“독일 통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
전환의 기초가 된 것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였다. 고르바초프와 소련 지도부는 이 정책 지침의 연장으로, 공산권 여러 나라의 내부 문제에 대한 소련의 간여를 정당화하는 브레즈네프 선언을 파기하고 독자적인 결정과 책임을 인정했고 나아가 독일 통일의 문제에서도 독일 국민의 자결권(自決權) 행사를 받아들였다. 독일 통일 협의에서 더 많은 유보를 가졌던 것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나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었고 자기는 더 적극적이었다고 고르바초프는 말한다.
물론 새로운 체제의 성립을 구상함에 있어 그가 서방 세력의 일방적 팽창을 허용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생각은 러시아의 안보를 고려하는 새로운 체제가 중부 유럽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통일 독일의 군사력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주둔군의 감축, 그리고 적절한 기간의 소련군의 독일 주둔 등을 요구했고 궁극적으로는 중부 유럽이 비군사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럽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외교적 조정과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적어도 연설문에서 말한 바로는 유럽이 “탄탄한 상호 보완적 안보체제가 되고… 세계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도적 역할을 맡게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현실이 되지 못했고 지금 서방과 러시아의 관계는 다시 새로운 냉전에 들어가기 직전에 와 있다고 그는 진단한다. 그 원인은 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당초의 약속-호혜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있다고 한다. 공산주의 국가 블록의 해체 이후에 서방은 러시아의 약화로 대항 세력이 없어지게 됐다. 그에 따라 서방 국가들은 일방적인 승리를 선언하고 모든 일에서 자기들의 일방적인 의지를 강제하려는 자세를 취하게 됐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코소보 전쟁, 미사일 확대 배치, 이라크 · 리비아 · 시리아의 무력 분쟁 문제 등이 이러한 ‘일방적 의지를 강요’하려는 서방의 자세에서 연유한다고 말한다.
악화되는 유럽의 안보 정세를 바로잡는 데 필요한 것은 다시 “정치적 의지를 굳히고 사안의 완급(緩急)을 분명히 파악해” 협의 체제를 회복하는 일이다. 냉전이 끝난 다음에 원래 기대했던 호혜적 관계 중단의 결과로 유럽은 그가 희망했던 바와 달리 “지구 전체의 변화를 위한 세계적 선도 체제가 되지 못하고 정치 분규, 영향력 경쟁 그리고 군사적 분쟁 지역”이 되었다. 이렇게 가면 유럽은 다른 세력과 영향력의 중심들이 부상하는 시점에서 세계적 상황에 발언권이 없는 힘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유럽에 중요한 것은 호혜적 협동 관계를 회복해 그 존재를 분명히 하는 것” 이라고 그는 말한다.
힘의 대결은 목적 달성 위한 수단
위에 간추려본 것은 인터넷에 실린 고르바초프의 연설 내용이다. 그 내용 자체를 소개하거나 따져보려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들어 있는 정치 행위의 특징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정치는 좋든 나쁘든 권력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서로 대결하는 세력이 있을 때 정치 행위의 중심은 힘을 겨루는 일에 놓인다. 이 대결 관계가 국제적인 것일 때, 특히 힘의 대결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힘의 균형’이 그것을 완화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는 명분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 관점에서는 힘의 대결은 결국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다.(물론 정치 투쟁이 단순한 권력 투쟁이 되는 것은 너무나 많이 보는 일이다. 그러한 경우 명분은 선전의 수단이 된다.) 정치 목적의 하나로서의 독립 또는 발전은 집단 동원을 정당화한다.
정의는 정치에서 또 하나의 목적 또는 목표다. 정의는 반드시 힘을 가진 것이 아닌 추상적인 이념이다. 그리하여 정치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려면, 그것은 정의로울 수만 없는 힘의 관계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모순은 인도주의적이고 보편적인 윤리의 실현이 그 목표가 될 때 더욱 두드러진다. 정의는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분격하는 마음에 관계돼 있다. 그러나 자비나 인자함 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부드러운 마음에 관계돼 있다. 힘 없는 것- 또는 도덕과 윤리도 길게 볼 때 힘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달리 말해 그것을 약력(弱力)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힘에 연결하는 것은 쉬운 일일 수 없다. 그런 경우 그것은 자기모순에 떨어지는 것이 된다. 정치를 통해 정의 또는 보편적 인간 윤리를 구현하는 것은 심히 어렵거나 복잡한 일일 수밖에 없다.
고르바초프의 연설을 접하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정치 행위에 들어 있는 모순된 계기들이다. 냉전의 종식은 인류를 전쟁과 분쟁과 적대적 긴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이것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수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물론 공산권의 해체와 냉전의 종식은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단에 관계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가 독일의 통일에 찬성하고 냉전의 종식에 동조한 것은 불가피한 사실을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이러한 정치 결단은 패배를 인정하고 영토와 국익의 패권(覇權)을 내어 놓는 일로 간주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조국의 이익을 배반한다는 혐의가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열려 있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결단을 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었을 수 없다.
냉전종식을 평화적으로 이끈 고르비
물론 고르바초프의 경우에도 힘의 논리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냉전이 끝나면서 유연한 협의 관계가 성립하지 못한 것이 나토 회원국만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또 엄청난 살해와 방화(放火) 행위 그리고 여러 고통을 가져온 코소보 전쟁, 핵무기가 폐기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방어적 미사일 배치, 또는 아랍권의 여러 분규 등을 서방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있는 것인가. 또는 유럽이 새로이 부상하는 “다른 세력과 영향력의 중심들”에-여기에는 동아시아가 포함될 것이다- 맞설 수 있는 중심으로 결속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희망은 참으로 인류의 보편적 관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지적하는 것은 소련과 러시아의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 인류의 보편적 스승이 될 것을 그에게서 기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비친 바와 같이 정치 행동의 장(場)을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정치행위의 어려움을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다. 그가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패권을 포기하면서 그 빈자리에 서방 세력이 밀려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국제정치의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그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그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악마의 올가미’ 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정의와 보편적 인간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가를 더 심각하게 연구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악마의 올가미’는 정치는 ‘악마와의 협약’ 을 요구한다는 막스 베버의 관찰을 고쳐본 것이다.) 그런데 정치가 정의와 인간적 가치 실현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현실과 이상 조화시키기엔 난관 많아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 정치를 통하지 않고 어디에서 그 수단을 찾을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 대한 간단한 답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답을 시도해본다면 그것은 언제나 현실 속에서 움직이면서 그때그때의 문제에 대해 현실적 해결 방식을 찾고자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정치를 저울질하는 것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서 비추고 있는 보편적 가치의 별이다. 현실과 보편적 이상이 결국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 참으로 의미 있는 정치다. 그리고 역사 속에 빛나는 정치 지도자는 현실과 이상의 합일을 위해 순교자가 되는 것도 사양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되풀이하건대 현실 상황, 현실 문제에 대한 일단의 해결, 그리고 멀리 있는 인간의 이상, 이 셋 사이에 연결을 놓고자 진력하는 것이 진정한 정치의 의미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할 때 고르바초프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낸 정치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가장 넓고 높은 보편적 인간 가치의 이상에 연결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의 발상의 틀이 단순한 현실 정치의 논리를 넘어 가면서도 동시에 그 논리의 올가미를 충분히-현실과 이상 양면으로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 오늘의 총체적 상황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 중앙선데이 | 제403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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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의 큰 문제 푸는 건 작은 결정과 실천의 ‘부분 공학’ |
⑪ 정체된 정치 상황을 바라보며
얼마 전 새누리당의 김태호 최고위원이 “국회가 밥만 축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고 뉘우치는 차원에서” 최고위원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면서 당과 국회가 경제활성화를 위한 법안들을 심의하지 않고 개헌론과 같은 정치 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비판했다.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들이 있지만, 발언 내용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정치인들이 “밥만 축내고 있다”는 것은 요즘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느낌일 것이다. 전에 쓴 한 칼럼에서 정치가의 대부분을 종신형에 처한다면 환영할 사람이 많을 것 이라는 미국의 풍자가 앤디 보로위츠의 말을 언급한 일이 있지만, 정치에 대한 혐오감 또는 적어도 권태감은 세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미래 전망이 대안 없는 하나의 이념으로 수축된 데에 관계된다). 이러한 느낌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특히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개헌 논의도 그러한 상황을 시정해 보자는 시도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를 활성화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
사회가 전기 맞으면 큰 지도자 출현
많은 경우 정치가 중심에 놓이게 되는 것은 그럴 만한 상황으로 인한 것이다. 위대한 정치지도자가 나타나는 것도 반드시 그의 개인적인 능력으로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어떤 전기(轉機)에 이를 때 큰 차원에서의 정치 행동이 필요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큰 정치 지도자가 출현한다. 그것도 갑자기 지도적 인물이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 상황에 대한 대응 과정이 그러한 지도자를 단련하여 출현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침체된 정치는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는, 상황 자체가 정태 또는 안정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정치가 굼뜨게 되는 데에는 다른 원인들이 있을 수 있다. 강력한 정치 행동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대응할 수 있는 정치력을 조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가 정체에 빠질 수 있다. 분명하게 정치를 자극하는 상황은 외침의 위협이다. 그리하여 정치 이론가들은 국가 또는 다른 정치 집단의 결속과 단합을 강화하고 그 존재를 활성화하는 것은 적(敵)의 존재 그리고 전쟁이라고 한다. 적(敵)은 현실로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상상되고 조작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근대적 경제 발전 또는 체제 변혁의 필요도 정치력의 동원을 추구한다.
요즘 정치의 무기력은 어떻게 설명되는 것일까. 사태의 큰 테두리-가령 지구환경의 문제 또는 통일이나 동아시아의 평화 문제에 잠재적 위기의 요인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테두리를 너무 크게 잡지 않는다면 나라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태평성대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 더러 주장되는 바와 같이, 민주제도의 내실화와 공고화가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의 중요한 역사적 과제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경제의 활성화가 절실하다는 것도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명제일 것이다.
경제는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된다. 한 관점은 경제 전체가 장기적인 침체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걱정하는 시각이다. 이 문제에 대한 간단한 해결책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경제 상황은 큰 조건들-경제발전의 단계, 그것과 다른 여러 나라 경제와의 다면적인 관계, 또 2008년의 금융위기 이후 되풀이해 이야기되고 있는 구미와 일본의 선진경제에 대한 비관적 전망 등이 얽혀 있다. 이것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경제를 보는 다른 하나의 관점은 재화와 소득의 분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1980년대 말부터 오늘날까지 스스로를 중산 계급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는 인구가 75%에서 20% 정도로 줄었다는 보고가 있다. 분배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위에 말한 두 가지의 관점에서 나오는 문제의식이 완전히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 활성화는 어느 쪽에서 접근하든 문제의 해결에 다 같이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다만 환경론자의 입장에선 경제의 활성화는 해답이 아닐 수 있다).
경제정책은 전문적 지식 아니면 적어도 심도 있는 연구와 고려, 그리고 선택을 요구한다. 최종의 정책 결단은 다수 국민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그 정책의 세부 사항은 쉽게 정치적 정열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분배의 문제는 조금 더 정치적 정열에 직결된다. 그러나 그것도 그 구체적인 방안에 있어선 감정을 넘어 심도 있는 경제학적 또는 정치경제학적 고려를 필요로 한다.
개혁 대상에 문제 있을 땐 해결 더 어려워
체제 전체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문제는 사실적 고려에 입각한 작은 결정과 실천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정치 상황의 어려움은 작은 일들로서 큰일을 해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작은 일로 큰일을 해내는 것은, 큰일을 하는 것 또는 저지르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정치의 변화를 생각할 때, 개혁보다는 혁명이 보다 쉽게 의제가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개혁의 경우, 그 대상이 모순을 가지고 있을 때 문제의 해결은 더욱 어려운 것이 된다. 지난달의 칼럼에서 장하성 교수의 저서 『한국 자본주의』를 언급하면서 나는 장 교수가 제시하는 과제를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를 지향하되,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세밀한 수단과 방법”으로써 이뤄내야 한다고 요약한 바 있다. 그것은 작은 일들로써 큰일을 이뤄 내야 한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이 크고 작은 것의 불균형에 더하여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라는 목표는 그 자체로 모순과 긴장을 내장한 목표다. 그리하여 문제의 해결은 극히 조심스러운 균형 속에서만 근접될 수 있다. 많은 이론가가 자본주의와 정의가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섬세한 ‘부분 공학’이 필요한 것이다. 이 공학은 물론 사회공학이고 정치공학이다.
이 공학이 요구하는 정치 개입은 시장의 자유를 핵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어기는 일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려 하지 않는 문제로서-정치적 개입은, 그것이 강압적인 것이 되는 경우, 시장경제가 내포하고 있던 정치 이상 하나를 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 그 이상은 인간의 권리로서의 자유의 실천이다. 시장의 자유도 이념적 차원에서만 본다면, 이 자유의 일부다.
