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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오는 것을 보리라
말씀/마태복음 24:1-31
요절/마태복음 24:30, 찬송가/176장
한때 세상의 끝을 말하는 종말론으로 시끄러웠는데 한동안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여기저기서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가 급증하면서 이러다 세상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과연 어떻게 될까요? 탄소배출을 줄이면서 기후변화만 잘 조절하면 이 세상은 살만할까요?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성전의 멸망, 더 나아가 세상의 끝 날을 말씀하십니다. 이를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1장, 그제야 끝이 오리라(1-14)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3장에 걸쳐서 성전의 타락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해지는 유대교나 지도자들의 타락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들에 대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 바싹 마른 것처럼 다 망할 것이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 7번이나 ‘화 있을진저’라고 하시며 그들의 형식주의와 외식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 종교에 대해 포용적이었고 또 유대는 로마 총독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희망적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곧 지상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라는 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기 위해 성전의 아름다움과 견고함을 상기시키고자 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예수님께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왔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와 주님, 이 성전이 한번 보세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하면서 감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성전은 헤롯왕에 의해 BC 18년에 착공하여 AD64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건물을 지을 때, 돌을 깎아 돌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 돌의 길이가 보통 12미터 두께가 3-4미터입니다. 3-4층 높이의 돌을 세운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돌은 무게가 400톤이나 되는 것도 있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이 성전은 히브리 문화의 최고봉이라고 할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했습니다. 우리가 사진이나 영상에는 보는 통곡의 벽은 성전의 일부분이 아니라,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쌓은 축대입니다. 그것도 대단한데, 이 성전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타락한 성전이고 곧 멸망당할 성전입니다. 만약 여객기 최고기종인 보잉 787 비행기지만 곧 추락할 비행기라면, 누가 나에게 일등석에 공짜로 태워준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땡 잡았다. 완전대박!’이렇게 감탄하며 타시겠습니까? 아무도 안타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흘려듣거나, 반박하는 마음을 듣지 않고, 제대로 들었다면 성전의 겉모습에 놀랄 것이 아니라 탄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단지 성전의 외모만 보고 놀라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소위 비주얼이 깡패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만큼 겉으로 드러난 것에 놀라고, 감탄하고 속기 쉽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누구나 크고 화려하고 멋진 것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렇게 크고 화려하고 멋지니 당연히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진실은 무엇일까요? 2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으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십니다. 한 마디로 폭망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성전 부실 공사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안에 담긴 것이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를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AD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한 병사가 성전 안에 횃불을 던져 전소시키고, 70여 차례에 걸친 파괴 공사로 성전을 위시하여 예루살렘 전 도시가 옛터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철처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조용히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은 단지 성전멸망을 예고하셨는데, 제자들은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 날에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오버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수 천년을 성전 중심으로 살아온 유대 제자들에게 성전은 모든 것의 중심입니다. 성전은 곧 하나님의 집이고, 성전이 있기에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전이 멸망한다는 것은 세상의 끝날이 온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 날의 때와 징조를 아주 진지하게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예수님은 세상의 끝 날이 언제인가를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이들에게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미혹에 대해 메-성경은 ‘사이비 종말론자들을 조심하여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들이 미혹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미혹이나 유혹이나 같은 말 같은데 검색해보니, 조금 의미가 달랐습니다. 유혹은 ‘꾀어서 좋지 않은 길로 이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혹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 중에 보이스 피싱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여기에 속아 넘어갑니다. 그럼 그들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속이는 자들이 교묘하기 때문입니다. 사이비들도 그러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자신이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부처의 이름으로 온다면 우리가 미혹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니까? 나 예수 믿는 사람인데, 혹시라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 걸까? 하며 미혹을 받습니다.
더구나 세상에 난리와 난리 소문이 납니다. 우리가 방송으로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소식을 듣는데, 만약에 실제로 미사일이 발사되고, 폭탄이 떨어지는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났다는 소문이 나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다 구원자를 찾게 되고, 자칫하면 사이비에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스라엘과 이란이 전쟁이 나면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계시록에서 말하는 아마겟돈 전쟁이 나서 세상이 끝난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은 세계 3차 대전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전쟁과 난리, 온갖 재난은 예수님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금방 세상이 끝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이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재난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NIV성경은 이를 ‘birth pain’, 산통으로 번역했습니다. 여인이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서운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되는 것과 같이,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재난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합니다. 사람이 재난을 당하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들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편히 살 때는 인생에 대해 아무런 문제 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하면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세상에서 붙들고 있는 것들이 참된 희망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재난들은 그 자체가 종말이 아니라 종말의 징조요, 장차 올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재난들을 통해 인생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재난들이 일어날 때,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머지않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에 불타야 합니다.
