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눈에는 이란인이나 아랍인이나 비슷한 민족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유럽인들이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비슷한 민족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
이란은 아랍과 언어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다. 무엇보다 정체성이 다르다. 물론 오랫동안 튀르크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몽골이나 티무르의 침략도 받았지만 이란 지역은 별개의 왕조와 문화가 존재했다.
애초부터 서아시아 지역의 패자는 페르시아, 즉 이란인이었다. 이슬람이 크게 일어난 후 651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랍인에게 정복되고 약 200년 동안 지배당했다. 그러나
아랍인의 지배 동안에도 페르시아라는 정체성은 유지된다. 유목민인 아랍인들이 딱히 페르시아를 통치할 기술이나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페르시아인들을 앞세워 광활한 나라를 운용하였다. 그만큼 페르시아의 문화가 월등하였다. 후대 이란인들은 '정복자들을 정복한 민족'이라고 자랑스러워 하는 이유다.
'최초의 시아파 왕조 부와이흐 등장'
바그다드를 근거한 이슬람 아바스 왕조가 약해지면서 많은 지방 세력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시절에,
932년 이스파한을 근거지로 하는 이란계이자 최초의 시아파 왕조인 부와이흐 왕조가 일어난다.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허울만 남은 칼리파의 아바스 제국을 좌지우지할 정도까지 커진다. 이 덕분에 시아파가 이란 지역에 자리를 잡는다.
다시 부와이흐 왕조가 사라지고 실크로드의 길목인 이란 지역에는 여러 유목민들이 칩입하고 수많은 부족들이 명멸한다. 부와이흐 왕조 이후 근 400년 동안 뚜렷한 지배자도 없이 황폐해져 간다.
15세기 말 쿠르드인과 튀르크인 기병 출신들이 세력을 키워가던 중 셰이크 사피가 이끄는 부족이 부상한다.
이들을 '사파비 부족'이라 부른다. 16세기 초 10대의 어린 지도자 이스마일은 튀르크 전사들과 함께 주변 영토를 넓혀나간다. 페르시아의 옛 영광을 지향하는 그는 스스로를 '샤(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자)'라고 칭하면서 페르시아 제국을 이어 받는다는 정체성을 가진다.
샤 이스마일1세는 시아파의 한 갈래인 '12이맘파'를 정식 종교로 선언하고 주민들을 개종시킨다. 대다수가 수니파인 주민들이 반발하자 잔혹한 형벌을 내세워 개종을 강제한다. 그가 시아파로 강제 개종시키는 당시 수니파의 칼리파가 군림하는 초강대국 오스만 제국이 아시아와 유럽을 지배하고 있다.
샤 이스마일1세는 자신의 왕국에 시아파를 심으면 수니파의 오스만 제국과 별개로 시아파의 종주국이 되리라는 야심을 기지고 있다.
과거 페르시아의 영토 대부분을 정복한 샤 이스마일1세에게 반발하는 수니파 주민들은 오스만 제국의 칼리파에게 도움을 호소한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1세는 시아파인 사파비 왕조를 그냥 두지 않는다. 1514년 10만 대군의 포병과 화승총을 앞세운 오스만 군대는 재래식 기병대인 사파비 군대를 공격한다. 전투에서 패배한 사파비 왕국은 아나톨리아 지역을 빼앗기고 쿠르드족들도 오스만 제국 편으로 붙는다.
위력을 잃은 사파비 왕조는 곧 사라지고, 나디르 샤가 아프샤르 왕조를 일으킨다. 나디르 샤는 200여년간 지속해온 시아파 강제 개종을 계속하나 수니파에게 다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수니파가 대세를 이루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그는 대단히 폭력적인 군주이다. 영토를 넓히는 한편 백성들에게 공포정치를 펼친다. 이에 불만을 가진 저항 세력에게 암살당하지만 이후 등장하는 왕조들도 사파비 왕조의 시아파 정책을 계승하여 지금도 이란은 시아파 국가로 존재한다.
'그러면 오늘날 시아파 이란은 왜 수니파 국가들과 충돌하는가?'
시아파의 종주국인 이란과 수니파의 종주국이라고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갈등은 중동 지역 정치의 한 축을 이룬다.
흔히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을 이슬람의 4대 칼리파이자 사후에 시아파 초대 이맘으로 추앙되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의 아들이자 3대 이맘인 후세인이 비참한 죽임을 당한 '카르발라 전투'의 참극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물론 후세들이 그날을 '아슈라'라는 공휴일을 정하고 비통해하는 점은 맞지만, 이는 현재의 국가간의 갈등을 과거의 사건과 역순으로 연결하는 논리일 뿐이다.
이란의 시아파 개종은 앞에서 언급하였다시피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당시 군주의 정치적 이해득실 계산으로 강제 개종을 시킨 것뿐이다. 즉 이란은 이맘 알리의 비참한 죽음이 아닌 정치적 계산으로 시아파 국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갈등 역시 종교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이유때문이다. 중동 지역의 전략적 주도권을 두고 서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왕정이고 이란은 공화정을 채택한 것도 양측 갈등의 또 다른 요인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입장에서는 이란의 세력이 커지면 공화정의 바람이 사우디아라비아 왕정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기때문이다.
또 하나, 사우디아라비아는 친미국가인 반면 이란은 호메이니 이후 대표적인 반미국가로 돌아섰다. 이런 외교적 차이도 양측의 갈등을 부추긴다. 두 국가는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전만 해도 둘 다 왕정국가이고 친미 정책을 가지고 있어 서로 우호적이었다. 이란이 공화정으로 바뀌고 반미정책으로 돌아서면서 두 나라는 서로 반목하게 된다. 종교의 갈등이 아니라 정치적 문제이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좋은시간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