그런데 자유의 이상은 이미 모순의 조화를 가설로서 전제한다. 전제란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적 질서에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의 경우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의 자유 속에 작용하는 질서 창출의 매개자를 지칭한다. 지금의 시점에서 이 매개자는 시장에 있어서나, 다른 사회 제도에 있어서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보이는 정치적 개입이어야 한다. 분명하게 보인다고 하는 것은 개입이 정치권력의 자의적인 결정이 아니라 납득할 만한, 그리고 법과 제도로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납득한다는 것은 이성의 관점에서 그 필요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성적 또는 합리적 손익 계산은 공유하는 사회질서를 위하여 내 자유의 축소를 받아들이게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이성적 고려는 손익 계산에 입각한 타협이 아니라, 공정성의 원리에 따라 이뤄지는 것일 수 있다. 지난달 칼럼에서 이름을 비추었던 존 롤스가 『정의의 원리』에서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이성적 반성에서 나오는 공정성의 원리다. 이 원리는 나를 넘어가는 사회 세계의 객관적 원리이지만, 동시에 높은 차원으로 지양된 자아의 중심이다.
큰 것도 보이지 않으면 마음 벗어나
공정성의 원리는, 다시 말하면 이성의 원리다.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세밀한 수단과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이성의 기능이다. 그리고 이때 세밀한 것들에 대한 고려는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진다. 여러 작은 고려 속에서 큰 이성은 뒷전에 유보되어 존재한다. 그러나 뒤에 유보되어 보이지 않는 큰 것은 사람의 눈 그리고 마음을 벗어나기 쉽다.
전체성은 사람의 열정을 유발한다. 이성도 전체를 거머쥐는 것으로 느껴지는 까닭에 정열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의 원리가 되려면 구체적 현실 속에서 변주될 수 있어야 한다. 고야의 그림 중에 ‘이성의 잠은 괴물들을 태어나게 한다’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그림에는 잠자는 사람이 있고 그 머리 위로 괴물들이 날고 있다. 제목으로 보아 그림에 대한 제일 간단한 해석은 이성이 잠들면 괴물들이 풀려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이 꾸는 꿈이 괴물들을 만들어낸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성의 정열은 혁명을 낳을 수 있다. 그러면서 이성의 혁명적 정열이 어떻게 구체적 현실의 이성이 되는가 하는 것은 숙제로 남는다. 그렇게 변주되는 경우, 그것은 이성의 정열을 식게 한다.
전체성은 정열을 촉발한다. 이성은 그 전체성의 주장으로 하여 정열에 이어진다. 그러면서 전체성은 이성을 넘어간다. 전체라는 것이 참으로 삶과 세계의 모든 것이라면, 그것이 어찌 현실 이성의 한 영역에 한정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초월적인 세계를 암시한다. 그러면서 또한 전체란 우리가 직접적으로 느끼는 어떤 것이다. 촛불집회와 같은 대중 집회는 반드시 합리적인 근거로 환원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집단 현장(現場)은 집단 전체와의 일체감을 현실화한다. 그것은 정열의 폭발이 될 수도 있고, 심미적으로 승화된 것일 수도 있다. 집단 행위에 추구되는 일체성의 체험을 심미적 형식으로 승화한 것이 의례나 축제다. 무리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도 전체성을 향한 근원적인 일체감의 요구에 이어진다. 이러한 요구는 이해의 합리적 계산이나 공정성- 결국은 개체들 간의 물질적 · 정신적 재화의 균등 분배를 말하는 공정성을 넘어 개체를 전체성에 열어 놓는다. 그것은 정신세계로 열리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와의 일체감이 세속 세계에서 심미적으로 승화되었을 때 우리는 문화의 개화(開花)를 본다. 이성은 이러한, 보다 넓은 문화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정신과 감각적 아름다움을 정제(整齊)된 문화로 통합하는 중재자이고 그 중심이다. 이때 이성은 차가운 손익 계산의 수단이면서 그것을 넘어가는 정신적 영감, 그리고 부드러운 삶의 원리다. 그리고 현실 문제 해결의 세밀하고 섬세한 수단이 된다. 우리는 정열, 이성의 정열, 그것이 굳어진 이데올로기를 안다. 그러나 세밀하고 섬세한 삶의 원리로서의 이성에 익숙하지 않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정체감(停滯感), 그러면서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사회의 어지러운 움직임은 이러한 총체적인 문화 진화의 과정을 생각하게 한다.
- 중앙선데이 | 제399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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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 자본주의 ‘불안한 결합’이 세계 무질서의 한 원인 |
⑩ 신세계질서의 버팀목
하버드대 정치학대학원 마이클 이그나티예프 교수의 ‘신세계 무질서’라는 글이 근착의 미국 서평지에 실려 있다. 이 글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장 충돌 사태들을 언급하면서 안정된 것으로 보였던 국제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언급된 사태는 러시아의 크림 반도 점령, 우크라이나 내란 개입, 중동 지방의 내란과 분규, 이슬람국가(IS)의 등장 등이다. 그의 말로는 테러 집단으로서 IS처럼 탱크와 유전(油田), 영토를 차지하고 전대미문의 포학 행위를 선전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춘 경우는 일찍이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미국·영국·프랑스의 민간인 도살 영상은 정치적으로 정당화되는 잔인 행위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의 세계 무질서론에서 초점이 되는 것은 러시아와 유럽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관계에서 긴장이 고조된 것이다. 세계의 무질서화에 대한 그의 진단은 주로 미국의 관점에서, 또는 그가 캐나다인이면서 유럽에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방 세계의 패권적 위치를 대표한다고 할 수도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그의 표현을 따르면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다. 이 체제가 서방의 보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결하게 된 것이 결국 세계 질서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감 날로 커져
그러나 오늘의 세계 질서의 불안한 상태는 다른 나라의 관점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그나티예프 교수의 글이 나온 이후에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주로 공습을 통해서지만, 시리아와 이라크의 국경에 자리하고 있는 IS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지난 6~7월 시작됐다가 9월 말에 격화되어 계속되는 홍콩의 데모도 세계가 조용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다 아랍 세계의 계속되는 불안정,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잔디 깎기’식 무차별 공격, 그리고 사람의 잘못은 아니지만 에볼라 발생, 온타케산 폭발 등 끊임없는 병란과 재앙의 뉴스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안정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잊을 수 없게 한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사회, 정치 질서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세월호 사건도 그러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정부나 국회는 나라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역사의 시간 속을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그나티예프 교수는 세계 질서의 불안을 말하면서 미국의 정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가령 의회와 행정부의 한 세대에 걸친 불통(不通) 상태, 현실에서 동떨어진 정치 논쟁의 양극화, 금력과 정치의 유착, 빈부 격차의 심화 이러한 일들 때문에 공적 자산의 공유가 약화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감이 날로 커져 가게 됐다는 것 등이 이야기된다.
미국의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 정치가 드러내는 문제들과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유사성은 세계화 속에서 모든 나라가 보이지 않는 하나의 정세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점은 보다 깊이 연구해봐야 할 과제라고 하겠지만, 적어도 하나의 원인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에 들어 있는 불안 요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결합은 해체되든지 아니면 끊임없는 조정과 시정의 노력으로써 유지돼야 하는 필요한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후발 민주화의 나라인 한국과 같은 곳에서 특히 그러하다. 성숙한 국가를 아무 데로도 가지 않고 제자리에 떠 있는 배에 비유한 정치학자가 있지만, 오늘날의 한국을 그러한 비유로 말할 수는 없다. 사회 제도들이 완전히 정착됐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한국에서 처리되지 않는 국정의 당면 과제들이 선진국에서보다 더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뿐만 아니라 일 처리에 추가해 국민이 원하는 것은 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최근에 출간된 장하성 고려대 교수의 저서 『한국 자본주의』는 이러한 후발 민주주의,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모순 관계를 인정하면서 주어진 현실을 검토하고 그것을 시정해 나갈 방도를 생각하고자 하는 저작이다. 장 교수가 말하는 한국이 지향해야 할 체제는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라는 말로 집약된다. 이 목표는 시장과 경제정의 사이의 모순된 결합에 타협점들을 모색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를 정치로서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장 교수의 생각으로는 시장이나 자본주의에 원천적인 결함이 있다는 주장, 또는 그 반대로 그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실패하기 마련이라는 주장, 어느 쪽도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필요한 것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구체적이고 세밀한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정규직의 문제나 소득 누진세의 강화 등 정부가 개입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여러 가지로 파헤치는 일은 이 책의 중심 과제가 돼 있다.
장하성 교수의 한국경제 분석 큰 의미
그러나 장 교수가 시장이 일으키는 문제를 일방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 자체를 바르게 움직이게 하는 데에도 여러 시정책들이 필요하다. 시장에서의 지나친 경쟁은 경쟁 자체를 소멸하게 하고 특정한 경쟁자의 효율을 높이는 것은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저하시킨다. ‘소유의 미로’에 빠져 있는 재벌경제를 개혁하고, 불공정한 내부 거래를 들어내고, 기업의 투명성과 책임감을 높이는 것은 시장으로나 사회정의 어느 쪽으로나 필수 사항들이다.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것은-이것도 현실에서 해법을 찾고자 하는 장 교수의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외국의 이론을 그대로 빌려 우리 경제와 사회에 적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령 장 교수의 강력한 주장 중 하나는 기업의 내부보유금에 대한 과세다. 그러나 그는 토마 피케티가 주장하는 고도한 자본세에 대해서는 유보를 표한다. 그것은 선진국에서와는 달리 한국 경제를 침체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저율이고 징세의 절차도 간단한 토빈(Tobin)세를 부과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그는 말한다. 또는 기율이 지나치게 이완돼 있는 스웨덴의 복지제도에 대해 유보를 표하는 것도 이러한 입장에 맞아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경제의 사회적 결과를 말할 때 장 교수의 기준이 돼 있는 것은 시사한 바와 같이 사회정의다. 그리하여 고용과 임금의 문제가 중요한 주제가 된다. 다만 이것이 성장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중앙일보 9월 27일자에 실린 최장집 교수의 서평은, 이 책을 “대작이면서 역작”이라고 극찬하고 특히 이 점에 주목한다. 이 책에서와 같이 경제학자가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장 교수가 존 롤스의 『정의론』을 논하는 것도 이러한 의식과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정의에 대한 장 교수의 관심은 그의 넓은 문제의식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대적으로 한국 사회가 그러한 단계에 이른 것과도 관계된 일이지 않나 한다. 중앙일보 같은 일자의 시평란에는 서강대 조윤제 경제학 교수의 글이 실려 있다. 조 교수는 기술 등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이 없이는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는 “고성장 없이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사회문화, 제도,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하여 ‘질서와 예절, 정직과 투명, 상호 신뢰, 법 적용의 공정성과 엄중함, 공정경쟁’ 등을 존중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조 교수의 주장은 경제에 대한 정치적 중재에 더해 윤리와 문화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한 윤리와 문화는 오랫동안 함양돼 비로소 사회적 관습(ethos)으로 성립한다. 그런데 여러 사회적 덕성이 자연스러운 에토스가 되기 전의 혼란한 사회 조건하에서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새로 다짐하는 윤리적 결단이 아닌가 한다.
얼마 전 미국의 인터넷 매체에 환경운동가이면서 복음교회 신자인 환경 연구 관련 교수와의 인터뷰가 실린 일이 있었다. 그 교수는 인생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며, 만물에 대한 사랑은 종교인으로서의 의무라고 말했다. 그 관점에서 모든 생명체는 존중돼야 하는 대상이다. 이 인터뷰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고통과 시련도 하늘에서 주시는 것이니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인용은 동물 연구가이자 동물 애호운동가인 제인 구달의 “머리와 가슴이 하나의 조화를 이룰 때에만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발휘된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주의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마음은 어느 때나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이다. 머리로 하는 계획은 큰 목적을 위해 윤리의 보류를 허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신적 자세는 집단적으로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마음과 행동과 함께한다. 물론 여기에도 결단은 필요하다.
유럽은 지금 ‘덴마크 모델’로 향하는 중
이그나티예프의 글의 제목 ‘신세계 무질서’는 H G 웰스의 저서 『신세계질서』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크다. 웰스는 스스로 사회주의라고 말하면서 산업의 집단화와 국유화를 주장하고 공산주의에도 관심을 가지고 마르크스 · 레닌 · 스탈린 등에서도 그 나름의 장점을 찾으려 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기본적으로 책상물림의 학자가 만들어낸 추상적 이론이며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신세계의 질서’는 민주주의의 여러 제도와 전통적 문화 업적을 받아들이면서 사실적 사정에 즉해 점진적으로 연구되고 성취돼야 하는 미래였다.
그리고 그는 사회제도의 불공평이 불러일으키는 부정적 감정이 그대로 신질서 구성의 에너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계급 의식의 정치적 의미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그는 하층 계급 출신으로 자기의 왜소한 체구는 20년간의 굶주림으로 인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가 주장한 국유화는 영국에서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없지만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그의 비전은 아직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는 앞에 언급한 필자들을 포함할 수 있다).
유럽의 민주국가들의 미래를 말하면서 이그나티예프 교수는 가고 있는 길이 다르긴 하지만 이들 나라는 모두 “덴마크로 가는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공감이나 동의를 넘어 역사의 새로운 질서로 가는 길이 거기로 향하고 있다는 예언일 것이다.
