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섯 살인가? 제가 어려서부터 한국무용을 했었어요. 초등학교 때는 리틀엔젤스에서 활동하면서 외국도 다니구요.
무용을 하면서 가끔씩은 언니들이 하는 병창도 들어보고, 또 조금 배워보기도 하긴 했었는데, 그래도 그때는 무용이 위주였죠. 그런데 제가 선화예중에 들어가면서 가야금으로 전공을 정하게 됐어요. 그 당시 아버지께서 무용을 굉장히 반대하셨거든요. 그리고 저도 무용을 하면서 공연이 있으면 외국에 6개월씩 나가있어야 하니까 학교생활이 안되더라구요. 한 학기가 성적이며 아무것도 없는거예요. 그런것도 너무 속상하고 해서 초등학교 6학년 때 무용을 잠시 쉬었었는데, 그리고 나서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래도 그때까지 가장 가깝게 들었었고, 조금 만져보기도 했던 가야금을 하게 됐어요.
그럼, 그때부터 '나는 앞으로 훌륭한 가야금 연주자가 되겠다' 하고 결정하신 건가요?
▒ 아니에요. 그때는 내가 가야금을 해서 나중에 어떤 연주자가 되고, 그런 생각은 해본 일이 없고 그냥 전공이니까, 선화예중을 다니니까, 학교를 다니면서 가야금을 하니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 대신에 학교에서 레슨을 한번 받쟎아요, 그럼 저는 따로 레슨을 한번 더가서 더 배우고 그랬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이 계속 쌓여서 실력을 탄탄하게 해준 것 같아요.
전공을 가야금으로 정한 다음에도 꽤 오랫동안 무용을 그만두지 않았는데, 무용과 가야금을 비교해 본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 네.. 제가 대학교때도 무용을 했었어요. 그래서 호주 청소년음악제에 가서도 가야금이 아니라 무용을 했었죠. 그 정도로 무용을 좋아하고, 제가 국악원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언젠가는 무용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문일지 선생님도 나만 보면 '애리야 너는 무용을 꼭 해야돼' 그런 말씀을 하셨고 주위에서도 그런 말씀들을 하셨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내가 가야금을 하기 위해서 무용을 했던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똑같아요. 어차피 연주자는 무대 위에서 보여지는 거쟎아요? 연주할 때 손을 쓰는 모양이나 전체적인 선 같은 것도 무용이랑 다를 게 없고, 힘을 쓰는 거나 호흡도 무용이랑 똑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무용하는 분들이랑 함께 작업을 하다보면 호흡을 맞추기도 쉽고, 무용에서 요구하는 음악을 선택할 때도 쉽게 찾을 수가 있어요.
꽤 오랫동안 가야금하고 인연을 맺고 계신데, 연주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혹은 후배들에게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렇게 얘기해요. 나는 너희들한테 테크닉까지는 가르쳐줄 수 있다. 연주기술은 정말 하나하나 자세한 부분까지 가르쳐줄 수 있지만, 너희의 마음가짐까지는 내가 해줄 수가 없다고.. 연주자라는 것은 겉에서 아무리 포장을 잘해도 무대에 서면 속에 있는 게 다 드러나니까, 어떤 마음을 갖고있고 어떤 사람이라는게 딱 보여지는 거니까 그런 것은 너희들이 잘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수양.. 수양이랄 것까지도 없고 평소에 좋은 마음 갖고,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그냥 편안한 마음가짐 가지라고 그래요.
황병기 선생님께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았고, 음악을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많은 도움, 영향을 받으셨는데 어떻게 만나게 되신건가요?
