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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2025년 1월 18일 (토)
2. 날씨: 맑음
3. 경로: 산성마을 - 파리봉 - 상계봉 - 남문 - 대륙봉 - 산성고개 - 동문 - 의상봉 - 원효봉 - 북문 - 고당봉 - 범어사
4. 거리: 약 17.1km
5. 소요시간: 5시간 50분
6. 산행정보 : 파리봉, 상계봉, 금정산성, 금정산, 고당봉, 금샘, 범어사
7. 금정산 지명도: 100대 명산 (산림청, 블랙야크, 한국의 산하, 월간 산)
8. 지역: 부산광역시
9. 트랙:
10. 산행코스
겨울날씨가 겨울답지 않게 포근하다. 눈꽃 산행도 좋지만 포근하면서 시야가 깨끗해지는 겨울산행도 경험상 괜찮은 선택이다. 산성마을로 가기위해 온천장역에서 203번 버스를 탔는데, 대부분 산객들은 동문에서 하차를 한다. 동문에서 내리면 나비바위, 제3망루, 부채바위, 무명바위 등 금정산의 명물들을 감상하며 고당봉까지 비교적 수월하게 접근할수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조금 거리를 늘리기 위해 산성마을에서 내려 가나안수양관 입구에서 파리봉으로 산행을 시작하고...
[금정산] 태백산맥이 남으로 뻗어 한반도 동남단 바닷가에 이르러 솟은 명산으로 부산의 진산(鎭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동래현 북쪽 20리에 금정산이 있고, 산꼭대기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척이며 깊이는 일곱 치쯤 된다. 물은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다. 전설로는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정이라는 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절을 짓고 범어사라는 이름을 지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금정은 금어(金魚)가 사는 바위 우물에서 유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금정산은 낙동강과 수영강(水營江)의 분수계가 되는데, 최고봉은 북쪽의 고당봉(801m)이다. 북으로는 장군봉, 계명봉(602m)이 뻗어 있고, 남으로는 원효봉(687m), 의상봉, 파리봉, 상계봉 등 600m 내외의 봉우리들이 백양산(白陽山, 642m)으로 이어진다. 산정부는 각섬석화강암(角閃石花崗岩)으로 되어있고, 남동부는 마산암류(馬山岩類), 북부는 안산암질 암류(安山岩質岩類)로 구성되어 있다. 산정의 능선에는 암반이 노출된 첨봉(尖峰)이 많으며 대체로 동쪽과 남쪽은 급사면, 북쪽은 완사면을 이룬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리봉은 금정산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암봉이다. 기암괴석이 멋지고 산성마을에서도 멀지 않아 적지 않은 산객들이 벌써 멋진 풍광에 심취해 있다. 금정산 품속에 안겨 있는 듯한 산성마을과 금정산 정상인 고당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좌우의 산줄기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가슴이 시원해 지는 기분이다^^...
파리봉 정상부는 영락없이 돼지 머리를 닮은 돼지바위를 비롯하여 울퉁불퉁 근육질의 기암괴석들이 도열해 있다. 양산 정족산 정상에도 비슷한 느낌의 돼지 한마리가 살고 있는데 파리봉 돼지가 훨씬 사실적인 것 같다^^. 정상석은 기암괴석 사이로 설치되어 있는 나무데크계단을 올라 남쪽으로 조금 더 전진해야 한다...
