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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허가 판자촌의 설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한창 인구 유입이 많을 때는 하룻밤 사이 집이 한 채 들어서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고 한다. 살기 싫다며 눈물을 찍어대는 집사람을 반은 설득하고 반은 우격다짐으로 데리고 와서는 남자들이 집을 짓는 모습이 매일 매일 이어졌다. 슬레이트 지붕에 흙으로 만든 블록이면 그나마 좋은 축에 속했다. 주민들끼리 무허가 건물을 서로 고발하는 일도 많았다. 이씨는 누가 더 좋은 집을 짓거나 하는 것을 보기 싫은 없는 사람들의 고발정신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안창 마을의 토박이 집이라고 할 만큼 오래된 집에 지금도 이씨의 동생이 살고 있다. 이씨의 기억으로 그 집은 자신이 군대를 제대한 이후 7번 고발을 당해 7번을 뜯겨나갔다가 다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운이 나쁜 집은 9번까지도 뜯겨져 나갔다고 한다. “귀퉁이에 땅 하나 쪼매 할애 해가지고 부로꾸 지가지고 스레트 자기 돈으로 사가지고 그냥 하나 지아가 방 하나 부엌 하나 이래가 들어갔습니다.”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내는 집이다 보니 제대로 단열이 될 리가 없었다. 나무를 해다 때면서 난방을 하는 집에 겨울이면 웃풍 때문에 방 안에 있어도 코가 시렸다. 겨울을 지내고 나면 벽지가 성한 집이 없었다. 지금도 주민의 대부분이 사용세를 내며 생활하고 있는 이곳에서 매매라고 하면 권리금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불하도 되지 않은 땅에 권리금이 많다 적다하는 실랑이가 많아 요즘은 매매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여전히 무허가 건축물이 대부분이지만 예전처럼 감시가 심하지는 않아 슬쩍 집을 확장하는 일도 많아졌다. 고지대에 개발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살아가면서 애를 먹기도 많이 했다.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에는 마을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 그나마 수정산에서 흘러나오는 개울물이 참 좋았다. 맑고 양도 많아 물 걱정은 없었다. 여자들은 개울물에서 빨래를 하면 때가 잘 진다고 좋아라 했다. 양동이에 지게질까지 해가며 물을 길어 오는 것이 귀찮기는 했지만 일상이 되어 지내다 보니 그리 문제될 것도 없었다. 여차 하면 장정 둘이 이틀만 파면 지하수가 펑펑 나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그 많던 물들이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 범내는 겨우 개천 수준이 되었고 지하수도 거의 말라가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이 수정산을 가로지르며 생긴 터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이 흐르는 맥을 끊어 놓았기 때문에 얕은 우물물은 모두 말라버렸다고 한다. 그나마 1990년대에 들어 상수도가 들어왔다. 무허가지라 전기나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다보니 계속 무시할 수는 없었나보다. 지금도 당시 지역구 국회 의원을 보면 반갑다. 높은 사람들이 힘을 써줬기 때문에 이런 곳도 그나마 살기 좋아졌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수도가 들어와도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워낙 고지대여서 마을까지 물을 끌어오다 보면 수압이 낮아져서 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랫집에서 물을 다 빼서 쓰면 윗집은 물을 못 쓰기 일쑤였다. 밑에서 물을 어느 정도 쓰고 잠궈 주면 그나마 물이 나왔지만 시간이 되면 꺼져버렸다. 24시간 급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마을 운동 이후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받은 혜택이 있었냐는 질문에 그는 도로 이야기를 꺼낸다. 30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주도하여 포장한 도로를 확장해 나간 것이 가장 큰 혜택이라며. 도로 확장도 그냥 받은 것이 아니었다. 몇 년 전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선일(金鮮一) 사건의 주인공인 김선일이 바로 안창 마을 출신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지역인 이 마을에 세계 각국의 카메라가 모여들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집이라 오리고기집에 가서 어느 집이 김선일 집이냐 묻기도 했었다. 당시 국무총리가 안창 마을까지 방문을 했는데 낙후된 마을의 실태를 보고 마을 개선 사업비가 내려왔다고 한다. 덕분에 도로 정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