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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yond reason
중국으로 들어오는 불교
32) 실크로드 개척과 함께 시작된 불교의 전파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교세를 확장하여 여러지역으로 전파됨. 중국으로의 전파는 실크로드가 개척된 이후 활기를 띠기 시작함. 중국과 인도 사이의 히말라야를 우회하여 실크로드가 열림.
장건(張騫, ? ~ 기원전 114년)은 자는 자문(子文)[출처 필요]이며 지금의 산시 성 성고현(城固縣) 사람으로 기원 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으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를 발견하였다고 전해지며, 서역의 한혈마,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왔다는 전설 또한 존재한다. 기원전 139년 한나라 건원 4년, 당시 한나라는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 대월지에 대한 동맹을 맺으려 사자를 모집하였다. 장건이 지원을 해서 지원자 10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역으로 가서 대월지국으로 향하였다. 당시 서역 지방은 흉노의 세력권이었으므로, 장건이 한의 세력권인 감숙성으로 나가자마자 흉노에게 잡히고 만다. 흉노의 군신 선우는 장건이 대월지로 가는 사자임을 알아채고, “월씨는 우리들의 북쪽에 있다. 어떻게 한이 그곳에 사자를 보낼 수 있는가? 만약 내가 한의 남쪽 월나라에 사자를 보낸다면 한은 그것을 허용할까?”라고 말하며, 장건을 십여 년동안 구류하였다. 흉노에서 탈출한 장건은 귀향 노선을 곤륜산맥을 타서, 강 일족의 지배지를 통과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또 다시 흉노에게 붙잡힌다. 일 년 남짓 지나 군신 선우가 사망한 틈을 타서 탈출, 기원전 126년에 마침 한나라로 귀환했다. 출발할 때에 100명 남짓 있던 수행원은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동맹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장건이 가지고 돌아온 서역에 대한 지식은 지극히 귀중한 것이었고, 그 때까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서역의 사정을 듣고, 한은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이 공로에 의해 장건은 태중대부가 된다.
참고) 장건이 서역을 처음 개척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는 중앙아시아 및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끊임없이 사절을 교환했고, 민간인들의 왕래도 활발해졌다. 또한 사신과 민간인의 잦은 왕래는 문물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서역이라는 국교가 열리게 되면서 중국을 방문한 외국 상인들에 의해 진귀한 물품과 문물이 유입되었다. 비단, 향료, 화약, 종이 등이 당시 가장 활발하게 교류되던 생산품이었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서북 지역과 각 민족간의 정치, 경제, 문화를 더욱 탄탄하게 하였다. 비단길을 통해 포도, 호두, 석류, 향류, 약재, 후추, 보석, 유리, 준마, 사자 등의 특산물과 음악, 무용, 천문법,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의 문화 등이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 중원 지방으로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중원의 비단, 칠기, 철기, 화약, 금은식기, 도자기, 복숭아, 배 등의 생산물과 종이 제조법, 제련기술, 화약제조법 등의 기술이 신장웨이우얼자치구로 들어왔다. 이는 인류문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실크로드는 중국과 아시아, 유럽의 각 나라와의 교류를 촉진시켜서 동서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1]
종교적인 면에서도 실크로드는 중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에는 많은 구법승들이 경전을 구하러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로 들어갔고, 각국에서 불교를 지원하는 풍조에 힘입어 많은 인도 승려들이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왔다. 당대에는 불교가 이미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고, 현장(玄奘)의 역경사업이 이루어진 후에는 중국 고유의 유교·도교함께 당대의 3대 사상 중 하나가 되었다. 중국 불교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인도와 중국을 연결시켜준 실크로드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불교 이외에도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로마에서 이단시되었던 네스토리우스교(景敎), 이슬람교 등도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전해졌다. 또한 당대의 장안에는 페르시아인을 비롯해 적지 않은 수의 서역인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호복(胡服)·호모(胡帽)·호악(胡樂)·호무(胡舞)·호병(胡餠) 등 각종 호풍(胡風)을 유행시켰다. 서역의 문물이 중국 사회에 전파되는 한편, 중국의 주철(鑄鐵) 기술, 양잠, 제지법 등이 서방으로 전달되었다. 이러하듯 실크로드는 상업 면에서 뿐만 아니라 다방면적으로 동서문화의 교류라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장건은 한나러 7대 황제인 무제(BC 141~87)때 쿠샨왕조와 동맹을 맺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흉노족에게 잡혀 13년간 유랑을 하다가 기원전 126년 한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돌아옴. 이러한 유랑과정에서 장건이 파악한 중앙아시아와 관련된 정보와 교역로들이 한무제의 팽창정책과 맞물리면서 실크로드 개척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만들어냄.
실크로드는 '오아시스로, 초원로, 해로' 3가지 간선으로 이루어진 교역로를 총칭하는 말. 장건의 실크로드는 오아시스로임. 불교의 중국전파 역시 이 오아시스로를 따라서 이루어짐.