'파리봉'이라는 이름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있을까? 먼저 파리(fly)라는 단어가 생각나고 또 학창시절에 82학번을 파리학번이라고 칭하던 추억도 떠오르고 프랑스의 파리와 파리바케트도 소환된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파리라는 이름은 순수 우리말로 유리 또는 수정을 뜻한다고 하는데, 정상석 뒷면에 새겨져 있는 한자 '玻璃'는 중국어로 수정 또는 구슬을 뜻하는 단어라 순수 우리말이라고 하기는 좀 찜찜하다. 차라리 한자를 새겨놓지 말던지. 수정처럼 빛나는 산정에 코끼리가 낙동강 물을 마시고 있는 형상을 한 바위가 있다고 하여 불명(佛名)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형상의 코끼리는 어떤 바위를 말하는 것일까? 정상석에서 뒤돌아보면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있는 바위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파리봉(615m)]은 금정산맥의 상학봉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상학봉 능선의 봉우리이다. 금정산의 여러 봉우리들은 산성의 동쪽에 집중되어 있는데 파리봉만은 서쪽에 하나의 봉우리로 우뚝 서 있다. 비교적 험준한 만년 산지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으며, 부산 금정구 금성동과 북구 화명동의 자연 경계를 이루고 있다. 파리봉의 ‘파리’는 순우리말로 유리 또는 수정을 뜻한다. 수정처럼 빛나는 산정에 코끼리가 낙동강 물을 마시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가 있다 하여 불명(佛名)으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수정은 불교의 칠보(七寶) 중 하나이다. 파류봉(波留峰)으로도 불리는데, 조선 시대 이곳에 망미루가 설치되면서 별장이 파견되어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한다. 금정산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파리봉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정표에도 파리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당봉과 낙동대교 주변의 경치를 탐한후 상계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중간에 제1망루를 지난다. 몇년전 금정산성 4대성문 종주를 할때에는 발굴조사 중이었는데, 지금은 복원한 형체가 멋지게 보인다...
제1망루에서 남문은 좌틀해야 하지만, 직진 방향으로 가까운 거리에 상계봉이 자리잡고 있다. 상계봉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닭과 관련된 지명이며, 닭벼슬을 닮은 기암괴석 등이 볼만한 곳이다. 상계봉은 한편으로 학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상학봉이라고도 불린다. 주변을 순찰중이신 산림감시원께 부탁하여 인증샷도 찍고...
[상계봉] 부산광역시의 북구 화명동에 소재한 봉(640m)으로 고시 지명은 상학산이나, 지역에서는 상계봉으로 부른다. 금정산의 봉우리의 하나이다. 산 정상에서는 낙동강 물줄기는 물론 멀리 김해평야와 김해시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경관이 수려한 산봉우리이다. 상계봉을 이루고 있는 화강암은 기계적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성채 모양의 크고 작은 기반암이 노출되어 있다. 등바위·베틀굴·영감바위·할멈바위 등이 있다. 상계 지명은 이곳에 닭과 관련된 전설이 많아 유래된 것으로 전한다. 학과 모습이 닮았다고 하여 상학봉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계봉에서는 해운대 방향의 조망이 남다른 곳이다. 오전에는 햇빛에 반사된 넓은 바다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고 황금빛 속에 빛나는 마천루들은 이세상이 아닌 듯한 장관을 연출한다. 오늘은 해무 때문에 조금 흐릿한 모습이 더 몽환적이고 환상적으로 느껴진다...
상계봉에서 빽(back)하여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헬기장을 지나 남문으로 연결된다. '금정산성부설비' 기록에 의하면 "1808년 초봄에 기둥과 들보를 100리 밖에서 옮겨오고, 벼랑 끝에서 험준한 바위를 깎아내어 메고 끌어 당기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 들어서 만사람이 일제히 힘을 쓰니 149일만에 남문의 초루가 완성되었다"라고 전해진다...
남문을 지나 언덕을 올라선 곳에 제2망루가 자리잡고 있다. 즉 지나온 제1망루와 제2망루는 사방을 잘 감시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고 남문은 그 중간에 좀 더 낮은 곳에 설치되어 있다. 남문은 망루의 기능보다는 사람들의 통행과 생활을 염두에 둔 것으로 짐작된다...
[금정산성]은 해발 801m인 금정산 꼭대기에서 동남쪽, 서남쪽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축성되었다. 둘레 18,845m로 국내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산성이다. 현재의 산성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인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어려운 시기를 겪고 난 후 숙종 29년(1703)에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동래부사 박태항의 책임 하에 석성으로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 부사가 맡았으며, 전쟁이나 변란이 발생하면 동래, 양산, 기장의 각 읍 소속군과 사찰의 승려들이 차출되어 방어토록 하였다. 특히, 승병은 숙종 39년(1713년) 판결사 이정신의 건의에 따라 동래, 양산, 기장의 3읍에 있는 승려 수천 명으로 대를 편성하고 유사시에는 이들을 모아 산성 방어에 임하도록 조치하였다. 조선 숙종 33년(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가 중성을 축성하면서 좌기청, 내동헌 등의 관아건물 및 장대, 중군소, 교련청, 군기고, 화약고, 승장소, 산성창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금정산성의 수비 및 관리를 맡은 금정진은 남북으로 비교적 급한 경사를 이루는 지형을 3단으로 단이 지게 조성하고 각 단마다 건물을 배치하였다. 숙종 이래로 산성의 수리공사의 내용을 비석에 새긴 ‘금정산성부설비’가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2망루에서 산성고개까지는 약간의 부침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내리막길이다. 중간에 볼록한 곳이 대륙봉인데, 위에서 보면 산봉우리라기 보다는 평범한 마당바위처럼 느껴지지만 동쪽이 직벽인 릿지장소로 잘 알려진 곳이다...
