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伽藍配置] 미륵사지는 해발 430m인 미륵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지세는 산의 남쪽 등성이에 있는 사자바위에서 미륵사지를 감싸고 구릉이 좌우로 뻗어내려 있고, 사지(寺址)의 앞에는 연못지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미륵사지는 약 1300여년을 이어온 오래 된 절터로써,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사찰로서 창건되어 폐사될 때까지의 시기는 약 1,000년 가량 유지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기 때문에 시대적으로 가람(伽藍)의 조영은 다양하게 운영된다고 할 수 있다. 가람배치에 있어서 미륵사지는 그 창건시기가 빠를 뿐 아니라, 사역이 넓어 일제시대부터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백제시대의 가람배치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중문(中門) → 탑(塔) → 금당(金堂) → 강당(講堂)을 남북 일직선상으로 두는 일탑식(一塔式) 가람양식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삼국유사』에는 미륵사지는 '전탑과 낭무를 세곳에 두었다.( 殿塔廊 各三所創之 ) 고 한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미륵사지의 가람배치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에 의해 일탑식 가람이 品자형으로 3곳에 배치되어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1945년 광복이후 많은 국내 학자들이 이 설에 대해 여러 가지 이견이나 주장을 하기도 하였지만 결정적인 자료의 부족으로 그것이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1980년이후 문화재연구소의 미륵사지에 대한 종합발굴 조사에 의해 品자형 가람이 아닌 삼원병치식(三院竝置式)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발굴조사에 의한 초창기의 가람배치는 자오선상에서 서쪽으로 23.5。 기울어진 남북축선상에서 남쪽에서부터 중문(中門), 목탑(木塔), 금당(金堂)을 배치하고 그 사방을 복랑(復廊)으로 된 회랑을 돌린 중원(中院)과 동일한 양식을 갖춘 독립된 형식의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을 병치하여 놓고 있다.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의 남회랑은 동서로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동원 동회랑과 서원 서회랑은 남회랑에서 북측으로 4.4m 떨어진 곳에서 시작하여 중원의 동서회랑보다 약간 짧게 북쪽으로 뻗다가 각기 안으로 꺾여 일단 폭을 좁힌 후 각각 동서 양쪽에 세워져 있는 승방자리와 연결된다. 그리고, 승방자리의 끝에서 회랑은 다시 좁혀져 중금당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강당의 동서끝부분과 연결된다. 강당의 뒤쪽으로는 배수로가 설치되고 이를 경계로 하여 강당(講堂)과 같은 동서방향으로 승방자리가 배치되어 있다. 이 가람의 특성은 중심가람을 중원과 동·서원으로 나누어 그 안에 일탑식 가람을 배치한 삼원병치식 가람으로 중원의 북측에 거대한 강당 하나만을 두어 동서원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가람은 백제의 가람양식에 충실하면서도 독특하게 구성된 가람으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원의 탑은 목탑이며, 현재 남아 있는 석탑은 서원의 탑이고, 1992년에 9층으로 복원된 탑은 동원의 탑이다. 통일신라에 들어와서는 사역내에 부분적으로 부속건물들이 들어섰으며 남쪽으로는 남회랑에서 연못지까지 공간을 보토(補土)하고 이 지역을 둘러싼 단랑(單廊)으로 된 후대회랑을 시설하였다. 이 공간 내부에 2기의 당간지주(幢竿支柱)를 만들고 당간(幢竿)을 세웠다. 또한 연못지의 호안(護岸)에도 격지석을 깔아 보강하여 사원의 영역이 더욱 확장된 면모를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중원과 동원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고 그 대신 현재 탑이 남아 있는 서원쪽에서만 축소 운영되었는데, 서승방의 상층에 후대 건물지등이 건립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건물지군이 따로 사역 서편에 조성되어 운영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선시대에는 창건 당시의 건물들은 완전히 그 기능을 상실하고 사역 북쪽에 따로 건물지군을 조성하여 부분적으로 만 운영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같이 미륵사지는 백제 시대는 국찰로써 대단한 가람으로 운영되다가 통일신라때 들어와 백제인에 대한 일종의 회유책으로 약간 확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지원보다는 승려 개인의 역량에 따른 사찰의 운영으로 점차 퇴락하다가 결국에는 조선 중기에 폐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