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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근혜 대통령 팬카페 근혜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여왕신화
종북 조직의 실체 | ||||||||||
1. 이석기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 ||||||||||
ㅇ. 학력 : 한국외국어 대학교 용인 켐퍼스 중국어과 졸업(82학번) | ||||||||||
ㅇ. 반국가단체 지하당 민족진주혁명당(민혁당) 경기 남부 위원장으로 활동 : 김일성이 | ||||||||||
1927년 중국 길림에서 청년혁명조직 "반제청년동맹"을 사상적으로 계승된 조직 | ||||||||||
ㅇ. 2003년 국보법 위반으로 징역 2년6월 복역 | ||||||||||
2. 한명숙(전 국무총리,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 ||||||||||
ㅇ. 박성준 : 징역15년 자격정지15년(대법원 형 확정) | ||||||||||
ㅇ. 한명숙 : 징역1년, 집행유예1년, 자격정지1년 | ||||||||||
3. RO(Revolurtion Organization) : 혁명조직 | ||||||||||
ROP(Revolurtion Oganization of People) : 무장인민혁명기구 | ||||||||||
4. 주사파 : 주체사상 신봉자 | ||||||||||
ㅇ. NL파(National Liberation ) : 북한의 대남혁명론인 민족해방 목표 | ||||||||||
일명( NLPDR : National Liberation People Democratic Revolurtion) : | ||||||||||
인민 민주주의 혁명 (국내 다수 세력) | ||||||||||
ㅇ. NDR파(National Democratic Revolurtion) : 민족민주 혁명으로 공산화 | ||||||||||
1). 반제 반파쇼 민족민주화 투쟁위원회(민민투) | ||||||||||
2). 계열 제현의회(CA) | ||||||||||
3). 혁명적 노동자 계급투쟁 동맹(혁노맹) | ||||||||||
4).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연맹(사노맹) | ||||||||||
5). 전국학생 정치 연합(전학련) | ||||||||||
ㅇ. PDR파(People Democratic Revolurtion) : 민중민주 혁명 | ||||||||||
1). 제독 PD파 : 반제, 반독점, 민준민주주의 혁명파 | ||||||||||
2). 제파 PD파 : 반제, 반파쇼 민중민족주의 혁명파) | ||||||||||
ㅇ. 트로츠키파(Trotsky) : 혁명노선에 입각한 남한 공산화 | ||||||||||
1). 국제사회 주의자(IS : International socialism) | ||||||||||
2). 사회주의 학생연합(사학련) | ||||||||||
3).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사노련) | ||||||||||
4). 해방연대 | ||||||||||
5. 주요 학생 운동권 조직 | ||||||||||
1). 전민학련 : 전국 민족 학생 연맹(1981 : 결정적 시기 민중봉기) | ||||||||||
2). 전학련 : 전국학생총 연합회(1985 : 반파쇼, 반독재) | ||||||||||
3). 삼민투 :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을 위한 투쟁 위원회(1985 : 민족통일 | ||||||||||
민주쟁취, 민중해방) | ||||||||||
4). 민민투 : 반제, 반군부, 반파쇼 민족민주 투쟁위원회(1986 : 군부독재, 독점재벌 | ||||||||||
제국주의 타도) | ||||||||||
5). 자민투 :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1986 : 과격투쟁, 민족해방, | ||||||||||
민족민주혁명) | ||||||||||
6). 구학련 : 구국학생연맹(1986 : 미제타도) | ||||||||||
7). 얘학투련 : 전국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맹(1986 : 반공이데오로기 까부수자) | ||||||||||
8). 전대협 : 전국대학생 대표자 협의회(1987 : 보안법 철폐, 미군철수) | ||||||||||
9). 범청학련 : 조국통일 범 민족 청년 학생연합(1992 : 한국을 미국의 구속에서 해방) | ||||||||||
10). 한총련 : 한국 대학 총 학생회 연합(1993 : 국보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 ||||||||||
