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주요명소
경천대
영남인에게 낙동강은 온유하고 넉넉한 어머니의 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먼 옛날부터 낙동강물을 끌어당겨 농사를 지었으며, 산업화가 시작되자 강물로 공장을 돌렸다. 언제나 한가롭게 굽이치며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던 낙동강. 그러나 낙동강도 상주에서만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서쪽 면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룬 천주봉과 만나 부딪히며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을 빚어냈기 때문이다. 이 아찔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노라면 여기서만은 생활 속의 낙동강이 아니라 환상 속의 이름 모를 물줄기라는 느낌이 든다. 이처럼 낙동강의 아름다운 전경은 끊어질 듯 말 듯 하며 계속 이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 경천대이다.
경천대에는 하늘로 우뚝 솟아오른 절벽 위로 송림이 우거져 있고, 반대편에는 금빛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그 사이로 푸르디푸른 강이 흐른다. 이 눈부신 절경을 경천대에서 내려다보면 이곳의 빼어난 경관에 대한 찬양과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수영장을 비롯한 전망대, 어린이 놀이시설, 야영장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가족과 함께 휴식을 취하기 좋다.
뿐만 아니라 경천대에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정기룡 장군이 젊었을 때 이곳에서 용마와 더불어 수련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때 장군이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말먹이통이 남아 있다. 또 병자호란으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갈 때 따라가 함께 고생했던 우담 채득기 선생이 후일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은거했다는 무우정이 있다.
인근에는 상주가 자랑하는 전사벌 왕릉이 있다. 옛날 이 일대를 지배하던 부족국가 사벌국의 왕릉이라 전해지고 있고, 사벌면 화달리에 위치해 있다. 능 아래에 사벌국왕릉사적비와 사벌국 왕 신도비가 있다. 또한 근처에는 화달리 3층석탑(보물 제117호)도 있다.
함창읍 증촌리에는 전고령가야왕릉이 있는데, 1592년 선조 25년 경상도 관찰사 김쉬와 함창 현감 이국필에 의해 묘비가 발견되어 가야왕릉임이 확인되었다. 왕릉과 왕비릉이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정기룡 장군의 유적지인 충의사는 사벌면 금혼리에 있다. 공검면 오태리에는 오태저수지가 있으며, 사벌면 삼덕리에는 경천대관광농원이 있다. 또한 삼한시대 축조한 저수지인 공갈못 옛터도 있다.
문장대
문장대는 속리산의 해발1,054m에 위치한 석대이며 세조대왕과 문무시종이 이곳 문장대에서 시를 읊었다는 데서 연유된 이름으로 이거대한 암봉이 구름속에 묻혀있다 하여 운장대라 부르기도한다
또한, 문장대를 세번 다녀와야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생길만큼 신선의 땅인듯 신비로운 곳이다 이곳 문장대에서는 속리산 최고봉인 천황봉과 관음봉, 칠성봉, 시루봉, 투구봉, 문수봉, 비로봉등 높고 낮은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가을 단풍의 진경을 보려면 상주시 화북면쪽에서 문장대로 오르는 계곡의 산행을 빼
놓을 수 없다.
등반을 시작하면서 삼국시대 5~6세기경에 축조된 견훤산성-길이610m, 높이7~15m-과,
오송폭포-높이10m-, 성불사 등 명승고적이 도처에 산재하고 있으며,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에 따라 산행의 묘미를 더해준다.
장각폭포
천황봉에서 길게 뻗어 내려온 산과 물이 한 용소로 깊숙이 떨어지니 이것이 바로 장각동구의 장각폭포다. 폭포의 높이는 6m가 넘으며 수량이 많아 산천을 진동하고 수십 장 애안아래
검푸른 용소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낙수의 여파로 빙글빙글 돌고있는 수면을 보고 있으면 금방 용이라도 치솟아 오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폭포 위에는 금란정과 노송이 고색 창연하게 서 있다. 폭포 좌우의 절벽과 단애의 절기는 조화가 무궁하며 조금 밑에 향북정이 있어 산, 폭포, 정자 모두가 잘 조화되어 있다.
