特集・企画 2018年5月22日
특집·기획
世界広布新時代第34回本部幹部会・信越総会から(要旨) 活動体験
新潟 佐渡圏 頓宮愛子さん(圏総合婦人部長) 浩明さん(圏男子部長)
세계광포신시대 제34회 본부간부회ㆍ신에쓰총회에서(요지) 활동체험
니가타 사도권 돈미야 아이코(권총합부인부장)
히로아키(권남자부장)
숙명을 타고 넘어 사명의 길을
一、日蓮大聖人有縁の地・佐渡で活動する頓宮愛子です。私は佐渡で生まれ育ち、7歳の時、母に続いて入会しました。
唱題と御書が大好きだった母は、常に仏壇の横に「…
니치렌 대성인과 연이 있는 땅, 사도에서 활동하는 돈미야 아이코입니다. 저는 사도에서 태어나 7살 때 어머니를 따라 입회했습니다.
창제와 어서를 대단히 좋아하셨던 어머니는 항상 불단 옆에 “재재제불토(在在諸佛土) 상여사구생(常與師俱生)”(어서 1338쪽)의 경문을 걸어놓으셨습니다. 어디까지나 이케다 선생님 외길의 어머니셨습니다.
아무리 생계가 힘들어도 어머니는 저를 미래부 회합에 보내주셨습니다. 1969년 8월 15일, 도쿄의 니치다이강당(당시)에서 개최된 ‘제2회 고등부총회’에, 사도에서 참석하여 선생님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최고의 원점입니다.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에서 일하면서 야간전문대에서 공부하였고 1976년에 사도로 귀향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사도 광포에 정열을 불태우다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1971년 5월, 사도에 전해져오는 민요 ‘아이카와선창’의 춤을 선생님 앞에서 선보였고 기념촬영을 해 주신 일을 최고로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이인삼각으로 광포에 걸었으며 세 자녀에 둘러싸여 일가화락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3년 9월, 남편이 갑자기 심부전으로 쓰러져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41세. 중학교 3학년, 1학년, 초등학교 5학년인 3명의 아이를 안고 그저 멍하니 내내 서 있었습니다.
그럴 때, 선생님으로부터 조의와 함께 “앞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생(生)도 환희, 사(死)도 환희’라는 강연을 합니다.”라는 전언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하버드대학교에서 강연을 하시기 전에 저희 가족을 지켜봐 주시는 진심에 반드시 ‘생도 환희, 사도 환희’라고 단언할 수 있는 승리의 인생으로 부응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는 낮에는 농협에서 임시 직원으로 일하여 가계를 지탱했고 밤에는 부인부 본부장으로 동지의 격려에 철저했습니다.
그래도 시련은 계속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충격 때문인지, 장녀는 섭식장애(攝食障害)에. 작은 아들은 등교 거부를 하였습니다. 퇴근길과 활동하는 길에 아이들의 무사를 확인하고 시간을 내어 그저 제목을 불러주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런 매일이 몇 년이나 계속되었는데, 이윽고 딸은 병을 완치하고 결혼하여 저에게는 첫 손주도 탄생했습니다. 차남도 발랄하게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장남은 도쿄의 대학에서 사도로 유턴해, 취직하여 권남자부장을 맡기까지 성장해 주었습니다. (박수)
권부인부장을 하던 2012년, 대망하던 ‘사도평화회관’의 낙경식을 맞이했습니다. 로비에는 개관을 기념해 이케다 선생님과 사도 동지의 인연을 소개한 사진 패널이 전시되었습니다.
그 1971년의 사진 속에는 어떻게나 선생님의 바로 옆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 남편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남편과 함께 웃는 얼굴로 회관의 완성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감사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러나 2년 후, 이번에는 31세였던 둘째 아들이 남편과 같은 심부전으로 갑자기 타계했습니다.
