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증언(證言) - [20] 윤영태(尹泳泰) - 고생과 축복 5. 고생과 축복이 1 1965년 9월 25일 30개월 만기 제대를 하고 10월 1일 옛 임지인 풍산 구역장으로 다시 발령을 받았다. 얼마 후 서울 집회에 참석하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강원도 특별 전도단에 지원하여 특전대 강사로 임명받아 춘성 지역에 배치되었다. 2 신동면을 담당하고 “구국과 반공, 구국과 종교” 등을 주제로 부락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하였다. 그 해 겨울 선생님과 같이 강원도 정선으로 사냥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지역장들과 강사들과 전도대원 등 약 40여 명의 몸에 끼게 되었다. 거기서 선생님과 같이 산에서 불을 피워 놓고 인절미를 구워 먹던 값진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3 3개월간 쌀 1말씩 지원해 주시던 것을 중단하시고 거점을 확보하여 자립 할 것을 지시하셨다. 나는 신동면 신촌리 양재갑(梁在甲) 씨 내외분과 순회 강연할 때 인연 맺었기 때문에 쉽게 그 집에다 거점을 확보하고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활동할 수가 있었다. 4 양재갑(梁在甲) 씨 부인 윤이분(尹伊分) 씨는 평소에 몸이 쇠약한 입장이기는 하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밤중에 기절을 하게 되어 그 남편과 같이 하늘 앞에 매달려 간절히 기도한 결과 소생하여 남편도 신기하게 생각하고 그때부터 신앙이 더욱 확실해졌으며 두 내외가 열심히 전도하고 협조하여 20여 명이 예배 볼 수 있게 되었다. 4개 부락 예배 집회소를 마련하고 전도대원 2명을 더 지원받아 배치했다. 5 1966년 6월 4개 집회소의 우리 식구 20여 명이 매일같이 몰려다니면서 모심기 봉사활동을 하여 좋은 이미지를 심기도 했다. 15일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따라다니며 모심기를 하던 중 6월 10일자로 경북지구 포항 지역장으로 발령받았다. 6 그때 마침 통일 산업 공장 신축을 위해 각 지역별로 헌금 액수를 배정받았는데 포항은 20만 원이었다. 포항에 도착하여 1차적 과제는 배당금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7 식구들과 상의한 결과 윤영순 이영분 두 아가씨들에게 사업을 하게 하고 구역장인 유재훈 씨는 바다에 나가 1개월 간 오징어 잡이를 하여 책임액을 감당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춘자 구역장은 자기 언니에게 협조를 받기로 하는 등 각자 힘껏 헌금하기로 했다. 8 그러나 마음 아팠던 것은 유재훈 씨가 장마를 만나 오징어가 상하여 모두 버렸다는 엽서가 왔을 때며, 이영분 양은 사업을 하다가 집에 가서 결혼할 돈을 얻어 놓았다가 도둑을 맞았다고 울면서 이야기 했을 때였다. 9 40일 하계 전도 기간에는 전도대원이 배치된 구역을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하였는데,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구룡포 최종구 씨의 전도 임지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공기총으로 까마귀를 잡아 삶아 먹던 일이다. 10 10월 10일 울진 지역장으로 발령받고 평해 교회에서 당분간 지내다가 경찰서 앞에 방을 얻어 총포사와 겸하여 사용하였다. 군 소재지는 식구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식생활이란 순 조밥에 소금과 간장으로 때웠다. 11 주로 그때는 총 판매와 4배가 운동 실시, 반공 강연 등이 활동의 주된 내용이었다. 