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27 (일자별) 광주 -- 민간인 사망은 158명 + ? 2008.9.26. (a89)
1980.6.11. 계엄軍이 작성한 충정일일 주요사항에 보면 사망 185명으로 --------▶ 민간인 158명, 군인 23명, 경찰 4명 으로 집계돼 있다.
1982.3.15. 육군본부가 작성한 “계엄사”375쪽에는 사망이 189명, 이 중 ---------- 민간인 162명, 군인 23명, 경찰 4명 으로 집계돼 있다.
1985.7.30. 육군본부 발행한 책자에는 191명 이고 ---------- 민간인 164명, 군인 23명, 경찰 4명 으로 집계돼 있다. (책자를 직접 확인하였음)
1995.7월 서울지검의 발표문에 따르면 광주사태 사망자는 193명이다. ---------- 민간인 166명, 군인23명, 경찰관 4명이다. (민간인 158명 + 8명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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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사망자 : 23명
※ 1980.5.24(토) 09:55분, 호남도로 광주인터체인지(IC) 부근에서 부대로 복귀하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2/29)이 무장시위대의 사격에 응사하면서 고속도로로 진행하던 중 이를 시위대로 오인한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오인사격을 가하여 96연대 소속 사병 3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2명과 군인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 1980.5.24(토) 오후 효천역 부근에서는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병력이 이동 중에 있던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하여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미리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키고, 이에 63대대가 응사를 하는 과정에서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 9명이 사망하고 63대대장 등 군인 33명과 마을주민 3명이 총상을 입었다.
- 이렇듯 전쟁터에 배치된 총구는 한사람 한 사람의 신분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억울하게 피해를 당했다는 말은 성립해도 계엄군이 일부러 광주시민만을 골라서 쏘았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도 합니다. (2008.9.25.JMY)
※ 군인 사망자 23명 중 12명은 부대 상호간의 오인사격으로 밝혀졌으며 나머지 11명은 시민군과의 충돌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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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인 사망자
※ 10일간 민간인 158명이 사망한 것으로 발표 되었으며. (그후 8명이 추가됨)
5월18일에는 0 --- 사망자가 없었다. 5월19일에는 2명 --- 노동자 및 양화점 점원 2명이 타박상으로 사망했다. 5월20일에는 7명 --- 총상 3명, 타박상 4명이다.
5월21일에는 61명 --- 총상 46명 이었고, 나머지 15명의 대부분 타박상이고, 일부 기타 총상 및 자상이 있었다
5월22일에는 29명 --- 총상 21명, 차량사 5명, 그리고 나머지 3명은 기타총상이다. 5월23일에는 20명 --- 총상 15명, 타박 2명, 기타총상 3명이다. 5월24일에는 12명 --- 총상 9명, 타박1명, 자상1명, 기타총상 1명이다.
5월25일에는 0 --- 사망자가 없었고, 5월26일에는 1명 --- 타박상 1명이 발생했다. 5월27일에는 26명 --- 총상 23명, 자상1명(윤상원), 기타총상 2명이다.
※ 총상은 M-16소총, 자동소총, 카빈및 M1소총으로 구분되였으나
/ 무기분류는 논란이 있어서 총상으로 합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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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16 소총에의한 사망자는 29 명 → 45명 → 91명으로 증가
- 계엄군 무기로 인정하고 있는 M16소총에의 사망 은 관심의 촛점이 되고 있는데
※ 1985.7.30. 육군본부 발행한 책자에는
◆ 49명의 시체검안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결과 총상으로 사망 128명 중
- M16소총에의한 사망 : 29명
- 기관총에 의한 사망 : 47명
- 칼빈 또는 M1 소총 : 52명
◆ 계엄군이 휴대하는 M16소총을 제외한
- 나머지 총상자 99명은 시위군중의 과격분자들이 광주세무서 등 예비군무기고에서
탈취한 총기에의한 오발이나 유탄, 또는 폭도 상호간의 오인교전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계엄군 → 육본)의 분석임
- 5.18광주를 과격분자, 폭도, 불순분자가 왜곡된 광주사태라고 분석 / 교육을 한
(계엄군 → 육본)이 큰소리친 통계 였는데
※ 1988년 민화위 증언에서
- M16소총에의한 사망 : 45명 -→ (최초 29명에서 16명 증가)
1988년 민화위(民和委) 증언에서 소준열(蘇俊烈) 당시 全南北 계엄 분소장은
『민간인 사망자의 검시 결과 군인이 사용한 M16 총탄으로 죽은 시민은 45명이었다
※ 1995.7월 서울지검의 발표문에 따르면
- M16소총에의한 사망 : 91명 -→ (최초 29명에서 62명 증가)
- 10일간 [ 0, 0, 1, 30, 16, 14, 8, 0, 0, 22 ]
- 칼빈소총에의한 사망 : 26명 - 10일간 [ 0, 0, 2, 16, 5, 1, 1, 0, 0, 1 ]
■ M16소총에의한 사망 : 29 명 → 45명 → 91명으로 증가 → (?)
