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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뜨 |
거운 감자 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문제에 접근해 보려고 하는 데는 내가 어떤 학문적 식견(識見)이나 소견(所見)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작으나마 평소에 관심을 갖던 역사문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보고자 하는 따름이다.
광개토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는 고구려 제18대왕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아들 장수왕* 3년(414년)에 건립한 비로 높이 6.39m, 너비 1.3~2.0m 윗면과 아랫면이 넓고 허리부분이 약간 좁은 형태로 된 무게가 37톤이나 되는 장엄하기 그지없는 비다.
* 長壽王 11살~90살까지 79년간 재위, 427년에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
비의 받침돌은 길이 3.35m, 너비 2.7m 크기로 여기에 홈을 파내고 비를 세웠는데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 비를 세우면서 세 쪽으로 갈라진 것을 그대로 둔 것으로 보이는데 - 아니면 나중에 쪼개진 것인지 - 지금은 땅 밑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받침돌은 화강암(花崗巖)이고, 비의 몸돌은 자갈돌이 중간 중간에 박힌 응회암(凝灰巖)이다.
그러나 1991년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 한 후에 비를 본 한국의 어떤 지질학자는 화산암질현무암(火山巖質玄武巖)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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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莊嚴)하고 웅장하기 그지없는 이 비를 두고 왜 그리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지 오래 전부터 궁금하던 중 지난해에는 논쟁의 한 축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재일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박사의 자전적 에세이 「해협」이란 책을 사서 읽어보도 했으나역시 궁금증만 더하고 속 시원한 증명이 없다.
나도 나름대로 풀어야 할 과제거나 고구려의 후손으로서 알아야 할 책무라면 기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학자적 연구까지는 아닐지라도 알아 볼 수 있다면 다 알아보고 싶은 것이 지금의 심정이다.
무 |
“장엄하기 그지없는 비의 각 면에는 빼곡이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동남쪽을 향한 1면에는 11행 449자, 서남향인 2면에는 10행 387자, 서북향인 3면에는 14행 574자, 동북향의 4면엔 9행 369자 등 모두 44행에 1,775자가 새겨져 있다. 다만 이중 150여자는 훼손되어 읽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훼손된 이유가 세월의 풍상(風霜)으로 마멸된 것이라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게 아니라 近代에 누군가가 탁본(拓本)을 뜨기 위해 비문에 낀 이끼를 태우다가 그랬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비문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1부는 시조 추모왕(趨牟王)의 건국설화로 시작하여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대한 칭송이고, 2부는 태왕의 정복활동에 대한 훈적(勳績)을 연대순으로 기록하였다. 3부는 근처에 있는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비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라 훈적비, 신도비(神道碑), 수묘비(守墓碑) 성격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王陵 : 근처에 장군총, 태왕능 두 능이 있는데 태왕능은 광개토왕릉,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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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긴 시호는 여러 가지 뜻과 상징을 담고 있는데 국강상은 왕의 무덤이 위치한 지명에서 따온 것이고, 광개토경은 영토를 크게 넓힌 업적을 강조한 명칭이며, 평안은 왕의 시대 태평성대에 대한 칭송인 듯하고, 호태왕은 그런 위대한 업적을 쌓은 왕에 대한 최대한의 존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시호를 받은 왕은 광개토왕이 처음인데 당시 고구려인들의 왕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를 고구려답게 만든 왕 그가 광개토대왕이고 당대 고구려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찬양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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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24년 전인 1880년 무렵 비가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에도 우리 역사에 이 비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현존하는 최고는<용비어천가> (1445)에 ‘평안도 강계부 서쪽에 압록강을 건너 140리 너른 평야가 있다. 그 가운데 옛 성이 있는데 세간에는 금나라 황제의 성이라고 한다. 성의 북쪽 7리 떨어진 곳에 비가 있고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 2기가 있다.’고 했다.
이 내용은 고려 말 이성계의 군대가 원나라와 명나라의 싸움에 출동하여 고구려의 첫 수도 우라산성(于羅山城=烏女山城)과 두 번째 수도 국내성을 지나쳤기 때문인데 당시에는 그저 금나라 성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 후 성종 18년(1487) 평안도 관찰사 성현(成俔)이 비의 글자를 읽을 수 없음을 한스러워 하며 시를 남겼고, 1595년 후금의 누루하치를 방문한 신충일(申忠一)이란 사신도 황성(皇城-국내성)과 황제묘(皇帝墓-장군총)가 존재한다고 했다.
