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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만의 해후 그리고 형제의 나라
靑 山 정 근 서
2002년 월드컵은 대한민국에겐 국위선양의 좋은 계기가 되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도 엄청난 함성과 짜릿한 흥분,
그리고 무한한 감동의 물결을 기억합니다.
또한 한국과 터키 간 1300여년 만에 형제간 진정한 해후를 했던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2년 6월3일 울산 문수 월드컵 경기장에서 브라질과 터키의 C조 1차전에서
사건의 발단이 일어납니다.
경기 전에는 브라질의 절대 우세가 점쳐졌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야말로 막상막하의 대접전이었고,
1:1 분위기는 후반 42분까지 계속 됩니다.
그냥 그렇게 끝나는가 했는데, 터키 선수 외잘린이 반칙을 하자,
PK를 선언하고 반칙 누적으로 퇴장 시킵니다.
당시 심판은 바로 대한민국 최초 월드컵 국제 심판인 K씨 였었죠.
슬로우 비디오 판독을 해보니 반칙은 했으나, 골에어리어 밖의 상황이기에
PK는 아니다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사건은 이 시간부터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치닫습니다.
경기는 우리나라와 터키의 전국에도 방송되었습니다.
터키 전국에서는 이 때부터 코리아는 형제국인데
왜 우리에게 불리하게 오심을 했는냐?
형제국 심판이 우리(터키)를 배반했다..등등
반한 무드가 삽시간에 터키를 태풍처럼 휩쓸어 버립니다.
경기 후 이틀 동안 터키인의 한국에 대한 민심은 최악의 상태가 되지요.
그 때 터키에 나가있던 국군 무관단에서
맨 먼저 이런 극심한 공황상태와도 같은 제1보를 국내로 보고했고,
이 사태 해결을 위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 주어 담을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3일 후인 6월 9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코스타리카와의 경기에서 터키 팀을 집중 응원하기로 긴급 결정되었지요.
경기 당일 인천 문학 경기장에 입장하는 모든 한국 관람객에게
태극기와 터키 국기를 나눠 주고, 터키 응원을 부탁합니다.
물론 빈 좌석에는 미리 자발적인 참여와 권유로 긴급 동원된
군인과 학생들로 채워졌습니다.
중계가 시작되자 화면에는 그야말로 터키 국기와 태극기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쉴새없이 터키를 연발하며 응원을 했습니다.
이 때 제일 먼저 놀란 것은 터키 중계단이었죠.
어리둥절했습니다. 어리둥철한 것은 중계단 뿐만 아니라
이 중계를 지켜 보던 터키 전 국민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조금전 까지 KOREA 욕을 계속했는데, 화면을 보니 그게 아니었죠.
중계 TV에서 보고 들리는 것은
한국 사람들에 의한 터키 응원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 한국은 역시 우리 형제의 나라였구나! 역시 우리 편이다! 우리가 잘못 알았다!
그렇게 흥분과 기대가 이어지면서 전반전이 지나고
후반전 초반 터키 팀이 한골을 넣었습니다.
긴장과 흥분, 미칠 것 같은 터키 국민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태극기와 터키 국기,
그리고 터키 응원 소리..그게 전부였었지요.
후반 막판에 코스타리카도 한 골을 넣어 1:1로 끝납니다.
그러나 터키 국민들은 환호를 합니다.
예상은 코스타리카가 우세했는데,
형제국의 전폭적인 응원에 힘입어 무승부가 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약체 중국이니까 한 껏 기대가 부풀어 오릅니다.
그 때 터키를 여행하던 사람들은
식당에 가서도 공짜에 대환영..환영의 연속이었습니다.
KOREA는 우리 형제국이니까 한번 안아보고 감격하면서,
공짜 식사를 제공 받았습니다.
당시 터키를 여행했던 형님의 증언입니다.
이제 터키에서 한국은 최고의 1등 손님이 되어 버렸고,
국민들 마음에 6일전 그 악몽은 다 잊어버렸지요.
이런 응원 대장정은 6월13일 서울 상암 경기장에서 최고의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합니다.