산성고개는 현재 부산 동래와 산성마을을 이어주는 도로가 지나고 있다. 금정산 등산로는 이곳에서 바닥을 친후 다시 완만하게 상승한다. 산성고개 바로 위에 동문이 자리잡고 있다. 동문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동래부사 정현덕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쓰고 있을 때, 두 성문을 아주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결과 사제지간의 두 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 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 하였다.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완성했다고 한다. 당시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했는데,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사제는 동문과 서문 공사가 끝난 뒤에는 힘을 합쳐 밀양 영남루 공사를 함께 하였다고 한다...
동문에서 제3망루 갈림길까지는 성벽 조금 안쪽의 등산로를 따라간다. 성벽 바로옆으로 나란히 좁은 등산로가 있기는 하지만 '금정산 휴식년제'가 실시되고 있어 현재는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덕분에(^^) 널찍한 등산로를 따라 편안하게...
편하긴 했지만 대신 한가지를 잃고 말았다. 제3망루 갈림길에서 우측방향으로 제3망루에 접근했는데, 제3망루 남쪽에 있는 나비바위가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조금 멀리서 봐야 날개를 접은 나비모양의 바위가 제대로 보이는데, 갈림길에서 들어오면 나비바위와 가깝기 때문에 나비바위의 전체 형체는 보이질 않고 아무리 둘러보고 살펴봐도 그냥 바위 덩어리^^. 귀하고 소중한 것일 수록 조금 거리를 두는 것도 필요하다는 교훈이리라...
제3망루는 동문에서 약 1km 지점에 있는데, 능선 동쪽으로 튀어나온 암반과 암반 사이 경사면에 축대를 쌓아 지었다. 솟아오른 암반 절벽위에 절묘하게 얹혀있는 모습으로 숨겨진 명소라고 할까. 등산로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알지 않고는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제4망루는 금정산에서 유명한 '부채바위', '날개편 나비바위'를 포함하여 천구만별(천마리의 거북이와 만마리의 자라)의 모습을 한 기암괴석이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제3망루에서 제4망루까지는 성벽을 따라간다. 도중에 동자바위를 지나고, 부채바위가 세워져 있는 부채릿지도 길게 내려다 보인다. 부채바위의 부채는 화염산의 불을 끈 손오공의 파초선을 닮았나요? 여름날 더위와 씨름하며 손에서 놓치 않았던 둥근부채를 닮았나요?...
제4망루 북쪽에 솟아오른 암봉이 의상봉이며,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의상봉 북쪽에는 의상과 평생의 도반이었던 원효의 이름을 딴 원효봉이 자리잡고 있다. 북한산의 의상봉과 원효봉이 서로을 마주 보고 있듯이 이곳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듯 하다. 의상봉은 용호봉이라고도 하는데, 전설에 따르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금정산 산신령인 호랑이가 나타나 승천을 저지하려고 용과 격렬한 몸싸움을 했다고 한다. 마침내 무승부가 된 호랑이와 용은 각각 위쪽은 용을 저지하는 호봉이 되었고, 아래쪽은 용을 닮은 용봉이 되었는데, 두 봉우리를 합쳐서 용호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뒤 1970년대 산악인들이 의상봉이라 명명한 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의상봉 동쪽 아래에 기암괴석이 탑을 쌓고 있는 암봉은 '무명바위'이다. 이름이 없다니? 이름이 '무명바위'인가? '색즉시공 공즉시색' 의미가 숨겨져 있을까?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용호봉 전설에 나오는 용을 닮은 용봉을 말하는 것일까? 무명바위는 릿지코스로도 유명한 곳이다...
의상봉을 지나 원효봉으로 가는길에 무명바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각면체의 바위가 공기놀이 하듯이 반듯하게(?) 올려져 있는 암릉이 보인다. 은벽릿지라고 하는 모양인데....