▒ 88년에 선생님이 홍콩 아시아예술제에 참가하시면서 국악원에서 몇 사람들이 선생님을 도와주게 된 적이 있었어요. 선생님 음악도 연주하고 시나위도 연주하고 그런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때 제가 인제 어린 나이에 국악원에서 발탁이 돼서 선생님을 쫓아가게 됐죠. 그때 선생님을 처음 뵀어요. 그리곤 91년 즈음에 문화부에서 'UN가입 경축 사절단'같은 명목으로 연주자들을 한 백여명 정도 홍보차 해외로 보낸적이 있는데, 그때 또 황선생님을 뵙고, 연주도 함께 했었죠. 선생님께서 특별히 말씀을 해주신 것도 없었고 저도 그때만 해도 너무 어렵기만 한 선생님이라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는데 그때 아마도 선생님이 저를 눈여겨보셨던 것 같아요. 그 다음 92년도에 또 선생님이랑 같이 유럽에 25일 정도 연주를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아이가 둘이나 있고, 그때 작은애가 6개월이었는데 25일 동안이나 떨어져 있어야 하니까 집에서 연주를 못가게 했었어요. 그래서 난 이번에 연주 갔다와서는 국악원을 그만두겠다고, 그렇게 식구들을 설득해서 연주를 나갔어요. 그런데 가서도 연주도 그렇고, 집안생각에 아이들생각에 너무너무 힘이 들더라구요. 그러던 중에 황병기 선생님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그때 선생님이 너무 많은 말씀을 해주셨죠. 지금 국악원을 그만둬도 좋고, 그만두지 않아도 좋다. 그건 그냥 흘러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시면서 오히려 대학원에 들어가보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국악원도 그만두지 않고, 대학원에도 들어가게 됐죠.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연주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 거예요.
가까이서 오랫동안 황병기 선생님을 봐왔는데.. 어떤 분이세요?
▒ 글쎄.. 저는 굉장히 감성적이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굉장히 계획적이고 치밀하고 그러세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한테 많이 혼나죠. 보통 선생님보고 바늘로 콕 찍어도 피 한방울 안나올 것 같다고 그러시쟎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세요. 자상하고 정말 아버지 같으세요. 항상 그렇게 이야기해놓고 저희 아버지한테 미안해하고 그래요.
이건 정말 선생님한테 배웠다, 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 연주는 아직도 멀었어요. 전에 누가 그러시더라구요. 그래도 그렇게 오래 배웠으면 스승보다 나은 게 하나라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런데 없어요. 선생님 같은 소리가 안나요. 아직도 레슨을 받다보면, '저 소리가 나도 나야되는데, 왜 나는 안나지..' 계속 그래요. 그래도 제가 선생님한테 배운 것 중의 하나는, 선생님이 평소에도 표정이 없으시쟎아요? 연주도 그러세요. 그렇지만 깊이가 있어요. 나는 그걸 철학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걸 배우게 되더라구요. 겉으로 막 표현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쟎아요. 선생님이 늘상 하시는 얘기가, 서양음악에도 두 가지 부류가 있대요. 어떤 사람들은 막 몸을 흔들면서 연주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만히 연주를 해도 속에서 소리를 다 낸다구요. 그렇게 봤을 때 황병기선생님은 후자죠. 저도 그런걸 배우게 되더라구요. 소리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곡 연주도 많이 하시쟎아요. 나중에라도 직접 곡을 써보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 아직 그런 생각은 전혀 없어요. 제가 교회에서 연주를 하게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찬양연주 같은 것을 하다보면 편곡을 조금 해야되요. 그것도 너무 어려워요. 있는 곡을 가지고 가야금으로 편곡해서 연주하는 것도 너무 어려운데 작곡까지는 감히 생각 못해요. 작곡자들이 만들어 놓은 음악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하는 것, 지금은 그게 더 재미있어요.
이제는 국악하는 사람들의 폭도 넓어졌쟎아요? 졸업을 하고 연주단체에 들어가서 연주하는 것 말고도 '내 음악을 하겠다'고 혼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새로운 시도도 하고, 그렇게 해서 인정을 받는 사람들도 있는데, 한 10년이나 20년 후에 어떤 모습의 연주자가 되 있을 것 같은가요?