11). 한대련 : 21세기 한국대학생 연합(2005 : 미군철수, 국보법 폐지, 연방제 통일) | ||||||||||
★ 2011년 7기 목표 : 6. 15(김대중-김정일 선언), 10 ,4(노무현-김정일 선언) | ||||||||||
지지 MB정권의 대북외교정책 고립, MB정권심판 여론 조성으로 대중투쟁 | ||||||||||
6. 국보법 / 집시법 위반자 19대 국회위원 | ||||||||||
구분 | 민주통합당 | 통합진보당 | 새누리당 | |||||||
강기정 | 김경협 | 김성주 | 김재연 | 노희찬 | 심재철 | 정병국 | ||||
김기식 | 김태년 | 민병두 | 오병윤 | 이석기 | 하태경 | |||||
국보법 | 부좌현 | 박홍근 | 서영교 | |||||||
심재권 | 오영식 | 이학영 | ||||||||
임수경 | 은수미 | 정청래 | ||||||||
진성준 | 최규성 | 최재성 | ||||||||
강기정 | 김경협 | 김성주 | ||||||||
김윤덕 | 민병두 | 문재인 | ||||||||
집시법 | 박홍근 | 서영교 | 오영식 | |||||||
우상호 | 우원식 | 이인영 | ||||||||
이원옥 | 원혜영 | 유기홍 | ||||||||
정청래 | 진성준 | 최민희 | ||||||||
최재성 | 홍영표 | |||||||||
반공법 | 이학영 | 한명숙 | 이재오 | |||||||
강기정 | 김경협 | 김성주 | ||||||||
국보법 | 민병두 | 박홍근 | 서영교 | |||||||
집시법 | 오영식 | 이인영 | 정청래 | |||||||
모두위반 | 진성준 | 최재성 | ||||||||
★ 반공법은 1980년 국가보안법으로 변경 | ||||||||||
7. 연대별 사건 | ||||||||||
1). 1960년대 : 지하당 인혁당 사건(남로당 잔존세력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등 지하 | ||||||||||
조직 건설 사업 꾸준히 전개 1962년 결성) | ||||||||||
2). 1970년대 : 지하당 남민전 사건(인혁당 연류자 이재문등이 감옥에서 나와 결성 | ||||||||||
인혁당 사형수8명의 옷을모아 인공기를 모방한 남민전 깃발제작) | ||||||||||
3). 1980년대 : 종북세력의 공개적 활동시기(양적, 질적 일대 전환기) | ||||||||||
1979년 : 광주사태, 1980년 : 서울의 봄 사태이후 급속히 확산 | ||||||||||
4). 1990년대 : 지하당 중부지역당, 구국전위, 민혁당 사건 | ||||||||||
중부지역당 : 북한간첩 이선실(조선노동당 서열 22위) 남파하여 조직 | ||||||||||
5). 2000년대 : 지하조직 일심회 사건(2006년 국가정보원이 적발한 종북조직, 장민호 | ||||||||||
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활동) | ||||||||||
6). 2010년대 : 지하당 왕재산 사건(2011년적발, 북한 대외연락부 지령으로 남조선 | ||||||||||
혁명 구성, 군부대 정보 송부 및 2014년 인천남동공단 폭파 계획 | ||||||||||
■ 제가 저의 임관 47주년 총회때 소개 할려고 간추린 것입니다 | ||||||||||
혹시 내용의 잘못이 있으면 지적 해 주시고 수정사항이 있으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 ||||||||||
시간은 10분 정도 할애 받았습니다 | ||||||||||
요즘 미국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세월호 침몰사고 한 달째인 지난 5월16일, 80여 명의 시위대가 미국 뉴욕의 맨해튼 거리에서 박근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수만 달러를 들여 외신에 광고를 냈다. 간절히 소망한다 황장엽 "김정일 책상 위에서 고정간첩 5만명 명단을 봤다"
2014.01.15 09:56:01 (*.36.*.41) 황장엽; "남한내 고정간첩 5만명 권력 핵심부에도"
"한국 기관 회의내용이 즉각 김정일 책상위에 "南베트남을 패망시킨 간첩 5만명...부정부패 이용 체제 파괴 "남한 통일시 2천만명 숙청, 1천만은 이민 갈 것" 공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j3799&logNo=30114469230
“남한 내에 고정간첩 5만 명이 암약하고 있으며 특히 권력 핵심부에도 침투해있다…. 그쪽(한국) 권력 깊숙한 곳에 이쪽(북한) 사람이 있다…. 우연히 김정일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보았더니 그날 아침 여권 핵심기관의 회의내용과 참석자들의 발언내용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망명 당시 서신)
자유베트남(남베트남)은 시종일관 反美·反戰 데모를 주도했던 간첩과 시민·종교단체의 조직적인 선전선동결과 미군의 전면철수 후 공산화 됐다.
