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과 구분 없는 원시종교 악가무
1.주술과 희생제의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아침에 일어나 처음 눈에 띄는 것을 숭배하는 자바섬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미지(未知)의 모든 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인식한 원시종교 시대는 마을 행사, 국가행사, 통과의례, 병자 치유 등에 원색적인 노래와 춤을 추며 의식을 했다. 누군가 병이 들면 그 사람에게 귀신이 들었다 하여 무당이 굿을 하면서 나무 막대나 돌멩이를 두드리며 주문을 외거나 노래를 하는가 하면 공동체의 번영을 위하여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다. 한국의 무당 중에 작두 타는 무녀가 있듯이 지구촌 곳곳에는 희생제의와 선혈을 뿌리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행위와 악가무가 종교라는 이름 하에 묵과되었고, 이러한 행위는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무속은 오늘날까지 각 문화권 기층신앙이자 악가무로 잠재해 있다가 고등 종교의 질서가 약화되면 언제라도 그들 속으로 파고들어 분출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2.제의와 악가무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의한 두려움과 숭배는 "인류가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면서 전설․신화․신(神)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인류는 시공간을 초월해 과거․현재․미래가 하나로 존재하는 장소가 가능해졌고, 모든 예술 장르 중에 음악이야말로 형체가 없는 허구 그 자체인 추상예술의 정점에 있었다. 이 무렵 종교에서의 음악은 이전의 원색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성의 발로에서 특정 민족의 신앙체계 속으로 들어와 음률 그 자체를 신으로부터 부여받는 영적인 것으로 인식하였으므로 사제들은 우주적 신과 인간의 관계 형성을 위해 춤추고 노래하거나 주술을 행하며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1)힌두 성명(聲明)의 발생과 정립
인도에서의 음악은 신과 인간을 연결 짓는 것으로 "음악은 곧 종교적 실천"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인도 고전음악의 대가들은 항상 현자 내지는 성자를 뜻하는 '무니(Muni)'라는 존칭을 붙였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 사회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천상의 신으로부터 선율을 받아 적는 존재였다. 따라서 고대 인도에서 음악을 배운다는 것은 영적 수련을 의미하는 사다나(sãdhanã)였다. 오늘날까지도 인도의 전통음악은 단지 선율이나 리듬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행위를 통하여 영적 성취를 이루고자 하므로 세속음악과 종교음악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다.
서기전 1500년경 부터 사제들은 복잡한 제사의식을 집행하기 위하여 고도의 훈련을 쌓았다. 그들은 무아의 경지에 들어 초자연계의 보이지 않는 힘과 신성(神性)에 나아가게 하는 시도를 하였다. 이때 소리의 진동이 매개로 쓰였으며, 불가지(不可知)한 것을 청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신께 제사를 드리고 찬가와 공물을 바치는 것에 집중되었던 베다시대와 달리 우파니샤드 시대에 이르러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추구하는 행법을 학문화하며 성명을 발전시켰다.
베다문헌은 삼히타ㆍ브라마나ㆍ아란야카ㆍ파니샤드ㆍ수트라의 다섯 부문으로 분류되는데, 이 중에서 힌두 정전(正典)에 속하는 삼히타(saṃhita)는 리그베다ㆍ야주르베다ㆍ사마베다ㆍ타르바베다 등 4종이다. 4대 베다 중 현실적인 문제와 기원을 담은 『아타르바 베다』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베다는 모두 제례와 관련이 있으므로 이들은 그 낭송법과 율조가 매우 중요하였다. 이들 송주법을 보면, 제례의식의 다양한 형식적 관례를 다룬 『야주르베다』는 한 음(音)만으로 낭송되고, 『리그베다』는 가사의 악센트에 따라 중음ㆍ저음ㆍ고음을 지켜 낭송하였다. 4대 경전 중 음악적 성격이 가장 큰 것은 『사마베다』인데, 이는 처음에는 세 음으로 낭송되었지만 점차 네 음, 일곱 음, 나아가 아홉 개의 음까지 확장되어 인도음악의 시발이 되었다. 정교해진 율조로 제사를 올리는 사제는 절대자와 같은 지위를 누리며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였다.
