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치 않은 석굴암으로 가는 길
불국사에서 석굴암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2.2km의 산길을 따라 1시간 10분 정도 걸어서 가는 방법과 12분 정도 차를 타고 8km 정도의 꼬불꼬불한 산길을 타고 오르는 방법이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자차를 이용하든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지만, 신라가 불국토를 구현하려고 한 토함산을 오르는 것 또한 좋은 방법이다. 석굴암을 보고 난 뒤 발품을 팔아 토함산 정상까지 가서 탑골로 내려오면 또 다른 폐사지에서 마동 삼층석탑까지 볼 수 있으니 여유가 되는 사람은 토함산 등산을 함께 즐기는 편이 낫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나는 아직도 토함산 정상을 밟아본 적이 없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세 번이나 갔음에도 토함산 등산은 떠올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경주에서 한참 떨어진 성남에 사는 지금은 그때 왜 토함산을 오르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기도 한다. 경주 국립공원의 양대산맥이라 부를 수 있는 남산과 토함산 중 남산은 뻔질나게 올랐으면서, 토함산은 끝끝내 외면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토함산에 있는 유명한 사찰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두 절을 품고 있는 산인 '토함산'의 명성을 가려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공원 이야기 41 - 석굴암의 복원 과정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 김대성이 건축한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원이다. 불교 문화재의 걸작이자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된 석굴암은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에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고 경덕왕에 이르러 불교 예술의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당시 신라의 재상이었던 김대성과 이성룡이 창건해 서기 774년에 석굴암을 완성하였다. 신라 당시에는 석불사로 불렸을 정도로 규모가 컸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재는 암자로 여겨져 석굴암이라 불린다. 석굴암은 불교가 전래된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한반도는 조각 난도가 높은 화강암이 많아 석굴을 만들기 어려워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곳곳에 석굴이 만들어졌다. 특히 불교 예술이 절정에 다다른 신라 시대에 대부분의 석굴이 건설되었다. 군위의 삼존석굴, 골굴사의 12개 석굴, 양산의 미타암, 경주 남산의 칠불암 등이 그것들이다.
석굴암은 신라 시대 건설된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관리되고 보존되어왔다. 하지만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 시대에 토함산 중턱에 있는 석굴암을 제대로 관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경주가 평범한 지방도시로 격하되어 사람들의 기억에도 점차 잊혀 갔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자 방치되었던 불교 유적을 일제가 면밀히 조사하고 귀중한 문화유산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석굴암은 사람들의 기억에 잊히고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는데, 일제는 이를 발견하고 재건하기로 했다. 1910년 당시 석굴암의 보존 상태는 최악이었다. 본존불의 코가 깨져있었고, 연화대 또한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천장의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기고 그 사이로 흙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대로 방치할 경우 석굴암 내 모든 불상이 파손되는 건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석굴암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은 일본에도 널리 알려져 조선 총독 데라우치가 직접 경주에 방문해 시찰할 정도였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고 재조립하였다. 석굴암이 있는 곳은 아주 습한 곳으로, 불상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외벽을 세우고 외벽과 석굴 사이에 콘크리트를 채웠다. 하지만 당시에는 콘크리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탄산가스(CO₂)와 칼슘(Ca)이 화강암 벽을 손상시킨다는 사실을 몰랐다. 게다가 석굴암이 지하수가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는데, 아연관을 이용해 물을 빼내는 공사를 진행해 바닥의 온도가 높아져 버렸다. 물이 흐르면 바닥의 온도가 낮아 이슬이 바닥에만 생겼는데 내부 벽과 불상 표면에 엄청난 결로와 이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누수 현상과 습기로 인해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드는 현상이 나타나자 1920년부터 1923년까지 방수를 위해 천장에 아스팔트를 바르고 석실 지하 아연 배수로의 방향을 바꾸는 공사를 진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1927년과 1934년에 증기 세척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본존불을 비롯한 불상이 마모되었다.
이후에도 제대로 된 복원과 보존은 이뤄지지 않았고, 현재 석굴암의 습기는 밀폐된 상태에서 에어컨을 가동해 제거하고 있다. 관람객이 석굴암에 들어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습기 문제 때문이다. 원래 석굴암은 석굴 안으로 들어와 10대 제자상과 11면 관음상으로 둘러진 방을 한 바퀴 돌면서 참배하는 구조였다. 현재 석굴암은 부처님 오신 날에 신자들에 한해 개방되고 있으며, 다른 때 석굴암에 방문한 사람들은 굴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유리 너머로 본존불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석굴암, 하지만 우리는 다가가지 못한다
석굴암 주차장에서 내려도 석굴암까지 가기 위해선 15분 정도 걸어야 한다. 하지만 석굴암까지 가는 길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 아름다운 숲길이라 심심할 틈은 없다. 주말이나 연휴에 가면 엄청난 인파로 붐비지만 걷는 이들이 한결같이 기대하는 표정으로 석굴암으로 향하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지 어느덧 30년이 다 되어감에도 석굴암을 여러 번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석굴암에 도착하면 둥근언덕처럼 보이는 석굴 앞으로 목조 전각이 설치되어 있다. 전각이 설치된 이유는 석굴암을 완전히 밀폐된 공간으로 만들고 환기장치를 통해 습도와 온도를 조절하기 위해서다. 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에 콘크리트로 보수된 석굴암은 습기가 차 이끼와 결로가 생겨 훼손되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를 막기 위해 현대의 기술을 빌려 석굴암을 보존하고 있지만, 원래의 형태를 영원히 알지 못할 것 같은 걱정이 앞선다.