3일간 응원준비를 거쳐 중국전에서는 더 많은 터키 함성이 쏟아지고,
결과는 3:0, 드디어 16강 진출이 확정되었습니다.
이제 터키는 백성 한사람에서 부터 대통령에 이르기 까지
한국과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열기는 8강전 4강전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더 극적인 것은 3.4위전에서 터키가 한국을 3:2로 이기고
같이 손을 흔드는 모습에서 한국=터키의 등식이 성립되었지요.
이 사건 이후로 2003년에는 한국에서 터키로의 무역이 59%나 증가하고,
2004년에는 71%의 무역 증가를 가져 옵니다.
이어서 국산 무기도 엄청나게 수출합니다.
한국형 전차, 장갑차, K-9 자주포 등,
그리고 지금은 국산 항공기까지 사가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터키는 우리 한국의 알짜 손님인 동시에 완전한 형제의 나라입니다.
2002월드컵에서 터키의 첫 경기중 오심이 결국은 전화 위복이 된 것이죠.
그러면 형제의 나라라는 기원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의외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왜냐면 최근 세대는 역사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고,
기성 세대도 당 나라와 고구려 시대의 대외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시대 말기에 돌궐은 고구려 서북쪽에 위치한 인접 국가 였었지요.
당시 신흥 강국인 당나라에게 돌궐과 거란, 고구려는 눈에 가시였으나,
거란은 당에 복속되고, 남은 돌궐과 고구려는 동시에 견제를 받으며,
동병 상련인지라 일종의 결혼 동맹과 유사한 형태의 이웃이 됩니다.
서로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런 관계가 계속 이어 졌지요.
처남 매부지간 같으니 형제의 나라가 자연히 형성되는 것이지요.
결국 고구려가 망하고,
대조영 장군에 의한 발해가 성립이 되어서도
그런 관계는 계속 됩니다.
이에 당나라 측천무후가 정권을 잡자,
돌궐과 발해 사이로 쐐기를 박는 분리 정책을 펼칩니다.
발해는 천문산을 넘어 한반도 북쪽으로 밀려나
만주 동쪽 용경 상천부에 수도를 정하고, 시베리아 일대까지 확장을 해요.
그런데 돌궐은 이 때부터 당(唐)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거의 6세기간에 걸친 거대한 민족의 대 이동을 하게 됩니다.
중국 당나라는 돌궐과 발해를 분리 시킨후 쇄기를 확대해가며
돌궐을 압박해 가자, 돌궐은 기마민족으로서
말을 탈수 있는 강한 군대와 젊은 여인들만
그룹을 지어 계속 서쪽으로 쫓겨갔습니다.
이동로에 있는 부족은 닥치는 대로 정복한후,
전쟁에서 남자들은 싹쓸이를 당하고,
젊은 여인들은 취하여 결혼을 하면서 계속 종족을 보존하여 갔지요.
이렇게 중국 북서부를 지나고 인도 북부를 지나,
오늘날 “키르기스탄,아푸가니스탄”을 거쳐 200여년이 흐른
서기 900여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오늘날 이란 지역에 까지 도달합니다.
이 과정에서 돌궐은 영어식 표기인 “투르크”로 불리게 되지요.
그곳에서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돌궐”족은
이란계 이슬람에 의해 군사 노예로 고용당합니다.
이 때 이동하는 지역에 있던 이슬람 여인들이 계속 유입되면서
종교는 여인들이 가져온 수니파 이스람교가 됩니다.
그러나 무력과 토지를 보유한 그들은 결집하여 결국에는
강력한 이슬람 국가를 형성하고,
비잔틴 제국을 번번히 칩입했지요.
비잔틴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하자 교황은 십자군을 파견하지요.
그렇게 계속 영향력을 확대했으나 12세기에는 분열되어 뿔뿔히 흩어졌었고,
13세기에는 몽골의 칩입을 피해 소아시아로 투르크인들이 이주하여,
1453년에는 비잔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킵니다.
이로서 330년부터 1,100년간 이어온 로마 제국의 수도는 사라지고,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고어 1922년까지 오스만 제국으로 번영하다가,
1차 세계 대전후 오스만은 승전국에 의해 분할되어 없어졌습니다.
