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14세기 시조는 성리학을 중요 이념으로 하는 유학자들이 전대의 문학 및 음악 · 예술의 형식을 극복하면서 창작되었다. 노년의 지혜를 말하는 탄로가(嘆老歌)류나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시조와 같이 주위에서 흔히 보는 경물을 노래한 것과 소망하는 바를 이루지 못해 번민하는 심정을 토로하는 작품을 흔히 볼 수 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이룩되는 과정이나 그 직후의 상황에서 시조가 긴요한 구실을 했다. 특히 조선의 건국을 앞두고 태종이 될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부르자,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라는 시조로 응답했다는 일화가 후대 문헌에 전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시조를 창작했다는 것은 시조의 구실이 크게 확대된 증거이다. 또한 정치적 격변기라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고려에 대한 절개를 노래하는 절의가(節義歌), 고려 멸망 후 지난날의 왕조를 추억하면서 옛 도읍지인 송도(松都)를 찾은 느낌을 읊은 회고가(懷古歌)들이 나타난다. 이 시기 당대의 정치에 관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둘러서 은근하게 나타내는 것이 한시에서는 가능하지 않아 새로 등장한 서정시인 시조가 소중한 기여를 했다.
1.황진이
산(山)은 옛 산(山)이로되 물은 옛 물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임의 정(情)이
녹수(綠水) 흘러간들 청산(靑山)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니져 우러 예어 가는고.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임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긴가 하노라.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서경덕
만물은 어디에서 왔다가 또 어디로 가는지
음양이 모였다 헤어졌다 하는 이치는 알듯 모를 듯 오묘하다
구름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깨우쳤는지 못 깨우쳤는지
만물의 이치를 보면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같다
시작에서 끝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항아리 치며 노래한 뜻을 알겠고
아, 인생이 약상(弱喪) 같다는 것을 아는 이 얼마나 되는가
제 집으로 돌아가듯 본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