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는 다가올 고난을 예고하는듯 앞으로 나가기 싫어하는 상여처럼 아주 느리게 가고 있었다. 가면서 있는 도시들에 계속 서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도중에 볼티모어 외곽에 타우슨이란 도시에 사는 처외삼촌댁을 방문했다. 그 집 완성된 지하실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거주하셨는데 전주 북문 이진사의 막내 따님이란다. 전국에 한량들이 다 이진사 집을 드나들었다고 하며 외할머니는 기전여고를 나오셨다고 들었다. 외할아버지는 평양신학 출신으로 평생을 가난한 목회자로 사셨다.
그 외삼촌이 내가 이민수속을 할 때 재정보증과 고용계약 등으로 도와주셨다. 그렇게 크고 좋아 보이던 집이 나중에 보니 집 전체가 내가 나중에 살던 집보다 훨씬 작아서 놀랬다. 그분은 평생을 나를 친절하게 정답게 대해주셨다. 그분의 애창곡은 대니보이였는데 그 맑고 우렁찬 목소리가 어떻게 그런 왜소한 몸에서 나오는 지 신기할 정도였다. 외숙모님은 옛날 분들의 그 예절과 여유 그리고 재미있고 구수함이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옛사람으로 각인이 되어 있다. 그 분들도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리운 분들이다.
NC에 도착을 하니 처이모님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는 한국신학대학을 나와 한양대 병원에서 근무를 하다가 미국에 임상병리사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이모님은 평생을 독신으오 살았고 남을 대접하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좋아 하셨다. 그리고 매사에 너무 긍정적이어서 어떤 비즈니스의 기회가 생기면 앞뒤를 따지지 않고 일단 시작을 하곤 하셔서 평생을 고생하시게 된다. 이모님이 살던 아파트는 너무 깨끗했고 커서 이모님이 출근을 하시면 아내와 나는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이모님과 셋이 루미컵이란 게임을 하며 티격태격 싸웠던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온다.
이모님의 차로 휴일 아침 쇼핑몰에서 운전연습을 하는 첫날 만류하는 이모님의 뜻에 반해 하이웨이로 나가서 신나게 운전을 했다. 이제야 사람 구실을 한다는 자유를 맛보아서 였을까.
아주 전망이 좋고 잘 된다던 비즈니스는 어느 장로님이 운영하던 세탁소에 딸린 픽업스토어 였는데 하루 매상이 몇십불 수준이었고 비가 오는 날은 $20 정도일 때도 있었다. 나는 전단지를 만들어 근처 집들과 숙박업소 등을 계속 돌았다. 내 기억에 단 한 사람도 그 전단지를 들고 온 사람은 없었다. 아내의 배는 불러오고 있었고 나는 밤에는 양말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 때는 기름이 반질거리는 마루위를 뛰어 다니며 CK 라는 기계와 또 한 종류를 약 삼십 개씩 돌렸다.
그 장로님에게서 $500에 스테이션웨곤을 샀는데 이 차가 50마일만 넘으면 심하게 흔들리고 계속 말썽을 부렸다. 한 번은 만삭이 된 아내와 근처의 마켓에서 식료품을 가득 사서 싣고 집으로 오려는데 시동이 안걸렸다. 연락할 사람도 없고 아내는 울고… 그 절망은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돈다.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첫아이가 태어난 날은 한겨울이었다. 눈이 많이 내렸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나는 그 전날도 밤 늦게까지 놀다가 병원에 들어갔다. 그 때 나이가 25이었는데 정말 철이 없었다. 당시에 아파트에는 침대도 없었고 그냥 요를 깔고 아내를 누이니 습기가 올라오고 추워서 오들거리던 모습이 선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가게는 나아지지 않았고 그 장로님에게 사정을 해서 결국 가게를 물리고 돈을 돌려받게 된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석달을 해보고 반환하는 옵션을 종이에 써놓았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그러던 중 마지막 카드로 미군에 응모를 한다. 이년의 대학생활이 인정이 되어 2+2+2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학사장교가 되는 과정이었고 일반 GI bill보다 약간 혜택이 많았다. 이년을 싸인업하니 내게 주어진 선택은 쿡, 탱크메케닉, 헌병, 연막병 등 모두 지원자들이 싫어하는 병과만 주어졌다. 내 생각에 그래도 쿡을 하면 나중에 제대하고 써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것을 선택했는데 내 일생에 또 한 번의 실수였다.
아내와 나는 새로 장만한 빨간 머큐리 링스라는 작은 웨곤을 타고 언니와 동서가 공부를 하던 오하이오 켄트라는 도시에 여행을 했다. 그 학교가 월남전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총에 몇명이 죽음을 당한 Kent State University 였다. 결혼한 가정을 위한 학교 기숙사가 참 인상적이었다. 함께 테니스를 하고 바둑을 두고 당시에 가난했던 형편에도 함께 치킨을 사서 맛있게 먹었다.
함께 만난 나이아가라는 그 모습이 채 보이기 전 온 몸을 흔드는 그 소리가 압권이었다. 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배를 타고 폭포 근처로 향할 때는 숨이 쉬기 힘들 정도의 물보라와 소리가 내 젊은 날의 지친 영혼을 마구 휘갈겼다.
‘일어나 일어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잖아. ’
여행을 다녀와서 나는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간단한 가방 하나와 함께 사우스캐롤라이나 콜럼비아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몸과 지친 마음을 실었다. 창 밖에서 슬픈 표정으로 손을 흔들던 아내의 모습이 지금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나는 웃어보였다. 아내를 따라 이민 온지 일년 반만에 나는 다시 어린 애기가 딸린 아내와 헤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