당시 온정리에 이승부 씨 형님을 중심한 그 가정과 이수정 씨가 울진지역에서는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12 1년간 동분서주하다가 67년 6월 10일부로 상주 지역장으로 부임하였다. 여기는 영적으로 얽힌 복잡한 문제가 많아 얼마 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성화학생회를 조직하고 총포사와 사격장을 만들어 협회 사업 지원과 자립경제 기반을 닦았으며 공무원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발이 불어 터지도록 걸어 다니면서 리 단위까지 반공 강연을 하였다. 13 1968년 430가정 축복을 받고자 약혼 특별 수련회에 참석했다. 수련 기간에 서로 소개하고 대상자를 5명씩 적어서 내라고 했는데 3명만 적어 내었다. 공직자가 우선적으로 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약혼하게 되었는데 내 차례가 되어 마음을 조이면서 2층으로 올라가 선생님과 문답을 하였다. 14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앨범을 보여 주시면서 인자하신 어조로 “너는 깔끔하게 생겼으니 이 사람이 어떠냐?” 하시고 2번으로 적어낸 최XX 양의 사진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성격도 잘 모르고 해서 내 성격이 급하고 까다롭기 때문에 평소 성격을 좀 알고 있는 사람을 1번으로 적어 냈으므로 그때 나는 “제가 1번으로 적어낸 사람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15 선생님께서 “1번이 누구냐?”라고 물으시기에 “송영순”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옆에 앉아 계시던 어머님과 최원복 선생님께서 예진님 모시다가 홍순애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충설명을 해주셨다. 16 나는 다시 말씀드리기를 “제가 그 가정을 복귀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서인지 관심을 갖게 되어 아버님께서 염려하실 것을 알면서도 말씀을 드립니다” 했더니 “바탕이 좋지!” 하시면서 “책임을 다하겠느냐?”라고 물으셨다. 그 때 나는 자신 있게 “책임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7 그 책임의 한계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느껴진 것은 지역장으로서 책임과 축복가정으로서의 책임,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책임이라고 생각됐다. 그다음 인자하신 모습으로 그러면 형이 맞는지 보자고 하시면서 밖에 나가 기다리라고 하셨다. 18 나는 선생님 앞에서 대화하면서 정말 부모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할 수 있었으며 축복을 통하지 않고는 참부모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날 수 없음을 재삼 느낄 수 있었다. 며칠간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어 초조했으나 2차 때 약혼을 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19 1968년 2월 22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역사적인 축복 행사를 마치고 피로연 식당에 갔으나 처가 측에서는 복귀된 장모와 처남 둘만 왔고 우리 집에서는 같이 축복받은 누이동생과 나뿐이었다. 