- 2002년 MBC " 태양인 이제마 "촬영지.
공검지(공갈못)
공갈못은 의림지 벽골제 등과 같은 시대인 삼한시대에 수축된 저수지로 역대 여러 차례의 보수를 하였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길이 없고, 다만 고려 명종 때 최 정빈이란 분이 고쳐
쌓았는데 못 둑의 길이가 8백 6십 보이고, 못 주위의 길이가 1만 6천 6백 4십 칠척이라 상산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 못에 물이 차면 수심이 다섯 길이나 되었고, 서쪽 못 가로는 연꽃이 만발하는데 그 절경을 중국의 전당호에 비길 정도라 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못의 얼음 어는 것을 보고 흉년, 풍년을 예측하였다고 한다. 또 정월 열나흗날 밤, 소들이 땀을 흘리는데 그것은 밤을 이용하여 소들이 못에 얼음을 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 경주 용담의 암용이 공갈못 숫용에게 시집온 이야기도 있다. 또 볶은 콩 서되를 하나씩 먹으면서 말을 타고 못 가를 돌아도 콩이 모자란다는 말도 있다.
속설에 "저승에 가도 공갈못을 구경하지 못한 사람은 이승으로 되돌려 보낸다"고 하였다.
함창 읍지에는 이 못의 서반에는 몇 리에 걸쳐 연꽃이 피어 있으며 마치 중국의 전당호를 방불케 하는 풍취를 지녔다고 하여 그 아름다움과 연꽃의 풍광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옛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주옥같은 글을 남기어 그 아름다운 풍광을 연상케 하여 준다. 이 못의 이름이 공갈못이라 부르게 된 것은 못 둑을 쌓을 때 "공갈"이라는 아이를 묻었다는 매아설화에 의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향민들은 이 못을 신비롭고 여험스러운 영지로 신앙하여 왔다.
이제는 이와 같은 전설과 연밥 따는 노래가 공갈못을 상기시켜 줄 뿐 못은 논으로 변하여 그 모습과 풍광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옛 못을 알려주는 비석이 옛 못 뚝에 외롭게 서서 이곳을 찾아주는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서운한 발걸음을 되돌려야 하는 곳이 되었다. 공갈못 하면 곧 우리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것은 연밥 따는 노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노래는 공갈못을 배경으로 하여 발생 형성된 민간의 노래로 지방성과 토속성을 짙게 띈 민요의 성격으로 이 노래의 내용은 연정, 사친, 완월관어, 호련 등의 유형을 이루었다.
형식으로는 기본형, 복합형, 생략형, 후렴첨가형 등이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노래는 동남 동녀를 대상으로 한 한국민요의 대표할 만한 노래군이라 할 수 있다. 이 노래군이 상주, 함창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서 전승 보존되는 이 지방 특유의 무형 문화재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낙화담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에 낙화담이 있다. 이곳 낙화담의 제단 비각은 조선시대 1850년(현종 16년)에 유림과 후손들이 나라의 명정을 받아 건립하여 오랜 세월을 전래해 오는 동안 몇 차례의 중수를 한 흔적은 있으나 근래에는 퇴락 되어 보기 흉한 정도로 보존되어 오던 것이다.
상주시에서는 충효의 산 교육으로 활용 보전하기 위하여 군비로 단각과 담모제를 보수하고 담장과 삼문을 신축하였으며 후손 부담으로 민가 3동을 철거하는 등 정화하였다.
