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6,8)라는 선언에 이어 주님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그러니 이는 불안이나 부족함을 달래고 채우려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심을 바탕으로 한 신뢰의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6,9)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아버지로서 친밀함을 동시에 붙드는 고백이자 외침입니다. 이러한 친밀함은 개인에서 시작되지만 “저희”라는 복수형 표현 안에서 공동체로 확장됩니다. 그다음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 중심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6,9)는 하느님 스스로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시는 종말론적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서도(에제 36,23 참조), 백성이 현재의 삶에서 그분의 이름을 존중하는 자세를 포함합니다(이사 29,23 참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태 6,10)는 구약의 야훼 통치 사상을 재해석한 종말론적 청원으로, 이미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뜻이 …… 이루어지게 하소서.”(6,10)는 순종의 윤리로, 앞선 두 청원을 더욱 간절히 요청하는 백성의 호소가 됩니다. 이어지는 청원들은 인간의 삶을 다룹니다. “일용할 양식”(6,11)은 모호한 내일의 잔치가 아닌, 오늘 하루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가리킵니다. 잘못의 용서는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조건이 됨을 강조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6,13)는 삶의 시련에 주저앉지 않게 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그리하여 악에서 구해 달라는 마지막 청원이 이어지지요. 결국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주권과 자비 앞에 인간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조용히 봉헌하며 내맡기는 기도가 됩니다. 우리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주님의 기도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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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인간과 쥐, 누가 더 똑똑할까요? 미국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교의 파크리사누 교수 연구팀이 진행한 ‘제비 뽑기 실험’이 있습니다. 실험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가자는 A와 B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뽑기를 총 200번 진행합니다. A를 뽑으면 75%의 확률로 1,000원을 벌고, B를 뽑으면 25%의 확률로 1,000원을 법니다. 물론 참가자는 이 확률을 모른 채로 실험에 참여합니다. 참가자는 A와 B를 선택하며 시행착오를 거치고, 100번쯤 했을 때 A를 뽑으면 B를 뽑았을 때보다 훨씬 더 높은 확률로 보상받는다는 규칙을 눈치챕니다. 그런데도 대다수가 A와 B를 왔다 갔다 하며 수익률을 떨어뜨렸습니다. 반면 쥐는 눈치를 채자마자 계속 A만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쥐가 사람보다 1만 2,000원을 더 벌었습니다. 왜 쥐보다 어리석은 판단을 할까요? 눈치를 채고서도 자기의 첫 판단을 함부로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판단이 신중한 사고 체계를 갖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자기 판단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표징과 말씀만으로 예수님을 향한 이유가 충분한데도, 자기 안의 고정관념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자기 판단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특별히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이 주님의 기도는 단순히 미사 때 암송하기 위한 주문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십니다. 즉, 하느님의 뜻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양식의 나눔과 용서를 실천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런 가르침을 주신 이유는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지 못하면서, 대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마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용서에 관한 부분이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이미 우리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용서는 부족하기만 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한 용서, 상대의 보상에 따른 용서를 외치곤 합니다. 그래서 이런 잘못된 판단으로 이웃을 향해 마음을 닫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올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주님의 기도에 나오듯이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기 삶을 하느님 뜻에 맞추는 영적인 조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마치면서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도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결단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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