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실의 혼인 풍속/ 경선
왕건(王建)은 송악(松嶽) 출신 호족 왕륭(王隆)의 아들이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태봉국 왕인 궁예에게 귀순하여 장수가 되었다. 태봉국의 궁예는 관심법(觀心法)이란 독심술(讀心術)로 죄인의 마음을 읽는다고 공언하였다. 궁예는 관심법(觀心法)의 독심술(讀心術)을 증거로 삼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와 백성에게 역모의 죄로 처단하였다. 궁예는 비록 자신이 미워하거나 의심하여 관심법으로 만들어진 죄인을 잔인한 형벌로 다스렸다. 여자도 예외 없이 불에 달군 쇠몽둥이로 음부를 찔러서 불타는 연기가 코와 입으로 나오니, 이를 본 신하와 만백성이 아무리 결백하여도 공포에 떨었다.
이러한 시기에 변방에서 전쟁을 하는 왕건은 항복한 무리를 자신의 군사로 삼았다. 따라서 태봉국의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왕건의 세력은 점점 커지고 신망도 높아만 갔다. 왕건이 도읍으로 돌아와 궁예를 알현하니, 왕건을 위협으로 생각한 궁예가 말하기를 “그대가 어제저녁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데, 사실인가?” 하였다. 당시 궁예는 관심법이란 독심술을 증거로 하여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처벌 하였다. 궁예의 독심술을 모르는 왕건이 태연하게 웃으면서 부인했다. 그러자 궁예가 다그치며 말하기를 "나를 속이지 마라. 내가 정신을 집중시켜서 그대의 마음을 훤히 다 보겠다" 하였다. 궁예는 즉시 눈을 감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독심술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왕건 가까이 있던 최응이 고의로 땅에 붓을 떨어뜨리고, 그 붓을 줍는 척하면서 귀엣말로 속삭였다.
“장군,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건이 거짓으로 역모를 인정했다.
“사실은 제가 모반을 계획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왕건의 말에 궁예가 껄껄 웃었다.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다시는 나를 속이려 하지 말라.”
궁예는 금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를 왕건에게 선물 하였다.
이와 같은 궁예의 행동에 왕건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때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모반을 하자고 하였다. 왕건이 망설이니, 부인 유씨의 설득으로 왕건이 궁예왕을 몰아내고 918년에 고려 태조가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후예로 자처하는 발해(926년 폐국)가 북쪽에 있고, 그 남쪽에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고려가 있게 되었다.
왕건이 고려의 태조가 되니, 신라 경순왕이 935년에 귀순을 하였다. 신라지역을 통합한 왕건의 고려군이 936년 후백제로 쳐들어갔다. 그때 고려군이 완산주에서 후백제의 두 번째 왕인 신검의 항복을 받고 삼국을 통합하였다.
고려가 삼국을 통합한 초기에 지방에는 호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왕건은 각 지방 호족의 딸을 아내로 삼고, 전국의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화합정책을 펼쳤다. 정주의 유(柳)씨, 평주(平山)의 유(庾)씨, 경주의 김(金)씨, 황주의 황보씨, 광주의 왕씨, 충주에 유(劉)씨 등 호족의 딸들과 혼인하였다. 영토통합이 다 이루어질 무렵에는 의성의 홍씨, 평산의 박씨, 신주(信川)의 강(康)씨 등이 더해져 왕건은 총 29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14명의 아내가 자식을 낳아서 25남 9녀가 되었다.
왕건의 아내가 많은 만큼 자식문제도 많았다. 왕건의 29명의 아내에게 번호를 매기지 않으면 역사 연구자들도 그의 가정에 가족관계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이다.
제1비 신혜왕후 유씨는 왕건을 고려 태조왕으로 만드는 공이 있으나 자식이 없다.
제2비 장화왕후 오씨가 장남 무(武)를 낳았다.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가 왕자 태(泰)를 낳았다. 그때부터 조정에서 세자 문제로 고민이 생겼다. 왕건의 왕비들은 모두 지방호족의 딸이다. 지방의 호족들은 외손의 왕위문제에 관심이 쏠렸다. 어느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느냐에 따라 호족들 간에 세력다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왕건은 왕자들의 외척인 호족 간에 세자책봉 문제로 충돌하지 않도록 예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왕건은 어머니가 다른 오라비와 누이의 결혼을 허락하여 부인들 사이에 화합과 부인들의 친정인 호족들의 화합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왕건은 왕자에게 자신의 성인 왕(王)씨를 주고, 공주에게 어머니나 친할머니의 성을 주었다. 따라서 왕건의 딸로서 성씨가 다른 공주들은 그의 왕자들과 혼인을 하는 왕실풍속이 만들어졌다.