그런데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9절에 보면,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10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여러 가지 고난이 닥치게 되면 많은 사람이 실족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실족합니까? 바로 믿는 사람들이 실족합니다. 믿음을 잃고 방황합니다. 심지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합니다. 메-성경은 세상이 살벌해져서 모두가 서로 물고 뜯으며 미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무엇을 갖고 미혹하겠습니까? 거짓된 종말론을 갖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가장 큰 메뉴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자기 말을 따르면 종말의 때에 환란을 겪지 않고 휴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휴거가 성경에 나올까요? 휴거는 성경 어디에도, 종말을 이야기 하는 계시록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더구나 신자라도 환란을 겪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뭘 말씀하십니까? 지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환난을 당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런 거짓말에 넘어간 사람들이 집도 팔고 직장도 그만두고 심지어 학교까지 포기하고 흰옷을 입고 산에 가서 찬송을 부르며 자신의 휴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집니다. 힘들 때 서로 위로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데 살기가 너무 힘드니, 사랑도 식고, 팍팍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핍박이 심했던 AD90년에 쓰여 진 요한서신의 가장 큰 주제중의 하나가 바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 사랑하라고 했을까요?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며 신자들을 핍박하니, 신자들은 순교 당하고, 토끼처럼 이리 저리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자 너무 힘드니까 자기 한 사람 지키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그러니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 요한이 이런 신자들을 향해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험악한 세상에서 누가 구원을 얻습니까? 1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견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이를 악물고 끝까지 버티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아무리 달콤한 소리를 해도 끝까지 미혹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들까지 실족하고 그 가운데 사랑도 식어서 더 힘든 가운데 있을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말년에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딤후4:8).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중요하고, 1세기 사도들에게도 중요하고,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냥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다면 참 좋을 텐데, 수식어가 있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견디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1세기말에 환란을 당하고 있던 신자들을 돕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환난당하는 신자들에게 곧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하거나, 또 환란을 피하기 위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란을 당하는 가운데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요한 계시록의 표현에 의하면 이기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세상의 유혹과 환란과 시험 앞에서 믿음을 잃고 패배하는 자가 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이기는 자가 되라는 방향 가운데 쓰여진 책이 바로 요한 계시록입니다. 그러면 무조건 끝까지 견디기만 하면 될까요?
14절을 보십시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세상 종말의 때를 견디는 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이 환란이 계속 가는 것이 아니고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이 모두가 듣는 위로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꾸로 매달려도 국방부시계는 간다’는 말입니다. 세상 종말의 때에 많은 것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일은 지나갈 것이고, 끝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끝날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하루 버티고, 자고 나서 내일 또 다시 버티고, 자고 나서 모레 또 다시 버티고...그러면 끝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끝만 바라보고 버티면 될까요?
둘째로, 온 세상에 천국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다음에 그제야 끝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역사에는 세속사와 구속사가 있습니다. 세속사는 일반역사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이 지내온 발자취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세속사는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과 같이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했다가 사라집니다. 여기에는 뚜렷한 방향과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속사는 태초와 종말이 있고, 또 복음전파를 통해 인류구속이라는 분명한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타락한 후 오랫동안 복음을 준비하시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 전파를 통해서 인류 구원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내가 믿음을 지키며 견디는 그 시간, 하나님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 그 일을 하실까요? 선교사들을 통해서 하실까요? 맞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믿음의 전사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만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싸움에는 전선이 따로 없습니다. 내가 있는 이곳, 이곳이 복음전파의 최전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나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복음의 시작이며, 내가 세상에 복음을 전할 자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원코자 부름 받은 주님 사역의 동역자들입니다. 저 먼 땅에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지만 바로 내 곁에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동료가 있습니다. 이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곧 내 일입니다. 그것이 세상 종말을 준비하는 나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종말의 때에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복음을 전하며 세상의 끝날을 준비하기를 기도합니다.
