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지.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1930~)의 선언은 ‘새로운 영화’의 명제가 됐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은 고전적 양식을 완성했고(알프레드 히치콕, 존 포드, 그리고 장르 영화들), 이탈리안 네오레알리슴은 부패하기 시작했고(펠리니, 안토니오니, 비스콘티), 프랑스 영화는 문학의 진부한 재각색(르네 클레망, 앙리 조르주 클루조에서 알랭 레네까지)에 사로잡혔다. 영화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제 영화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물결(!)이 필요했다.
장 뤽 고다르는 바로 이때 수호천사처럼 등장했다. 프랑스 영화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영화평을 쓰던 고다르는 하워드 혹스와 뮤지컬, 험프리 보가트, 그리고 할리우드 B급 영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와 앙드레 바쟁의 미장센을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킬 가능성을 모색했다. 비평가 시절 그가 쓴 ‘몽타주, 나의 멋진 근심’은 영화감독으로서의 고다르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고다르는 8편의 단편영화 수업을 거쳐 그의 <카이에 뒤 시네마> 동료이자 영화감독인 프랑수아 트뤼포의 시나리오 <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로 데뷔했다. 그는 스스로 이 영화를 ‘오토 플레밍거의 <슬픔이여 안녕>에 대한 속편’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으며 또 한편으로 험프리 보가트에게 바치는 연애편지(!)라고 불렀다. 고다르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 자신의 영화광적인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영화에 바치는 존경심과 함께 정반대로 모든 영화에 대한 부정을 시도하고 있다. 영화는 마치 B급 갱스터 영화의 멜로드라마처럼 보인다. 주인공 미셸(장 폴 벨몽도Jean Paul Belmondo)은 별다른 이유 없이 차를 훔치고, 여자들을 울리고, 경찰을 총으로 쏘고, 미국에서 온 애인 패트리샤(진 세버그Jean Seberg)를 설득해 도망치자고 유혹한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경찰에 고발하고, 미셸은 거리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다.
고다르는 미셸과 함께 1959년 파리를 달린다. 알제리가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실존주의가 구조주의에 자리를 양보하고, 드골정권이 보수반동주의로 변질하고 있는 파리에서 ‘새로운 세대’의 공기와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를 영화는 영화 스스로 질문한다. 고다르는 영화 사상 최초로 ‘영화에 관한 영화’를 창조해낸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스스로의 자의식을 갖고 주인공과 이야기와 작가 사이에서 영화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은 갑자기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걸고, 화면은 점프 컷과 롱 테이크의 수사학으로 영화의 불문율을 차례로 돌파한다. 영화는 지켜야 할 문법을 갖고 있지 않은 담론이며, 고다르는 영화란 ‘네 멋대로’ 만드는 것이라고 선동한다.
고다르는 단호하게 말한다. 영화에서 이론이란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영화에 관한 이론이란 영화(들)뿐이라고 대답한다. 만일 그러하다면 고다르는 여전히 영화로 영화를 말하는 영화평론가인 셈이다. 그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 미래의 영화를 발명한 것이며, 고다를 통해서 영화는 무한히 다양한 상상력의 이미지를 타고 도주하는 복화술사가 됐다. 고다르 이전에 고다르 없고, 고다르 이후에 고다르 없다. 평생 고다르가 싫어했던 미셸 푸코의 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