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탄에 감사해야 한다” 日 총리에 직격탄 날린 JP (31)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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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회담에 임하는 내 마음은 1961년 혁명 때 목숨을 걸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게는 제2의 혁명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 그 일을 수행하는 게 혁명의 기획자이자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내가 할 일이었다.
10년간 교착 상태에 빠진 데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게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과업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 조국 근대화의 자금 밑천을 만들어야 했다. 그때 중공(中共)은 잠자는 거인에서 ‘포효하는 사자’로 깨어나고 있었다. 중공의 국제무대 등장으로 인한 우리의 외교적 고립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예방해야 했다. 내가 한·일 회담에 뛰어들게 된 배경에는 이런 국제정세적 변화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 후 4년을 회상해 보니 이케다 총리와 비밀회담, 오히라 외상과 대일 청구권 협상, 최종 타결을 위한 막후 조정,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반대시위, 대학 캠퍼스 순회 토론, 6·3 비상계엄 선포, 구름처럼 떠돌던 2차 외유 장면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갔다.
책상에 발 올린 케네디 동생…JP도 벌러덩 소파 드러누웠다 (32)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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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0월 23일 나는 미국 워싱턴DC에 도착했다. 미 국무부와 중앙정보국(CIA)의 공식 초청으로 간 것이다.
육군 대위로 미국 포트베닝 육군보병학교(조지아주)에서 유학한 지 10년 만에 중앙정보부장 신분으로 미국 땅을 다시 밟았다. 혁명정부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얻는 게 나의 방미 목적이었다.
1962년 11월 3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이 미국의 항공기 제작사 노스롭을 시찰한 뒤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의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한국 공군이 도입할 초음속 전투기 F-5A를 시승했다.
오른쪽은 주미 한국대사관의 무관 김두만 장군. 이날 JP는 F-5A를 타고 6만 피트 상공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애초엔 존 F 케네디(JFK) 대통령을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도착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