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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한수정은 조선 인종 조에 의정부 우찬성을 지낸 바 있는 안동권씨 판서공파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로부터 그의 아들인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 1518∼1592) 그리고 손자인 석천(石泉) 권래(權來, 1562∼1617)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순차적인 과정을 거쳐 가면서 이루어진 정자이다. 이처럼 오랫동안의 과정을 거쳐 건축된 정자의 창건과 중창 및 중건, 중수 등의 내력과 관련된 기록은 문중의 여러 유적에 관해 기록한 석천지(石泉誌)와 권벌의 5대손인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1654∼1725)이 지은 「한수정기(寒水亭記)」 그리고 6대손인 강좌(江左) 권만(權萬, 1688∼1749)이 지은 「한수정중창상량문(寒水亭重刱上梁文)」, 「한수정성훼전말사적(寒水亭成毁顚末事蹟)」 등에 자세하게 남아 있다.
한수정은 1519년(중종 14)에 충재 권벌이 삼척부사로 재임 시 경치가 뛰어난 춘양면을 별장지로 정한 후 밀양부사로 재임 때인 1534년(중종 29)에 한수정 일대의 터를 매입하였고, 1576년(선조 9)에 청암 권동보(靑巖 東輔)가 충재의 유지를 받들어 현재의 한수정으로부터 약 백보 정도 떨어진 곳에 거연헌(居然軒)을 건립하였다. 이후, 1608년(선조 41년)에 충재 손자인 석천 권래(石泉 權來, 1562∼1677)가 조부를 추모하기 위해 한수정을 세웠다. 이후, 거연헌이 1672년(현종13)에 소실되자, 1742년에 중건하였다. 이후, 1848년(헌종 14)과 1880년(고종 17)에 중수하였고 1990년 화재로 손상된 후 1992년 복구하였다. 연지와 석축은 2018년에 정비했다.
한수정이 자리한 춘양면 의양리 마을은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산천의 형승(形勝) 조에 “학봉 김성일의 옛 집안 안동 임하의 몽선각(夢仙閣), 찬성 권벌(權橃)의 옛집인 내성의 청암정(靑巖亭), 정언 권두경(權斗經)의 세거지인 춘양 한수정은 모두 태백산 남쪽 물가에 자리한 이름난 마을이다”라고 기록될 만큼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특히 이러한 절경을 경암(敬巖) 이한응(李漢膺)은 ‘춘양은 신령한 골짜기와 맑은 시내를 가졌다. 춘양의 물은 태백산 서남 두 계곡으로부터 흘러오다가 남류로 합하여 낙강으로 들어가서 수백 리를 흐른다. 태백산은 신령하고 빼어나며 방박한데 춘양이 그 중심에 처함으로써 그윽하고 깊을 뿐만 아니라 시내가 흐르면서 가경을 이루었다’라고 칭송한 뒤 적연(笛淵)에서 도연(道淵)까지 구곡을 설정하고 「춘양구곡가」를 짓기도하였다.
한수정이란 이름은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는 뜻이며, 조선조 명공석사(名公碩士)들이 운집하여 도의를 선양하고 많은 신진학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애국지사들의 집회장소및 은신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寒水亭記
太白之下譚山水者。歸之春陽。春陽之間名泉石者。歸之寒水亭。寒水吾家莊也。
태백산 아래에 산수를 이야기 하자면 춘양만 한 데가 없고, 춘양의 자연 풍광은 한수정만 한 곳이 없다. 한수는 우리 집안 장원이 있는 곳이다.
吾家春陽卜莊。自冲齋先生始。而時則未有宅。置宅自靑巖公始。而居然軒以瑰偉擅勝。
우리 집안이 춘양에 장전(莊田)을 마련한 것은 충재 권벌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때에는 아직 집이 없었다. 집을 지은 것은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뛰어나고 기이한 승경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에 거연헌(居然軒)을 지었다.
寒水之築。自石泉公始也。春陽。安東縣也。吾莊地不屬安東而稱春陽者。以距縣不一里而通爲一郊也。葢太白南支。雄峙磅礴。積翠浮天。
한수정을 건축한 것은 석천공(石泉公) 권동미(權東美)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춘양은 안동현(安東縣)에 있다. 그런데 우리 장원이 있는 곳이 안동현에 속하지 않고 춘양으로 일컬어지는 까닭은 현과의 거리가 1리도 못되고 근교라고는 하지만, 아마도 태백산의 남쪽 줄기가 가파르게 솟아 있으며 푸른 산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
기 때문일 것이다.
其陽爲藏史之閣。其西洞曰道心。溪水出焉。
그 남쪽에는 장상지각(藏象之閣)이 있고, 서쪽 도심(道心)이라 불리는 골짜기에는 시냇물이 흘러나온다.
南流數十里。歷攢巒抵嵁巗。洞天坻石。往往使游者忘歸。
이 냇물은 남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내리며 빽빽이 늘어선 산들을 거치고 험한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깊은 골짜기의 모래톱과 바위들이 놀러온 사람으로 하여금 돌아갈 생각을 잊게 만든다.