남베트남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당시 기준 세계 4위, 병력 58만 명)에서도 북베트남(월맹)을 훨씬 앞질렀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급 인사의 자제와 돈 있는 집 청년 10만 명 이상이 병역기피 및 해외 유학을 갔거나 군 출신 장군이 운영하는 사기업에서 일했다. 황금만능주의의 병폐가 체제 파괴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사진은 1966년 5월 수도 사이공에서 열린 반전시위 장면이다.
일례로 남베트남 대통령 티우는 패망 당시 철수하는 미군을 향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미군이 마련한 군용기에 몸을 실었다.
티우를 수행한 미국의 CIA 요원은 그의 트렁크를 옮길 때마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금덩이가 한쪽으로 쏠릴 때 나는 소리였다. 미군기는 티우의 금괴를 싣고 첫 망명지인 대만으로 날았다. 티우는 이란의 팔레비나 필리핀의 마르코스에 앞서 스위스 비밀은행계좌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전면 철수 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해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이들은 베트남 전쟁은 민족 간 내전으로 미국 등 외세가 내정 간섭 할 문제가 아니라면서 미국을 고립시켰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수많은 간첩을 파견, 동조자를 포섭하고 각 분야에 간첩을 침투시켜 혼란을 조성하는 등 정부가 힘을 집중시키기 못하도록 했다.
특히 목사, 승려, 학생, 직업적 좌경인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등 가능한 모든 운동체가 총동원되어 티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전쟁반대를 주장하며 1963년 6월 11일 분신 자살한 승려 '틱쾅둑'(Thich Quang Duc) 이후 베트남에서는 종교인들의 분신자살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년 남베트남은 북베트남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개 이상의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당했던 것이다.
패망 당시 베트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채 시민·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미군의 전면철수 후 베트남패망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간 이후에나 확인됐다.
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도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면서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동했다.
간첩들이 가장 많이 침투했던 것은 시민·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反美·反戰평화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해가면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자유베트남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당시 기준 세계 4위, 병력 58만 명)에서도 북베트남(월맹)을 훨씬 앞질렀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급 인사의 자제와 돈 있는 집 청년 10만 명 이상이 병역기피 및 해외 유학을 갔거나 장군이 운영하는 사기업에서 일했다.
언론인들이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고, 이들의 가족-친지들이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베트남은 공산화 이후 지식인, 공무원, 군인, 종교인, 부유층, 그리고 자유 베트남 정부에 협조한 사람들은 전부 재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적대(敵對)계층으로 분류됐으며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로 간주되어 승자의 보복대상이 됐다.
탄압과 차별, 학대와 폭정이 자행되었고 전국 각처에 재교육 수용소가 설치되어 적대계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잡아 가두고 공안경찰을 증원(增員)하여 국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것을 통제했다. 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규정하여 "부모의 흘린 피와 땀, 자식이 흘린 피와 땀이 합쳐야 나라가 번영한다"고 선전하면서 무자비(無慈悲)한 노동을 강요했다.
논과 밭은 국유화되고 영농은 철저한 3모작을, 일반 국민은 헌금을 강요받았으며 돈이 없는 자는 노력봉사를 해야만 했다. 노동자는 한 달에 15kg의 쌀을 배급받아 생활해야 했고, 전쟁부채 상환비, 전비(戰費)기금을 내야 했다.
▲자유베트남이 패망하자 미군 헬기를 타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모습. 이후 베트남 사람들은 공산 치하에서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먹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고 수중에 돈이 없게 하여 국민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철저한 국민재교육을 시행했다. 또한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종래 부를 축척한 모든 것을 부정해 자살을 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공무원(公務員)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경찰(警察) 및 정보요원은 제국주의의 도구(道具)로, 군인(軍人)은 무력으로 총을 가지고 대항했던 사람으로, 문예(文藝)인은 민족정신을 교란시킨 사람으로, 종교인(宗敎人)은 국민을 유혹하여 미신에 빠지게 하고 우매하게 만든 사람으로, 자본가(資本家)는 국민을 착취해 강압적 노동을 시켜 반혁명에 앞장을 섰으며 국민에게 피의 부채를 지고 있다"는 죄를 물어 재교육을 시켰다. 사회주의 혁명에 동참할 선량한 국민으로 개조하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으로 선도할 것이며 노동을 경험하게 하여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길을 열어준다"라고 선전했다.