원효봉 아래에 '김유신 솔바위'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김유신 솔바위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인터넷을 찾아봐도 명쾌한 정보가 없다. 혹자는 부채바위 부근에 동자바위로 알려진 바위가 솔바위라고도 하던데. 원효봉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을 읽어보면 김유신 솔바위의 정확한 위치는 알수가 없다고 하네요^^
원효봉은 어둠을 헤치고 동해에서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갓 피어난 매화처럼 화려한 자태와 빛깔로 수놓은 형상을 하고 있어 '으뜸의 새벽'이라는 뜻으로 원효봉이라 불렀다. 원효봉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김유신 장군이 원효봉에서 낭도들을 훈련시킬때 바위에서 부동자세로 오랫동안 서 있다가 선 채로 소변을 보았는데, 낭도 하나가 그 자리에 작은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 소나무는 오랜 세월 비바람을 이겨내고 푸르름을 뽐내었는데 사람들은 김유신 장군이 서있던 바위를 '김유신 솔바위'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수가 없다고 한다... (안내판)
[원효봉] 금정산의 봉우리 중 하나로 봉우리에 해골바가지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원효봉(687m)이라 하였다고도 하고, 원효암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원효봉은 금정산맥의 봉우리 중 하나이다. 산정은 불국사 화강암류 및 마산암류의 크고 작은 기반암이 드러나는 특이한 암괴 지형인 토르(Tor, 지하의 암괴덩어리가 오랜 풍화 작용으로 동글동글한 돌인 핵석을 만들게 되고, 이후 오랜 침식으로 주변의 층이 제거되며 핵석이 높게 쌓여 돌탑처럼 드러나게 되는 지형)를 이루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효봉을 넘으면 북문으로 이어진다. 도중에 보이는 사기봉에는 암봉과 암릉을 즐기는 산객들도 제법 보이고...
금정산 정상 고당봉이 점점 다가온다. 정상 아래 암릉에 자리잡고 있는 금샘(金井)도 당겨보고...
금정산성 북문이 있는 세심정 일대는 원효대사께서 화엄경을 설파한 곳이다. '화엄벌'이라 하였으며 이곳은 금정산성 방어를 위한 범어사, 국청사, 해월사 등의 스님을 훈련시켜 승병 양성을 한 승병 훈련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범어사 3월 만세운동(1919년) 거사를 위해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운동 관계서류를 가지고 경부선 물금역에 내려 금정산 고당봉을 넘어 청련암으로 온 통로도 북문이었다고 전해진다...
부산국가지질공원 안내센터 옆에는 유리상자 속에 옛 고당봉 정상석이 보관되어 있다. '고당봉 낙뢰 표석비'라고 하는데 1994년 12월 23일 금정산 고당봉 정상에 설치되었으나, 2016년 8월 1일 천둥번개를 동반한 집중호우시 낙뢰로 파손된 것을 이곳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고당봉까지는 다시 오르막길. 슬슬 다리가 땅에 끌리기 시작한다. 고당샘이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2~~300를 들어가야 금샘이 있는데, 아이고야 오늘은 힘들어서 못가겠다 ^^;;
[금정산 금샘(金井)]은 금정산(金井山) 고당봉(姑堂峰)[801.5m] 동남쪽 8부 능선에 돌출한 바위 무더기 중 남쪽에 솟아 있으며, 마치 샘물이 솟아나듯 항상 물이 마르지 않고 괴어 있는 바위 정수리를 말한다. 금정산 금샘은 범어 삼기(梵魚三奇)로 불리는 금정산 비경 가운데 하나로, 암상금정(岩上金井)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동래현 산천조에 “금정산 산마루에 3장(丈, 약 9.09m)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위에 우물이 있고 둘레가 10여 자(尺)(약 3.03m)이며, 깊이는 7치(약 0.21m)쯤 되는데 물이 항상 가득 차 있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황금빛을 띤다”라고 유래를 전하고 있다. 또한 같은 책의 기록에 따르면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이 황금색 우물 속에서 놀았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금빛 우물이 있는 산’, 즉 금정산(金井山)이라 산 이름을 짓고, 그로 인하여 산 아래 절을 지어 ‘범천(梵天)의 고기’ 즉 범어사(梵魚寺)라 절 이름을 지어 불렀다고 한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도 같은 기록이 전한다. 범어사창건사적(梵魚寺創建事蹟)에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문무왕과 함께 금샘 아래에서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칠일 밤낮을 일심(一心)으로 독경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내력이 삼국 시대 말 이전부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예로부터 금정산 금샘에 물이 마르면 큰 재앙이 온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당봉 바로 아래에 산신각인 고모당이 있다. 이곳에는 금정산을 지키는 산신이 사는 곳이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때 죽어서도 범어사를 지키겠다는 밀양박씨의 충혼도 깃든 곳이다. 고당봉의 한자가 高幢峰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지금은 고당봉 산신할미와 연관이 있는 姑堂峰이 정확한 명칭이다..
