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과 PD는 여전히 우리나라 운동권의 지형을 결정짓는 요소들입니다. 그만큼 많이 거론되고 있지요.
하지만 NL과 PD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에 근거한 것으로 얘기되는 느낌이 있더군요. 물론 그게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별로 아는 건 없지만, 들었던대로, 기억나는대로... 한번 얘기해볼까 합니다. 이거 시리즈가 될 것 같기는 한데... 약속은 못합니다...^^
NL과 PD의 노선 차이가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된 계기는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사건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70년대부터 학생운동권이나 그들을 배후 조종하는 지하운동권 내부에서 상당한 노선 차이가 드러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준비론과 투쟁론이 그것인데요... 주로 노동현장 이전을 준비하던 세력들이 준비론을 말하는 경우가 많았고 반면 투쟁론은 보다 정치적인 이슈파이팅을 선호하는 편이었다고 하더군요. 준비론은 주체역량의 미약함과 객관적 정세의 미성숙을 들어 일단 노동현장 이전을 통해 민중들의 역량을 강화하며 기다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친미수구 파쇼세력과 건곤일척의 대결전을 벌인다는 컨셉이고... 투쟁론은 반대로 '그런 식으로 은인자중 도나 닦다가는 결코 주객관적인 조건이 무르익지도 않고, 설혹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 와도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다... 민중의 혁명역량은 무엇보다 먼저 투쟁을 통해 훈련되고 고양된다...' 뭐 이런 입장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이 가운데 준비론이 나중에 NL 계열, 투쟁론이 PD 계열로 정리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물론 준비론이 노동현장 이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후 노동자 계급 주도성을 말하는 것과 연관되고, 투쟁론이 부르주아 정치세력(DJ나 YS)과의 연대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NL의 특징을 연상시키는 바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정치노선이 그렇게 단선적으로 진행 발전하는 것은 아닌 것 같구요... 오히려 준비론과 투쟁론으로 구별되는 기질의 차이가 이후 NL과 PD의 차이로 갈리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준비론과 투쟁론이 보다 본격적인 사상투쟁이나 논쟁으로 이어진 것이 바로 80년대 초반의 유명했던 무학논쟁입니다. 무림-학림 논쟁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요, 당시 학림은 그 주요 멤버들이 구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 부근의 학림다방(지금의 대학로. 현재도 학림다방은 남아 있습니다)에서 주로 모였다고 해서 학림이라고 불리웠지요... 이들이 소위 투쟁론을 대표합니다.
반면 무림은 준비론을 대표하는 입장인데, 당연히 노동현장 이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보안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입장이었고... 마치 안개낀 것처럼 뿌옇게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학림에 대비하여 '안개 무(霧)' 자를 써서 무림이라고 불렀다는... 물론 이것을 제가 일일이 확인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100%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이들이 80년대 초반에 대판 싸움을 벌이게 된 계기는 뭐니뭐니 해도 80년 광주항쟁이었습니다. 70년대만 해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파쇼의 물리적 억압과 또 그에 대응하는 광주 시민들의 폭발적인 혁명투쟁 수위의 고양을 보며 우리나라 운동권들이 기존의 정세인식과 전략전술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객관적인 요구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무학 논쟁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특히 1980년 5월, 광주항쟁 직전에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서울역에 집결했다가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 이루어진 경험이 당시 학생운동권과 전체 변혁운동권에 엄청난 충격과 반성을 강요했고, 이것이 이런 논쟁을 촉발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세력이 비겁하게(?) 또는 기회주의적으로 서울역에서 회군하는 바람에 광주의 고립된 민중들이 처절하게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고, 민주화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그런 뼈저린 반성이 깃들여 있는 논쟁인 셈입니다.