한 수용소에 2.000명 정도 수용했으며 성(省) 별로 1개 이상이 있고 사이공 주변 등 도시 주변에는 대상자가 많음으로 여러 곳에 설치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밀림지대에 위치시켜 탈출을 방지하고, 나무를 벌목하여 수용소를 짓고 개간하면서 식량은 월 9kg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자급자족하도록 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사용됐던 땅굴의 모습.
수용소 방침 자체가 체형(體刑) 및 학대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작업 실적에 따라서 수용소장의 재량으로 급식의 양을 결정했다.
따라서 제거해 버리고 싶은 적대계층의 사람은 굳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더라도 제거할 수 있게 제도를 만들었다.
가족이나 다른 국민들, 외국(外國)의 항의를 벗어나기 위한 교묘한 방법을 강구해 냈다. 수용소 기간에는 면회가 일체 사절되었고, 편지도 1년 또는 2년에 한번 보낼 수 있었으며 의료혜택은 전무하여 병에 걸리면 바로 죽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혁명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제거했다. 즉결처분된 사람들을 포함, 그 인원은 최소 30만에서 최대 2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확한 통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 출신의 경우 하사관 및 초급장교까지 수용소로 보냈으며, 공무원 종교인 경제인 월남 정부 협조자와 그 가족까지를 포함하면 최소한 100만 명 이상의 인원이 재교육을 받았다고 판단된다.
공산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한 수많은 남부 베트남인들은 즉각 해외 탈출을 시도했다.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망명길에 올랐던 1세대 탈출자들은 미국 등 서방으로 이주하여 비교적 쉽게 그곳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북한 전투기 조종사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호지명.
그러나 1976년부터 탈출한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은 안전한 이주 및 재정착의 보장 없이 무작정 국경을 넘거나, 배를 타고 공산베트남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다른 나라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고, 동남아 일대의 바다를 정처 없이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들이 바로 보트피플(Boat People)이라 불리는 베트남 난민이다.
년부터 1992년 말까지 동남아지역으로 탈출한 사람들의 수는 총 792,893명에 이르렀다. 1979년부터 1992년 말까지 동남아국가들의 난민 수용소를 거쳐 최종적으로 난민자격을 인정받아 서방 등 제3국에 정착한 난민 수는 438,436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정일은 “한반도 적화(赤化)통일 달성 시 1천만 명은 이민 갈 것이고, 2천만 명은 숙청될 것이며, 남은 2천만 명과 북한 2천만 명으로 공산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 공산집단의 이 같은 주장을 절대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운명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북한은 베트남 전쟁에서 조종사, 갱도병(땅굴파기 병사) 등으로 참전해 한국군과 미군을 공격했다.
▲사진은 90년대 초 인민군 유해가 북한으로 이장된 후 베트남에 남은 묘비의 모습이다. 이들의 유해는 현재 북한군 인민군 영웅열사 묘에 안장되어 있다.
미국과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공산당과의 협상도 아니다. 북한 공산 집단에 맞서 우리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의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전쟁은 결국 ‘의지의 대결’이다. 한반도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북한은 핵무기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강성대국’ 진입시기인 2012년부터 한미연합사가 해체되는 2015년을 ‘남조선 혁명의 성숙기’로 보고 있다. 북한 급변사태에 앞서 북한에 의한 남한 급변사태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오히려 위험한 생각이다. 군사 안보전략은 반드시 비관론적 가정에 근거해야 한다. 근거없는 낙관론을 배격해야 한다. 지금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철통같은 총력안보태세를 다짐해야 할 때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다. 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창군 이래 최초의 해외원정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과 함께 자유진영의 공동 방어전선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으며, 4,000여 명이 희생되는 대가를 치렀다. 사진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중 2명의 베트남 어린이를 구출하고 있는 백마부대 장병의 모습이다.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참된 군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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