- 중앙선데이 | 제395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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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세월호 애도는 부당한 고통 막자는 뜻이리라 |
⑨ 슬픔의 보다 높은 자리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근래의 대사건이었다. 요즘 보도되는 큰 사건이란 전쟁, 테러리즘, 지진, 대형사고, 역병, 폭력, 부패, 사기, 협잡 등 사람이 사는 지구가 얼마나 불안한 곳인가, 또 우리 사회의 경우, 다행히도 큰 천재(天災)는 피해가면서도, 정치나 인간관계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가를 매일매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일들이다. 교황의 방문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의미에서의 대사건이었다.
국가 원수나 국가 기구의 수장이 나라를 방문하는 것도 중요한 사건이다. 국가 수장의 뒤에는 국가라는 조직의 힘이 있고, 그것이 뒷받침하는 권위는 그러한 인물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대사건이 되게 한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바티칸은 ‘바티칸 도시국가‘ 라는 독립국이다. 교황은 이 독립국의 수장이다. 교황은 온 세계의 12억 가톨릭 신자들이 이루는 조직의 정점에 있다. 바티칸시는 다른 국가나 마찬가지로 내각에 해당하는 추기경과 신부들의 회의가 있고, 많은 현실적 결정은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교황은, 어떤 설명에 의하면, 민주주의나 적어도 입헌군주제가 확립된 유럽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절대군주다.
개인적 실천의 삶이 프란치스코의 힘
‘교황무류성(無謬性)’ 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 교황이 선포하는 말씀은 다시는 논박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교황은 이렇게 조직이나 제도상의 절대권자이지만, 그 권위의 근본은 정신적인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권위는 지도자의 권위가 -또는 흔히 이야기하는 카리스마도-반드시 ‘일반의지’가 된 민의(民意) 또는 다른 현실적인 힘에서만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위 또는 호소력은 그의 개인적 삶에서 시작한다. 취임하면서 그가 새 이름 프란치스코를 택한 것이 이미 그것을 표현한 것이지만, 널리 보도된 바 그의 검소한 일상생활은 그가 선택한 정신적 삶의 모습을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러면서 그의 개인윤리는 성 프란치스코가 그러했던 것처럼, 집단 윤리로 확대된다. 종교가 요구하는 윤리의 강점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개인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속적 윤리강령과는 달리,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비윤리적 행동을 개인과 집단의 윤리의 틈새에 감추기 어렵게 한다.
개인적 실천의 삶을 넘어, 교황의 관심은 빈곤과 괴로움 속의 사람들을 향한다. 그는 행동에서나 강론에서나 특히 가난과 고통 속의 인간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명동성당의 강론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바 사람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어야 하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이 교황의 중요한 삶의 지침으로 보인다. 여기의 사랑은 특히 불우한 사람과의 유대를 강조하는 사랑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남북 분단의 문제와 세월호의 비극 후에 계속되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에 관련하여, 염수정 추기경은 이기고 지는 것을 넘어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로 교황의 메시지를 요약하였다. 정치에서나 개인적으로나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반드시 그것으로 사람들을 집단적 투쟁에 동원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명동성당 강론의 제목은 ‘평화와 화해를 위한 강론’이었다. 하나가 되는 것은 화해를 통하여 화평한 관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 결정에 계기가 된 것은 아시아의 가톨릭 청년들이 모이는 아시아청년대회였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행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정은 한국이 분단국가라는 것과 관계된 것일 수 있다. 교황은 지난 5월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번 방한 시에 중국의 상공을 지나면서, 중국에 대한 선의를 전달하고, 또 기자회견에서 중국 방문의 희망을 표명하였다. 중국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관계를 단절하고 있으며,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됨에 따라 동아시아 평화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나라다.
원수 사이 같은 이 · 팔 지도자 초청한 뜻
세계 분쟁 지역의 문제 해결에 교황의 방문이나 설법이 무슨 소용이 되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교황은 중동을 방문한 후 팔레스타인의 마흐무드 압바스,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 대통령을 바티칸으로 초청하였다. 6월에는 바티칸에서 이들과 함께 하는 기도회가 있었다.
최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행한 잔학한 살육전은 평화를 위한 교황의 노력이 역사적 갈등의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교황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두 지도자를 초청한 것은 두 지역의 갈등에 대한 정치적 타결책을 직접적으로 거래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초청의 목적은 함께 하는 기도였다. 이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을까? 교황은 명동성당의 강론에서, 두 세 사람이 함께 하는 기도도 큰 힘이 된다는 마태복음의 구절을 언급하면서 분단된 한국에서 온 민족이 함께하는 기도는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일을 바르게 달성하는 데에는 윤리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현실의 위 또는 아래에 있는 공통의 소망에서 나온다. 우선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정이다. 단순히 마음을 집중하는 것 또는 경건하게 갖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갖추어야 할 기본적 자세이다. 다만 경건함을 지니는 마음-옛날에 지경(持敬)이라고 불렀던 마음가짐이 유치하고 허망한 일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는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이다.
그러나 교황이 사람들의 마음에 불러일으킨 반향(反響)은 정신적 전환에 대한 갈증이 사람들의 마음 깊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현실은 현실이라도, 그러한 마음가짐이 있어서 현실은 지향해야 하는 가치를 발견하고 만국정쟁 만인정쟁과 그로부터의 임시 휴전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남북 관계에 못지 않게 평화와 화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사회적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이 특히 심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이 교황의 방한 결정의 한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교황은 사회적 분열의 요인이 되는 “불운한 이들, 소외된 이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들, 번영에서 제외된 이들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황이 위안부 문제나 세월호 참사 등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추가하여, 지리멸렬이 된 사회의 정신상태를 보여준 것이 윤 일병의 죽음인데, 이것은 교황의 눈에 띠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와 관련하여, 교황은 세월호 비극의 유족을 만나기도 하고, 애도의 뜻을 표하는 리본을 달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한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여, 교황은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중립을 지킬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동정과 애도를 표하였다면, 가족의 격렬한 아픔에 완전히 일치하자는 것만은 아니었다. 원한과 울분에 함께 잠기자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교황이 애도하는 마음을 표하였다면, 그것은 슬픔에 가까운 것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의 죽음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절망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것이 슬픔으로 옮겨 간다. 슬픔은 여러 가지 가닥을 가지고 있는 인간 감정이다. 슬픔은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제삼자가 나누어 갖는 슬픔이 가족의 슬픔과 같다고 행세하는 것은 참월한 일이다.
가족의 슬픔을 지켜보는 슬픔은 그것을 존중하는 예절의 슬픔이다. 이러한 슬픔은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식은 사자(死者)와 가족의 고통, 그리고 인간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이른다. 슬픔의 가장 깊은 층위에 놓여 있는 것은 인간의 공동운명에 대한 깨우침이다. 이것은 현실로 되돌아와 다시 오늘과 내일에 일어날 수 있는 부당한 죽음과 고통을 생각하고 그것을 완화할 일들을 생각하는 데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일어난 죽음이 아무리 비극적이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부당한 죽음과 부당한 고통을 방지하는 방법에 마음을 돌리는 일이다. 세월호의 비극에 애도를 표하는 교황의 마음은 이러한 넓은 의미의 슬픔의 마음, 자비(慈悲)의 마음 그리고 인간 조건의 개선을 위한 성심으로 이어지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이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 대책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데에는 의식하든 아니하든 이러한 마음의 층위가-무의식의 사회적 규범으로-그 아래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공공의 자리에 위치해 있는 사람의 의무는 현실 대책을 강구하는 일이다. 그 첫 책임은 물론 수난자를 위로하고, 둘째로 진상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다. 진상의 규명은 분노를 터뜨리고 복수를 위해서보다도,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고통과 불행한 죽음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현실적 방책과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다.
이기고 지는 것 보다 중요한 ‘하나됨’
미국의 철학 교수이며, 정치행동가인 코넬 웨스트는 자기와 같은 흑인 배경의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미조리 주 퍼거슨에서 최근 경찰이 흑인 소년을 총살한 사건에 대한 대책, 민간인 살상을 불사하는 미국의 중동정책 등-을 비판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이 정치세력들의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으려는 까닭에, 보다 높은 자리에 서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가 서야 할 자리는 여러 정치세력의 가운데 지점이 아니라 “보다 높은 자리, 도덕의 자리, 더 나아가 성스러운 자리이어야 한다” 고 웨스트 교수는 말하였다. 이것은 전혀 다른 정치 상황에서의 이야기지만, 어려운 문제에 부딪는 정치 지도자는 마땅히 이러한 높은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반드시 집단화된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누어 갖는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하고, 어제의 불행을 넘어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는 삶을 말한다. 이것은 국내 문제만이 아니라 민족 문제 그리고 국가 간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월호의 경우 슬픔을 나누어야 할 때도, 보다 높은 슬픔의 자리는 현실의 문제를 널리 살펴보게 하는 자리이다. 거기로부터 삶의 현실 문제를 보살피는 일이 시작된다.
- 중앙선데이 | 제391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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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치에 바라는 건 현실 문제의 현실적 해결 |
⑧ 큰 감정의 정치학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도 이제 100일이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거기에서 시작한 참담한 느낌과 분노는 끝나지 않고 있다. 원인은 물론 대책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다른 한편으로, 더 넓게 보면, 사건이 준 충격은 사건 자체의 비극적 규모로 인한 것이지만, 그것이 참담한 느낌을 준 다른 이유는 많은 사람에게 사회 전체에 들어 있는 깊은 병을 문득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사건의 원인이 사회의 병에 있다면, 치료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문제를 지나치게 근본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인 조처를 지연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이러한 관점에서 일을 조금 에둘러 생각해보기로 한다. 사건의 요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선박 운영의 고리마다에 끼어든 부패다. 그러나 현장에서 그것은 일처리에서의 성실성 부족으로 나타난다. 작은 것이면서도 이것이야말로 사회에 퍼져 있는 병의 큰 증후이고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국정 위한 심성 훈련 설명한 『성학십도』
에두른다는 것은 오늘의 사정과 관련하여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언급해보겠다는 것이다. 『성학십도』는 임금으로 하여금 국정(國政)에 대비할 수 있게 하는 심성의 훈련을 설명하기 위하여 유학(儒學)의 고전적인 문장을 집약한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여기의 충고는 임금이 아니라도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지켜야 할 사항들을 포함한다. 그 가운데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은 특히 만사에서 행동 지침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일에 당하여서는 그 일에만 마음을 두어, 그 마음 씀이 다른 데로 가지 않도록 하라. 두 가지, 세 가지 일로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자명한 지침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조심스러운 집중이 세월호 운항에서도 필요한 것이었던 점은 사실이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집중이 보장되는가. 말할 것도 없이 이 집요(輯要)에 열거된 열 개의 지표에 따라 공부하고 수양하는 것이 그것을 몸에 붙이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더 간단한 조건은 잠(箴)의 첫 부분의 설명에 나와 있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가지고 있기를 마치 상제(上帝) 대하듯 하라. 발가짐(足容)은 반드시 무겁게 할 것이며, 손가짐(手容)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니, 땅은 가려서 밟아, 개미집 두덩(蟻封)까지도 (밟지 말고)돌아서 가라. 문을 나설 때는 손님을 뵐 듯해야 하며, 일을 할 때(承事)는 제사를 지내듯 조심조심하여, 혹시라도 안이하게 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의관이나 손발을 바르게 갖춘다는 것은 몸가짐에 대한 주의사항을 말한 것이다. 여기의 몸단속하라는 지시는 억압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몸가짐이 마음의 형성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현대 심리학에서도 인정하는 인간 심리의 한 특징이다. 몸가짐이 어때야 하는가를 다시 살피면, 몸은 한편으로는 ‘존엄하게’ ‘무겁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손하게’ 하여야 한다. 그러면서 행위의 극히 작은 외표에까지 마음을 써야 한다. 그래서 걸음을 걸을 때 개미집 두덩도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행동의 전체적인 테두리다. 일을 처리할 때에 제사 지내듯이 하여야 한다는 것은 그 테두리를 시사한다. 조선조 사회에서 의례(儀禮)는 가장 중요한 공적 행사이었다. 그리고 사적인 행동의 방식도 그에 준했다. 의례란 인간의 행동을 양식화하는 것이면서, 전체적으로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제(上帝)에 대한 언급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 상제는 신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세속적인 통치자를 비유적으로 확대한 것이기도 하다(어원적으로는 그 반대라고 할 수도 있다). 상제의 존재가 가리키는 바 초월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이 여기에 상정돼 있다. 이 테두리가 모든 인간 행동에 엄숙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조심스러운 마음과 태도에도 적용된다. 손님을 예의로서 대하여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큰 질서, 우주적 질서의 일부라는 전제로부터 저절로 도출된다. 거기에 작용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 경(敬)이다.
권력도 상징적 의미 가져야 현실 움직여
이렇게 풀이해 보면, 일의 신중한 처리를 보장하는 것은 이러한 질서이다. 이것을 상제나 황제가 대표한다. 그러나 질서가 반드시 권력으로 강요되는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 질서의 힘은 현실적인 것이면서 상징질서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서의 힘이 사라진 곳에서 조심스럽고 성실한 일의 수행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세속화된 세계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힘은 오로지 현실적 힘-강제력이다.