그러다가 투르크의 민족 운동 지도자 케말파샤에 의해 터어키로 독립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돌궐은 600여 년에 걸친 대 이동을 한 후에
오늘날 터어키 지역에 뿌리를 내려,
약 700여 년 동안 발전을 해 왔던 것입니다.
돌궐 출발 당시에는 소수의 건강한 돌궐 여자와
고구려에서 시집을 간 건강한 여인들만 민족 대 탈출 행렬에 가담을 하였는데,
이동 과정에서 이슬람 여인들이 계속 유입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터어키인들은 돌궐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슬람화 반서구화된 안면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과종에서 터어키인들은 자신의 뿌리를 그대로 기록하여
후세에게 정확하게 교육을 했기 때문에
KOREA는 고구려, 발해의 후예이기에 형제의 나라라고 교육시키고,
그렇게 알아 왔던 게지요.
형제란 형/아우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의 친척을 의미합니다.
당시 일부 정치권이나 방송에서는 터어키인들이 형제라고 얘기하면,
“그래 너는 아우고 내가 형이다”라고 어리석은 넌쎈스적 말을 했는데,
이제 우리는 그런 태도를 버려야 할 때입니다.
현재 터어키에서는 “굴뚝”, “부뚜막”등 글씨는 다르나
말은 우리와 똑같은 것을 보면,
고구려에서 돌궐 상류층으로 시집간 건강한 여자들이
대거 돌궐 대이동에 따라갔고,
그 후손이 계속 그 말을 사용했기에
터어키에 일부 한국 말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터어키인들은 자원하여 15,000여명이 전투병으로 참전하였고,
약 3,500여명이 전사하는 가운데 승전을 많이 올렸었지요.
전쟁이 끝나고 그들은 돌아갔지만,
세월이 흘러 대부분은 사망하였으나,
아직도 많은 참전 베테랑들이 살아 남아있어
우리의 과거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과거 10여 년 동안은 이런 참전 용사들을 홀대 했으나,
지금은 계속 이들을 100% 대한민국비로 초청을 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한 KOREA를 보여주면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감격해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동료가 있는 부산 UN군 묘지에 헌화하며
자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먼저 간 전우에게 보고하며,
결연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나 역시도 가슴이 뭉클하며,
그 분들에 대한 최대한의 공경을 담아 안내하고, 설명해 줍니다.
그 분들이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면
그들은 전보다도 더 뿌듯한 마음으로 살면서,
최고의 KOREA 홍보요원이 된다는 것을 현지 무관단을 통해 듣고 있습니다.
1300여 년 전 만주 북방에서 헤어진 형제는
엄청나게 긴 세월과 공간을 돌아,
1950년 6.25 동란에서 해후를 했으나,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 몰랐지요.
그로부터 50여년이 더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는 형제의 나라와 1300년만의 진정한 해후를 한 것입니다.
이제는 다시 만났으니 헤어지지 말고,
사이좋게 오고 가며 잘 지내고,
서로를 아껴 주며 보듬어 주어야겠지요.
이제는 이런 역사를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깨닫게 해 주어야 하는데....
오늘날 우리의 교육 현실은 여기에서 자꾸만 멀어져가는 것을 느낍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갈 길은 멀고 험하지만,
그래도 한 걸음씩 전진하다보면,
목적지에 도달해서 언젠가는 많은 후손들이 알고 실천하며,
겸손하게 살아갈 것을 기대하면서,
이런 것도 나의 소명이라 여기며 다짐해 봅니다.
2011년 66주년 광복절에 즈음하여,
제 2의 광복인 평화 통일을 기원하면서
靑山이 온 국민들에게 드립니다.
첫댓글 언젠가 한번 듣거나 본적이 있었는데????? 청산으로 부터 들었었나???? 오묘한 역사의 진실일세!!!!!
그러니 잘 전파하고.....또 봄세
청산의 지식과 열정을 존경하옵니다! 자~알 보았읍니다!
자-알 봤으면 양국관계증진에 도움이 되도록,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잘 활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