2)구약과 유대인들의 음악
창세기 4장 21절에는 카인→에녹→이랏→므두사→라멕으로 이어지는 족보에서 라멕의 아들이요, 카인의 5대 손자인 유발이 금(琴)을 타고 퉁소를 부는 장면이 있다. 이는 성경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음악적 내용이다. 천지창조에 이어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에서는 "셈의 하느님 야훼는 찬양받으실 분"이라는 구절이 있어, '찬송'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출애굽』에는 모세가 미리암과 함께 노래 부르는 대목이 있다. "내가 여호와를 찬양하리니 그지없이 높으신 분, 애굽의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시고, 나를 살려주셨다. 야훼는 나의 노래,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이시니 그를 찬송할 지리라" 이어서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 미리암이 소고(小鼓)를 들고 나서자, 모든 여인들이 그를 따라 소고를 잡고 춤추었다. 그러자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야훼를 찬양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는 대목이 있다. 『민수기』 10장 1절에는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중략...아론의 후손 사제들만이 그 나팔을 불 수 있다...중략...축제 때와 매달 초하루 행사로 모여 즐기는 날, 너희는 번제와 친교제를 드리며 나팔을 불어라. 그러면 하느님 야훼가 너희를 기억할 것이다"
위의 대목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제사와 악기 사용 용례와 그 악기를 부는 사람의 신분 등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선 『민수기』에 등장하는 악기들이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악기와 동일한 것이어서 아라비아 음악 문화 전승이 구약의 악가무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매달 초하루라는 어휘로써 정기적 의례와 특별한 제사 의례가 상용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대기 상권」 15장 16절, "다윗은 레위인 지휘자들에게 지시를 내려 그들 일족 가운데서 합창대를 내세워 와금(臥琴)과 수금(垂琴)을 뜯고 바라를 치며 흥겹게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는 대목이 있고, 25장 6절에는 "...왕명을 따라 모두 아버지의 지휘를 받으며 야훼의 성전 예배에 참례하였고. 이들은 야훼께 찬양을 부르는 훈련 받은 일족들과 함께 명단에 올랐다"는 대목과 함께 24대열에 각각 아들과 딸들이 배열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내용을 통해 당시에 훈련된 전문 합창대와 24대열이라 할 만큼 대 규모의 합창대가 의식 음악에 수반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솔로몬 대에는 다윗 시대보다 훨씬 화려하고 장대한 제사 음악이 있었다. 「역대기 하」 6장 11절,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이 그 아들들과 형제들을 모두 거느리고 레위 성가대원으로서 모시옷을 입고 바라와 현악기들을 들고 제단 동쪽에 늘어섰고, 이들과 함께 120명의 사제들이 나팔을 불었다."는 대목이다. 「역대기 하」권 16장 12절, "거기에 참석한 사제들은 목욕재계를 하고, 나팔을 불고, 노래를 불렀다. 야훼를 찬양하고 감사를 드리는 그 소리가 한 소리처럼 들렸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 티벳 사원에서 승려들이 거대한 나팔을 불며 춤을 추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모든 성경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출애굽』은 BC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내용을 구전으로 전승해 오다 BC 950년경에서 BC 5세기에 걸쳐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외에 제반의 구약에서 드러나는 음악적 양상은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일반적 음악 양상을 추정하게 하는 내용으로써 세속 음악과 구분되지 않는 고대 종교음악의 양상이다.
3)고대 중국의 제사 음악
공자 이전부터 중국의 고대 악론은 오미(五味)ㆍ오색(五色)ㆍ오성(五聲)을 미(美)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하늘에는 육기(六氣)가 있어, 내리어 오미(五味)를 만들고, 발하여 오색(五色)이 되며, 울리어 오성이 된다고 여겼다. 이러한 원리의 배경을 보면 "예(禮)란 천(天)의 경(經)이고, 지(地)의 의(義)이며, 천지의 경의(經義)가 있으면 민(民)은 그것을 본받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옛 백성들이 가송(歌頌)에 수(水)와 화(火)는 백성이 마시고 먹는 것, 금(金)과 목(木)은 백성의 삶을 흥기하는 것, 토(土)는 만물이 생의 자질로써 인간의 용(用)이 된다"고 하였다.
『서경(書經)』 「하서(夏書)」에는 "훌륭한 명령으로 타이르고, 위엄있는 형벌로 감독하고, 구가(九歌)로써 권장하여 그릇되이 사용하지 말라"는 대목이 있고, "육부(六府)와 삼사(三事)를 구공(九功)이라 하여 물ㆍ불ㆍ금속ㆍ나무ㆍ흙ㆍ곡식을 육부라 하고, 정덕(正德)ㆍ이용(利用)ㆍ후생(厚生)을 삼사(三事)라 하였다. 중국 제사음악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을 전하는 『구가』는 초나라의 개혁 정치가 굴원(屈原 BC 343-BC 278)이 선대의 제사에 쓰인 가사를 기록한 것이다.
