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노닐고 遊智異山/李仁老
두류산 멀고 저녁구름 나지막한데
수많은 골짝과 바위는 회계會稽와 비슷히구나
지팡이 짚고 청학동 찾아가나니
수풀 너머 흰 원숭이 울음소리 들려오누나.
누대는 아득하고 삼신산三神山 멀기도 한데
이끼 낀 네 글자는 희미하기만.
선원仙源이 어디냐 찾아 물으려 했더니
흐르는 물 지는 꽃에 어딘지 모르겠네
頭流山逈暮雲低 두류산형모운저
萬壑千巖似會稽 만학천암사회계
策杖欲尋靑鶴洞 책장욕심청학동
隔林空廳白猿啼 격림공청백원제
『동문선』제13권
『파한집』에 따르면 이 시는 작자가 당형인 최당과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 나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며 지은 것이다. 창작시기는 시인의 젊은 시절로 짐작된다. 武臣의 난으로 집안이 참화를 당한 뒤 세상과 절연할 요량으로 지리산을 찾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편 『파한집』에는 청학동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소개되어 있다. 지리산 깊은 곳에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매우 좁은 길이 있어 한참을 가면 문득 농토가 있는 넓은 들이 나타난다. 그곳은 옛날에 세상을 피해 숨어 살던 이들의 터전이며 푸른 학이 깃들여 살았다고 전해 내려온다. 현재 지리산 삼신봉 동쪽 기슭 해발 800미터경에 위치한 산골마을(경남 하동 청암면 묵계리)을 청학동이라 부르지만 작자가 찾던 바로 그곳인지는 알길이 없다.
이 시에서 청학동은 미지의 이상향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東晉의 陶淵明이 「桃花源記」를 남긴 이래 ‘武陵桃源’은 동양의 전형적인 유토피아상으로 수용되었다. 그렇기에 청학동을 노래했음에도 이 시에는 무릉도원에 대한 관념적 인식이 산재한다. 1연에서 지리산을 중국의 ‘회계’와 비슷하다고 한 까닭은 무릉이 해당지역에 속한 때문이다. 2연에서 지리산에 실재하지 않는 ‘흰원숭이’를 언급한 까닭도 중국 남방의 생태환경을 염두에 둔 때문이다. 4연에서는 또 도화원을 연상케하는 ‘仙源’과 지는 복사꽃을 상기시키는 ‘낙화도화원’을 연상케 하는 ‘선원’과 지는 복사꽃을 상기시키는 ‘낙화’를 시어로 사용했다. 이로써 청학동은 무릉도원의 낙원 이미지를 확연히 갖추게 되었다.
아울러 이 시는 청학동을 시선의 땅으로 묘사하며 신비로운 색채를 더 했다. 3연의 ‘三山’은 어딘지 모를 청학동을 둘러싼 산을 막연히 三神山 에 빗댄 것이며, 신선과 관련된 전거가 있는 문자로 추정되는 ‘四子’ 역시 청학동을 仙界로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무릉도원이 후인들에 의해 仙境의 표상으로 취급된 것처럼 청학동을 신선사상과 연계해 파악한 것이다.
그런데 이인노는 훗날 「도화원기」를 반복해 읽은 뒤 후인들이 도원을 선계로 이해한 것은 오독의 결과임을 지적했다. 도원은 선인이 거주하는 도교적 환상 공간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 백성이 사회체재의 간섭과 구속을 배제한 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던 피난처임을 뒤늦게 간파한 것이다. 아울러 청학동 역시 무릉도원처럼 인간 현실과 무관한 신비로운 신선세계가 아니라 이상적인 운둔처일 뿐임을 명료히 지작했다.
이 시에 仙的이고 신비한 색채가 농후하게 드리운 까닭은 이 시가 그 같은 인식 상태 이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출처: 고려 한시 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