그러나 대체로는 권력도 상징적 의미를 가짐으로써 참으로 현실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상징은 마음의 안으로부터 사람을 움직인다. 그때 강제력에 대한 무서움은 보다 일반적인 두려움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주적 질서에 이어질 때, 그것은 외경심이 된다. 유교에서 ‘공구(恐懼)’-두려워하고 경(敬)의 마음을 갖는 것은 수신의 목표이다. 이것은 상제의 질서에 뒷받침되면서, 편재(遍在)하는 자연의 질서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거대한 자연의 힘은-물론 그것을 실감하는 경우-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으로 그 신비를 우러러보게 한다. 한스 요나스와 같은 환경 철학자는 자연에 대하여 사람이 갖는 두려움 또는 외경심(畏敬心)을 환경 존중의 심리적 자원으로 말한다. 이 두려움은 특히 큰 규모의 자연현상을 대면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높은 산이나 바다는 그러한 두려움 또는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자연이다. 삶도 자연 또는 그 신비의 일부이다. 사람의 실존적 불안감도 목숨의 위태로움에 대한 느낌이 사람의 마음 깊이에 서려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죽음은 인간 존재의 허약함과 무상함을 말하는 절대적인 사실이다. 서양 중세에는 해골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죽음이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을 명상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해골 자체를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로 부르기도 했다.
오늘날 죽음은 물론 자연의 두려움, 그리고 그 한계 안에서 영위되는 삶의 엄숙성은 너무나 쉽게 잊히고, 그것을 기억하는 일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 되었다. 자연의 두려움은 사람의 힘에 의해 거의 통제·조정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과학기술은 나날이 이를 위한 새로운 장치를 만들어낸다. 쏟아지는 정보는 사람에게 거의 영생불사(永生不死)를 약속한다. 금전과 권력만 있다면, 이 모든 것이 확보될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의 시대다. 정부를 포함해 모든 사회 조직과 기구도 이러한 삶의 통제와 조정의 완성을 지향하고 약속한다. 그리하여 잘못되는 일은 당연히 그 수령이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외경심은 올바른 일처리의 출발점
위에 말한 두려움과 외경심의 현실적 의미는 그것이 마음을 집중하여 일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게 하는 심리적 준비가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러한 집중에 이르게 하는 큰 감정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오늘의 세상이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큰 감정은 줄어들었다기보다는 불어났다고 할 수 있다. 조심스러움을 강조하는 외경심이 아니라도 큰 감정은 행동의 동력이 된다. 외경심은 큰 질서에 비추어 자신이 그 질서의 일부라는 것과 함께 자신의 작음을 깨닫게 한다. 분노와 같은 정치적 큰 감정도 큰 현실의 존재를 알게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작은 존재가 아니라 큰 것의 일부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정치에 동원될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 문제에 대한 현실적 대처로 직결되는 것은 쉽지 않다. 외경심은 주의 깊은 자세를 낳는다. 다른 큰 감정들은 조심스러운 반성으로 이어지지 아니한다. 다만 그러한 감정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시할 수는 있다. 필요한 것은 그에 대한 이성적 검토이다. 이성은 위태로우면서 보다 넓은 세속적 가능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다.
정치적 관심이 큰 작가였던 브레히트는 감정과 현실적 깨달음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내세우는 특이한 연극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의 생각으로는 연극은 등장인물에 대한 공감과 동정을 표현하면서도 그로부터 거리를 유지하여야만, 총체적 의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생기는 효과가 연극의 공감으로부터 사람을 떼어놓는 유명한 ‘소외효과’다. 과장된 감정적 일치를 강조하는 연극은 소원과 두려움을 섞어 ‘거짓된 세계’를 만들어 관중을 현혹한다(브레히트의 시 ‘무대, 꿈의 자리’). 이에 대하여 현실적 진실을 추구하는 연극은 이러한 환상의 창조를 멀리 하여야 한다. 일상생활에서도 사람들은 사건의 주인공을 흉내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방에 완전히 흡수되지는 않는다. 모방자가 모방되는 사람의 감정과 견해를 완전히 같이하는 것도 아니다. 심장이 하나가 되어 뛰거나 머리가 하나의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공감은 사태 설명의 한 부분일 뿐이다(‘일상생활의 무대에 대하여’).
이러한 점은 격앙된 감정에 의존하고자 하는 정치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영웅적 열광과 행동은 정치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고 유혹이다. 그러나 참으로 인간을 위한 정치는, 정의롭고 행복한 삶의 질서를 안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테두리 안에서 직무와 도덕적 의무에 충실한 행동들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물론 현대의 세속적 삶의 테두리 안에서 정치가 조심스런 일 처리, “일에 당하여서는 그 일에만 마음을 두어, 그 마음 씀이 다른 데로 가지 않도록” 하는 승사(承事)가 보장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세월호의 비극은 성실성이 사회적 의무 수행의 필수 요건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이번 선거의 결과는, 감정의 격앙 또는 아지프로(agitation propaganda)를 넘어서 현실적 문제에 대한 현실적 해결이 사람들이 정치에서 바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 중앙선데이 | 제387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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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여러 겹에 대하여, 7 | 전환기의 낙담과 희망 |
우리는 지금 새 질서 향한 큰 굽이에 서 있는 건 아닐까 |
⑦ 전환기의 낙담과 희망
시대와 역사를 움직이는 여러 요인들은 일정한 구조와 형상으로 안정되기도 하고, 그것이 무너지면서 혼란과 갈등의 상태로 옮겨가기도 한다. 그리고 운수가 좋으면, 그것은 다시 일정한 형상으로 안정된다. 이러한 변화의 화전(和戰)의 순환은 정치나 사회의 방향 재조정에도 적용된다.
최근 중국 시진핑 주석의 한국 방문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 그리고 남북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일컬어진다. 그의 방문은 중국이 북보다 남에 가까워지게 되었거나, 적어도 종전보다는 남북에 대한 관계에서 등거리(等距離)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한중 관계의 재조정의 배경에는 영토문제로 긴장 상태에 들어가 있는 중일 관계가 있다. 일본은 피랍자 문제와 관련하여 북에 대한 제제를 완화하고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는 의도를 보였다.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확대하는 결정을 내리고, 북한이 핵실험의 강행과 빈번한 미사일 실험으로 공격적인 태도를 굳히고 있는데도 이러한 교섭의 전망이 트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건들의 전개는, 지금까지 한 · 미 · 일이 유지하고 있는 동맹적 관계에 비추어, 한 · 중 · 일 세 나라에의 관계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을 예상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보다 쉽게 마찰이 유발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한편, 새로운 합종연횡(合縱連衡) 가운데 이루어질 새로운 균형을 예상하게 한다.
지난해로 기억되는 일로, 금년의 금융위기를 설명하면서, 런던정경대(LSE)의 명예교수이며 귀족원 의원인 인도 출신의 메그나드 데사이 경(卿)은 자본주의의 중심이 아시아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와 정치 상황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결국 아시아, 특히 중국의 경제력의 거대화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중심 이동이 더 분명해짐에 따라, 그것은 일정한 질서로 정착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이어지는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으나 사회나 정치가 그 국면을 바꾸는 전환기에 들어섰다는 느낌은 한국 사회에도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일단 우리가 받는 인상은 사회의 어떤 부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는 하나의 굽이를 돌고 있는 때문일 수도 있다.
막바지에 이른 듯 한 느낌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세월호 사건이다. 이 참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가 기능부전에 빠져 있고, 부패 · 비능율 · 도덕적 무감각 등이 얽혀서 그러한 참사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느끼게 했다. 고성의 군부대에서 있었던 병사의 총기난사 사건은 군부대의 기율 문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의 비인간화를 생각하게 한다. 수사 대상이 되었던 철도시설공단 이사장의 투신자살, 살인 교사 혐의를 받고 있는 시의원의 뉴스 등 공직자들의 비리문제는 오늘의 사회상에 대하여 더 심각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을 심화하는 것은 내각과 정부 고위직 후보자들이 청문회를 열기도 전에 드러나는 도덕적 결함으로 하여 탈락하는 사태다.
청문회 모습 추하지만 비리 예방 효과도
그러나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의혹들을 폭로하는 절차가, 반드시 아름다운 일은 아니면서도, 그것을 제거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과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국민 일반에게 새로운 윤리도덕의 필요를 인식하게 하고 앞으로의 공직 지망자에게 예비적 경고를 발하는 효과를 갖는다.
문창극 총리 후보의 경우는 그에 관련된 조금 더 미묘한 사회적 의미들을 생각하게 한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부패나 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이었다.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또 민족의 과거를 폄하하는 등의 발언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발언이 참으로 그러한 것인가는 달리 문제가 될 수 있다. 개혁 교회의 예정설은 신의 벌과 구원이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미리 정해진 것이라 하고, 구원의 약속은 신앙의 확실성에서 오며 그 증거는 매일 매일의 정진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개혁 신학이 말하는 영원한 형벌의 가능성이 나날의 일에 정진하게 하는 윤리를 낳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것은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의 정신적 뿌리에 대한 유명한 설명이다. 문창극 후보가 일본의 지배를 신이 내린 형벌로 말한 것도 이 비슷한 테두리에서 해석돼야 할지 모른다). 그의 신앙의 개조를 문제 삼는 것은, 그의 지지자들이 주장하듯이, 민주적 절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정을 맡을 사람의 생각의 흐름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법률적 절차의 문제에 더 하여, 또 하나의 문제는 역사의 어떤 부분에 대한 견해가 참으로 국정을 맡을 사람의 마음가짐을 시험하는 요건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 상황이 조금 더 안정된 것이라면, 검증 절차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 · 경제 · 사회적 과제에 대한 소견을 듣는 일일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답변자의 소신은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과제를 간단히 말할 수는 없지만, 예컨대, 경제 · 정치의 능동적 기능의 제고(提高) 문제 이외에 건강 · 교육 · 연금 · 실직 보상금, 또는 더 확대하여, 문화 · 주거 · 휴가 등을 위하여 정치가 무엇을 어느 정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거기에 경제와 재정정책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의 문제들이 과제들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방금 든 뒷 부분, 즉 주로 복지에 관련되 부분은,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그의 저서에서 되풀이해 강조하는 국가 재정 운영의 과제를 빌려 온 것이다. 지난번의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의 주제는 소득과 자산 격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의 이상을 무력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으로는, 미국을 포함하여 서구 여러 나라들이 이룩한 것은 분배의 균형을 지향하는 ‘사회국가’이다(그는 중국이나 인도도 결국 여기를 향하는 것으로 말한다). 이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실패에 대조된다(앞에서 언급했던 영국의 데사이도 빈곤 문제 등 사회문제의 해결에 마르크스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자본주의 경제학으로 전향한 사람이다).
성장 이룬 한국, 이념 극복할 능력 충분
물론 사회국가의 실현을 위해서는 다른 요인들이 있다. 투자와 성장과 이윤이 경제의 원동력이라는 것은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정부나 공공기구의 투명성의 확보는 또 하나의 조건이다. 숙의(熟議)의 민주주의는 다른 또 하나의 조건이다(이것이 반드시 대결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사회정의를 비롯한 사회적 이념이 현실화된다. 롤스가 말한 바와 같이, 불평등도, 이러한 숙의(熟議)를 통하여, 가장 불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그것으로 혜택을 입게 된다는 조건하에서 정당화된다. 또 인간적 삶과 평화 등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신뢰가 일반화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요건들로 하여, 피케티의 생각에,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서 논하려는 것은 피케티의 자본주의론이 아니다. 이글의 목적은 그의 생각에 비추어 오늘날의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가늠해보자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문창극 총리 후보의 검증 문제로 돌아가면, 문제 된 것은 그의 역사관이었다. 이것은 더 확대하면,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중요한 정치적 사고의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큰 뉴스가 된 사건의 하나는 전쟁 상태로 돌입하는 이라크 사태이다. 여기의 무력 충돌에 큰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교리다. 달리 말하면, 종교 이데올로기가 무장봉기의 열정을 북돋는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 에서 시아파 · 수니파 · 쿠르드인이라는 신앙적 · 종파적 · 인종적 구분은 단순히 종교와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넘어 정치적 · 사회적 차별의 구실의 역할을 하였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문제가 현실에서 바르게 풀리지 못할 때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동지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분규와 갈등이 심한 지역의 하나다. 피케티는 국가의 총생산에 비해 사회적 지출의 비율이 극히 작은 지역으로 중동의 몇 나라를 들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현실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이데올로기 투쟁이 격화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할 수 있다 (물론 서방의 여러 나라의 석유 이권의 문제가 여기에 크게 개입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피케티가 제안하는 불평등 문제의 해결책은 궁극적으로 소득과 자본 이득에 대한 세계적 투명화와 과세를 포함한다).