엉뚱하게도 현재는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가 있는 심재철(맞죠?^^)이 바로 당시 서울대 학생대표로서 회군 결정을 공식화했고... 덕분에 심재철은 80년대 내내 거의 사람 구실을 못하고 폐인 노릇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심재철이 그 역할 때문에 엄청난 죄인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 그 결정 자체는 심재철이 내릴만한 위치도 아니었고, 그저 발표를 맡았을 뿐인데... 그래도 어쨌든 당시로서는 광주학살의 경험이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심재철은 광주일고 출신으로 자신 때문에 고향 사람들이 더욱 총칼에 학살되었다는 죄의식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심재철 보면 과거의 그 충격 잘도 흡수하시고 참 건강하게 앞으로 벽에 *칠할 때까지 살 것으로 사료가 되기는 합니다만...^^
나중에 무림과 학림은 우리나라 운동권을 대표하는 다양한 정파로 분화 발전하고, 특히 그 큰 주류가 NL과 PD로 발전합니다만... 80년대 초반 무학 논쟁을 주도한 인물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현재 내일신문의 발행인인 장명국씨(현재도 발행인으로 있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패스~ 하지만 창간 당시는 발행인이었던 것으로 압니다)와 DJ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됐다가 미국 제약사의 약값 문제 어쩌구 하면서 경질됐던 이태복씨(원래 이 양반이 내일신문보다 먼저 1989년에 전국노동자신문을 창간 발행했죠^^)... 이 두 분이 무학 논쟁의 당사자였습니다.
당시 논쟁에서는 장명국씨가 준비론(무림)의 대표주자였고, 이태복씨가 투쟁론(학림)의 대표주자였다고 하더군요. 이 둘이서 몇 개월 동안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고, 전체 운동권의 초미의 관심사였다고 하는데...^^ 뭐 당시에 운동권이란 게 규모가 얼마나 됐는지도 알 수 없고, 또 요즘 스타크래프트 중계방송하듯이 실시간으로 전송했을 리도 없으니... 저 '초미의 관심사'라는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당시 운동권에서 말발깨나 날린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논쟁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저 논쟁을 통해 양자의 입장 차이가 분명해지고, 이후 자신들의 철학적 이론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고 보다 다양한 논의와 이론적 모색을 통해 다양한 분파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까요?
혹시 당시의 논쟁 내용을 담은 기록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싶어서 개인적으로 좀 수소문해봤는데, 적어도 제가 아는 바로는 그런 기록이 없는 것 같더군요. 그저 당시 논쟁을 옆에서 지켜봤던 사람들이 기억에 의존한 단편적인 증언 정도... 그나마도 별로 듣지 못했구요... 아쉬운 점입니다.
당시 그리고 그 이후까지도 학생운동권의 이론적 리더들은 거의 99% 가량 서울대 출신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태복은 이런 점에서도 특이했죠. 국민대 출신이었으니까요. 그는 70년대에 노동현장 경험을 쌓으면서 서울대 학생들과 접촉하면서 조직을 만들어갑니다. 당시 같은 엄혹한 비합법 상황에서 선배의 이름이나 출신학교 물어보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겠지만, 아무튼 이태복의 서울대 출신 후배들은 상당히 나중까지도 이태복이 서울대 출신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첫댓글저는 줄곧 역사에서 비껴서 있거나 밀려나 있었던 사람입니다. 거창하게 역사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모든 부문의 주류에서 비껴나 있었던 주변부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능력이나 그릇의 탓이 크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미처 내가 헤아리지 못하는 다른 원인들도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필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나를 비롯한 주변부는 과연 왜 주변부일 수 밖에 없었나 하는 원인, 또는 변명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필자의 솔직담백한 체험담을 기대합니다.
첫댓글 저는 줄곧 역사에서 비껴서 있거나 밀려나 있었던 사람입니다. 거창하게 역사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모든 부문의 주류에서 비껴나 있었던 주변부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능력이나 그릇의 탓이 크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미처 내가 헤아리지 못하는 다른 원인들도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필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나를 비롯한 주변부는 과연 왜 주변부일 수 밖에 없었나 하는 원인, 또는 변명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필자의 솔직담백한 체험담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