이곳 낙화담은 원래 1,500여 평이나 되는 못이었으나 지금은 줄어들어 60여 평 남짓한 못이 되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못은 판곡 마을의 안산인 속리산 줄기의 백화산이 화성을 띄우고 있다는 풍수 지리설에 의하여 그 화기를 중화시켜야 한다고 믿어 마을 사람들이 만들게 된 못이라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을 당하여 김 준신이란 분이 상주성에서 왜적을 많이 죽였으므로 그 보복으로 왜병이 판곡리를 침입하였을 때, 이 못에 부녀자들이 투신 자살 하였으므로 이 때부터 낙화담이라 불리워졌다. 이 못의 처음 크기는 1600여 평이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전답과 대지로 줄어들어 현재는 150평 정도의 적은 연못인데 못 가운데에 작은 동산을 만들고 그 동산 위에 수 백년 묵은 노송이 한 그루 서 있어 옛 이야기를 간직한 듯 하다
서린 서보
옛 상산, 여기 상주 앞들의 젖줄이요 풍요의 근원인 서보에 조상의 애환이 서린 서보가를 새겨 선인의 숨결과 얼을 고이 기리고자 상맥인의 뜻으로 이 노랫돌을 세운다. 상주시에서 서쪽으로 4km 국도를 따라 가노라면 서보 다리가 나온다. 다리 입구에 커다란 돌비가 세워져 있으니 우리 선인들의 애환 어린 서보 노랫돌비다. 1977년 12월 15일 상주의 봉사단체인 상맥회에서 세었으며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여 노래를 음미해보게 한다.
상주는 예로부터 곡창지대다. 특히 관계 시설이 발달된 곳이기도 하다. 서보도 그 유형의 하나이니 한발 극복의 예지를 우리 상주지방의 선인들이 보여준 보기의 하나라 하겠다. 상주 서보의 유래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상주시 낙양동 개운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하천의 제방 둑에 상주 서보 낙양수문비가 있다. 이 비의 뒷면에 서보의 연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옛부터 수리의 편리를 주는 보가 없어 몽리자들이 애타게 생각하던 중 숙종 27년에 고을 원인 이시필이 처음으로 서보를 수축하였다. 이 때가 1701년(숙종 27년)이다. 80여 년 뒤인 1783년(정조 7년)에 서필수가 개축하고 박 래설, 이기도 등이 서로 번갈아 개수했다. 박 정준 등이 관리할 때 수원지의 암거 및 수문 입구의 대 개수가 있었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매년 내리는 장마에 의하여 보가 허무러져 관계에 막대한 지장이 있으므로 그때 그때 몽리자들의 출자로 임시 보수 조치하였으나 장구한 대책을 수립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1927년에 면에 협력을 얻어 박정열 등 8명이 주동이 되어 관계조합을 조직하고 공사비를 몽리 지주에게 분담시켜 크게 보수하고 보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서보의 시발은 280여 년 전에 수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보의 근원지는 상주시 남장동 입구의 냇바닥의 땅속 도랑(암거)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여기에선 물이 솟아올라 상주 앞들의 목을 추겨주었던 것이다. 인가 면적 230ha 에 176.2ha 의 논밭에 물을 대어 준다.
근원지에서 상주 앞들까지의 물줄기는 20여 리에 걸쳐 있다고 볼 수있다. 삼 백의 고장 상주, 쌀 생산지로 이름나 있는 상주는 이 서보가 젖줄 구실을 하여 오늘의 풍요를 이루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보가를 음미하면서 내일의 풍요를 구가할 꿈에 부풀어야겠다.
오송(五松) 폭포
상주시에서 괴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속리산 국립공원 구역내에 있다. 오송(五松) 폭포는 속리산 신선대에서 발원한 계류가 빚은 높이 15m의 아름다운 폭포다. 보기에 따라 5단 또는
7단의 층을 타고 물줄기가 구르지만, 비 온 뒤에는 층이 구별되지 않을 만큼 장쾌한 자태를 과시한다.
이 일대의 계곡을 시어동(侍御洞)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세조가 찾았을 때 칡넝쿨이 하늘로 치솟아 왕의 행차가 편하도록 모셨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이곳은 문장대로 오르는 가장 짧은 등산 코스의 기점이기도 하다. 천연림과 기이한 암석 사이를 흐르는 이 폭포는 가뭄 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또한 이 일대는 옥양폭포, 장각폭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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