直縣之東而爲麗桂潭。層巖支累。有積魚之穴。舊有宋氏主之。名宋穴。
곧바로 현의 동쪽에 이르러서는 여계담(麗桂潭)을 이루는데, 층암절벽이 여러 갈래로 늘어서 있다. 그곳에는 물고기를 쌓아두는 굴이 있는데, 예전에 송씨(宋氏)들이 그곳을 주관하였으므로 송혈(宋穴)이라고 부른다.
又下爲斗郞巖。高大當水衝。其始溪水與縣西新潭小溪。合流於莊之北。渟爲長潭。溶漾淪漣。可負大舟。
또 그 아래쪽에는 두랑암(斗郎巖)이 있는데 높고 커서 수로의 요충지가 될 만하다. 처음에는 졸졸 흐르던 계곡 물이 장전의 북쪽에 이르면 현의 서쪽 신담(新潭)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시냇물과 합류하여 고인 물이 자못 긴 못을 이루는데, 물결이 출렁출렁하여 큰 배를 댈 수 있을 정도이다.
溪傍巨石錯伏。堆阜隆起。高者爲丘。下者爲磯。
물가에는 큰 바위들이 뒤섞여 엎드려 있고 퇴적된 언덕이 치솟아 높은 데는 구릉이 되고 낮은 데는 물가가 된다.
石泉公視而樂之。磯而闢之爲亭。丘而崇之爲臺。亭凡六間。堂四間室二間。南其室以納陽日。北其堂以眺雲山。
석천 권동미 선생이 이곳을 살펴보고 그 경관을 즐겨, 물가에 정자를 짓고 구릉을 높여 대(臺)를 만들었다.
정자는 모두 6칸으로, 당(堂)이 4칸이고, 실(室)이 2칸이다. 실은 남향으로 하여 햇빛을 받아들이고, 당은 북향으로 하여 구름 핀 산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臺之廣可數畝。植以花卉。挾以枏梨。狎水鳥於階除。鉤淵鱗於闌檻。巖居川觀之樂。不出戶庭而取之左右。
여러 이랑이나 되는 넓은 대에는 꽃나무를 심고 좌우에 녹나무와 배나무를 심었다. 계단에서 물새를 가까이 하고 난간에서 물고기를 낚으니, 문지방이나 마당을 나서지 않고서도 은거하여 자연을 즐기는 기쁨을 쉽게 얻을 수가 있다.
縣廨官路不能咫尺。而囂聲不入。塵事不汩。驕陽爍而淸風不息。綠陰合而明月自透。
관아와 그쪽으로 통하는 길이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없어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어오지 않았고 속세의 일로 더럽혀지지 않았다. 강한 햇볕이 내리쬐어도 밝은 바람이 끊이지 않았고, 녹음이 우거져도 밝은 달빛이 절로 비추었다.
翛翛乎悠悠乎。動靜各適。曠奧俱宜。卽太白之山水春陽之泉石。宜不得與玆亭競勝也。
빠르면서도 느긋하구나. 동정(動靜)이 각각 알맞으며 넓음과 그윽함이 적당하고 그윽하니 태백의 산수와 춘양의 경치라 해도 분명 이 정자의 경관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丁未之水。溪歧於斗郞巖。分爲三流。亭下之潭遂淺。旣溪流歲變。近水洲渚。多白石淨沙。
1667년(현종 8)의 홍수로 시냇물이 두랑암(斗郎巖)에서 나뉘어 세 갈래가 되니 정자 아래의 못이 마침내 얕아지게 되었다. 물의 흐름도 해마다 변하여 요즘에는 물이 바닥이 나서 햇볕에 흰 돌과 밝은 모래가 많아졌다.
水淺其鳴鏘然益可愛。凡陰晴晝夜寒暑之變。言不能究其狀。
물이 얕아 그 울리는 소리가 졸졸거려 더욱 사랑스럽다. 흐르거나, 낮이나 밤이나, 춥거나 더울 때의 변화는 그 형상을 이루 다 나타낼 수가 없다.
居然軒爲里人任氏借居失火。今有遺址在寒水亭南百數十步。莊地舊隷奉化。今屬順興。
거연헌(居然軒)은 마을 사람인 임씨(任氏)에게 빌려주어 살게 하였는데, 불이 나서 지금은 다만 한수정(寒水亭) 남쪽 1백 수십 보의 거리에 그 터가 남아 있을 뿐이다. 별장의 터는 옛날에는 봉화(奉化)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순흥(順興)에 속해 있다.