본 문헌에서 신령에게 제사 지내는 11편의 악가(樂歌)를 보면, 천신(天神)의 악장 5편, 지신(地神)의 악장 4편, 인신(人神)의 악장인 '국상(國殤) 1편, 예혼(禮魂) 1편으로, 마지막의 예혼은 제사를 훌륭히 마친데 대한 피날레 의식이었다. 『구가』는 민간제신의 악조(樂調)를 기초하여 지은 제가(祭歌)인 점에서 남녀간의 애정을 노래하는 연가(戀歌)에 속하는 내용을 다수 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인도의 라가 가사에 보이는 인신연애(人神戀愛)와도 상통하고 있어 동ㆍ서를 막론하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연인화하는 공통점이 보인다. BC 470년경에 성립된 『시경』은 서주(西周) 초기(BC 11세기)부터 춘추시대 중기(BC 6세기)까지 전승된 많은 시가를 담고 있다. 형식과 내용면에서 풍(風)ㆍ아(雅)ㆍ송(頌)의 세 가지가 있다. '풍'은 본래 종교적 주술적 노래였으나 각 지방의 풍습이나 생활상을 담아 민요화되었고, '아'는 조상의 공덕을 노래하며 씨족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지어져 주로 궁정과 귀족의 향연에서 불렸다. '송'은 '아'와 동일하게 조상의 공덕을 가무로 재현하는 것으로 종묘(宗廟)의 제사음악으로 쓰였다.
춘추전국시기(BC431-221)에서 한(BC206-AD220)초에는 유가(儒家)의 악(樂)에 대한 사상을 집대성한 『예기(樂記)』가 집성되어 음악 사상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악기(樂記)』에는 연주를 위한 내용보다 음악의 역할과 연주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한 내용이 더 많다. 선율을 구성하는 음계 중 낮은 음을 궁(宮)으로 하여 군자의 소리로 여겼는데, 이는 저음을 숭상한 미학적 관점을 드러낸다. 전국시대 후기의 중요한 사상가로써 유가악파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조나라(趙 BC 403-BC 228)의 순자(荀子 BC 298-BC 238)가 지은 『악기』와 「악론」은 중국의 음악미학 형성에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고, 이는 조선시대 성종 대에 편찬된 『악학궤범』에도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예서(禮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악기(樂記)에 청묘(淸廟)의 슬은 주색(朱色)줄과 성긴 저공(低空)을 가졌다" 하였는데, 대개 줄을 누이지 않으면 거세고 소리가 높으며, 누이면 부드럽고 소리가 낮다. 구멍이 작으면 소리가 빠르게 되고, 크면 소리가 느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저공을 성기게 하여 그 소리를 느리게 한 후에야 음악이 너무 빠르지 않고, 실을 누이어서 그 소리를 낮게 한 후에야 음이 너무 높아지지 않는다. 슬은 닫아버리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분한 생각을 징계하고 욕심을 막아주어 사람의 덕을 바르게 한다."
위의 내용에 보면, 슬(瑟)은 붉은 줄을 사용하였는데, 이때 주현(朱絃)은 소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양잿물에 삶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줄을 성글게(䟽) 매어 촉급하게 타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빠르고 기교적인 음악을 경계하여 느리고 점잖은 음악을 추구한 예악사상이 근저에 있다. 또한 관악기의 작은 구멍은 소리가 빨라짐을 지적하며 이를 경계하고 있다. 이렇듯 인간이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가치 추구가 체계화되면서 음악에도 추상적 가치가 부여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중국에는 유가(儒家)의 악론과 다른 사상을 펼친 도가(道家)의 음악 사상도 있었지만 한국에는 유학을 숭상한 조선조 정치이념에 의하여 궁중악을 비롯한 제반의 악론이 공자의 예악을 정치이념화 하였고, 이러한 음악관은 불교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해방전후 보성(寶聲)으로 칭송받은 용운스님의 범패를 들어보면, 함께 하는 모든 승려들에 비해서 저음에 월등히 강한 내공을 보이고 있다.
<범패, 그 존재 이유와 역할에 대한 고찰/ 윤소희 위덕대학교 밀교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