▒ 나는.. 그렇게 앞을 내다보지를 못해요. 그때그때 그 상황에 따라서 열심히 연주를 하는 거죠. 내가 국악원을 그만두게 된 것도, 그리고 들어가게 된 것 부터두요. 앞으로 내가 어떤 연주를 해야지 하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열심히 하다보니까 대학원도 가게되고, 여기 저기에서 강사도 나오라고 하고 그런거죠. 꼭 프리랜서로 연주를 하겠다 그런 생각은 안해요. 그런데 지금은 나도 프리랜서라고 할 수 있쟎아요?
학생들 보면 제일 안타까운게 그거예요. 졸업하고 할 게 너무 없쟎아요. 이번 학기까지 대학원 박사과정에 묶여있어서 아직 실천은 못하고 있지만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놓은 것들이 있거든요. 지금 하고 있는 과정만 마치면, 자유롭게.. 후배들한테 연주할 기회도 많이 만들어주고, 관객들도 더 많이 만나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도 가지고 좋아하게 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제까지 활동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게 있었나요?
▒ 가장어려웠던점.. 글쎄요.. 아이들 어렸을 때 정말 이걸 해야되나 하고 생각했을 때죠. 한 96년도 쯤이죠? 아이들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내가 연주하고, 내가 잘 되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결국은 아이들 때문에 울고 웃는 건데 하는걸 깨닫고, 아.. 아이들한테 신경을 많이 써야겠다 생각을 했죠. 그리곤 국악원도 그렇고 가야금도 다 그만두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부터는 모든 걸 신앙 안에서 다 해결을 해요. 지금까지도.. 제 힘으로는 도저히 할수도 없구요.
그런데 단체에도 한 10년 있어보고, 학교도 나가보고, 결혼해서 아이도 키워보고 그러면서 고민도 많이 해보고, 이렇게 생활에서 경험이 많다보니까 그런 것들이 후배들한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후배들한테 얘기를 많이 해줘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사람들이 어떤 연주자로 봐주고, 기억해 주길 바라시나요?
▒ 그냥.. 예.. 가정도 잘 꾸려나가고, 그것과 함께 연주도 참 잘 하고 있고. 그 두 가지를 병행해서 잘하고 있는 사람.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어요. 이 두 가지를 병행을 한다는 게.. 너무 많은 걸 포기를 해야되거든요. 그런데 아직까지는 이 두 가지를 잘 해왔고 이제는 후배들이나 선생님들도 그런 쪽에서 칭찬을 많이 해주세요. 전에는 선생님들한테 인사도 못하고 집안일에만 신경쓰고, 정말 내 연주 아니면 집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그 안에서 또 내 음악세계가 나오고 해야 하는 것들도 규정이 되고, 이제는 조금 자유스러워진 것 같아요.
5월 28일에 국립국악원에서독주회를 하시쟎아요? 연주회 소개를 좀 해주세요.
▒ 그 동안에는 황선생님 곡을 많이 했었쟎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세계의
여러 작곡가분들이 쓰신 곡들을 연주해요. 우리나라 작곡가이신 나인용선생님, 이영자선생님 그리고 일본에 미끼 미노루, 독일에 마틴 에버라인, 그리고 황병기선생님 곡을 연주하는데요, 나인용선생님 '낙조'랑 이영자선생님 '가야금을 위한 만가'는 원래 이번 독주회때 초연을 하려고 했던 건데 얼마전 21세기 악회에서 음악제를 하면서 초연을 해버렸어요. 그리고 미끼 미노루는 제가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작곡가예요. 저만 좋아해요. 짝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그 분의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곡을 위촉했는데 이번에는 쓰실 수 없는 상황이 됐었어요. 그래서 그 전에 쓰셨던 곡들을 몇 개 보내주셨는데 그 중에서 85년도에 작곡한 '단조'라는 곡을 연주해요. 산조처럼 처음엔 느리게 시작해서 점점 빨라지는 곡이에요. 그리고 마틴 에버라인의 '가을폭풍과 꿈틀거리는 빛'은 현악사중주와 21현 가야금 곡인데, 95년도에 제가 초연했던 곡이에요. 그리고 황병기 선생님 최근곡이죠? 하마단까지 총 다섯 곡이구요, 마틴 에버라인 곡 말고는 모두 12현 가야금으로 연주를 해요. 요즘 창작곡들이 많이 나오는데 17현, 21현, 25현까지 현 수를 늘린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곡이 많쟎아요? 그것보다는 전통가야금으로 연주하는 창작곡이 더 현대적이고 좋은 것 같아요.