이러한 사정을 생각하면, 세계적 관점에서 어느 정도로 빈곤을 넘어서는 경제발전을 이룩한 한국은 이제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세월호 사건에서 높아진 공적 책임에 대한 요구, 고위 공직자 청문회 등에서 드러나는 투명성의 필요 등도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보다 넓은 관점에서의 인간관계의 인간화는 그보다는 더 넓은 윤리의식의 보편화,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구조와 물질적 기반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평화와 인간적 삶에 대한 과정적 이해는 서두에서 언급한 동아시아에서의 국제관계에도 해당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미 있던 질서의 해체는 불안정과 불안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경제발전의 논리로 보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금까지 이것을 이룩했거나 이룩하려고 노력하는 나라들이다. 불안이 없지 않은 채로, 국내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평화와 정의를 공고히 하는 일이 다음 단계의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전지구적 평등화에 대한 피케티의 생각을 언급하였다. 지역 단위의 평화와 평등은 그것을 향한 하나의 예비가 된다. 물론 붙여 말해야 할 것은 이러한 낙관론은 여러 가지로 오늘날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도덕적 낭패감에 대한 하나의 보상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 중앙선데이 | 제383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4.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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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여러 겹에 대하여, 6 | 두 개의 길, 사회와 개인의 결단 |
경제성장은 강박관념 아닌 선택의 문제로 접근할 일 |
⑥ 두 개의 길, 사회와 개인의 결단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은 여러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거니와, 이에 대한 뉴스와 논평은 중앙일보를 비롯해 우리나라 매체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된 바 있다.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빈부격차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의 경쟁이 심한 사회체제라고 하겠지만, 적절한 범위 안에서 부(富)를 나누어 가지게 하는 체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장경제론의 효시가 되는 애덤 스미스의 책 제목 『국부론(國富論)』 자체가 그러한 함의(含意)를 가지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을 유명해지게 한 ‘조수(潮水)가 들어오면 큰 배 작은 배 할 것 없이 모두 뜨게 된다’ 는 말은 이러한 관점을 간략하게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피케티의 생각은 정책적 대안이 없이 경제를 시장에 맡겨둔다면 부는 한쪽 으로 치우쳐 쌓이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는 시대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지지만, 1970년대 이후에 심화된 이 차이는 어느 시대에 있어서보다도 예민하게 여러 사람에 의해 문제로 인식되게 되었다.
그의 책이 출판된 다음에 나온 비판들에 답하면서, 피케티는 자신이 이 문제에 있어 결정론자는 아니라고 변명했다. 그의 저서 제목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책이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파국에 이르거나 혁명적 전환의 시점에 이른다는 마르크스주의 역사변증법을 다시 증명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커져가는 빈부 격차를 말하면서도 대책들을 내놓는 것은 그것을 시정 불가능한 역사의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여러 논평에서 피케티의 업적을 극찬 했다. 오늘날에 있어서의 빈부 차의 심화는 경제학자들도 알고 있고 사람들도 느끼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나 피케티의 연구만큼 포괄적으로 또 철저하게 이 문제를 파헤친 책은 찾기 어렵다고 그는 말한다. 서방의 여러 나라의 자료를 18세기, 19세기까지 밀어올려 조사하고, 다른 연구들의 단편적인 소득 비교를 넘어 소득과 자본과 자산의 수익을 아울러 총체적으로 살펴본 점이 이 책을 결정적인 경제학 연구의 대작이 되게 한다고 한다. 한 서평에서 사용한 그의 표현으로, 이 책은 “경제성장, 자본과 노동 간의 소득 분배, 개인들 간의 부의 분배를 하나의 틀에 총괄하는, 불평등의 통일장(統一場) 이론”이다.
피케티의 주장에 대한 반론들도 적지 않다. 그것들은 그가 의존하고 있는 통계가 정확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위해 과장 · 선택 · 변형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파이낸셜타임스의 크리스 자일스의 비평이 대표적이다). 크루그먼도 피케티의 진단이 전적으로 옳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분적인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방대한 자료를 다루는 까닭에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전체적인 테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피케티의 견해에 거의 전적인 동의를 표현한다.
자세한 내용은 더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부의 불평등에 대한 대책에서도 두 경제학자는 의견을 같이한다. 대책은 누진세율을 엄격하게 적용해 소득에 한계를 두게 하고 여러 방법으로 사회적 재분배를 시도하는 것이다. 과대한 연봉의 문제에 대한 대책은 이러한 정책의 한 예시가 될 것이다. 1980년대 이전의 부가 자본과 자산에 근거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에 있어서 그에 못지않은 것이 기업, 특히 금융기업 간부들의 엄청난 연봉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연봉이 세금에 의해 깎여 나간다면 이 고액 소득자들도 사회적인 비판을 무릅쓰면서 고액 연봉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근본적인 물음을 하나 묻는다면, 빈부 차의 심화가 왜 문제가 되는가? 이번 논쟁과 관련해 빈부 차를 문제삼는 동기는 시기심이라는 것이 보수주의자들이 내놓는 하나의 답이다. 여기에 이어지는 것은, 그러한 동기에서 나온 주장들이 경제를 북돋우고 고용을 창출하는 경제를 후퇴하게 한다는 비판이다. 피케티나 크루그먼은 과도한 빈부 격차가 민주주의를 파괴한다고 말한다. 소수자에게 부가 편중되면 정치에 있어 그 영향이 커지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될 수 없다.
또 하나 문제는 피케티가 말하는 부가 상속되는 부라는 점에 관계된다. 자본주의의 신화는 누구나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인데, ‘세습 자본 주의’는 능력에 따른 보상의 공정성을 파괴한다. 극단적인 경우 편중된 부는 빈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 경우, 문제는 단순히 민주주의 또는 정치의 문제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여기 두 경제학자는 대체로 선진국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런 차원에서의 빈곤에 대해 크게 주의하지는 않는다.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정한 정도 이상의 빈부의 차는 공동체 의식을 파괴 한다.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엘리시움의 피케티’라는 글에는 흥미 있는 우화적(寓話的) 이미지가 나와 있다. 이 글의 필자 존 페퍼는 한국의 남북관계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고, 성공회대학에서 가르친 일도 있는 워싱턴 소재 정책연구소(Institute for Policy Studies)의 연구원이다. 그는 피케티의 책을 책방에 가서 사볼 생각이었는데, 너무나 잘 팔려서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글은 피케티의 주제를 다룬다.
제목에 들어 있는 엘리시움(Elysium, 2013)은 근년에 출시된 영화의 제목이다. 엘리시움은 물론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이 사후에 가는 극락(極樂)이다. 이 영화에서는 지구의 부자들이 지구의 모든 부를 모아 우주 공간에 만들어 놓은 인공 낙원(樂園)이다. 이 사치와 기술의 낙원은 공기 오염이나 기후변화의 문제도 최신의 기술로 해결해 주민들은 여기에서 거의 영생을 누린다. 다른 한편으로 이 인공의 낙원을 뒷바라지하는 지구는 질병과 감옥과 규제 없는 공장으로 가득한 빈곤의 제3 세계다. 지구의 빈민들이 세 대의 셔틀을 타고 엘리시움에 침입해 온다. 그러나 두 대는 포에 맞아 추락하고 한 대가 안착하는데, 거기에 타고 있던 모녀가 호화주택에 숨어들어 간다. 백혈병을 앓고 있던 딸은 마술 기계의 힘으로 건강을 되찾는다. 그러나 이들 모녀는 곧 체포된다. 영화는 우여곡절을 거쳐 지구인(地球人) 모두가 엘리시움의 시민이 되는 것으로 끝나지만, 존 페퍼의 글이 이 영화를 언급 하는 것은 지구와 엘리지움의 격차가 미국의 사회상에 대한 비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격적인 피케티 론(論)에 추가해 또 하나의 흥미로운, 그리고 더 심오하다면 심오한 반응은 어떤 피케티 논쟁에 첨부된 댓글 한 편에 들어 있다. 이 댓글의 필자는 피케티와 그를 중심으로 한 논란이 전부 경제성장에 관계된다 고 하고, 그 때문에 경제의 지속가능성 문제를 전적으로 무시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누가 금 덩어리를 차지하느냐 하는” 부의 경쟁은 삶의 참다운 보람과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한 경쟁에는 “로맨스도, 기쁨도, 창조성도 없고, 삶에 대한 찬가(讚歌)도 없다” 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필자는 미국 애리조나주의 ‘레드록(赤岩) 사막 지대’에 산다. 그가 즐기는 것은 자전거 타기, 화수(花樹) 가꾸기, 그리고 실험 삼아 해보는 이런저런 일들이다. 사는 집은 화수 사이에 있는 오막살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필자는 그 생활수단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 나름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찾아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일 터인데, 그것이 그다지 쉬운 것은 아닐는지 모른다. 그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는 있다. 그의 주변에 널려 있는 미국 남서부의 광활한 땅이 그것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부귀영화를 버리고 사막 가운데 작은 집을 마련해 사는 결심이 쉽지는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세속을 버리는 금욕의 결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찾은 것은 번거로운 세속의 삶에서 찾을 수 있는 것보다도 더 진정한 삶의 기쁨이다. 그런데 ‘소은어야 대은어시(小隱於野 大隱於市)’ 즉, 작은 은자는 들에 숨고 큰 은자는 시중에 숨는다는 말이 있지만, 다른 많은 사람에게도 환경적 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구한 것과 같은 자기 충족적인 삶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경제성장과 빈부 격차의 문제가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사회 전체를 위해서는 그것을 적절하게 해결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선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도 정신 건강-개인적인 정신 건강, 그리고 사회적인 정신 건강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성장도 강박관념이 아니라 선택이어야 한다.
이것은 비단 경제 문제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오늘의 정치와 사회의 수사(修辭)는 모든 잘잘못을 전적으로 사회에서 찾는다. 사회적 윤리와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도 책임은 전적으로 사회에 있는 것으로 말해진다. 윤리와 도덕은 사회적 제도에 관계됨으로써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결단에 연결됨으로써만 참다운 인간적 덕성이 된다. 사회에서 윤리 도덕의 기초가 무너졌다는 느낌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다. 사회가 바른 윤리의 기초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한 일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도덕적 결단은 쉽지는 않으면서도 어느 때나 불가능 한 것은 아니다.
크게 떠오르게 된 빈부 격차에 대한 논쟁을 보면서 그 문제에서나, 다른 사회 문제들에서나 해결에는 큰 길 이외에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작은 길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이 큰 길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가장 인간적인 사회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 중앙선데이 | 제379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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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여러 겹에 대하여, 5 | 허영의 경제, 인간의 경제 |
인간적이고 지속 가능한 경제,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 |
생각의 여러 겹에 대하여 ⑤ 허영의 경제, 인간의 경제
세월호 침몰의 참사에 이어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아침에는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 으로 기울어진 7층 건물의 사진이 여러 신문에 올라 있다. 아산 테크노밸리에 짓고 있던 오피스텔 건물이 완성 직전에 기울어진 것이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진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큰 건물이 완성 직전에 비뚤어지거나 도괴된다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대한 불신감과 불안감은 더 커지지 않을 수 없다.
주변의 일에 대해 우리가 강한 반응을 갖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 삶의 조건이 되는 여러 일이 그 너머에서도 우리의 삶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다만 지금의 시점에서 그것은 논하기도 망설여지는 일이기는 하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이웃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아픔을 안겨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 이야기로 들리면서도 중요하고, 깊이 살피면, 나날의 삶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큰 변화들이 오늘 세계의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가운데 기후와 환경은 말할 것도 없이 삶의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다. 이 며칠 사이에도 급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뉴스가 전해 온다.
하나는, 며칠 전 미국의 기상예보센터에서 발표한 ‘엘니뇨’ 기상 현상에 대한 것이다. 엘니뇨 현상이 생기면, 그것은 태평양의 서안과 동안 사이 수면의 온도와 공기 압력의 차이를 크게 해 한발·폭풍우·산불·홍수 등 커다란 천재(天災)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도 2009~2010년에 있었던 엘니뇨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있지만 보도에 의하면 참으로 큰 재난을 일으켰던 것은 1997~98년에 있었던 엘니뇨라고 한다. 이 현상은 주로 남아메리카나 미국의 남서부에 피해를 주지만 그 외 지역에도 재난을 가져올 수 있다. 20년 내지 30년의 주기를 두고 일어나는 것이 엘니뇨인데, 이번에는 15년 만에 일어나는 일이 될 듯하다고 한다. 이것은 가을에서 겨울 사이의 일이기 때문에 지금의 시점에서는 조금 더 두고 보아야 확실한 것을 알 것이라고 한다. 엘니뇨의 한 효과는 지구의 평균 온도를 올리는 것이어서, 이것은 기후변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기후와 환경과 관계된 또 하나의 뉴스는 미국의 항공우주국(NASA)이 내놓은 것이다. 이 뉴스에 의하면, 서(西) 남극의 빙하들이 후퇴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그곳에 있는 여섯 개를 비롯해 빙산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고 한다. 이미 시작된 이 과정은 역전(逆轉) 가능한 지점을 지났다고 한다. 남극 위에 부는 바람이 거세어져 바다 밑에 있던 높은 온도의 물결이 위로 올라오고, 그것이 빙하와 빙산을 녹게 한다.
이는 여러 요인으로 일어나고 주기적인 반복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반드시 사람의 잘못만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한 요인은 온실가스 배출이다. 그로 인해 성층권의 오존에 구멍이 뚫리고 그것이 남극의 바람을 강하게 해 결국 빙하와 빙산을 녹게 하는 현상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빙산이 완전히 녹는 데까지는 2~3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하니, 내일을 생각할 틈이 없는 오늘의 지구인에게는 그것이 지나치게 큰 걱정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전에도 해수면은 계속 상승하게 된다. 그리하여 수면의 높이는 금세기 말에는 1.2m 또는 그 세 배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200~300년이 지나기 전에도 해변의 도시들은 큰 위협에 노출되게 된다.