왕건의 제2비 장화왕후 오씨의 장남 혜종(제2대)은 공주 3명을 두었다. 혜종의 제1비 의화왕후 임씨가 낳은 공주 2명과 혜종의 제4비 궁인 애이주가 낳은 공주 1명이 있다. 혜종의 장녀 경화궁부인은 왕건의 아들 광종(제4대)에게 시집가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경화궁부인의 동복동생 정헌공주와 이복동생 명혜부인은 기록이 없다.
왕건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의 장남은 제3대 정종이다. 정종의 제1비 문공왕후 박씨·제2비 문성왕후 박씨는 견훤의 사위 박영규의 딸로 친자매인 동시에 왕건의 제17비 <동산원부인 박씨>의 친동생들로 삼중결혼을 하였다. 그 결과 <동산원부인 박씨>는 친동생 2명을 며느리로 맞았으니, 왕건은 처제를 며느리로 삼은 것이 된다. 정종의 제3비 청주남원부인 김씨는 청주 호족 김긍율의 딸인 동시에 혜종(2대왕)의 제3비 <청주원부인 김씨>의 친동생이다. 그 결과 형제가 왕건의 며느리가 되었다.
왕건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차남은 제4대 광종이다. 왕건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공주는 광종의 제1비 대목왕후 황보씨이다. 대목왕후 황보씨의 장남은 경종(제5대)·2남은 효화태자·장녀는 천추전부인·2녀는 보화궁부인·3녀는 문덕왕후(성종비)이다.
광종의 제1비 대목왕후 황보씨의 장남은 제5대 경종이다. 경종의 제1비 헌숙왕후 김씨는 신라 경순왕 김부의 딸이다. 935년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가 경순왕(=김부)에게 시집을 갔다. 경종의 제1비는 낙랑공주가 낳은 딸인 듯하다. 경종의 제2비 ‘헌의왕후 유씨’는 광종의 동복동생 문원대왕 정과 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 소생 ‘문혜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원대왕 정은 광종의 친동생이므로 경종과 헌의왕후는 친4촌이다. 그녀가 사용하는 유씨 성은 아버지 문원대왕의 외가 쪽 성을 따른 것이다. 경종의 제3비 헌애왕후 황보씨는 왕건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인 대종의 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왕건의 제6비 정덕왕후 유씨 소생의 ‘선의왕후(대종의 아내) 유씨’이다. 헌애왕후는 어머니의 성인 유씨 성을 따르지 않고, 친할머니인 성을 따랐다.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는 대종의 딸이며 헌애왕후 황보씨의 친동생이다. 경종의 제5비 대명궁부인 유씨는 왕건의 제6비 정덕왕후 유씨의 3남인 원장태자가 아버지이고, 왕건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둘째 딸인 흥방공주가 어머니이다.
이번에는 왕건의 딸을 중심으로 결혼문제를 살펴보자.
태조 왕건은 신라 경순왕이 항복하자, 그의 장녀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냈다.
왕건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 장녀(낙랑공주)는 왕건의 딸로서 왕씨(王氏) 성을 사용하여 경순왕에게 시집갔다. 왕건은 신라왕 김부(金傅)가 고려 조정에 입조(入朝)함에 따라 정략적으로 낙랑공주라 칭하여 하가(下嫁)시켰다. 왕건의 이 같은 하가(下嫁) 조치는 경주지역의 호족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된다. 훗날 낙랑공주의 딸은 외4촌 오빠인 경종에게 시집온 헌숙왕후 김씨이다. 고려 왕실은 하가(下嫁)한 낙랑공주 고모에 대한 배려로 생각된다.
왕건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의 2녀인 흥방궁주는 낙랑공주의 동복동생인데, 그녀는 왕건의 제6비 정덕왕후 유씨의 3남인 원장태자에게 시집가서 흥방궁대군(興芳宮大君)을 낳았다.
왕건의 제4비인 신정왕후 황보씨의 공주는 대목왕후이다. 대목왕후 황보씨는 왕건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3남 광종에게 시집갔다. 그녀는 경종(주(伷), 제5대)·효화태자·천추전부인·보화궁부인·문덕왕후(성종비)를 낳았다.
왕건의 제6비 정덕왕후 유씨의 장녀는 문혜왕후이다. 문혜왕후는 왕건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4남인 문원대왕 왕정(王貞)에게 시집갔으나, 문원대왕 왕정이 일찍 죽었다. 그녀의 딸인 헌의왕후 유씨는 경종(제5대)의 제2비가 되었다. 헌의왕후의 아버지(문원대왕)는 광종의 친동생이니, 헌의왕후는 남편인 경종과 4촌이다. 헌의 왕후 유씨 성은 왕건의 제6비 ‘정덕왕후 유씨’로부터 가족 혼을 하면서 여자가족 3세가 유(劉)씨 성을 사용하였다.