석굴암 석굴은 토함산의 자연 암벽을 다듬어 공간을 만든 뒤 흙을 덮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공 석굴사원이다. 또한 불상・보살상・천인상・사천왕상・인왕상・제자상 등 불보살과 권속의 조각이 가득 자리해 있는 신라 불교문화의 보고이다. 석굴 축조의 정교함과 조각 예술의 뛰어남이 인정되어 1995년에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석굴암은 크게 전실과 주실로 나뉘는데, 네모난 전실에는 불국토를 수호하는 팔부 중상과 인왕상, 사천왕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고, 둥근 주실에는 본존불과 함께 보살상과 제자상 등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존살 압구부터 왼쪽과 오른쪽의 각 면에는 팔부 중상이 4구씩 놓였고, 그 옆으로 인왕상 2구가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서서 앞면을 바라보고 있다. 전실과 주실을 잇는 비도에는 사천왕상이 양쪽 면에 각각 2구씩 서 있다.
주실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앞쪽 왼쪽과 오른쪽에는 돌기둥이 있고, 입구에서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차례대로 범천과 제석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놓였으며, 10대 제자도 양쪽으로 5구씩 있다. 본존불 바로 뒤에는 십일면 관세음보살상이 있고, 그 위로 본존불의 광배가 새겨져 있으며, 광배의 왼쪽과 오른쪽에 설치된 감실 5곳에는 문수, 유마, 지장 등 여러 보살상이 앉아 있지만, 2개의 감실은 비어 있다. 석굴암 석굴에는 모두 38구의 조각이 모여 있는 셈이다.
높이 3.4m의 본존불은 주실의 한가운데에서 약간 뒤에 있는데, 연꽃무늬가 새겨진 받침대에 앉아 있다. 얼굴에는 온화한 눈썹에 반쯤 뜬 눈, 오뚝한 콧날과 자애로운 입을 갖추었고, 부드러운 어깨와 굴곡 있는 가슴에 얇은 옷과 주름을 새겼으며, 안정된 자세로 가부좌를 틀었다. 특히 삼국시대의 불상과 달리 미소가 없이 깊은 사색에 빠진 얼굴 표정은 가히 일품이며, 윗부분을 아랫부분보다 크게 새긴 뒷벽의 광배도 뛰어나다. 다만 왼손을 배꼽에 두고 오른손을 활짝 펴 오른쪽 무릎에 놓은 항마촉지인의 손 모양을 두고 석가불과 아미타불 가운데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아직도 남아 있다.
본존불 뒤쪽의 높이 2.2m인 십일면관음보살상은 보관 위에 십일면의 얼굴을 크게 돋을새김 하였는데,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오른손에는 목걸이를 잡고 있으며, 섬세하게 늘어진 옷자락과 온몸을 치장한 장신구 등이 입체적으로 조각되었다. 각각의 높이가 2.2m인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은 둥그런 광배에 보관을 쓰고 몸에 구슬 장식을 단 모습인데, 신체와 옷이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우아하게 조각되었다.
무려 38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석굴암은 석굴 전체가 부처님의 세계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석굴암 안으로 들어가 모든 조각을 자세히 보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석굴암의 보존을 위해 입구에서 유리 너머로 본존불을 비롯한 비도 (扉道)를 이루고 있는 팔부 중상과 인왕상, 사천왕상을 보는 것이 다이다. 주실을 이루고 있는 다른 조각들은 구경도 하지 못하며, 본존불의 광배가 원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도 없다. 비싼 요금을 내고 우리 선조들이 만든 걸출한 불교 유산을 보러 왔지만 한참 떨어진 곳에서 본존불의 형태만 살짝 볼 수 있다는 건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세 번이나 석굴암을 방문했지만 불국사보다 덜 감동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국사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조각과 불상은 바로 앞에서 감상하며 감동을 느낄 수 있지만, 석굴암의 구조와 조각을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경주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단연 최고의 여행지로 꼽지만 나는 불국사만 다녀와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석굴암은 그 명성에 비해 직접 찾은 사람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창덕궁 후원처럼 하루에 제한된 인원이라도 석굴암을 감상하게 해서 그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때가 오기를 바란다.
토함산의 또 다른 절들, 골굴사와 기림사
경주 국립공원에 속한 토함산의 대표적인 사찰은 불국사와 석굴암이지만, 토함산의 잘 알려지지 않은 두 사찰 또한 찾아가 볼 만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토함산에 있다고 볼 수는 없고 토함산 산줄기를 타고 동쪽으로 뻗은 야트막한 산에 있는 두 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스님들이 무술을 연마하기로 유명한 골굴사 (骨窟寺)이며, 다른 하나는 기림사 (祗林寺)다.
골굴사도 석굴암에 비할 바 아니지만 보물로 지정된 석굴이 있다. 하지만 골굴사가 유명한 건 선무도 (禪武道)의 총본산이기 때문이다. 선무도를 연마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골굴사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골굴사에 하루 묵은 뒤 아침에 기림사와 감은사지를 포함한 불교 유적 답사에 참여해 경주의 숨겨진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듣기만 해도 설레는 일 아닐까!
★ 석굴암 흑백 사진은 국립문화재연구소 한석홍 기증자료에서 공익 목적으로 가지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