이러한 뉴스는 지구 환경의 변화가 복합적 요인의 주기 현상에 관계된다는 것을 새로 생각하고 새삼스럽게 인간의 우주적 위상의 허약성을 상기하게 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이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기여한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적절한 생태환경을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난번 칼럼에서 언급한 영국의 경제사가 리처드 스미스는 기후변화와 환경 변화가 주로 인간의 탐욕과 관계된 것으로 그것을 조장하는 오늘의 경제체제 그리고 정치체제하에서는 어떤 대책을 세우더라도 기후변화를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대안이 무엇인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생각에 오늘날 생산되는 것들은 3분의 2에서 4분의 3은 인간의 참다운 필요라는 관점에서는 쓸데없는 것들이다. 해야 할 일은 과잉 소비 체제를 고치는 것이다. 그가 들고 있는 불요불급의 제품들은 ▶고소득자용으로는 고급 승용차, 디자이너 의상, 펜트하우스, 리조트라는 휴양시설, 전원의 별장, 요트, 전용 비행기 ▶일반 소비자용으로 판촉되는 것으로는 잠깐 입고 버리는 디자이너 의상, 화장품, 소모품 전자기기, 불필요한 기호식품, 넓은 아파트, 중앙냉방, SUV, 일회용 기저귀, 옷, 가구, 비행기나 선박을 이용한 관광 여행 등을 포함하고 ▶필요 없는 시설물과 산업으로는 회사들의 거대 건물, 쇼핑센터, 포장산업, 배달업, 쓰레기 같은 광고물 잡지, 광고, 은행, 신용카드 산업 등이 있다. 포장용 플라스틱도 쓰지 말아야 하고, 음료수용 플라스틱 병도 다시 채워 쓸 수 있는 병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바뀌어야 할 것은 낭비적인 생산과 소비 방식이다. 오늘의 자동차 산업은 소비자가 쓸 수 있는 튼튼한 제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날로 더 크고 더 화려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 한껏 이익을 늘리는 방법이다. 그리고 제품은 단기간에 고물이 되고 폐기될 수 있게끔 설계된다. 여기에 대조되는 것이, 적어도 처음 광고된 대로라면, 폴크스바겐과 같은 차다. 그것은 튼튼하고 단순하고 경제적이고 계속 수리 개조해 운용될 수 있는 자동차다. 물론 더 좋은 것은 자전거나 공중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집도 짓고 부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지탱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이러한 생산품 간소화와 체제의 전환은 일자리를 줄일 것이라는 우려를 낳는다. 그러나 일자리 감소는 노동 시간의 축소와 보다 긴 휴가로 보상될 수 있다.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이 일반화되면, 여러 작은 일자리가 생겨난다. 내구성 있는 상품을 만드는 체제가 되면, 가전제품 수리업을 비롯해 보수·정비·관리업이 흥하게 될 것이다. 생산업체의 축소와 상관없이 소규모의 업체들, 식당, 소규모의 농업, 농산품 시장, 공장(工匠), 식료품점, 빵 가게, 협동조합 매점, 작은 제조업 등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되거나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다.
스미스가 이 점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번영하는 소규모의 상점과 정비업은 사람들의 거주지가 유기적 공동체를 이루는 데 중요한 촉매가 된다. 생산 체제, 경제 체제의 거대화가 가져오는 문제의 하나는 그것으로 하여 일과 삶을 하나로 묶어 주는 자연스러운 유기적 공동체가 그 현실적 기반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거대화·추상화·관료화는 인간의 삶의 내실을 파괴한다.
생산 체제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 스미스의 생각이지만 사회적 관점에서 경제를 축소해야 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주거, 교육, 기반시설, 건강, 위생시설, 수도, 전기 그리고 환경 등은 반드시 무상(無償)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회의 공공 기구가 그 운영을 책임져야 한다고 한다. 시장경제의 원형이 되어 있는 미국에서도 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들, 즉 전기, 난방 연료, 상하수도, 지방의 전화 서비스 등은 공공 관리하에 있고 세계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도 가장 저렴하고 능률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스미스는 그것을 공공 운영의 타당성에 대한 중요한 증거로 제시한다.
인간적 필요에 기여하는 경제는 계획 경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경제는 다양하고 많은 인간의 필요를 조정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중앙권력의 강화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스미스는 민중운동으로 활성화된 민주주의에 기초해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고, 환경 보존과 생산의 필요에 대한 결정과 작업은 이 공동체가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과 같이 세계화된 조건 속에서 이러한 기구는 작은 지역으로부터 세계 정부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할지는 분명치 않다. 그는 미국과 다른 몇 나라의 사례를 들어 환경 문제를 국민 투표에 부쳤을 때 그 정책 선택이 환경친화적인 쪽으로 기운다고 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체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에서 간추려 소개해본 스미스의 아이디어대로 사회와 경제의 개편 그리고 인간의 개조가 이뤄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신도 반쯤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유토피아적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시사하는 바 인간의 진정한 필요에 부응하고 환경친화적일 수 있는 경제에 대한 비전은 오늘의 산업 체제에 대한 중요한 비판이 된다. 불요불급의 제품이 환경 파괴에 큰 요인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오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과잉 소비, 과시의 소비를 조장하는 허영의 경제가 인간성의 참모습에 맞아들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스미스가 생각하는 오래 두고 쓰는 물건의 경제는 공동체의 소생(蘇生)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일과 삶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동체야말로 사회적 삶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거기에서는 이번에 세월호 침몰과 관련해 크게 부상된 윤리적 책임의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스미스의 계획이 아니라도 주어진 지구 환경 속에서 지속 가능한, 그리고 인간성의 실현을 가능하게 할 경제를 생각하는 것은 인간 역사의 오늘의 시점에서 절실한 소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 중앙선데이 | 제375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4.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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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여러 겹에 대하여, 4 | 환경 친화적 세계로 가는 길 |
과잉 · 과시적 소비 자제는 지구를 위한 인간의 윤리 |
생각의 여러 겹에 대하여 ④ 환경 친화적 세계로 가는 길
며칠 전에 유엔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의 중간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우리 신문에는 이것이 크게 보도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은 시사적인 충격을 주는 내용을 가진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끄는 것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후 변화는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지구와 우주적인 변화의 자연스러운 리듬이 주된 원인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것이 인간에 의한 환경 훼손의 결과라는 데 대해 별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기후 변화의 문제는 공기가 숨쉬기도 어려운 것이 된다는 것 외에, 바다와 육지와 동식물의 환경조건에 대변화가 일어나 현재의 인류가 거기에 적응해 살기가 어렵게 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다가온다는 경고에 사람들이 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내일과 내일을 넘어 미래의 일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면서도, 무엇보다도 오늘을 살아가기에 바쁜 것이 사람의 삶이다.
보고서의 진단은 대체로 이미 알려진 것들이다. 근년에 증가한 탄소배출은 지구의 평균 온도를 위험할 정도로 상승하게 한다. 허용될 수 있는 온도 상승은 2도 이내인데, 지금의 속도로 탄소 배출이 계속되면, 2100년을 기준으로 해 온도가 3.2도 내지 4.7도 올라가게 되고, 그것은 해수면을 높이고 육지의 많은 부분을 물에 잠기게 하는 외에 사람이 다스릴 수 없는 여러 재난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파국적 결과는 배출이 일어난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배출량 제한 조치는 2030년까지 취해져야 한다.
대책의 핵심은 에너지 출처를 화석연료로부터 다른 재생 가능한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대체 에너지에는 풍력이나 조수, 태양광을 활용하는 발전이 있다. 식물연료(바이오퓨얼)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는 환경오염이 적지 않고, 또 식량 생산의 감소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스는, 환경훼손이 없지는 않지만, 잠정적인 방편으로나마 그 채굴을 중단할 수 없다고 한다. 또 눈에 띄는 것은 원자력 포기를 말하지 않은 것이다. 원자력은 계속 중요한 에너지 자원이 될 수밖에 없되 폐기물 처리의 방편이 따라야 한다고 한다. 후쿠시마 원자로 파손으로 원자로의 위험성에 대한 의식이 높아졌다.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이후 원자력 발전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아베 신조 총리는 원자력 복귀를 선언했다. 독일에서도 후쿠시마 이후 원자력 발전 중단이 정부 정책이 되었지만, 그 대신 더욱 활발해진 석탄 발전으로 탄소 배출량이 증가했다는 보도가 있다.
IPCC의 발표와 관련해 나온 비판의 하나는 보고서가 강조하는 조처들이 개발도상국에 과다한 부담을 준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탄소배출의 책임은 선진국에 있는데, 그것을 억제하려는 조처들은 산업발전에 부담과 제약을 가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협의체에 개발도상국가들의 대표가 더 참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이미 이 유엔 기구에 참여하고 있는 연구자들의 30%는 개발도상국들을 대표한다.
개발도상국의 문제는 산업발전이 인간의 삶에 대해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결국 기후 변화와 환경의 문제는 산업발전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연구는 오늘의 산업구조·경제구조의 근본적 개혁이 없이는 기후와 환경의 문제는 해결할 방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에 따르면 지금의 발전된 산업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몽유병자처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류전멸의 낭떠러지로 떨어져 가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번 칼럼에 언급한 영국의 경제사가 리처드 스미스는 지금의 에너지 생산 체제를 완전히 오염 없는 체제로 바꾼다고 해도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17%가 제거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통계를 그대로 따른다 해도 배출되는 탄소의 14.3%가 교통수단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없앨 수 있다면, 이 둘을 합쳐, 이번 보고서에서 한국을 포함한 산업선진국이 감축해야 하는 배출 가스의 30~50%의 하한선까지 감축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광범위한 자료 조사에 기초한 스미스의 연구는 기후 문제를 넘어서 그 원인이 되고 있는 산업문명의 자연 파괴, 자원 고갈, 공기 오염, 삶의 황폐화 등 문제들을 전반적으로 망라해 언급하고 있다. 깊이 검토해야 할 것은 이 문제들 전체다.(그의 견해가 담긴 ‘자본주의와 지구 생명의 파괴: 인간 구출을 위한 여섯 가지 테제’는 인터넷 저널인 ‘현실세계 경제평론(Real-World Economics Review)’에 실려 있다. 내년 봄에 출간될 단행본은 이에 대한 더 철저한 조사와 성찰을 담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환경 파괴가 엄중한 인간 생존의 문제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통계를 인용해 스미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300만 년 전에서 500만 년 전까지의 플라이오세(世)(Pliocene) 이후 대기에 쌓이는 탄소량이 지금처럼 높아진 일이 없다. 그로 인한 온도의 상승은 툰드라, 그리고 북극의 얼음을 녹여 탄소 외에도 메탄가스가 방출되게 한다. 이 외에도 여러 면에서 자연 질서의 파괴와 그에 따른 부작용이 번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무분별한 천연자원의 개발은 수억 년에 걸쳐 형성된 생태계가 무너지게 하고 생물들로 하여금 그 서식지를 잃게 한다. 싼 값의 가구를 만드는 어떤 회사는 재목을 위한 삼림 남벌로 시베리아와 말레이시아의 삼림을 사라지게 한다. 폭력, 강간, 소년병 동원 등이 난무하는 동부 콩고의 혼돈은 전자제품에 필요한 희토(稀土)의 채굴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 농업기업들의 농약 살포가 벌과 나비와 새를 몰살하고, 개인 농업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도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환경 파괴는 대규모로 행해지는-주로 대기업의 이익 추구를 위한-산업활동의 결과이지만, 대부분의 오늘의 인간은 알게 모르게 여기에 가담하고 있다. 기후 변화, 그리고 환경 파괴의 핵심에 있는 것은 경제성장이다. 모든 나라와 대부분의 사람은 경제성장의 목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성장이나 산업생산 그 자체가 아니라 경제의 초점이 삶의 필요가 아니라 소비 내지 과잉소비에 맞추어져 있다는 데 있다.
