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마을
내 고향 동편東便 마을 주위에는 산이 없고 들도 없다. 동진강과 만나는 자그만 내川를 끼고 고만고만한 논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농촌이다. 어렸을 적엔 50여 호의 초가와 두어 채 기와집이 어우러진 동네로 이웃 마을에 별반 뛰어나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고향을 등졌고 폐가가 뜯기면서 30여 호쯤 남아 있다. 제방시설이 잘 갖추어져 산사태나 물난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은 입지다. 산을 가까이 끼고 있지 않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6‧25전쟁 때 산 사람들의 피해를 당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 한 일이었다. 마을 중앙에 있는 기와집에 얼마동안 군인들이 주둔하였는데, 어렸을 적 기억으로는 그 집을 ‘중대 본부’라고 불렀다. 아마도 1개 중대의 병력이 빨치산 토벌의 임무를 받고 와 있었던 듯하다.
동네는 일가붙이가 많은 김 씨 집성촌으로 조상님 시제를 모시는 종대가 두 군데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서원이 있다.
우리 마을은 조선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비극적인 삶을 산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태생지로 알려졌다. 정순왕후는 판돈령부사 송현수의 딸로 성품이 공손하고 겸손하며 효심이 깊어 단종의 정비에 오른 인물이다. 단종이 유배되자 궁에서 쫓겨나 동대문 밖 청룡사 근처 초막에서 살았다. 시녀들이 동냥을 해다가 끼니를 이었고, 아낙네들이 식량과 반찬을 가져다주었다. 세조가 식량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고, 염색업을 하며 근근이 살았다고 한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없었다면 내 고향 마을은 왕비를 배출한 마을로 격상되었을 것이고, 후손이 왕위를 이었으면 왕의 외가 마을로서 크게 대접을 받았을 것인데…….
고향 마을에 살던 송현수 부원군이 벼슬길에 오르면서 솔가하여 한양으로 이사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 마을과 이웃 마을에 여산 송 씨 일가붙이들이 꽤 모여 살았다. 지금은 생가터에 비각이 세워져 있다. 지자체에서는 정순왕후의 생애를 기리기 위하여 태생지 관광 자원화 사업의 하나로 1억5천만 원을 들여 마을 정비사업을 추진하였다.
용계서원은 조선 숙종 때 창건하여 최서림을 향사하고 영조 때 김정호, 은정화, 한백유, 유종흥, 김습을 추배하였다.
마을 동쪽에 고당산 줄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조그만 내가 있고 건너편에 송산 마을이 있다. 정월대보름이면 내를 건너 석전石戰을 하러 몰려가기도 했다. 냇가 옆에 감운정感雲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신라 헌강왕 때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재임하면서 검단대사와 시를 읊고 소요하던 곳이라 한다. 상류에서 술잔을 띄워 자기 앞에 이르는 동안 시를 지어야 했다고 전해오며, 이를 유상곡수라 하는데 그 바위를 유상대라 했다. 이제 유상곡수의 흔적은 없으나 커다란 바윗돌은 남아 옛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1919년 유림들이 이곳에 최고운 선생을 추모하여 감운정을 세웠고, 뒷날 그 옆에 유상대 유적비를 건립했다.
이웃 마을에 있는 남천사는 조선 유학자 김후진, 안의, 손홍록, 김만정 등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안의와 손홍록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조선왕조 역사 기록의 단절을 막는데 큰 공을 세웠다. 김후진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군자감 직장 벼슬을 한 인물이다.
정읍시는 칠보면 중심의 태산선비문화권 관광 자원화에 힘을 쏟고 있다. 태산선비문화권은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선정을 베풀었던 곳이자 가사문학의 효시인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 탄생지이기도 하다.
고향 마을 서편에 있는 성황산이 아래 산자락을 따라 동네가 길게 이어져 있다. 이 마을에 최치원을 배향하는 무성서원이 있고 뒷산을 조금 오르면 노송 사이에 정자가 보인다. 송정松亭이라 하는데, 조선조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사건에 항소한 선비들이 벼슬을 버리고 음풍농월하던 곳이라 전해온다. 세칭 7광狂 10현賢이라 일컬으며, 7광은 김감, 이탁, 김대립, 김응빈, 송치중, 송민고, 이상형을 칭하고, 10현은 7광중 김감, 이탁, 김응비, 송치중, 송민고의 5인과 김관, 김정, 김급, 김우직, 양몽우를 가리킨다. 후손들이 정자를 세우고 칠광도와 10현도를 봉안하여 춘추 두 차례 제사를 지낸다. 어렸을 적 동네 친구들과 성황산을 오르고 송정에서 딱총 놀이를 하며 놀던 시절이 그립다.
가사문학의 효시로 꼽는 <상춘곡>을 지은 불우헌 정극인은 불교문화를 비판하고 숭유억불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진노로 위기를 맞았으나, 근신들의 구명으로 목숨을 보전하였다. 뒤늦게 출사하여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뒤 처가가 있는 정읍 칠보 무성리에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내 고향 마을 근동에 살면서 <상춘곡>을 썼으리라. 봄 경치의 아름다움과 안빈낙도의 삶을 읊은 가사다.
홍진紅塵 에 뭇친 분네 이 내 생애 엇더한고 (속세에 묻혀 사는 분들이여, 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가) (중략)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한들 엇지하리 (아무튼 한평생 즐겁게 사는 일이 이만하면 어떠한가)
남쪽 이웃 마을 삼리 연시각에 나의 20대조이신 충민공 忠敏公 김회련金懷鍊이 받은 개국원종공신록권과 왕지를 보관하였다. 충민공은 조선조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과 함께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공의 부인 예천이씨가 어린 아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하여 정읍 칠보에 정착하였고 대대로 세거하게 되었다. 개국공신록권은 정읍시 시립박물관에 기증하여 현재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
1년에 한두 번 찾는 고향이지만, 성묫길만 재촉하고 찬찬히 둘러보는 일이 없어 아쉬웠다. 이제 수구초심으로 돌아와 고향산천을 둘러보고 옛 추억에 젖으며 고향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2015. 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