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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말에 진실한 사람 - 산상설교 23(마태복음 5장 33~37)
여러분은 진실하십니까? 진실(眞實)이란 말은 ‘참’이란 뜻의 ‘진(眞)’자와 ‘열매’라는 뜻의 ‘실(實)’자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眞’은 ‘참’이란 뜻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 혹은 생긴 그대로’라는 뜻도 있습니다. ‘實’은 ‘열매’라는 뜻 외에도 ‘가득, 익다, 성숙하다’의 의미로도 쓰입니다. ‘그 사람 참 실(實)하다’하면 그 사람 괜찮다 혹은 성숙하다 혹은 믿을만하다는 말입니다.
진실하다는 말은 그 사람 그대로 믿을만하다 혹은 그 사람은 보이는 그대로 전부라는 의미입니다. 진실은 한 사람의 사람됨을 평가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진실한 사람됨은 행도거지를 칭하는데, 그 행동은 바로 말과 행동의 일치를 뜻합니다.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그 사람을 두고 진실하다고 평가합니다.
요즘 광고나 길에 걸린 홍보 현수막들을 보면 참 말 잔치한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광고는 말을 잘 하거나 글을 잘 만들어내는 전문 작가나 카피라이터들의 현란한 수사가 도배를 합니다. 홍보문구들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과장과 포장이 가득합니다. “단돈 몇 천만 원으로 내 집 마련 찬스!” 이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이 말을 진짜로 알고 천만 원만 들고 그 회사를 찾아가면 비웃음을 당합니다.
말잔치는 정치인들의 공약에서 남발됩니다. <군중심리>라는 책을 읽어보면, 대중 선동가나 정치가는 그 말의 진위 여부를 떠나 확언에 능숙해야 한다고 전망했습니다. 확언이란 그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 그 말대로 할지 안 할지의 여부를 떠나서 열정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외치는 정치인의 열정적인 웅변을 말합니다. 책의 저자인 귀스타브 르 봉은 선거에 나선 후보자의 유력한 자질 중에 하나를 거침없는 확언이라고 말했습니다. “후보자는 거창한 감언이설에 능숙해야 하고 유권자들에게 환상적인 약속을 서슴없이 할 수도 있어야 한다.”(p.263)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탐욕과 허영심을 충족하는 데 강하게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대중을 현혹하고 자신의 목적에 끌어들이고자하는 욕망이 가득한 정치가가 진실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상대의 허점을 공격하기 위해 그것을 증명할 증거들을 들이대며 진실을 말하려 든다면 선거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확언과 반복이 아닌, 논증으로 반론하려든다면 당선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의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끝나는 허망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판에서는 최대한 막연하게 말을 해야 군중이 좋아한다는 겁니다. 그런 후보자가 성공한다고 하니까요(p.264)
최대한 막연한 의미의 말들을 최대한 확실하게 말할수록 잘 먹힙니다. 그래서 요즘은 말의 진실성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말 그대로 믿기 어려운 시대 말입니다.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시대이다 보니 과장법과 화려한 수사법이 발전합니다. 단순한 사회, 서로가 믿음과 신뢰가 깊은 사회일수록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이 길지 않고 짧습니다. 한 두 마디면 다 알아듣고 믿어줍니다. 믿음이 없는 사회일수록 말이 길고, 과장이 많습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합니다. 장을 지진다는 뜻이 여러 가지더군요. 그 중 하나는 전통사회에서의 형벌 중에 하나입니다. 간장을 끓이면 촉매작용으로 빨리 끓고 물보다 더 뜨겁습니다. 장을 끓인 물에 손을 집어넣는 형벌입니다.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또 손바닥 장(掌)자를 써서 손을 불로 지진다는 뜻입니다. 이 또한 얼마나 끔찍합니까?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할 줄 알고도 자기 말에 확신한다는 뜻이죠. 그런데 이런 끔찍한 말을 우리는 아주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잖아요?
아마도 예수님 시대에도 그런 일들이 흔했던 모양입니다. 특히 랍비들의 가르침이 이런 말의 진실성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는 허점이 있었나 봅니다. 오늘의 예수님의 맹세에 관한 말씀은 사실 말의 진실성은 곧 그 사람의 진실성, 그 사람의 사람됨을 말한다는 교훈입니다.
랍비들의 가르침을 보십시오. 그들은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드리지만, 지금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의 실례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섯 가지 중, 살인과 간음에 이어 오늘은 맹세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각각의 주제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것에 대해 예수님은 바른 해석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 것은 주로 바리새인들인 랍비들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성경 그대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모세오경을 인용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맹세나 서원에 관한 말씀들 몇 가지를 요약한 것도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그것은 그저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자기 맹세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그리고 그가 그 맹세를 깨면 벌을 내려 달라고 요청하는 ‘서약’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주장이나 말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핑계로 써먹는 행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댔으니 그것을 빌미로 위협과 협박의 수단으로 써먹는 것이죠.