스미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제품은 허영에 호소하고, 그 이익은 풀어 놓은 탐욕에 부응한다. 인용된 간디의 표현으로 말하건대 “(지구의) 재화는 사람의 필요를 충족하고도 남지만, 어떤 사람들의 탐욕을 위해서는 그것은 충분할 수가 없다.” 오늘의 체제에 요구되는 것은 삶의 진정한 필요와 과잉소비 또는 과시소비를 가리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는 것은 윤리적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스미스의 견해가 주의를 끄는 것은 자연 환경의 파괴나 자원의 고갈에 대한 그의 우려에 인간에 대한 윤리적 비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정한 필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바른 관계에 대한 이해에는 윤리적 판단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판단 또는 그 부재는 생산과 판매의 과정에도 들어 있게 마련이다. 오늘에 와서 생산품은 일정 기한 후에 고장이 나고 폐물이 되게끔 고안해 제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치의 욕망에 겹치고 개량과 발전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20 세기 초의 자동차 산업을 말하는 데 나오는 이야기로, 자동차 제조업자는 처음에 튼튼하고 오래가는 자동차를 만드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소비자의 허영심을 자극할 목적으로 연도별로 새로운 스타일의 차형을 내는 것을 고안해냈다. 1950년대에 비해 2000년대에는 자동차의 무게가 두 배가 되었다. 그것이 더 큰 이익을 낳고 소비자의 허영을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체제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스미스는 산업과 사회의 혁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치적 움직임이 이것을 주도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에 대한 대처는 인간적인 사회의 실현의 문제로 귀착한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와 인간은 오늘의 낭비적인 경제체제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스미스의 계산으로는, 미국을 예로 들어, 생산품의 3분의 2가 불필요한 것이고 구매품의 4분의 3이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경제와 정치, 그리고 고용에 대한 요구가 그것을 필요한 것이 되게 한다. 그리고 개인의 심성 자체가 과소비의 체제에 맞추어져 있다. 후진국의 사람들이 경제성장을 바라고 선진국 사람들의 생활용품들, 세탁기, 냉방기, 아이패드, TV, 자동차 등을 부러워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돈 많은 회사의 임원들이 (미국의 경우) 이름난 고급차, 디자이너 복장, 펜션과 별장, 요트, 개인 비행기를 탐하고, 보통사람들까지 유행 의상, 화장품, SUV나 소형 트럭, 방마다 비치된 평판 스크린 TV,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는 휴대전화, 컴퓨터, 단기수명의 유명 가구 등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는 것이 오늘의 세상이다. 스미스의 개혁 프로그램은 이런 상황의 재조정을 주장하는 것인데, 사람들로 하여금 소비주의 체제와 그 심리적 함정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 중앙선데이 | 제371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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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삶 속에서도 멀리 보고 깊게 생각해야 좋은 삶 |
생각의 여러 겹에 대하여 ③ 삶의 문제
최근의 큰 뉴스의 하나는 주로 미국 대학들의 협동 연구 계획인 BICEP 2가 빅뱅의 증거를 발견했다는 보도다. 작은 입자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순식간에 폭발 팽창하여 우주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빅뱅의 이론이고, 이번의 발견은 그 흔적으로 우주의 마이크로파동의 배경에 공간적 뒤틀림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국외자에게 알기 어려운 이론이지만 보도는 우주 창조의 신비를 어렴풋이나마 감지하게 한다.
몇 해 전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 조지 스무트 교수가 이화여대에서 빅뱅 이론에 대한 강연을 하고 청중의 질문을 받았다. 한 학생의 질문은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하는 것이었다. 답은 시간과 공간도 빅뱅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무엇이 있었던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 제기조차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없다는 것은 있음을 전제로 하여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창조에 관한 이론들은 천체물리학의 관점에서 말하든 종교적인 관점에서 말하든 우리의 통상적인 생각의 틀을 완전히 넘어간다. 신기한 것은 논리를 넘어가는 사실을 논리적 사고의 연산(演算)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빅뱅 이론과 같은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보통 사람에게도 140억 년 전의 우주의 시작은 물론, 그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호기심의 관점에서 그렇기도 하지만 더 깊은 의미에서 경탄과 경외를 느끼게 한다. 이 느낌은 우주와 세계를 향하고 또 인간 존재를 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거대한 우주적 과정에서 한없이 하찮은 것인 듯하다. 그러면서 경이로운 것은 이 거대한 과정에 사람이 참여하고 또 나(自我)라는 한없이 작은 존재가 참여의 기여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어떤 천체물리학자들의 ‘우주의 인간 원리(cosmological anthropic principle)’를 생각할 수 있다. 이 원리로 하여 우주를 관찰하고 의식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우연이 아니라 일정한 구도 속에서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 어떤 물리학자들의 이론이다.
이론에 불과하면서도, 그로 인해 우리가 갖는 경이의 느낌이 전혀 현실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종교 또는 윤리적 가르침에서 두루 발견되는 외경심 또는 경(敬)의 태도는 이 느낌에 연결되어 있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외경심이 사람의 실천적 태도에 영향을 끼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이러한 우주적 현상에 대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테두리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적정한 크기의 테두리는 보다 큰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 얼마 전 한 강연회에서 최장집 교수는 학문적 탐구의 의의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 프랑스의 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을 빌려서 학문 연구에 세 가지 층이 있다는 것을 바다의 비유로 말했다. 바다에는 끊임없이 변하는 파도가 있고, 그 아래로 그 나름으로 움직이는 해류가 있다. 또 그 아래에는 거의 움직임이 없는 심해가 있다. 보다 중요한 연구는 파도보다는 해류에 관계된다는 지적이었다.
브로델의 ‘장기 지속(longue duree)’의 개념은 이제는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이것은 사건 하나하나에 주목하는 것보다 긴 시간의 흐름과 넓은 영역에서 드러나는 구조적 변화를 해명하고자 하는 역사 연구의 시각을 규정한다. 물론 보다 깊고 넓은 시각에서 인간 존재를 살피는 역사 연구, 가령 일정한 지역의 DNA의 지속과 흐름을 살피는 연구도 있다 (어떤 생물학자들은 DNA를 통해 유럽의 오랜 인종적 변화의 유형을 추적하려 한 바 있다).
이런 학문 연구 범위의 시각차에 비슷한 것은 사람들의 삶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학자는 나날의 사건을 주로 다루는 역사를 “사건적 역사”라고 부르고 이것은 연대기적 역사를 쓰는 사람이나 저널리스트들이 주로 관심을 갖는 사회적인 삶의 측면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의 삶도 나날의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거기에도 조금 더 긴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이 존재한다. 교육자들은 그날 그날의 삶이 아니라 장기적 목표를 가진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나 현 시점을 넘어선 전망이 없는 삶은 없다. 그러나 사건적 관심도 버릴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삶이다. 삶의 유지 자체가 사건적 주목을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위기의 연속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멀리 내다보고 보다 넓게 생각하면서 사는 삶이 좋은 삶인 것은 틀림이 없다.
우리가 우러러보는 사람은 사건적 삶을 넘어서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정치에 있어서도 지도자란 오늘의 문제를 넘어 멀고 넓게 보는 사람이다. 우주의 시종(始終)에까지 마음을 열어두려는 사람이 정신적 지도자다. 그러나 이 지도자는 천체물리학자와는 달리 그 먼 것에 이르는 비전으로 오늘의 사건적 삶을 밝히고자 한다. 정치 지도자는-또 정치적 비전은-우주의 시종은 아니라도 오늘의 사건을 넘어서는 구조적 변화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늘의 사건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다. 사건적 삶을 벗어날 수 없게 하는 현실이 그 행동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너무 벗어나면, 정치는 대중과의 관계를 상실하고 독재자의 길을 가야 한다.
여기에서 이야기해보려는 것은 인생론이나 지도자론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사회 문제에 대처해나가는 데도 좁고 넓은 틀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모순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보자는 것이다. 정치는 당면한 구체적인 문제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넘어 보다 넓은 지평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면한 사건이 안겨주는 과제, 그리고 보다 큰 현실의 구조와 그것의 바른 변화-이런 것들의 모순은 여러 문제, 사회, 경제, 정치, 국제 관계, 통일의 문제 등에서 풀기 어려운 옹이가 된다.
환경 문제는 오늘의 사회 또는 인류가 부닥치는 가장 큰 범위에서의 문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결정적인 해결을 찾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움의 한 가지는, 삶의 가장 큰 테두리인 환경에 일어나고 있는 재난의 예고가 사람들에게는 과히 크지 않은 사건들로서 체험될 뿐이라는 데 있다. 그리하여 문제의 급박함이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큰 대책들이 작은 삶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영역이 너무 크면 문제는 총괄적 답을 허용하지 않는 복합적 성격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3월 초에 세계적 언어학자이며 반체제비판주의자인 노엄 촘스키 교수가 언어학 강의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강의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강연 내용을 아직은 인터넷으로 접할 수는 없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은 재팬 타임스 인터뷰에 간단하게 표명되었다. 한·중·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는 현 일본 정부의 입장에 비판적인 것은 예상하는 바대로였다. 중국의 팽창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는 그것을 문제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중국의 이해관계의 방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했다. 그의 다른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또는 그 전부터의 미국의 패권주의에 그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미국의 압력으로 제정된 일본의 평화헌법은 자랑할 만한 모범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견해는 촘스키 교수의 정치 논의가 늘 그러하듯이, 관념의 관점에서는 공평성과 이상을 표현한 것이지만 반드시 정치의 현실에 효율적인 것일지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환경 문제에 대한 견해에서는 보다 넓은 관점을 가진 것이면서 충분히 그렇지는 못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문제에 대해 그 전폭적인 테두리와 관련하여 해답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촘스키 교수는 아베 신조 총리가 원자력 발전의 재가동 결정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답하여 원자로의 위험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일부 환경론자-가령 환경론자 제임스 러브록 그리고 누구보다도 환경 운동과 이론의 전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조지 몬비오트-는 화석 연료로 인한 기후변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이 최상의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촘스키 교수는 이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원자력 발전의 기한을 한정해야 하고 그 한정된 기한 내에 재생 가능한 에너지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원자력 발전을 당장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에 비해서는 더 많은 복합적 요소를 참작한 것이다.
그러나 또 고려해야 할 것은 재생 에너지가 환경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영국의 경제사가 리처드 스미스의 계산에 의하면, 원자력 발전을 완전히 재생 에너지로 대체하고 자동차 연료를 전부 전기로 바꾼다고 해도 대기를 오염시키는 온실가스는 17% 줄게 될 뿐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환경 문제의 해결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근본적 개혁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는 이데올로기적 강변(强辯)이 들어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환경 문제의 여러 대안에 폭넓은 고려가 필요한 것임은 틀림이 없다.
- 중앙선데이 | 제367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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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 슬픔에 대한 성찰 없이 삶의 이해는 완전할 수 없다 |
생각의 여러 겹에 대하여 ② 밤의 찬가
지난번 칼럼에서도 지구의 각처에서 일어난 천재(天災)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천재(天災)의 뉴스는 그치지 않는다. 며칠 계속해서 유럽 남부의 폭설, 영국 서남부의 폭우와 홍수, 그리고 미국 남부와 북동부의 폭설 소식이 들려온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아침에는 다시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화산 켈루드가 폭발하였다는 뉴스가 있다. 폭우나 폭설은 기후 변화에 따른 재난-그러니까 다분히 인재(人災)에서 시작한 천재라고도 하고, 또 다른 해석으로는 지구나 우주의 자연스러운 물리적 조건이 원래 그러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이러한 뉴스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되어 재난이 쉬지 않고 일어난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얼마나 긴 기간 또는 넓은 지역을 두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인상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사람이 매우 불안정한 환경 조건 속에서 산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도대체 사람이 생명의 긴 역사 속에서 진화해왔다는 것이나, 보다 짧게는 문명의 변화하는 역사 속에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생존 조건의 불안정을 말한다. 잠깐 편안한 때가 있어도 길게 보면 편안할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얼마 전 영국의 BBC 뉴스 인터넷판에는 여러 연구 결과를 종합한, 지구의 미래의 변화 연표가 실렸다. 삶의 불안정성을 가장 큰 테두리에서 비추어 보게 하는 보도라고 할 수 있다. 지구에 일어나는 변화 가운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500만 년 후에는, 아무 다른 대재난이 없다고 하더라도, 유전자 중 y 크로모솜이 소진되어 인간이 절멸할 수 있다는 예언이다. 문화 자산의 지속을 믿는 사람에게는 지금부터 1000년 정도 지나면 오늘의 언어의 어떤 단어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으리라는 예언이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나는, 고대 한·일관계 연구에 열중했던 경제학자 홍원탁 교수로부터 2000년 전에는 일본과 백제 사이에 소통을 막는 언어적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언어 변화나 종(種)으로서의 인간의 기원과 종말은 우주의 역사로 보아 지극히 짧은 시간-찰나(刹那)에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다. 인간의 존재가 사라진 후에, 생명체의 환경에 여러 변화가 일어나서, 다세포 동물이 없어지고, 광합성이 불가능해져 식물이 없어지는 등의 일이 일어나다가 13억 년 후에는 모든 생명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사이에 지구의 모습도 변하여, 나이애가라 폭포가 없어지고, 지중해가 마르고, 급기야는 모든 대양이 증발하여 사라진다고 한다. 79억 년 후에는 태양의 지름이 확대되어 지구는 수성이나 금성과 함께 태양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고, 200억 년 후에는 우주의 팽창이 모든 물질을 파열하게 하고, 우주가 종말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 후에 우주는 계속적인 파괴와 해체의 과정으로서 지속될 뿐이다.
말할 것도 없이, 국외자가 이러한 예언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의 관점에서도 그것은 확실한 것으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되풀이하건대, 크게 보거나 작게 보거나 변화와 불안정이 인간 조건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상기하는 것이 무슨 의의를 갖는가? 오늘에 중요한 것은 오늘의 관심 범위 내에서의 삶의 조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가는 삶의 조건들-지질학적 또는 우주론적 조건도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반성에 무관계한 일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반성은 인간의 현실 행동에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삶이 무상하고 허망하다는 것은 이미 철학적 형이상학적 인간 이해의 일부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생각은 불교만이 아니라 여러 문화 전통에서의 삶의 근본에 대한 형이상학적 반성에 두루 들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부분적 현실에 대하여 반성의 초연함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실천윤리의 격률이 된다.