한수정이 위치한 지형은 문수산(文殊山) 자락에서 발원한 조중천과 춘양면 옥선산(玉石山) 자락에서 발원한 낙동강 지류 운곡천이 합수하는 천변의 평지에 위치해 있고, 한수정 왼쪽과 뒤쪽으로는 집들이 들어서 있고, 오른쪽에는 하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다. 천변의 평지 터에 정자가 동남향으로 앉고 남쪽 출입 사주문 주위로 담장이 둘러져있다. 사주문을 들어서면 늘어선 크고 작은 바위와 우측의 400년 수령의 회목(檜木)이 있고, 연지가 정자의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감싸 흐르며, 서쪽 바로 앞에 높은 석단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일곽(一廓) 내에는 정자와 함께 큰 바위를 기반으로 석축을 1m 정도 높여 모를 굴린 방형으로 대(臺)를 쌓고 초연대라 하였고 이 주위를 크게 휘감아 돌아 나가는 연지를 조성하였는데 이를 와룡연(臥龍淵)이라 명명하였다. 현재는 와룡연 주변의 지형이 많이 변하여 자연적인 물흐름이 안되어 인공적으로 물을 흘리고 있다. 정자 전면 서북쪽에는 초연대와 정자 사이에 담장을 쌓고 남측의 출입문보다 작은 규모의 사주문을 하나 더 설치해 두어 와룡연으로 드나드는 출입문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 문을 나서면 와룡연을 건너갈 수 있는 폭 0.6m 정도의 돌다리가 있고 우측으로 보호수로 지정된 400년 수령의 회목이 장구한 한수정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연지는 와룡연(臥龍淵)이라 하는데, 일반적인 방형 연못과 달리 용이 누운 자태를 형상화하여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의 비유”, “때를 만나지 못한 큰 인물”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초연대(超然臺)라 명명한 석단은 불룩 솟은 큰 바위를 이용하여 조성한 높은 대로 여기에 “각종 꽃나무를 심고 주변으로는 느티나무와 배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유흥상경을 즐기기 위하여 사계를 감상할 수있게 화계처럼 꾸민 것으로 보인다. 초연대 북서쪽에는 연지를 건너는 작은 돌다리가 있다. 돌다리를 건너면 작은 사주문이 있고 그 좌우로 담장이 짧게 설치되어 있다. 이는, 한수정에 특정 영역성을 갖게 하여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건립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정자 주위에 담장을 두르지 않았음에 비추어 볼 때 원래는 그냥 외곽 담장없이 북서쪽에서 출입하는 부 출입문을 낸 것일 수도 있다.
한수정의 평면은 T자형으로 세로방향으로 맨 앞쪽에 2칸 온돌방(滌心齋), 뒤로는 4칸 대청을 놓았으며, 가로방향으로는 좌측에 2칸 온돌방(秋月軒), 우측에 1칸 대청이 있다. 세로축과 가로축의 대청과 온돌방을 비대칭으로 구성하고 가로축 바닥이 세로축 바닥보다 한 단 높은 것은 멀리 북쪽의 조중천과 동쪽의 운곡천이 합수해 남류하는 경물과 주변 자연의 부감 차경, 정자내의 연지와 조경을 통한 선경을 감상하기 위한 설계로 보인다. 한수정과 유사한 T자형 평면 누정은 청암정(靑巖亭)과 송암정(松巖亭)이 있는데, 송암정은 평면구성이 거의 같다. 이처럼 봉화 충재 권벌 문중 관련 건축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누정의 평면과 연지, 사당의 독특함은 특별한 조영관에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한수정은 실화로 부분 손상되었지만 옛 모습대로 복구하여 조선후기의 양식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3대에 걸쳐 지은 정자로 기능에 부합되게 최적의 입지를 선정하고 주인의 특별한 관념적 의미를 부여하여 조성한 조경 수법의 특이점과 탁월함이 돋보인다.
한수정 은 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워 정자를 구조하였는데 초석은 자연석 덤벙 주초와 가공된 주초가 혼재되어 있다. 자연석은 주로 정면 쪽에 주로 사용되었고 측면과 배면에는 거칠게 다듬은 4각주초, 주좌가 있는 원형초석, 석탑 부재로 보이는 석재, 고맥이 부재로 보이는 석재, 문인방으로 사용된 석재 등 타 용도로 사용된 듯한 재사용 석재를 초석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재사용 석재 등은 한수정 인근 폐찰(廢刹)된 남화사에서 사용되었던 부재를 옮겨 온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경암 이한응은 ‘춘양은 신령한 골짜기와 맑은 시내를 가졌다. 춘양의 물은 태백산 서남 두 계곡으로부터 흘러오다가 남류로 합하여 낙강(洛江)으로 들어가서 수백리를 흐른다. 태백산은 신령하고 빼어나며 방박한데 춘양이 그 중심에 처함으로써 그윽하고 깊을 뿐만 아니라 시내가 흐르면서 가경을 이루고 있다.’하여 적연(笛淵)으로부터 도연(道淵)까지 구곡을 설정하고 춘양구곡가 를 지었는데, 한수정은 춘양구곡가(春陽九曲歌) 중에서 제8곡(曲)에 해당될 만큼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八曲寒亭際野開。仙臺超忽俯澄洄。
팔곡이라 한수정 가에 들판이 열리고 선대가 높이 솟아 맑게 도는 물을 굽어보네.
遊人莫歎遺芳遠。秋月潭心夜夜來。
유인은 유방이 멀다고 탄식하지 말지어다. 가을달은 못 가운데 밤마다 찾아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