물질적으로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으니 초라하기도 하고 섭섭하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20 우리 두 내외는 이제부터 더욱 하늘 앞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노총각으로 축복을 받아서인지 하루도 떨어져 생활할 수 없었다. 교역장 회의에 참석했을 때도 밤 늦게라도 끝나면 돌아와야만 했다. 21 나는 딸같이, 동생같이 많이 이해하고 아껴줄 수 있었다. 성격도 반대이고 연령 차이도 많지만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스스로 발전하는 것 같고 점점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22 1968년 6월 10일의 전국적인 인사이동에 따라 상주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아 놓고 공기총 사업도 흑자를 남겨 지구에 인계하고 충남 지구 당진 지역장으로 부임하였다. 이곳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서 학생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3 우리는 교회 1층에다 공기총 판매센터 겸 문화 빵 가게를 시작하였다. 아내는 첫 아기 임신 중에도 하루 종일 앉아서 빵을 구워 팔면서 생활을 도왔다. 1969년 1월 2일 추운 부엌방에서 딸을 순산했으니 그 아이가 맏딸 순미였다. 24 이곳에서도 총판매를 계속했으며 여러 가지 영적 역사도 많았으나 잘 해결하면서 당진, 송악, 송산 3교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8개월이 지나 1969년 3월 17일 홍성에서 지역장 회의 때 지구내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결정되어서 밤에 돌아와 짐을 꾸려 놓고 18일 아침 8시경 홍종복 지구장님의 지프차를 타고 식구들에게 인사할 시간도 없이 서천으로 떠나왔다. 25 서천 지역에도 식구가 전연 없고 중학생 때 좀 교회 나오던 여고 1학년 윤임순 학생을 며칠 만에 만나 그의 친구 노명숙, 박경숙 등 12명을 모아 3월 말경에 학생회를 조직하고 매일 원리 강의를 실시하니 30~40명씩 몰려나오게 되었다. 26 성결교회의 장로인 교장선생님이 선생들에게 가정방문을 시켜 음성적 반대를 함으로써 학생들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윤임순, 노명숙, 박경숙, 최정숙 4학생은 교실에서 문을 잠그고 큰 창호지 한 장에 혈서를 가득 써서 뜨거운 신앙심과 굳은 결의를 보임으로 학교 측의 반대를 한풀 꺾었다. 학생들이 교회 분위기를 조성하자 신동천, 백병열, 송창복, 윤임순, 노명숙, 노박래 씨 가정이 복귀됨으로 교회의 기틀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27 1970년 12월 1일에는 이소영 여사를 조장으로 한 축복가정 부인 12명이 교회에 파송되어 왔다. 아내도 돌 지난 순미와 100일 지난 인환이를 두고 천안으로 임지를 배정받아 전도 나가고 나는 아기 둘을 데리고 목회 생활하는데 여간 애로가 많은 것이 아니었다. 28 한번은 지역장 회의에 다녀오니 순미가 혼자 놀다가 넘어져 입술에 상처를 심하게 입게 되어 병원에서 꿰매고 돌아와 있었다. 그 후 내가 밖에만 나가려면 다리를 껴안고 “아빠! 이제 가지 마” 하며 같이 있어 주기를 애원하는 모습을 볼 때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9 그리고 인환이는 배가 고파서 주전자에 남은 보리숭늉 찌꺼기를 손으로 집어먹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축복 가정을 내몰지 않으면 안 되시는 하늘의 심정은 오죽하실까! 생각하면서 우리의 어려운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다. 30 더욱이 방 한 칸을 베니어판 조각으로 칸막이를 하여 한쪽은 부인 대원 10여 명이, 한쪽은 지역장이 아기 둘을 데리고 생활하려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
