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창문’은 무엇인가?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보고나서-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선영석
#1. 창문을 넘어서다
100번 째 생일, 주인공 ‘알란’은 양로원 창문을 넘어 세상으로 나선다.
‘양로(養老)’라는 말은 ‘노인을 봉양하다’는 의미인데, 과연 양로원이 그 기능을 다하고 있었을까?
알란의 이웃들은 알란의 100세를 기념하며 알란이 좋아하는 아몬드 케잌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알란은 봉양받아야 할 수척한 노인이 아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뿐.
그는 창문 밖으로 넘어 갔다.
아몬드 케잌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을 인지한 것일까?
그렇게 하염없이 걸어가 버스정류장에서 그는 이야기한다.
‘가장 빨리 가는 티켓으로 한 장 주세요.’
목적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그가 걷는 길이 여정이고 가는 곳마다 목적지였다.
직관의 입장에서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목적지도 합리적 사고가 선정한 처리 방법의 최종 종착지 일뿐이라는 생각에
직관은 ‘지금 그리고 여기(Here and now)’를 중시하는 사고방식이다.
사라진 알란을 찾아 양로원의 식구들, 그리고 형사는 양로원의 구조 속에서 알란이 어느곳으로 나갔을지 생각해본다.
창문도 가능성이 있다고 했으나 ‘100세’노인이 무슨 창문으로 넘어갔겠느냐' 하는 합리적 사고에 막힌다.
결국 알란이 어디로 나갔는지 미궁속에 빠지게 된다.
알란은 아마 이런 상황을 지켜봤더라면 형사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봐, 창문도 문이잖아요.’
#2. 유전의 법칙(?)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갱단의 검은 돈을 손에 넣은 알란.
사실 그는 그 가방을 가지고 가려는 의도는 없었다.
단지 그가 타야 할 버스가 왔었고 버스를 가방과 함께 탔다.
비의도성을 입증하는 것은 하차지점에서 가방을 잊은채 내리는 그의 모습.
이제는 인적이 드문 비링거 역에서 그는 한 사나이를 만나게 되고
보드카 한 잔에 취해 가지고 온 가방이 궁금해져 열어보는데.
웬걸? 5천만 크로나라는 어마무시한 돈이 가방 속에 있지 않았나?
그리고 곧 이어 찾아온 돈가방의 주인.
그렇게 노인의 100세 인생이 마무리되나 보았는데 힘도 좋은 알란.
과거가 의심스러울 만큼 치밀한 한 방에 가방 주인을 제압하고.
이후의 영화는 그의 10대부터 50대까지 한 장면 한 장면 뇌리에 스쳐지나간다.
알란의 아버지는 당시에 콘돔 사용법을 널리 전파하려다 ‘신성 모독’이라는 죄목에 총살형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 또한 ‘직관적인 삶’에 대해 유언을 한 뒤에 저 세상으로 가게 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 괜히 고민해봤자 도움이 안돼.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거고, 세상은 살아가게 되어있어.”
당시의 합리와 이성 속에서 이반했던 부모님의 삶을 이어받은 듯
알란은 폭탄 제조의 달인으로 남다른 능력을 보유하였고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생식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도 알았지만 이미 닥친 일을 어찌할꼬.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그의 모습 속에서 문제에 봉착했을 때 후회와 원인에 대한 판단이 아닌
그 상태에서 해결책을 찾는 직관의 논리가 생각이 났다.
그 이후 우연한 이유로 파시스트인 프랑코의 목숨을 구하며 영웅으로 등극하게 되었고
미국 원자폭탄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직관적인 사고로 핵실험에 성공하는 등
뛰어난 공적으로 자랑하며 승승장구한다.
뒤이어 소련의 스탈린에게 스카웃되었지만
과거 프랑코와의 인연을 스탈린이 증오(?)하며 노동교화형에 힘든 나날을 보낸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그의 모습이지만 자신의 지위가 올라갈 때도 그리고 처참히 내려갈 때도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직관적인 감각에 의존하며 그 상황 자체를 즐기는 모습을 보인다.
‘내가 과연 알란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직관의 패러다임을 배우면서도 이성과 합리의 문화 속에서 살아온 나의 모습을 생각하며
무엇이 ‘방향’인지는 알겠지만 과감히 결단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3. 이상과 합리를 품다.
돈가방을 손에 쥔 알란은 율리우스, 베니, 구닐라를 차례대로 만나며 ‘돈가방을 갖고 튀는’ 공범으로 만들어 나간다.
배당금은 1/2, 1/3, 1/4로 줄어들지만 알란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유유히 수영을 하러 떠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완벽히 직관적인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100세정도 살았으니 인생에 여한이 없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는 완전히 반대로 살았던 베니의 삶을 바꾸어준다.
구닐라에 대한 마음을 재지 말고 자신의 직관을 믿고 그대로 나아가라는 조언.
100세 노인의 삶의 경험이 있는 조언이지만 경험보다 중요한 것은 베니에게 ‘직관’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상과 합리를 품은 알란 칼슨의 삶은 여전히 합리와 이성의 지배 속에 살아가는 세상에 큰 함의를 주는 것 같았다.
#4. 100세 인생
몇 년 전, 이애란의 ‘백세인생’이 큰 히트를 쳤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의학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을 백세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치료의 반복으로 인한 생명 연장에 '진정한 행복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알란 칼슨은 100세의 노인이다.
아무리 정신적인 나이가 젊다고 하더라도 그의 신체적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직관적인 사고는 어릴 때부터 100세의 노인이 된 시간까지 여전히 유효했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100번째 생일을 온전한 정신으로 맞이한 게 아닐까?
사람들은 걱정 속에서 살아간다.
학업에 대한 걱정, 취업에 대한 걱정, 결혼과 육아, 그리고 노후한 자신의 삶이 끝나는 순간을 두려워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알란 칼슨이 그랬던 것처럼.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