[금정산 고당 할미와 고모제] 고모당(姑母堂)이라는 당산과 고당 할미가 된 밀양 박씨의 내력에 관한 당산신 전설이 전해온다. 고당 할미를 모신 고모당은 금정산 고당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고모당의 고모제는 범어사의 모든 스님이 참석하여 1년에 두 번씩 지내는데, 음력 1월 15일과 5월 5일에 올린다. 스님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범어사에서 출발하여 서로 다른 코스로 고모당까지 걸어오는데, 이것은 범어사의 지표를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산신에게 고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고당 할미 전설]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을 함락시킨 왜군들은 울산 지방의 왜군과 합류하러 가는 길에 범어사를 불태웠다. 당시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해 있던 밀양 박씨는 절을 재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마을과 절을 오가며 애를 써서 주민들에게 시주 받은 것으로 스님들을 수발하고 절의 재건을 도왔다. 밀양 박씨는 범어사의 살림을 맡은 화주 보살이 되어 절의 부흥을 위해 하루하루 애를 쓰다가 나이가 들어 죽음을 앞두고는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죽으면 화장(火葬)을 하여 고당봉 아래에 사당을 짓고 고모제를 지내 주면, 자신은 그곳에서 죽어서라도 범어사를 지키는데 힘을 쓰겠다고 했다. 주지 스님은 그녀의 뜻대로 장사를 지냈고, 그 후로 고모당을 지어 일 년에 두 번씩 고모제를 지내 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당봉]은 금정산 주봉으로 해발 801.5m이다. 고당봉에는 고모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 아래에는 용호암과 용암굴이 있다. 금샘(금정샘 또는 용암샘이라고도 함)은 고당봉 동쪽에 위치한 화강암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대천천은 금정산 고당봉 아래 북문재에서 발원하는 하천으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동래부지(東來府誌, 1740)의 지도에는 고당봉을 ‘고암(姑岩)’으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고당봉(姑堂峰), 고당봉(姑黨峰), 고당봉(高幢峰), 고담봉(姑潭峰), 고단봉(姑壇峰) 등의 다양한 지명이 혼용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여러 지명 중 정확한 명칭을 찾기 위해 학자와 향토 사학자들로 구성된 ‘금정산표석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토론과 검정을 거쳐, 고당봉(姑堂峰)으로 공식 지명을 확정하고 금정구청에서 봉우리에 표석비를 세웠다.고당봉을 한자로 표기하면, 우리나라 산에는 산신이 있고 고려 때까지 내려오는 모든 산신은 여신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할미 고(姑)’에 ‘집 당(堂)’을 쓴 고당봉(姑堂峰)과 금정산 팔경에 ‘고당귀운(高幢歸雲)’이 있는 점과 범어사창건사적(梵魚寺創建事蹟)에 의상(義湘)이 금샘이 있는 곳을 찾아가 7일 7야로 독경을 하여 불법(佛法)의 깃발을 높이 세운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고당봉(高幢峰)의 두 가지가 쓰였는데, 이중 고당봉(姑堂峰)이 공식 한자명이 되었다.