- 칼빈소총에의한 사망은 52명 -→ (?) -→ 26명으로 축소 -→ (?)
※ 1995.7월 서울지검의 발표문에도 오류가 있다는 분석이 있는데
추후 올려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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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님이 질문한 -- 1980.5.21일자 사망자는)
※ 21일 13:00 이후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계엄군 /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이 있었다고 하는데
- 어느 분은 계엄군의 발표를 가지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민간인이 4명만 죽었다고 말하기에.. 자료를 확인하여 본것이며
61명의 사망자가 있었더군요
◆ 21일 하루, 여러분의 고향에서 61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면.. 분위기가 어떠했을까요?
부상자는 수백명 이상(?) 나왔을 것인데
이것을 본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젊은이, 학생들은.. 어떠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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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5월21일에만 민간인 사망이 ---▶ 61명으로 밝혀졌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문제는 칼빈이나 M1의 문제인데 제가 알기로는 이 총들은 시민군들이 자위권 활동으로 가지고 있던 것인데 52명의 희생자는 시민군들의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여기에 발론이 있습니다. 당시 시민군들은 정부에서 폭도로 취급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가지고 있던 칼빈 등의 총에 의해 희생당한 것은 시민군들의 분열에 의한 것이라고 숫자를 불렸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군인들에 의해 희생당한 것은 폭도로 취급을 당해 보상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군인들에게 희생을 당해도 시체 검시를 할 때 검시를 한 의사나 검사 등이
일부러 M1이나 칼빈에 의한 희생자의 숫자를 늘리거 M16의 줄였습니다. 이것은 검시의사의 증언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앞으로의 폭도로 취급 당할 경우 보상금 문제를 생각해서 이렇게 M! 등의 희생자가 늘어났던 것입니다. 물론 희생자의 상황이 조금씩 바뀌었지만 의식의 흐름은 큰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5월21일 특히 희생자가 많았던 것은 도청앞에서 오후 1시 집단 발포가 있었는데 그 때 피해가 가장 컷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 M16소총은 29명에서 --→ 91명으로 증가 하였고요
--- 카빈소총은 52명에서 --→ 26명으로 줄어들었내요. (내용을 추가 했음)
M16소총은 29명을 가지고 --- 전두환 정권 내내.. 얼마나 큰소리를 친줄 아십니까? --- 폭도들이 무법천지로 날뛰는 도시였다고.. 5.27.광주탈환후 광주시민이 환영 하였다고.. ㅋㅋ
21일 칼빈총에 의한 사망자수가 16명이나 되네요. 21일은 계엄군의 집단발포에 의해 60명이상의 님들이 희생된 날입니다. 이것을 본 시민들은 계엄군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의해 칼빈이나 M1을 들게 되었습니다. 당시 계엄군들은 M16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21일 특히 칼빈과 M1의 사망자가 16명이나 나온 것에 의문이 갑니다. 물론 시민들이 총을 가지면서 사고도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이렇게 숫자가 많은 것이 납득이 가지를 않습니다. 더 자료를 찾아보겠습니다.
1995.7월 서울지검의 발표 이후 --- 법의학자들의 사진으로 분석한 결과가 있습니다.. 교도소앞길에서 시민 사망자도 카빈으로 처리한게 있고요 --- 다시 내 눈에 띄이면 이곳으로 가져 오겠습니다
--- 그래서 이 묵구를 끝에 삽입한 겁니다 --- ※ 1995.7월 서울지검의 발표문에도 오류가 있다는 분석이 있는데.. 추후 올려드리겠습니다 .
애국촛불전국연대에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