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경성 근교 대표적인 유원지였던 북한산 우이동 계곡 사진 한장입니다.

(*사진은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돌틈사이로 힘좋게 내려오는 계곡물의 소리가 화면밖으로 나올 것 같습니다.
계곡 주변에는 벚꽃으로 추정되는 꽃이 만발해 있는 좋은 시절입니다.
벚꽃이라고 한다면 4월 말쯤이 되겠고, 서울 시민이 쏟아지듣 찾아들었습니다.
이곳이 어디일까요?

우이구곡이 있는 도선사쪽 계곡일 수도 있겠고, 우이령쪽 계곡일 수도 있겠는데...
계곡 저멀리 능선의 모습이 상장능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우이령쪽 계곡이겠죠.

저멀리 유원지 건물들은 초가집이 아니라 최소한 기와집입니다.

이층 누각처럼 보입니다.
일제때 만든 유원지용 공간인 듯 합니다.
이런 곳 중에 일부는 해방 후 6.25 지나서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어떤 건물은 정계 거물의 별장이 되기도 했고요.
지금 단 하나의 건물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마 근대문화유산이 지정되었기 쉽습니다.
그랬더라면, 우리들 사이에 우이동에 대해 더많은 이야기가 싹틀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도 좋아했던 산에 관한 더 많은 자료들이 모여들어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될겁니다.
북한산은 세계적인 산이라고 찬탄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낸 북한산 동구(洞口)인 우이동(풍경과 문화)은 어떤가요?
단골집이니 장비점이니 등산의류점이니 맛집이니 운운하지만
어찌보면 참 범속하고 비루하여 북한산에 대해 미안해서 고개를 못 들 정도라고 하면 엄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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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잃어버린 풍경1(1920-1940)(이지누 엮고 씀. 호미 출판사)에서.

이 글은 '우이동의 봄을 찾다'(차상찬)의 글에서 모셔온 사진인데,
이 사진이 과연 원글에 있던거라기보다는
벚꽃이 활짝 핀걸 보면 다른 곳에서 가져온 걸로 보인다.
참고로 이 글의 서두에서
"4월 6일이었다....
이 우이동은 수석 구경이나 앵두나무 꽃이 흐드러져서 구경가는 것이 아니라.....' 라고 적고 있는데, 엮은이가 오류를 일으킨 것 같다.
앵두나무에 해당하는 한자가 앵(櫻)인데,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알겠지만,
이 '앵'이라는 단어는 주로 벚나무를 뜻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 우이동은 계곡의 수석 구경이나 벚나무 꽃이 흐드러져서...'라고 해야 된다.
우이동은 벚나무로 유명한건 일제 이전부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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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이 책은 일제 때 산행기를 읽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제일 우선 추천할 만한 책이다
조선시대의 한문투의 유산기와는 다른, 근대 초 새로운 글투의 산행기의 맛을 엿볼 수 있기에 말이다.
작금의 한국에는 강단학계와 재야 연구가 할 것 없이, 넘쳐나는(?^^) 조선시대 유산기 번역붐에 비해,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과 전쟁후의 산행기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무(無)에 가깝다.
산을 향한 우리의 멘탈리티의 직접적인 뿌리는 조선사대부가 아니라, 일제 지식인 그룹에 맞닿아 있다고 본다. 당장 글투에서부터 그러하다.
아쉽다.
상춘객들이 무엇을 보고 있을까는 알기 어려운데 우리는 보통 저런 식으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디카처럼 대충 찍어대는 게 아니라 어떤 순간을 포착해서 찍은 사진이라면 더 더욱 그렇죠.
다시 말해 저시절 사람들의 봄경치 완상의 내용과 방식은
조선시대 선비들이나 지금 우리와는 다를 수도 있겠다는 짐작을 품어 보게 합니다.
일제때 그들은 말그대로 셀 수없이 많은 엽서를 만들어 유통했다.
그 사진들은 예술적 가치가 없이 그냥 아무나 찍어 엽서로 만들어 팔거나 사용하기도 했다.
첫댓글 이글을 못보고 우이동 풍경사진 모은 글에 댓글로 올렸었는데 다시 모셔봅니다. 차상찬의 글은 1926년 개벽 69호에 실린 글이더군요. 덕분에 글 하나더 발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