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별 예불방법 /불교의식에서 예불은 왜 하는걸까?[BTN다큐]
[특집다큐] 부처님이 주신 선물 예불의 모든 것, 귀의(歸依)
歸依-부처님이 주신 선물 예불(禮佛)의 모든 것
사찰의 하루는 예불(禮佛)에서 시작하여 예불(禮佛)로 끝난다. 일상적으로 하던 조석예불에는 불교의 요체라 할 수 있는 핵심 가르침과 정신이 모두 담겨져 있다. 예불은 믿음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첫 번째 문(門)이요, 마지막 문(文)이다. 불자 선원이고 불자로서의 도리이고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지복의 수행문이다.
불교의식의 전부라도 과언이 아닌 예불. 예불의 형식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화해왔지만, 예불에 대한 마음과 예불에 대한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작법귀감(作法龜鑑)〕
자신의 수행이 깊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예불(禮佛)이라는 것은 필수입니다(#무비스님)
예불(禮佛)을 하지않는 수행자는 스님이 아니다. 내지는 스님 노릇할 자격이 없다.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귀의하는 불교의 예불(禮佛). 예불(禮佛) 의식에 담긴 의미와 불가사의한 공덕 속으로 들어가 본다.
깊은 어둠에 잠긴 신새벽 도량을 깨우는 목탁소리가 울리는 시작하면 조실스님은 누구보다 먼저 먼저 법당으로 향한다. 새벽 예불(禮佛)이 시작되기전 백팔배를 올리기 위해서다. 출가하던 그날부터 평생을 이어 온 조실 고산스님의 철칙이다. 삼보에 대한 지극한 공경의 몸짓, 오체투지(五體投地)이고 예불이다. 수행자에게 예불은 수행의 시작이며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둠을 재우는 도량석 소리가 이어지면 예비스님과 행자들도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행자들이 제일 먼저 익히는 것이 예불이다. 삼보에 대한 공경심이 오늘의 초발심을 견고히 지켜줄 것이다. 어떤 수행을 하던 예경(禮敬)의 마음 없이는 수행의 결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조계총림 송광사).
우리 교주 석가모니 부처님을 위시한 그에 따른 모든 성스러운 사랑과 성스러운 가르침을 우리는 받고 거기에 대한 감동의 표현이며, 또 은혜를 보답하는 하나의 표현으로 그리고 또 스승을 잊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뜻에서 불교에서는 예경을 참 많이 합니다. 그래서 〈육시예경〉이라 하는 경우에는 많은 경우에는 여섯 번까지 부처님께 예경하게 되어 있습니다(※무비스님 : 금정총림 범어서 한주).
도량석 목탁소리를 받아 새벽 종송이 이어진다(#※새벽종송 : 아미타불의 위신력과 극락세계의 장엄을 설하여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귀의 발원하게 하는 중생구제의 의미).
밤이면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지고, 새벽이 되면 부처를 안고 일어나는 수행자. 하루의 시작부터 부처님을 뵙고 예배드리는 일이다. (법고, 목어, 운판, 범종)법고·목어·운판에 이어 범종이 28번 울리면 법당에서 새벽예불이 시작된다. 예불은 어른스님부터 행자까지 사찰 대중이 모두 함께 한다. 예불문은 오분향례로 시작되는데, 산창스님 혼자 한다(※동학사)
맨먼 저 우리가 예불드리는 것은 그 예불을 드릴만한 성인과 그 성인 가르침을 먼저 상기하는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성인의 가르침이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오분향」으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계(戒)를 닦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닦고 그래서 그 닦음의 결과로서 해탈을 성취하고, 해탈을 성취인 뒤에 그 해탈은 만중생과 함께 하는 것. 만중생에게 회향하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불교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래서 불교의 그 심오한 내용이 바로 이 오분향에 축약되어 있다. 이렇게 저는 표현 합니다(※무비스님)
오분향(五分香禮)은 오분법신(五分法身)의 향에 비유한 것으로 인격 형성 5가지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께 향을 올리며 부르는 진언이다. 헌양진언이 끝나면 장엄한 합송이 이루어진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귀의한다〉는 뜻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감동의 표현이며, 신앙고백이다. 조석예불과 같이 사찰에 전체 대중이 함께 하는 의식에는 정해진 각자의 자리가 있다.