33) 중앙아시아로의 불교전래
실크로드의 서역남로에 위치한 호탄은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은 곳임. 그래서 이 나라는 인도신화에 나오는 사천왕 중 하나이자 북방을 관장하는 비사문천왕을 숭배하며 아소카왕의 아들인 쿠날라가 건국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음.
바미얀과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키질 그리고 돈황
바미얀은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지중 한곳으로 2001년 탈레반이 파괴한 바미얀 석불이 있었던 지역임.
바미얀은 서쪽과 북쪽으로는 실크로드가 지나가고 남쪽과 동쪽으로는 인도와 접하는 문명의 접점임. 이곳에 500년대 초 55미터 크기로 조성된 바미얀 석불은 멀리서 오는 대상들에게는 기원의 등대와 같았음.
34) 중국으로의 불교전래
불교전래에 대한 최초의 기록
불교가 중국으로 처음 알려진 것은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온 상인에 의해서였음.
중국의 불교전래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언급되는 기록이 후한서 권 89 '서역전'에 나오는 후한 명제의 감몽구법설임.
주서이기. 중국불교가 만든 허구와 실제
불교의 중국전래와 관련해서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주서이기' 기록임.
35) 중국 최초의 사찰 '백마사'와 '사십이장경'
중국최초의 사찰 '백마사'
백마사 동쪽옆으로 13층 제운탑이 있는데 이 탑에는 백마의 등에 싣고 온 사리가 모셔져 있음.
백마사(白馬寺)는 고대 중국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의 불교의 중국 전래와 관련된 감몽구법(感夢求法) 설화를 토대로 낙양(洛陽) 교외에 지어진 절이다. 낙양 교외 동쪽 1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승 및 문헌으로 확인되는 중국 최고(最古)의 절이기도 하다.
사십이장경의 문제와 불교의 확대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중국에 전한 최초의 경전은 '사십이장경'임. 42장경은 총 42장의 짧은 초기 경전 대목들을 모은 것임.
비법분경, 불교와 중국전통의 충돌
불교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도교와 충돌함. 이를 흔히 '비법분경' 즉 가르침을 비교해서 경전을 불태운다. 비법분경의 자세한 내용은 '불교통기의 권 35 명제, 법림의 파사론' 등에 기록되어 있음. 이에 따르면 가섭마등과 축란법이 중국으로 온지 4년이 경과하자 점차 불교의 영향력이 확대됨. 이에 중국을 대표하는 5 영산 '태산, 화산, 형산, 항산, 숭산'의 도사들이 명제에게 불교를 배척할 것을 주청함. 그리고 불교와 도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는지 가리는 대회를 황제앞에서 해보자고 제안함.
백마사 남문 앞에 불교와 도교 측에서 각기 단을 쌓아 성상과 성물, 경전들을 모셔놓고 기도를 한 뒤 불을 붙여 타지 않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하자는 제안. 그 결과 불교의 단에서는 사리가 빛을 발하여 불기운을 눌러 노랗게 변색될 뿐 타지는 않았음. 이 사건이후 불교 경전의 표지는 황색으로 사용하고 도교 경전은 검은색을 사용함.
36) 외국인 승려의 입국과 경전의 번역
중국초기 승려들에 대한 중국 특유의 정리방식
가섭마등과 축법란 이후 중국에는 많은 전도승들이 들어옴. 그 중에는 인도출신의 승려도 있었지만 실크로드 국가 등 불교가 융성한 여러나라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음. 중국에서는 이들 이름에 승려의 출신지역을 성으로 붙이는 특이한 방식으로 그 출신지를 구분함. 중국불교 초기에 경전을 번역한 승려인 '안세고'의 안은 안식국 즉 파르티아를 의미함. 안세고는 안식국 출신의 세고라는 승려인 셈임. 지루가참은 월지국 즉 쿠샨왕국의 사람. 강맹상이나 강승희는 강거국 지금의 동투르키스탄 출산, 그리고 인도의 승려는 천축의 축자를 넣어 표시함. 축법란이나 축삭불이 여기에 해당함.
참고) 안세고(安世高, fl. 약 148년-180년)는 후한 시대에 중국에 들어온 역경승(譯經僧)들 중 하나다.[1] 안세고는 안식국의 왕자였으나 왕위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했다.[1] 세고(世高)는 자(字)이다. 성인 안(安)은 그의 출신국인 안식국을 나타낸 것이다.[1] 그는 특히 소승불교의 전적(典籍)인 아비달마와 선경(禪經)에 정통하였다. 안세고는 148년에 뤄양(洛陽)에 들어와 《안반수의경(安般守義經)》을 비롯하여 34부 40권의 불교 경전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1] 그의 불경 번역은 중국 역경사에서 최초기에 해당한다.[1] 후한(後漢: 25~220) 시대에 번역된 불교 경전들은 대체로 딱딱하며 세련되지 못하고 난해한데, 안세고가 번역한 경전들도 그러하다
중국최초의 역경승 안세고
중국불교에서 가장 먼저 경전을 번역한 승려는 안세고임. 안세고는 안식국 왕자출신으로 승려가 된 인물임. 그는 후한 147년 30세 나이로 낙양에 도착하여 20년동안 경전번역에 몰두함. 소승불교 책을 번역함.