제행무상의 깨달음이나 우주의 역사라면 몰라도 끊임없는 재난의 뉴스도 그러한 효과를 갖는 것일까? 우리에게 전해지는 단편적인 정보들은 대체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약화시키는 일을 한다. 직접적인 효과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서 몸을 사리게 한다는 것이다. 건강에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는 정보가 갖는 단적인 효과가 그러한 것이지만, 개인 관계나 사회 관계 또는 국가 관계에서 자기방어적인 태도가 강해지고 법술(法術)이 삶의 전략이 되는 것도 그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보에 대한 태도는 그것이 신변으로부터 또 지리적으로 얼마나 떨어진 데에서 오는 것인가에 따라, 즉 거리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된다. 이것은 2011년의 일본 동부 지방의 지진, 쓰나미, 원전 사고 등과 이탈리아나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재난에 대한 반응을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일어난 일은 드물게 큰 규모의 재난이기도 하였지만, 우리에게 큰 관심사가 되었는데 최근의 일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뉴스에 그치는 감이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거리와 함께 규모의 크기도 우리의 반응에 미묘한 변주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가까운 데에서 일어난 큰 재난은 자기방어의 경계심, 또는 요행으로 그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하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공감과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일본의 후쿠시마 재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적어도 그 당시의 반응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대하여 먼 데에서 일어난 재난은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느낌을 일반화하는 데 작용한다. 이것은 사람의 세계를 널리 말하여 그것을 고해(苦海)라고 하는 경우에 비슷하다. 다만 종교에서 이것은 삶 일반에 대한 슬픔 그리고 고통 속의 인간에 대한 슬픔과 동정으로 이어진다.
이 경우의 자비심은 감정이 인간 조건에 대한 일반적인 느낌을 넘어 개체적인 삶에로 향한 결과이다. 개인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쉽다는 것은 아프리카의 아동 빈곤을 알리는 사진 보도에서, 집단의 사진보다도 한 아이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진이 효과적이라는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다시 이데올로기가 불러일으키는 분노와 실존적 현실에 대한 성찰적이면서 감성적인 공감의 차이도 이에 비슷한 마음의 움직임을 예시한다.
종교적인 또는 성찰적인 자비심이 보통의 삶에서 느끼는 슬픔으로부터 아주 먼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시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가을이다. 가을은 슬픔의 마음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삶의 무상에 대하여 또 일반적으로 자신을 넘어 세상에 대하여 마음을 넓혀주는 매개자가 된다. 대조적으로 기쁨 또는 쾌락은-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마음을 자신에게 집중하게 한다. 물질적 번영과 현세적인 만족-또는 세속화된 행복을 지상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세계는, 오늘의 세계가 그렇듯이, 좁아진 자기중심의 세계이기 쉽다.
보들레르는 세속적 욕망과 동시에 그에 대한 증오와 경멸로 가득 찬 시인이다. 그러나 그가 슬픔과 쾌락의 역설적 변증법을 모른 것은 아니다. 그의 시 ‘반성(Recueillement)’은 적어도 쾌락은 강박을 가져오고 슬픔은 그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온다는 것을 말한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현명하라, 나의 슬픔이여, 고요 속에 견디라, 너는 저녁을 원했거니와 이제 저녁이 왔다. 어두운 저녁 공기가 도시를 감싼다, 어떤 사람에게는 평화, 다른 사람에게는 근심을 가져오며. 천박한 인간의 무리들이 쾌락의 채찍 아래에서, 이 자비심 없는 처형자 쾌락의 재촉으로 노예의 축제에 몰려가 뉘우침을 거두어들일 때, 손을 다오, 내 슬픔이여, 이리 오라, 그들을 멀리하고.
여기에 이어서 보들레르는 슬픔이 옛날을 되돌아보고, 미소하는 회한을 거두어들인다고 말한다. 그 다음에 나오는 시의 마지막 부분의 의미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아치 너머로 죽어가는 해가 잠들고/ 부드러운 밤이 동쪽에서 수의를 끌듯 오는 소리를 들으라”는 구절은, 슬픔이 죽음을 시사하면서 동시에 마음과 세상의 평정을 가져온다는 것을 말한다. ‘반성’은, 모호한 대로, 다른 시인의 제목을 빌려 말하건대 (의미가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밤의 찬가이고 슬픔의 예찬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시를 감상하거나 지구의 도처에서 들려오는 재난 뉴스의 의미를 헤아려 보자는 것만은 아니다. 행복과 쾌락은 삶의 주요한 버팀목이다. 그러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성찰이 없이는 삶의 이해는 완전한 것일 수 없다. 이 이해는 개인에게서만이 아니라 사회나 정치의 계획에서도 깊이 있는 사고(思考)의 기초가 된다. 크고 긴 비전만이 큰 결단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의 조건을 조금 더 길게 봄으로써만 생각할 수 있는 생태환경에 대한 결단에 있어서 이것은 특히 그러하다.
- 중앙선데이 | 제363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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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여러 겹에 대하여, 1 | 요동하는 지구 속의 삶 |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겸손이 참다운 행동의 바탕 |
생각의 여러 겹에 대하여 ① 요동하는 지구 속의 삶
감정을 과장하고 생각을 비틀어서 주의를 끄는 것이 시(詩)고 글쓰기라는 것이 오늘의 통념이다. 이런 조작적인 글쓰기의 병폐의 하나는 글에서는 물론 삶의 현실에서도 참과 거짓의 혼재를 당연한 것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감정화된 글의 허위성은 다른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20세기 영미문학에서 시나 소설의 표현을 될 수 있는 대로 객관적인 언어로 돌려놓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것은 비슷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종길 선생은 영문학자이면서 우리 전통에서의 절제의 문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시인이다. 최근에 발표된 선생의 시에 ‘아, 지구여!’ 라는 것이 있는데 (현대문학 2014년 1월호), 이것은 오늘과 같은 세계화 시대에서 매일매일 접하는 재난의 뉴스 몇 가지를 별 다른 수식이 없이 요약하고 있다.
지난 가을에는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 중부 타클로반 일대에서만 7000명이 넘는 인명을 앗아 가더니 이렇게 시작하여,
| | | ▲ 지난해 11월 태풍 하이옌이 휩쓸고 간 필리핀의 마을 | | ‘아, 지구여!’는 초겨울에 접어들면서 인도네시아 시나붕 화산이 폭발 하여 뿜어낸 재가 8000m 상공에까지 이르고, 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은 금년 들어 열일곱 번이나 화산재를 뿜어냈다는 뉴스에 언급한다. 이런 재난들을 열거한 다음, 시는
동서양 할 것 없이 이 지구덩이가 지금 무슨 발광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이러한 물음으로 끝난다. 그 이상의 감정 표현이나 평석은 첨가되어 있지 않다. 마지막 부분에서 말해지듯이, 시에 열거된 재난은 동에서 서까지, 즉 필리핀에서 시칠리아에 이르고, 시간적으로는 지난 가을부터 금년 초까지 연속해서 일어났으니 불안의 요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에 언급된 것 이외에도 들려오는 천재지변은 끊임이 없다.
이 며칠 사이에도 뉴스는 미국의 북동부와 캐나다 동부 지방의 온도가 영하 50도 이하로 내려갔다는 것을 전했다. 어떤 곳은 전기가 끊어지고, 동사자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날씨 상황과 관련해 특이한 이야기는 미국의 시카고나 인디애나에서 이 혹독한 한파에 대비해 노숙자들을 수용했으나, 그것을 거부해 동사한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노숙자는 다른 때도 합숙소 이용을 기피했다고 한다. 사람의 성미의 특이함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번 북미 대륙을 강타한 바와 같은 한파는 그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 일은 수십 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냉동기후는 북극 근처에서 지구 회전방향과 반대로 도는 냉기류 회오리로 인한 것인데, 이 회오리가 지구온난화로 인해 남하한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최근의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한 지역에서 큰 호수들의 물이 점점 차올라서 바나나·유카 농장들이 없어져 간다는 것이 특별 뉴스가 되었다. 도미니카와 아이티의 경계 지역에는 여러 개의 호수가 있는데, 그중에 가장 큰 호수가 엔리키요 호이다. 근년에 수면이 높아지면서 엔리키요 호는 그전 크기의 두 배, 135평방마일로 넓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주변의 바나나?유카?망고 농장들이 물에 잠기게 되고, 정부에서는 호변의 촌락들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 자체가 비극이라고 하겠지만, 뉴욕타임스의 보도는 여기에 관련된 개인적 비극을 전한다. 호세 요아킨 디아즈의 동생 빅토르는 해외에서 노동하다가 옛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돌아와보니 할아버지의 농지가 물에 잠기고, 소들이 풀을 뜯던 들이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호수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러한 변화를 참아 그대로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빅토르의 반응을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마음에 큰 충격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일일 것이고, 그 충격은 고향의 상실에 관계된 것이었을 것이다. 이 고향은 해외 노동자의 고달프고 고독한 생활에서 한없이 아름답고 정스러운 것으로 비쳤을 터인데, 그 꿈의 고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엔리키요 호수의 수면이 넓어지는 데는 여러 원인이 있을 것으로 말하여진다. 그 하나는 물을 흡수할 수 있는 삼림을 남벌한 것이다. 평균 온도가 낮아져서 호수 물의 증발양이 줄어든 것도 여기에 관계된다고 한다. 다른 또 하나의 설명은 강우량이 평균보다 크게 불어난 것인데, 지구 전체의 기후변화가 그 원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재난의 뉴스들은 인간에게 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엔리키요 호수 지대의 변화가 궁극적으로 기후변화에 있다고 한다면, 다른 원인들도 있기는 하지만, 결국 그것은 사람의 잘못 탓이 되고 그에 대해 사람들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탄소 가스 배출을 비롯해 여러 공기 오염에 대한 국가적인, 그리고 국제적인 대책은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사람이 사람의 일을 경영하는 것이 신뢰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다는 것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천재지변은 사람의 경영 능력을 넘어가는 일이다. 무엇이든 생각대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 능력에 대한 과신의 결과다. 이러한 재난들의 소식을 들으면, 사람의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가냘픈 잎사귀를 타고 거대한 물 위로 떠내려가는 것과 같은 것이 인간 존재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김종길 선생의 시에 언급된 재난들은 태고 적으로부터 사람이 견디어야 했던 인간 조건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매체의 발달이 그것이 인간 생존의 엄숙한 조건이 아니라 뉴스거리가 되게 하는 것일 것이다 (뉴스는 많은 일을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크게 보이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항다반사가 되게 한다).
김종길 선생의 시는 에트나 화산의 폭발을 말하고 있지만, 화산 폭발은 예나 지금이나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에트나 산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화산 폭발 가운데에도 가장 유명한 것은 서기 79년에 있었던 베수비오 산의 폭발로, 그때 폼페이는 완전히 화산재에 덮이고 시민은 몰살되었다. 20세기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의 시 ‘악의 미학’은 79년의 베수비오 산 폭발을 경험하고 그것을 기록한 플리니우스의 편지를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시가 화산 폭발과 같은 재난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을 담은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람이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악의 존재가 삶 전체를 긍정하는 데에 비극적이면서도 불가피한, 그리고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스티븐스의 그러한 주장은 인간사를 이데올로기적 계획에 따라 간단히 개혁할 수 있다는 생각을 경계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스티븐스의 생각에 비해 아마 화산 폭발은 보다 엄숙한 존재론적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두려움은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생태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자연에서 느끼는 두려움이나,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엄청난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으로 하여금 윤리적 책임을 떠맡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 연속선상에서 베수비오 또는 에트나 화산과 같은 산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생명이 주는 복합적인 외포감(畏怖感)을 표현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서양문학에는 에트나 산을 말한 작품이 많지만, 그 화구에 투신하여 자살한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횔덜린이나 매슈 아널드의 시에서 화산의 불꽃은 정신과 생명의 힘에 일치하는 것으로 말하여진다.
자연의 큰 재난을 삶의 조건으로 말하는 것은 숙명론에 굴복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위에 든 여러 재난의 원인은 기후변화에 있다고 한다. 이 변화에 인간의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필요한 것은 대책을 강구하는 적극적 행동이다. 그러나 천재지변과 관련해 생각할 수 있는 두 가지 태도, 인간의 운명의 신비에 대한 외포감과 행동적 대책 사이에 반드시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요나스의 유명한 말에 “당신의 행동의 결과가 진정한 인간의 생명의 영속성에 어긋나지 않도록 행동하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칸트의 지상명령의 공식에 따라 생명 윤리를 규정하고자 한 것이다.
두려움, 외경심 또는 존중은 참다운 행동의 바탕이다. 거기서 행동에 대한 책임의 원리가 생겨난다 (『책임 원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요나스의 중요 저서다). 그것을 반드시 탓할 수만은 없지만, 경제와 정치 발전은 모든 것이 간단한 창의적 발상으로 조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일반화한다. 그러나 심각한 인간 행동은, 다시 한번 요나스의 말을 빌려 ‘생명에 대한 경외감’ 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이렇게 여러 층위 위에서 이루어진다.
- 중앙선데이 | 제359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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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金禹昌,1937~) 고려대 명예교수 전남 함평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1973)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2007),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2012)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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