“헛맹세를 하다”(에피오르케인)는 동사는 “맹세를 저버리다”는 뜻입니다. ‘맹세를 깨지 말고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만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맹세를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맹세와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맹세입니다. 지켜야 하는 지와 지키지 않아도 되는 지의 기준은 그 맹세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는가 그냥 했는가의 차이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으면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 외의 것으로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얼핏 보면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서원의 문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함부로 서원하지 말고,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 ‘주여, 제 병을 낫게 해주시면 제가 신학교에 가겠습니다. 주여, 제 아들 대학교에 합격시켜주시면 아들을 바치겠습니다, 주여 ~하면 제가 해외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한때 뜨겁게 올라오는 마음의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내뱉은 서원의 말 때문에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 자리에서 혹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원을 내뱉었으니 이를 어쩌나하며. 또 하나님의 이름, 혹은 신앙의 이름으로 교인들에게 여러 가지 명목의 헌금이나 헌신을 강요해 놓고 그것을 올무로 삼는 일이 기독교 안에 비일비재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사람들은 웬만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으려고 별의별 수를 다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만큼 센 게 없었기에 고민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 외에 가장 강력한 맹세의 수단들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런 것들 중에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하늘, 땅, 그리고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것도 안 되면 “내 머리를 두고 맹세한다.”였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이름만큼은 세지 않아도, 굉장한 효력을 발휘했던 모양입니다. 랍비들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으로 맹세하면 나름 자기주장을 강하게 어필하면서,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좋은 맹세의 핑계거리였습니다.
이러다보니 실상이 어땠겠습니까? 맹세나 서원이 그 원래 목적을 잃어버리고 거짓말의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거짓말이 남발을 하고 맹세는 거짓말을 대놓고 하기 위한 핑계거리로 전락했습니다. 또 여기에 한 가지 어처구니없는 일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 가르침을 왜곡해서 이용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작태를 보이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눈먼 인도자”라고 비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16~22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맹세는 지키지 않는다 해놓고, 거기에 돈이 관계된 일이라면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전이나 제단으로 맹세하면 안 지켜도 되지만 거기에 있는 금이나 예물로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눈먼 인도자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돈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한다고 기록합니다(눅 16:14).
여러분,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의 허점이 보이십니까? 이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들은 맹세나 서원을 지나치게 신앙의 문제로 접근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 입니다. 십계명의 제3계명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를 갖다 댄 것이지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놓고 지키지 않은 불경함을 저지르지 않는 것만이 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원하고 지키지 않으면 불경한 것이 됩니다. 반대로 성전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으로 맹세하고 안 지켜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요?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직접 거론됐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합니다. 불경하지만 않으면 문제가 안 됩니다. 이러면서 이들이 놓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실의 문제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진실, 말하는 사람의 진실한 사람됨은 무시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그들은 맹세에서 위증(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보다는 불경건함(신적 이름을 불경하게 부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고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신의 이름을 부르느냐 아니냐를 따지다보니, 거짓말을 해도 되는 문제는 지나쳐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의 핑계로 하나님이라는 핑계로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습니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지는 않습니까? 이웃에 대한 책임에 불성실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강하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핑계로 어떤 것은 지켜야 되고 어떤 것은 안 지켜도 된다고 나누는 것은 순전히 자기들 맘대로의 기준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모든 것이 하나님과 상관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관계하지 않는 일이나 장소는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그분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은 그분의 큰 성이기에 그것들 모두 하나님과 관련 있다고. 어떤 표현으로 하던 그것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모든 맹세는 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와 같습니다. 심지어 ‘너희의 머리’도 희고 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므로 모든 맹세는 피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 하냐, 아니냐보다는 무엇을 더 중요하게 보시는 겁니까? 말의 진실성을 보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던 안 하든, 그것보다는 그 말하는 사람의 진실성, 거짓을 말하지 않는 사람됨이 더 중요함을 역설적으로 말씀합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맹세나 서원에 관한 율법의 진짜 뜻은 무슨 약속이나 서원이든지 우리가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말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서원은 불필요해집니다. 맹세도 필요 없어집니다. 맹세나 서원은 사실 말의 중요성, 말의 신실성이 땅에 떨어진 시대에 대한 반증입니다. 우리가 진실하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 바로 맹세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으면 맹세를 해야 그 말을 들을 지경이 된 것입니까? 그냥 말하면 믿지도 들어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말에 과장이 많고 쓸데없는 포장과 다짐과 강조가 많은 것 아닙니까? 진실한 사람은 말 한 마디면 되는 사람입니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냥 그 사람이 그렇다하면 그런 줄로 알고, 아니라하면 아닌 줄로 다 아는 그런 사람이 센 사람이고 실력 있는 사람이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자신의 생각과 말이 하나로 일치된 사람, 말 그대로 그 사람인 사람입니다. 야고보사도도 같은 말을 합니다. 야고보서 5:12입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실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목소리만 큽니다. 힘줘서 말하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맹세나 서원은 우리의 진실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약속이나 주장을 할 때, 엄청나게 과장을 하는 겁니다. 어떤 학자는 “맹세는 사람들이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진실을 말하고 내가 말하는 것이 나 이상의 것, 나 자신의 사람됨 이상의 것이 되게 꾸미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맹세나 서원 없이도 우리 자신의 진실함과 인격을 증명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굳이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거창한 맹세나 과장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냥 말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통하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 말이면 믿을 수 있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만 하면 ‘저 사람 하는 말 지켜봐야 해!’ 혹은 ‘글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고, 그런 것은 그렇다고 하십시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하고 되는 것은 된다고 하십시오. 말을 모호하게 해서 사람 헷갈리게 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안 된다고 할 때 서운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라고 하는 말에 상처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말의 진실함을 지킬 때,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