이때 며칠 동안의 일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거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장남 부부가 옆에서 지탱해주지 않았더라면 일어설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때도 “아들의 일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위대한 경애로 태어납니다. 남편의 일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전언을 들었을 때, 어머니가 불단 옆에 걸어두셨던 “재재제불토(在在諸佛土) 상여사구생(常與師俱生)”의 경문이 뇌리에 떠올랐습니다. 제목을 계속 부르면서 “삼세(三世) 영원히 가족 모두가 스승의 슬하에 함께 있다. 오로지 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전진해 나가자.”라고 다시 앞을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깊은 고뇌와 슬픔을 경험했던 만큼, 다양한 고뇌에 잠긴 부인부의 분들과 만날 때마다 어디까지나 상대의 곁으로 다가가 확신을 가지고 격려해줄 수 있는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감사는 끝이 없습니다.
저출산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사도이지만, 부인부에서는 영미세쓰의 인재가 속속 성장하여 사도평화회관에는 연일 후계인 아이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장남은 3년 전, 원래의 부지에 2가구의 주택을 새로 지어 주었습니다. 멋진 신부와 3명의 귀여운 손주에게 둘러싸여 또한 큰 딸에게도 두 번째 아이가 탄생하여 지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2살 된 장남의 둘째 아이는 얼굴도, 하는 장난도 타계한 차남과 똑같습니다. (웃음)
대성인은 사도의 여성 문하인 센니치니에게 “일본국(日本國)의 일체(一切)의 여인(女人)을 구(救)하려고 바라는 뜻은 버리기 어려우리라”(어서 1313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여성을 행복하게 - 저도 이 마음으로 눈앞의 한 사람에게 격려에 철저히 하는 삼세의 사명에 살아갈 결의입니다. (박수)
장남 히로아키입니다. 도쿄에서 사도로 돌아와 남자부로서 1세대 째의 절복(折伏)을 누구보다 응원해 주었던 것은 동생이었습니다. 집에 친구를 데려올 때면 동생은 저 이상으로 의기투합하여 자연스럽게 신심의 방향으로 이야기를 향하게 해주었습니다.
권남자부장이 되고 나서 매년 ‘쓰카하라문답’의 의의를 지니고 개최하고 있는 청년대회도 동생은 득의양양하게 자신의 PC를 구사하여 훌륭한 기획 영상을 제작. 대회를 북돋워주었습니다.
그 동생이 갑자기 타계했을 때,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밝게 일가를 지탱해 오신 어머니의 본적도 없는 초췌한 모습에 “슬퍼할 때가 아니다. 아버지의 몫도, 동생의 몫도 어머니를 받쳐드릴 사람은 나 밖에 없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런 제 자신도 여러 분들에게 “아버지에게 신세를 졌다.” “동생이 정말 잘 해주었다.”라는 제가 몰랐던 아버지와 동생의 일면을 가르쳐주실 때마다 지금도 아버지나 동생에게 지탱 받고 있음을 느낌입니다.
올해 3월 11일, 세계청년부총회도 전례 없는 청년을 결집하여 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학회의 청년답게 지역의 발전에도 진력하고자 ‘귀신북’이라는 전통 제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학회원인 제가 귀신북으로 지역의 각 가정을 돌 때마다 상대방이 깜짝 놀라고 ‘어머니는 화를 내시는 것이 아닐까’라고 거정했지만(웃음), 어머니는 화를 내시기는 커녕, 그 한 집 한집을 세이쿄신문 구독 추진을 위해 걷고 계셨습니다.(웃음, 박수) 이제는 제가 지역의 청년회 회장을 맡기까지 되었습니다.
올해는 이케다 선생님이 사도를 방문하신지 60주년이 되는 가절입니다. 선생님에게 승리를 보고 드리기 위해 앞으로도 가족과 함께, 동지와 함께 사도 광포의 미래를 승리로 열어가겠습니다. (박수)
첫댓글 감동입니다
가슴으로 읽고
더욱 결의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숙명을 사명으로 일구내온 감명깊은 체험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노고많습니다
힘든 역경을 신심으로 승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말 대단하신 신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저또한 일가화락으로 보은하겠 습니다 감사합니다
감동입니다!
저도 사제로 열심히 사명에 살겠습니다!
와....대단하신 체험담
정말..화이팅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읽으면서 다시금 결의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대단히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