예불의식뿐만 아니라 참선수행이라든가 공양의례에서 좌석배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중이 함께 하는 그런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렇게 좌석이 정해지게 되는데 대체적으로 예불의식에서의 그 자리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맨 앞에 행자가 서고, 그 다음엔 사미스님이 서고, 그 다음엔 비구스님이 서고, 맨 뒤에 결론적으로 맨 뒷줄에 가장 어른스님이 서게 되지요. 젊은 수행자들이 앞에 서서 부처님 모시고 공경하고 공양하는 그것을 어른스님들이 보고 지도해 주시는 그런 시각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되지요(※미등스님 - 불교문화재 연구소 소장)
부처님을 정면을 바라보게 되는 중앙의 뒷자리가 제일 어른스님의 자리다. 현행 예불문은 크게 오분향례와 칠정례로 조성되어 있고, 칠정례는 다시 불법승 삼보로 구성되어 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양하는 삼보에 대한 귀의이다. 예불 후에 항상 축원을 하며 발원문을 읽는다(※쌍계사).
이산 하연선사의 발원문은 가장 널리 독송(讀誦)되고 있는 발원문(發願文)이다. 예불의 마지막 순서는 「반야심경(般若心經)」 봉송이다. 심중단을 향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봉송하는 것으로 새벽예불을 마치게 된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칠정례로 예불을 드린다. 그러나 모든 사찰에서 칠정례를 하는 것은 아니다. 불보사찰이 통도사(通度寺)는 칠정례가 아니라 11정례로 한다. 11번 절을 올린다. 부처님 정골사리를 모신 사리탑과 창건주 자장율사 등에 대한 예경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찰의 전통과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다.
승보종찰 송광사는 팔정례 예불을 한다. 오늘의 송광사를 있게 한 역대 선지식인들에 대한 존경과 흠모다. 송광사 국사전에는 정해결사로 타락한 고려불교를 바로 세운 보조국사 지눌스님과 15국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송광사 조계 총림).
팔정례하는 보조국사 지눌스님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까 보조국사 스님이후 15국사 스님 나오셨고 그분들의 거룩한 그런 정신을 본 받아 우리들도 그분들의 뒤를 이어 부처님 혜명(慧命)을 받들고, 널리 중생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그런 수행자가 되고자 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예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공경하는 마음은 배움을 담는 담는 그릇이다. 불보살님을 비롯해 선지식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면 어찌 배움이 담기겠는가?
율원과 선원, 강원을 갖춘 해인사에서 배움은 엄격한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 스님들은 조석예불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일과의 시작이 예불이다. 아침 7시. 강원 툇마루의 금고가 울리면 〈강원상강례〉가 시작된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올리는 학승들의 예불이다. 지혜의 가르침을 주신 불보살님들과 선지식에 의지하여 가르침의 세계로 들어 간다는 예경의식이다.학승으로서 배움의 자세와 목적을 스스로 점검하고, 발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해인사).
상강례는 ‘아침 7시에 부처님께 경을 배운다’라고 하는 것을 고하는 의식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과 부처님 가르침을 올바르게 실천하고 또 이것을 전하는 것을 부처님께 고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상강계를 마치면 수업이 시작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배움은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이 된다. 부처님의 말씀인 그 경전(經典)을 배우는 것이 부처님 말씀을 담는 선원이다. 마음을 담는 수행(修行)은 언어를 떠난 내면의 수행이다(※태월스님 :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선원에서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수십 명이 모여 있어도 고요하다. 오직 화두 하나에 마음을 묶어 놓는다.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어야 한다. 고요하지만 치열한 전쟁이다(※정혜사 능이산사 -충남).
선원에서는 유언에서 무언으로 돌아가는 길 입니다. 그리고 좌선,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공부를 하는 것이에요. 일체 번뇌,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선(禪)입니다. 불기망상(不起妄想)이 선이라는 말이에요. 좌선을 하는 상태에서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말을 삼가고 못하게 합니다. 말을 함으로서 정신 집중이 되지 아니하고, 정신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죽비라고 하는 그 죽비의 조작에 의해서 행동이 규제되고, 제재됩니다.
그래서 선방에서는 죽비소리에 모두 앉고 서고 하는 것으로 예불과 똑같이 준비에 의해서 그냥 보통 법당에서 할 때는 칠정례로 하는 것이 정식입니다마는 선방에서는 삼정례만 합니다. 불법승 삼보에 절을 합니다(※설정스님 –덕승총림 수덕사 방장)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예경의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은 아니다. 죽비 세 번으로 세번 절하는 것이 예불의 전부이지만 부처님에 대한 공경심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 참선수행의 길이다. 완고한 틀을 갖추고 있으면서 또 틀이 없는 것이 불교 예불이다. 목숨바쳐 귀의하는 마음이 없다면 결국 부처님 마음에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