이번 연주회 부제가 '경계를 넘어'인데요, 여기서 넘고자 하는 '경계'는 어떤 것일까요?
▒ 글쎄요..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일단, 이번 연주회에서는 1985년에 작곡된 '단조'에서부터 2001년에 작곡된 최신작까지 연주가 되거든요. 20세기와 21세기의 경계를 넘어가는 국악작곡의 흐름을 볼 수 있을거예요. 그 다음에는.. 지역적 경계라고 할 수 있겠죠?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국악이라고 꼭 우리나라에서만 연주되고, 우리나라에서만 작곡되어야 하는 건 아니쟎아요.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번 연주회에는 우리나라 작곡가 뿐 아니라 일본과 독일의 작곡가들이 작곡한 가야금 곡을 연주해요. 소위 '월드뮤직'이라는 장르가 자리를 잡고 있는 지금시점에서, 그런 음악적 흐름에 부응하는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세 번째는 스타일의 경계라고 할까요. 전통음악, 서양음악, 그리고 현대음악 이렇게 세 가지의 다른 스타일에 바탕을 두고 작곡된 음악들이 연주되죠.
연주자로서 늘 관객들과 만나게 되는데요, 연주자들이 자기의 음악적 영역을 확대해가는 방식과 관객들이 원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요. 많은 관객들이 대중음악이라든지 크로스오버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는 편이쟎아요?
▒ 글쎄요.. 대중음악과 만나면 관객들과 쉽게 만날 수 있기는 하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만나고 싶지가 않아요.
산조연습을 하는게 정말 너무너무 힘들거든요. 정말 한 시간짜리 산조 한바탕을 연습하고 나면 다른 연습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거기에 비해 현대음악같은 것은 두 번을 연습하고, 세 번을 연습하고, 계속 연습을 할 수가 있어요. 제가 전에 황병기 선생님한테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선생님, 나 이거 왜 하고있는지 모르겠다고. 이렇게 연습한다고 산조를 누가 듣느냐구요. 듣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구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한사람을 위해서라도 해야한다. 그러시더라구요.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서 내 스타일이나 모습을 바꾸고 싶지는 않아요. 내꺼를 좋아하는 분들이 오시는거죠. 그래서 저는 작은 홀에서 하는 연주가 좋아요. 사람들과 편하게, 쉽게 만나서 연주하는 모습 보여주는 것. 그런 작은데서 하고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요.
93년인가요? 성금연 류 전바탕 연주 독집음반을 내셨죠? 그 이후에 나온 음반이나 계획 중에 있는 것이 있나요?
▒ 93년도에 성금연류 전바탕하고, 94년도였나? 국립국악원에서 생활국악대전집 발간할 때 짧은 산조를 연주했구요, 국악경연대회 수상자들끼리 만든 음반도 있고, 독집 음반으로는 황병기 선생님이 장고를 쳐주시고 제가 정남희 제 황병기류 짧은산조 세 가지를 연주한 음반이 있어요. 그런데 이건 팔지는 않구요, 선생님하고 저하고 돈을 반반씩 내서 만들어가지고 가까운 분들한테만 드리고 있어요. 한정이죠. 그래서 저는 되게 아껴요. 그리고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이제까지 연주한 현대음악들을 녹음하게 될 것 같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아직은 박사과정에서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다른 것들은 할 수가 없었거든요. 앞으로는 정말 자유스럽게, 많은 작곡가들의 음악, 내 해석으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음악들을 해보고 싶어요.
무대위에서 보았던 야무지고 깔끔한 모습. 까다롭고 깐깐할 것 같은 그 모습과 달리 소박하고 솔직한 모습에 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꾸준함과 부지런함에서 비롯되는 편안함과 여유로움이 지애리씨의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애리 씨의 그 소박한 욕심들을 믿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