이들이 무관심으로 스쳐지나간 뒤 200여 년 동안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그냥 잘 보존되어 왔는데 그것은 만주족이 중국대륙을 통일하여 청나라를 세우자 이 곳이 시조인 누루하치의 탄생지라 하여 사람들이 들어와 살지 못하도록 봉금(封禁)조치를 취함에 따라 비의 존재가 잊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새 농경지를 찾아 압록강 일대로 이주해 오는 가난한 농민들을 막을 수는 없었고 그 수가 점점 늘어나자 마침내 청나라 정부도 1876년 봉금을 해제했으며, 1880년 무렵 농토를 개간하던 농부가 비를 발견하자 당시 지사였던 장월(章樾)이 막료 관월산(關月山)을 시켜 조사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 비는 온통 이끼와 넝쿨로 뒤덮여 있었는데 이것들을 제거하고 탁본한 뒤에야 겨우 알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탁본이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됨으로써 비로소 <광개토왕릉비>는 다시금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비는 단지 세상에 자신을 선보인 것에 불과했고 장차 두고두고 국제적인 논쟁거리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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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1880년 가을 육군 참모본부는 사카오(酒匈景信) 중위를 중국에 파견하였다. 그는 현지에서 중국어를 배운 뒤 신분을 감추고 만주일대에서 밀정(密偵)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다 1883년 4~7월 무렵 집안(集安)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광개토왕릉비를 보게 된다. 그는 비의 이용 가치를 짐작하고 현지인을 조수로 고용해 탁본을 떳고 이때 일본에 유리하도록 이른바 신묘년(辛卯年)조 기사를 변조하는 등 25자를 변조하였다.
1883년 10월 귀국하여 131장이나 되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육군 참모본부에 제출하였는데 이 탁본을 토대로 비밀리에 연구를 진행하던 육군 참모본부는 마침내 1889년에 <회여록(會餘錄)> 5집을 고구려비 특집호로 발간하여 그간의 연구내용을 세상에 공포하였다. 여기서 비문의 이른바 신묘년 조 기사를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주장하였다.
※ 雙鉤加墨本 : 탁본이 아니라 비문에 종이를 대고 문자 둘레에 선을 그린 다음(쌍구)그 여백에 묵을 넣어 탁본처럼 보이게 만든 것(가묵)으로 이 둘을 합쳐 쌍구가묵본이라 한다.
그 사이 육군 참모본부는 여러 차례 스파이를 만주에 파견하여 비를 조사하였으며, 1899년 이전 어느 해 사카오의 비문 변조를 은폐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를 발랐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모든 탁본은 일제가 석회칠로 변조한 이후에 제작된 것이므로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 후 1981년 왕건군(王健群) 이라는 중국학자가 오랜 기간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결과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그는 탁본공이 탁본을 쉽게 하기 위해 비문 여기저기를 회칠하여 보강한 적은 있으나, 조직적인 변조 흔적은 없다고 하여 이진희씨의 주장을 부정하였다.
이런 논쟁의 근본 원인은 신묘년 조 20여자에 불과한 글자의 내용이 당시 고구려와 백제․ 신라 그리고 왜가 맺고 있는 국제관계 때문인데 그 내용이 묘하고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 너무 판이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而 倭 以 辛 卯 年 來 渡 海 破 百 殘 □ □ □〔斤〕羅 以 爲 臣 民
이 20여 글자를 두고, 일본인 학자들은 의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과 □□□〔斤〕羅(가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많은 우리나라 학자와 북한학자들은 이에 대해 주어(고구려)가 빠져 있거나 문맥이 맞지 않는다며 수용하지 않고 있고, 특히 이진희씨는 래도해파(來渡海破)넉자가 일본 참모본부에 의해 변조된 것이며 海자의 경우 행을 구분하는 세로선 밖으로 삐져 나와 있는 등 다른 글자와 칸이 맞지 않음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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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신묘년 조의 신민(臣民)은 곧 고구려 태왕의 신민일 수밖에 없고 비문 내에서 태왕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신민을 거느릴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신민에게 은덕을 베풀 수 있는 대상은 천재(天宰)의 자손인 고구려 태왕 뿐이고 적어도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 고구려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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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 과거 일본 제국주의자들만을 비판할 수 없을 것인데 현재의 일본은 물론 남․북한 역시 자국 중심의 논리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일본은 틈만 나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하고 있고, 우리는 우리대로 고구려의 영광과 왜의 미개함을 대비시키려고만 애쓰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중국까지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邊方史)로 거두어들일 의도를 노골화하고 있는데 이래저래 <광개토왕릉비>를 둘러싼 논쟁은 쉽게 그치지 않을 모양이다.
고구려 인의 역사를 담은 <광개토왕릉비>가 현대에 와서 한․일․중 3국이 가담한 역사 만들기의 증언자가 되고만 셈이다. “고구려 역사 복원을 위해서 우리 모두 탐욕을 버려야 한다. 겸손한 마음 자세로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할 때 역사는 스스로 말한다”고 임 교수는 말한다.
2004년 3월 4일 倫輔
장군총 - 사진은 빌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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