証言(證言) - [20] 尹永泰 - 苦労と祝福 5. 苦労と祝福 1 1965年9月25日、30ヵ月満期で除隊し、10月1日、旧任地である豊山区域長に再び任命された。数日後、ソウル集会に参加して先生の話を聞き、江原道特別伝道団に志願し、特戦隊講師に任命され、春城地域に配置された。 2 新東面を担当し「救国と反共、救国と宗教」等を主題に部落を巡回しながら演説した。その年の冬、先生と一緒に江原道旌善に狩りに行ける機会があって、地域長と講師、伝道隊員など約40人余りの団体に入ることになった。そこで先生と一緒に山で火を焚来、きな粉餅を焼いて食べたことは貴重な思い出として残っている。 3 3ヶ月間、米1斗ずつ支援してくださるのを中断なさり、拠点を確保して自立することを指示された。私は新東面新村里の梁在甲氏夫妻と巡回講演をする時に縁を結んだので、簡単にその家に拠点を確保し、寝食を提供してもらえて活動できた。 4 梁載甲氏の夫人尹伊文氏は、普段から体が衰弱してはいたが、ある日突然夜中に気絶し、載甲氏と一緒に天の前にすがり切実に祈った。その結果息を吹き返し、彼も不思議に思い、その時から信仰がより一層確実になり、この夫婦が一生懸命伝道し協力して20人余りが礼拝に参加できるようになった。4つの部落に集会所を設け、伝道隊員2人をさらに支援してもらって配置した。 5 1966年6月、4つの集会所の食口20人余りが毎日のように集まり、田植えの奉仕活動をして良い印象を植え付けたりもした。15日間一日も欠かさずついて行って、田植えをしていたが、6月10日付で慶尚北道地区の浦項地域長に任命された。 6 その時ちょうど統一産業工場の新築のために各地域別に献金額を配分されたが、浦項は20万ウォンだった。浦項に到着して最初の課題は配当金を解決することだった。 7 食口たちと相談した結果、ユン·ヨンスン、イ·ヨンブンの2人の女性には事業をさせ、区域長であるユ·ジェフン氏は海で1ヵ月間イカ釣りをして責任額を負うことにし、イ·チュンジャ区域長は自分の姉に援助してもらうことにするなど、各自が精一杯献金することにした。 8 しかし、胸が痛かったのはユ·ジェフン氏が梅雨のためイカが傷んで全部捨てたという葉書きが来た時、そしてイ·ヨンブンさんが事業をしている時家に帰って、結婚資金を貰って置いたのに泥棒に盗まれたと泣きながら話した時だった。 9 40日の夏季伝道期間には伝道隊員が配置された区域を巡回しながら復興会をしたが、特に忘れられないのは九龍浦のチェ·ジョング氏の伝道任地で食べ物がなくて空気銃でカラスを捕まえて煮て食べたことだ。 10 10月10日、蔚珍地域長に任命され、平海教会でしばらく過ごし、警察署前に部屋を借りて銃砲士と兼ねて使用した。郡の中心部には食口が一人もいなかったからだ。食生活は100%粟のご飯に、塩と醤油で済ませた。 11 主にその時は銃の販売と4倍化運動実施、反共講演などが活動の主な内容だった。当時、温井里にイ·スンブ氏のお兄さんを中心にその家庭と、イ·スジョン氏が蔚珍地域では中心的な役割をしていた。 12 1年間東奔西走し、67年6月10日付で尚州地域長に赴任した。ここは霊的に絡んだ複雑な問題が多く、しばらく苦戦を強いられたが、成和学生会を組織し、銃砲士と射撃場を作って協会事業の支援と自立経済の基盤を整え、公務員と学生たちを対象に足が腫れ張り裂ける程歩きまわりながら、里単位まで反共講演をした。 13 1968年、430家庭の祝福を受けようと婚約特別修練会に参加した。修練期間にお互いに紹介して対象者を5人ずつ書いて出すように言われたが、3人だけ書いて出した。公職者が優先的に先生と面談をして婚約することになったが、私の番になって気を引き締めながら2階に上がって先生と問答をした。 14 ところが先生はアルバムを見せながら慈しみ深い口調で「あなたはすっきりしているからこの人はどうか?」と言われて2番に書いた崔OOさんの写真を見せてくれた。しかし性格もよく知らないし、私の性格がせっかちで気難しいので、普段性格を少し知っている人を1番に書いたので、その時私は「私が1番に書いた人としてくださればうれしいです」と申し上げた。 15 先生が「1番は誰?」と聞かれたので「ソン·ヨンスン」と申し上げた。すると、隣に座っていらしたお母様と崔元福先生が誉進様に侍ってから洪順愛おばあさんに侍っている人だと補充説明をしてくださった。 16 私は再び申し上げた。「私がその家庭を復帰するために精誠を尽くしているからか関心を持つようになり、お父様が心配されることを知りながらも申し上げます」と言ったら「土台が良い!」と言われながら「責任を全うするか?」と尋ねられた。その時、私は自信を持って「責任を果たします」と答えた。 