지루가참의 대승경전 번역
안세고가 중국불교 초기에 소승경전을 번역하여 유통시켰다면 지루가참은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대승경전을 번역한 승려임. 지루가참은 160년경에 낙양으로 건너와 많은 대승경전을 번역함. 총 14부 27권.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대승불교의 수행법과 관련된 '반주삼매경 1권과 광매삼매경 1권, 수능엄경 2권'임. 이들은 대승불교에서 붓다를 관상하는 명상 및 빛과 마음의 문제를 이해하는 수행경전임. 또한 도행반야경을 번역한 사실을 보면 지루가참이 반야공 사상과 관련이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음
참고) 지루가참 : 147년 후한의 뤄양으로 와서 183년(중평 3년)에 이르기까지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수릉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아축불국경 등 14부(일설에 따르면 23부)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가 사용하였던 원전은 거의 대승경전이었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중국에 대승경전을 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제자로는 지량(支亮)이 있으며, 지루가참·지량·지겸(支謙 : 삼국시대의 역경자)의 셋을 삼지(三支)라고 한다.
안세고가 중국에 소승의 수행법을 전했다면 지루가참은 대승의 수행법을 전함. 이는 중국 불교의 시작이 명상 등의 수행과 관련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어 주목됨. 안세고의 소승경전 번역은 소승선관의 전래, 지루가참의 대승경전 번역은 대승선관의 전래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함. 지루가참이 소개한 대승 수행법은 이후 천태 지의의 지관법을 거쳐 마침내 선불교(가장 중국적인 불교)라는 이름으로 맺어짐.
37) 유목민의 중국정복과 불교의 확대
삼국의 혼란기에 확대되는 불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한나라때이지만 당시 중국인들은 불교에 관심이 없었음. 위촉오 3국은 184년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한나라가 무너진 뒤 형성됨. 이 혼란기 100년 동안 중국인구는 5천만에서 1천만으로 줄어듬.
한나라 말기부터 삼국의 성립까지 과정을 담은 역사책 '삼국지연의'를 보면 유교와 관련된 사상가는 거의 없음. 이러한 공백상태에서 불교가 영향력을 확대함.
고승전 권 4 등에 중국불교 최초의 서역 구법승으로 기록된 '주사행'에 대한 내용을 보면 주사행은 당시 당시 관심을 기울이던 도행(반야)경의 내용이 불충분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해 260년 서역남로를 이용하여 호탄(우전)에 도착하여 '대품반야경'을 입수해서 중국 낙양으로 보낸 뒤 자신은 호탄에서 입적함. 당시 반야 사상의 인기와 중국인의 열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임.
참고) 《고승전》(高僧傳)은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梁: 502-557) 때 승려 혜교(慧皎: 497-554)가 저술한, 고승들의 전기를 집성한 문헌("고승전")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승전으로, 후대의 다른 고승전과 구분하기 위해 양나라 때 편찬되었다 하여 《양고승전》(梁高僧傳) 또는 《양전》(梁傳)이라고 부른다.[1] 후대에 쓰인 여러 고승전의 표준이 되었다
유목민 세력의 성장과 불교의 번성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농업을 권장함. 상인들은 이익을 쫒아 이동하기 쉬운 반면 농경민들은 땅에 매여 단순하고 반복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 호전적인 유목민은 특히 경계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함. 한나라 이후 삼국시대에 만리장성 밖의 유목지대는 불교를 신앙하는 불교시대가 되었음. 이 만리장성이 무너지는 시기가 바로 5호 16국 시대임.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불교왕조가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함.
고승전 권 9에 의하면 5호 중 갈족이 세운 후조 왕조의 군주 '석호'. 석호는 이적을 행하는 인도 승려인 '불도징'을 책사로 두었는데 불도징은 전쟁에 공로를 세울때마다 사찰을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여 893개의 사찰을 세움.
남조의 성립과 삼론종의 유행
남조를 육조시대라고 함. 이는 장강 이남에 남경을 수도로 한 여섯왕조가 있었던 데 유래한 것임. 이 여섯왕조는 차례대로 오, 동진, 송, 제, 양, 진이었음. .. 미개하다고 여겼던 유목민에게 땅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쫒겨난 한족 지식인들에게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음. 이것이 남조에서 불교가 유행하고 인도의 중관학파와 관련된 '중론, 백론, 십이문론'으로 주요 경전을 삼아 삼론종이 유행하는 배경이 됨.
이와같은 시대적인 환경속에서 불교는 외래문화로 출발했지만 중국과 완전히 하나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