고당봉과 금정산 북부 지역 일대의 지질은 불국사 화강암류가 대부분이다. 주로 화강 섬록암, 각섬석 화강암 및 흑운모 화강암으로 구성되며 이 중에서 각섬석 화강암이 가장 넓게 분포한다. 오랜 지질 시대의 삭박 작용을 받아 특히 기계적 풍화 작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결과, 고당봉 주변에는 불국사 화강암류의 크고 작은 기반암의 나출로 특이한 암괴 지형인 토르(Tor, 지하의 암괴덩어리가 오랜 풍화 작용으로 동글동글한 돌인 핵석을 만들게 되고, 이후 오랜 침식으로 주변의 층이 제거되며 핵석이 높게 쌓여 돌탑처럼 드러나게 되는 지)와 타포니(Tafoni, 암벽에 마치 벌집처럼 구멍이 파여 있는 지형) 같은 미지형들이 경관을 이루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당봉은 몇번을 와도 항상 경외감이 든다. 바로 아래에 고모당이 있는 것도 한가지 이유일 테지만 넓지 않은 암봉 위에 서면 사방팔방이 내것처럼 안겨온다. 바람조차 상쾌하니 어찌 이 순간이 귀하지 않으리오. 고당봉에 흰구름이 걸려 있을 때에는 천상의 세상을 연상케 한다고 하여 '고당귀운'이라고 비경으로 유명하다. 햇빛이 쨍쨍한 날에는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경치가 계속 변하고, 방금까지 보이던 까마득한 골짜기에 문득 안개구름이 불끈 솟아 올라 골짜기를 덮고, 다시 고당봉까지 싸고 돌면 마치 바닷속에 떠 있는 섬이 흰 파도가 몰아치면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그만 하늘, 땅, 바다를 가리지 못하게 된다. 어느새 구름이 흩어지면 다시 산의 정상이 드러나고 짙은 안개속에 파묻혔던 골짜기도 드러나 보이는 기상천외한 자연의 조화가 나타나는 곳이다...
범어사 방향으로 하산을 결정했다. 직진하여 가산리마래여래입상도 둘러보고 갑오봉과 장군봉을 거쳐 범어사로 하산하면 좋겠지만 에고~ 몸이 말을 안 듣는다ㅋ....
청련암 내에 조성되어 있는 석불군은 색다른 볼거리다. 크기와 양으로 승부(^^)하는 중국의 어느 사찰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근 40년 만에 범어사를 온 것 같은데, 내 기억속의 범어사와는 완전 딴 판이다. 실제로 바뀐 것인지? 내 머리속의 기억이 필요에 따라 선택되고 조작된 것인지...ㅉ
[범어사]는 부산 금정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이다.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 사찰로 불린다. 2012년 11월 사부대중의 수행정진과 화합을 바탕으로 지유대종사를 초대 방장으로 모시고 총림으로 지정되었다. 신라 문무왕 18년(678년), 의상대사가 해동의 화엄십찰 중 하나로 창건하였다. 국보 (삼국유사)를 소장하고 있으며, 가장 오래된 판본 중 하나로 권4의 5편에 들어 있는 (의상전교)에는 의상대사가 열 곳의 절에 교를 전하게 해 화엄십찰을 창건하는 내용이 나오고, 이 가운데 '금정지범어' 즉, 금정산 범어사가 들어 있음이 언급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빛 나는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서 놀았다고 해서 산 이름이 금정산이고 그곳에 사찰을 지어 범어사를 건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엄경의 이상향인 맑고 청정하여 서로 돕고 이해하고 행복이 충만한 아름다운 삶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설립된 사찰로 범어사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고승대덕을 길러내고 선승을 배출한 수행사찰로 오랜 전통과 많은 문화재가 있다. 의상대사를 비롯해 원효대사, 만해 한용운선사 등 고승들이 수행 정진하여 명실상부한 한국의 명찰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1950년대 동산스님이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하였고, 이후 한국근대불교를 이끌었고, 총림지정 이후 조사스님들의 뜻을 받들어 수행공간을 지속적으로 확충하였다. 2019년 범어사의 오랜 숙원사업인 선문화교육관과 2021년 전국 사찰 최대 규모의 범어사 성보박물관의 대작불사를 완료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범어사 입구에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는 임진왜란 후 노승 묘전 스님께서 옮겨 심은 것으로 수령이 약 580년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은행이 열지 않아 3백년 전에 절에서 맞은 편에 은행 수나무 한그루를 심어줘 그 후부터 한해에 약 30여 가마의 은행을 따냈다고 한다. 1990년 땅벌을 쫒기 위해 연기를 피운다는 것이 그만 나무에 불이 붙어 아직까지도 불에 탄 자국이 남아 있다. (안내판)
정말로 멋진 시간, 의미있는 산행이었다. 기회가 되면 종종 오고 싶은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