17 その責任の限界が何かはまだはっきりとは分からないが、その瞬間感じたのは地域長としての責任と祝福家庭としての責任、そして夫としての責任だと思った。それからしばらく慈しみ深い姿で、それじゃ相が合うか見ようと言いわれ、外に出て待つようにと言われた。 18 私は先生の目前で対話しながら本当に両親の愛を熱く体験でき、祝福を通さずには真の父母から生まれ変わ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を再三感じることができた。数日間待ったが、便りがなくもどかしかったが、2次で婚約することになり、感謝の気持ちを禁じえなかった。 19 1968年2月22日、ソウル市民会館で歴史的な祝福行事を終えて披露宴をする食堂に行ったが、妻の実家側からは復帰せれた義母と義弟2人だけ、我が家からは一緒に祝福を受けた妹と私だけだった。物質的にも何の助けも受けられなかったので、みすぼらしくもあり、残念だった。しかし、羨ましいことは何もなかった。 20 私たち二人はこれからさらに天の前に忠誠を尽くすことを誓った。年を取って祝福を受けたせいか、1日も離れて生活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教域長会議に出席した時も、夜遅くなっても終われば必ず帰ってこ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21 私は娘のように、妹のようにたくさん理解して大切にしてあげれた。性格も反対で年齢差も大きいが、調和を成すために努力する中で自ら発展するようで、ますます一体感を感じられた。 22 1968年6月10日の全国的な人事異動のため、尚州である程度基盤を整え、空気銃事業も黒字を残して地区に引き継ぎ、忠清南道地区の唐津地域長に赴任した。ここは学生たちが中心で学生教会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かった。 23 私たちは教会1階で空気銃販売センター兼文化パン店を始めた。妻は最初の赤ちゃんの妊娠中も一日中座ってパンを焼いて売りながら生活を助けた。1969年1月2日、寒い台所の部屋で娘を安産したので、その子が長女のスンミだった。 24 ここでも総販売を続け、様々な霊的役事も多かったが、うまく解決しながら唐津、松岳、松山の3教会を発展させていった。8ヵ月が経った1969年3月17日、洪城で地域長会議の時、地区内の大幅な人事異動が決まって夜帰ってきて荷物をまとめ、18日朝8時頃、ホン·ジョンボク地区長のジープに乗って食口に挨拶する間もなく、舒川に向かった。 25 舒川地域にも食口が全くおらず、中学生の時に教会に来ていた女子高1年生のユン·イムスンさんに数日ぶりに会い、彼女の友人ノ·ミョンスク、パク·ギョンスクさんなど12人を集めて3月末頃に学生会を構成し、毎日原理講義を実施すると30~40人ずつ集まるようになった。 26 聖潔教会の長老である校長先生が、先生たちに家庭訪問をさせ陰で反対をしたため、生徒たちの活動が難しくなると、ユン·イムスン、ノ·ミョンスク、パク·キョンスク、チェ·ジョンスクの4人は、教室の戸に鍵をかけ大きな障子紙一枚に隈なく血書を書いて熱い信仰心と固い決意を見せることで、学校側の反対を治めた。学生たちが教会の雰囲気を作ると、シン·ドンチョン、ペク·ビョンヨル、ソン·チャンボク、ユン·イムスン、ノ·ミョンスク、ノ·バクレ氏の家庭が復帰され、教会の基礎が形成されていった。 27 1970年12月1日にはイ·ソヨン女史を班長とした祝福家庭の夫人12人が教会に派遣されてきた。 妻も1歳過ぎたスンミと100日過ぎたインファンを置いて天安に任地をいただき伝道に出かけた。私は赤ちゃん2人を連れて牧会生活をするのにかなり障害があった。 28 ある時地域長会議に行って帰ってくると、スンミが一人で遊んでいて転び、唇にひどい傷を負い、病院で縫って来ていた。その後、私が外に出るには足を抱きしめ「お父ちゃん! もう行かないで」と言って一緒にいてほしいと哀願する姿を見る時、胸が痛まざるを得なかった。 29 またインファンはお腹が空いてやかんに残っていた麦のおこげ湯のかすを手でつまんで食べていた姿が目に浮かぶ。このような事情を知りながらも国を救うために祝福家庭を送り出さざるを得ない天の心情はいかばかりだろう!と思いはかりながら、私たちの辛い痛みを克服することができた。 30 さらに、一つの部屋をベニヤ板の端くれで仕切り、片方は婦人隊員10人余りが、片方は地域長が赤ちゃん2人を連れて生活しようとしたものだから、不便な点が一つや二つではなかった。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