왕건의 제6비 정덕왕후 유씨의 둘째 딸은 선의왕후 이다. 선의왕후는 왕건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아들 대종(욱)에게 시집가서 효덕태자·성종·경장태자·헌정왕후(경종비)·헌애왕후(경종비)를 두었다. 헌정·헌애 두 공주는 경종에게 시집을 가면서 아우인 헌애가 제3비·언니인 헌정이 제4비가 되었다. 헌애·헌정 모두 정덕왕후 유씨의 성을 따르지 않고, 친할머니인 왕건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성을 따랐다.
경종의 제3비 헌애왕후 황보씨는 목종을 낳았는데, 천추전에서 18세인 목종을 섭정하여 천추태후(헌애)라고 한다. 천추태후(헌애)는 김치양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로 목종의 대를 잇게 하려고 했다. 중신들이 안종과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대량원군(현종)으로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하니, 천추태후(헌애)는 대량원군(현종)을 삼각산 신혈사에 출가시켜 머물게 하였다. 또 천추태후(헌애)는 사람을 시켜 여러 번 대량원군(현종)을 살해하려 하였다. 한 번은 술과 떡에 독약을 넣어 사람을 보내 먹이려 하였으나, 승려가 대량원군(현종)을 토굴 속에 숨겨두고 “놀러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간 뒤에 절 마당에 음식을 버렸더니, 까마귀들이 와서 주워 먹고 모두 죽었다. 그 후에 강조(康兆)가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목종도 죽였다. 그 후 천추태후(헌애)는 황주로 돌아가 살다가 서울로 돌아와 66세에 숭덕궁에서 사망하였다.
헌정왕후 황보씨는 경종의 제4비이다. 헌정왕후 황보씨가 자식을 낳기도 전에 경종이 죽었다. 그녀는 궁궐에서 나와 사가(私家)에 머물렀는데, 꿈에 곡령(鵠嶺)에 올라 오줌을 누니 온 나라가 오줌으로 넘쳐서 은빛 바다가 되었다. 점을 치니 아들이 왕이 될 것이라 했다. 그녀는 “나는 아들도 없는 과부인데, 어찌 아들이 왕이 되랴” 했다. 그러나 헌정왕후는 왕건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의 아들인 안종 삼촌의 집에 드나들면서 간통을 하였다. 하루는 헌정왕후가 안종의 집에서 잠을 잤는데, 안종의 아내가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안종의 집에 불이나자, 문무백관과 성종이 달려와 위문하였다. 그때 안종의 아내가 사실을 성종에게 고하여 안종은 유배를 갔다. 창피를 당한 헌정왕후가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겨우 대문 앞에 이르러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아들을 낳고 죽었다. 헌정왕후가 삼촌과 간통하여 낳은 아들이 현종이 되었다.
왕건의 제6비 정덕왕후 유씨의 셋째 딸인 공주는 사(史)에 이름이 빠졌는데, 동복 언니 문혜왕후·선의왕후가 있다. 이름 없는 공주는 왕건의 제26비 의성부부인 홍씨의 아들인 의성부원대군에게 시집갔는데, 후사가 없다.
왕건의 제8비인 정목부인 왕씨의 공주은 순안왕대비 이다. 명주 왕순식이 외조부인데, 공주의 외조부는 왕씨 성을 하사 받은 김씨 이다. 공주에게 순안왕대비란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아 왕실 족내혼을 하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왕건의 제 12비 흥복원부인 홍씨의 딸인 공주는 사(史)에 이름이 없다. 사(史)에서 이름을 잃은 공주는 왕건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장남인 태자 왕태(王泰)에게 시집갔으나, 후사가 없다.
왕건의 제 25비 성무부인 박씨의 딸인 아홉 번째 공주는 사(史)에 이름이 없다. 공주는 왕건의 딸로서 왕씨(王氏) 성을 사용하여 신라 마지막 왕인 김부(金傅, 경순왕)에게 시집갔다. 공주는 언니 낙랑공주와 함께 왕씨 성을 사용하여 족외혼을 한 왕건의 딸이 되었다.
왕건은 딸들이 고생할까봐 하가(下嫁)시키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왕자가 고모나 누이나 조카를 아내로 삼고, 공주가 숙부나 오빠나 조카를 남편으로 삼았다. 그 결과 왕건의 딸들은 삼촌에게 시집가서 4촌 아우를 낳거나 손자손녀를 낳게 되고, 누이가 오라비에게 시집가서 왕건을 시아버지라 불러야할지 아니면 친정아버지라 불러야할지 난감하게 되고, 고모가 조카에게 시집가서 손자손녀를 낳으면서 이상한 족보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누구를 촌수의 기준으로 정하냐에 따라서 입에 올리기가 민망한 촌수가 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