2장,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15-28)
제자들에게 성전의 멸망은 곧 세상의 멸망이라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도 성전의 멸망과 세상의 멸망을 오버랩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다니엘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다니엘이 말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것에 선다는 예언은 다니엘서 11:31; 12:1의 내용입니다. 이 예언대로 BC167년에 수리아의 안타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에 제우스 상을 세우고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또 일어날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즉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과 같은 신성모독이 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죄악이 극에 달했을 때,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됩니다. 오늘날도 얼마 전 끝난 프랑스 올림픽 개회식 장면을 보면, 기독교를 조롱하고, 신성모독을 버젓이 하고 있습니다. 죄악이 극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다시 성전 멸망으로 돌아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십니다. 또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급박하게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은 “그날에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하십니다. 또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겨울철은 유대에서 우기라 달아나기도 힘들고 피할 장소도 없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때에 큰 환란이 있겠음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먼저 성전멸망에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만 해도 로마와 유대는 그런대로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초반에는 유대가 이겼지만 나중에는 밀리게 되고,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을 몇 달 동안 포위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성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기 때문에 안전할 것이라고 여기고 다 성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평소보다 열배이상의 사람이 들어차는 바람에 먹을 것이 떨어지고 물도 부족해서 나중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참혹한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결국 로마군에 의해 110만 여명이 몰살을 당하고 15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던 환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가운데 산으로 도망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던 그리스도인들은 다 펠라라는 곳으로 도망하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참혹한 환란이 또 다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인을 떼는 재앙, 나팔 재앙, 대접재앙이 얼마나 큰 환란이 일어날 것인가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토록 참혹한 환란도 이들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통해 북이스라엘을, 바벨론을 통해 남유다를 심판했던 것처럼, 로마를 통해 타락한 유대를 심판하셨습니다. 심판을 자초한 것은 그들 자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심판의 날들을 줄여주어 택하신 자들을 살게 하십니다. 마지막 종말의 재앙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재앙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환란을 줄이셔서 세상 가운데 믿음을 지키는 자들을 살게 해주십니다. 세상이 환란을 당할 때, 신자라고 열외가 아닙니다. 신자도 같이 환란을 당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한 떼, 두 떼, 세 떼 반, 예를 들어 7년 환란을 예고하셨다면, 3년 반으로 줄여 주시는 것입니다. 즉 좀 봐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환란이 심해지면 또 다시 가짜 메시아, 가짜 구원자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심지어 이들은 큰 표적과 기사까지 보여주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합니다. 정통 교회에서는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데, 저쪽에서는 중풍병자가 일어났다. 말기암 환자가 낫다는 말이 들리면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병 때문에 답답한 마음에 표적과 기사만 있으면 그가 누구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성전의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던 제자들처럼 겉으로 드러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넘어집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광야도 있다고 해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고 해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렇게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이는 것처럼 주님의 임하심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혹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뭔가 보인다고 해서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믿음을 분명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셋째, 인지가 오는 것을 보리라(29-31)
29절을 읽겠습니다. “그날 환란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요한계시록의 재앙시리즈에서도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단순히 천체계의 어떤 변동을 말하기보다는 종말에 대한 상징적 언어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마지막 때가 되면 세상에서 해와 달같이 또 별같이 자랑하고 내세우던 모든 것들이 다 소용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 권력, 경제 권력 다 떨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30절을 읽겠습니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때에 보이실 인자의 징조는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곧 사단 마귀를 마지막으로 제압하시는 큰 능력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제압한 원수마귀를 완전히 무저갱에 가두며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지배하던 모든 어둠, 죄와 사단의 세력이 끝장나게 됩니다.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들이 통곡합니까? 예수님은 통곡하는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끝까지 믿음의 길에 서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욕심과 자기 영광만을 따라 살았습니다. 자기 편리와 자기 이익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이 전부인줄만 알고, 그런 세상이 계속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1940년대,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까지도 변절합니다. 친일파로 돌아섭니다. 그때 그들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누가 해방 될 줄 알았나?” 일본 제국주의 시대가 계속 될줄로 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1945년 갑자기 해방이 되었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그 날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문학가들이 친일 시를 쓰고, 조선 청년들에게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라는 독려의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해방이 되었고, 그들은 두고두고 매국노, 친일파로 불려 지게 되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이들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정말 세상 끝 날이 올 줄 누가 알았나?” “정말 주님이 오실 줄 누가 알았나?” 알았다면 이들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몰랐던 것입니다. 아니 알려주어도 받아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통곡하는 것입니다. 이제 늦은 것입니다. 이제 기회가 없습니다. 후회와 탄식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니까 기회가 있을 때, 알려줄 때, 좀 안 믿어져도 믿으려고 해야 됩니다. 그리고 진짜 믿어야 합니다. 나중에 “정말 세상 끝 날이 올 줄 누가 알았나?” 하며 탄식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 손해입니다.
그때에 주님은 능력과 큰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이것은 주님이 손오공처럼 오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처음 오실 때 초라한 말구유에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모두가 외면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참혹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시는 주님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가운데 영광과 능력으로 오십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십니다. 그때에는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만일 이때 나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으면 끝장입니다. 그날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형벌의 날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광의 날입니다. 그날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님의 복음을 복종치 않고 자행자지 한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것입니다(살후1:8). 또한 그날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믿는 자들을 괴롭히던 모든 불의의 세력들, 곧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십니다(고전15:24). 그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 되어 다스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십니다. 우리는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랑하는 우리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계21:1-4). 이것이 신자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구평균온도가 올라가든 내려가든 반드시 이 세상은 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끝 날에 능력과 큰 영광으로 주님이 오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가져야 할 역사관이요, 가치관입니다. 이 역사관과 가치관을 가졌다는 것은 곧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믿고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는 기대 가운데 사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이 끝날 것이고, 주님이 오실 것이고, 그 주님이 오실 때, 모든 것을 결정하실 것을 믿고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과 소망을 가진 자답게 올바른 역사관을 갖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능력과 큰 영광으로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 날에 찬양과 감사로 주님을 맞이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