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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1825-1854)
전기는 벽오사의 대표적인 동인으로서 조희룡과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년배로 따지면 조희룡의 아들뻘이 되지만 서화가의 입장에서 서로 공유하는 가치가 많았기 때문이다. 전기는 회화의 유통에도 관여함으로 19세기의 회화사에서 그를 관찰함으로 사회 문화적인 배경도 알아 볼 수 있다.
전기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림을 누구에게 배웠는지도 모른다. 호산외사에 의하면 필의를 저절로 얻었다는 구절이 있다. 한문 공부에서, 의학에 관한 공부, 서화론에 이르기까지 독학으로 하였으리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20세 때는 헌종의 주문을 받아서 연꽃을 그렸다고 하였으므로, 이미 그때에 그림으로 이름을 얻고 있었다. 약포를 개설할 때는 의관이 유최진이 많은 도움을 준 것은 그의 재능을 사랑하였기 때문이었다. 전기는 약포의 이름을 이초당(二草堂)이라 이름짓고,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이초당은 생계를 위한 근거지인 동시에 전기가 예술할동을 하였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초당에서 그림을 중계하였고, 그림에 대한 감정도 하였다. 전기의 행적을 통하여 미술 시장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벽오사 동인들이 소식의 예술론에 동조하였듯이 전기도 소식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젊은 나이에 죽은 탓에 조희룡처럼 자신의 이론을 발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대의 문인화론을 충실히 따라서 작품을 제작하였다.
전기는 자신의 산수화첩의 표제를 이정미도((以情味道)로 하였다. 성정(性情)을 기쁘게 하여 도를 즐기다,라고 할 수 있다. 회화가 사람을 제도하는 용도 이외에 마음을 기쁘게 하여 도에 이른다는, 다분히 주정론적인 예술론이다. 전기는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문인화론자이다. 따라서 전기의 작품은 전통적인 문인화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김정희의 주목을 받지만, 문자기가 없으므로 겉모양만 본 뜬 것이라는 질책을 받았다. 그렇더라도 갈필 위주의 화풍은 동기창의 서예적 필법으로서, 김정희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할 수 있다. 김정희가 중인들의 서화를 품평한 예림갑을록의 서문을 쓰면서 김정희의 평을 수용하자고 하였다. 전기의 회화론은 김정희의 예술론에 의존하고 있다.
전기는 화훼화에서 기법이나, 색채 사용을 다소나마 자유롭게 하였다. 전기의 기본적인 회화론은 형사에 있지 않고 사의론이다. 자신의 대나무 그림을 두고 ‘대나무를 그리는 데는 법식이 없다. 가슴 속의 생각을 곧 바로 드러낼 뿐이다.’라고 하였다.
전기의 산수화는 남종문인화풍의 연장 선상에 있다. 예찬의 영향이 그림의 구도와 필법에서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갈필로 그린 산수화는 김정희의 작품과 유사하다. ‘계산포무도’는 갈필법을 연상시키는 소략한 화풍을 보여준다. 전기의 산수화 중에 ‘춘경산수도’는 도화가 만발한 풍경을 비교적 세밀한 필치로 그리고 있어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매화서옥도는 문인화의 주제가 되는 고사도이지만 장식적인 효과가 두드러져서 중인들의 서화수집 취미에 부응하여 그린 것이 아닐까,라고 한다. 김정희는 ‘채색과 선염에 법도가 없어 자못 습기(習氣)를 범했다.’라고 하였다. 김정희의 예술론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소비층의 취향을 무시할 수 없었던 중인층 직업화가의 고민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결국 김정희의 화론에서 약간씩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린 김수철도 이색화풍이라는 변형된 문인산수화를 그렸고, 전기를 통해서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였다. 이것은 대중의 소비성향이 작품의 경향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뜻한다.
전기의 화훼 사군자는 김정희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3) 전기의 중개와 미술품 시장
전기가 그림 중개를 하였다는 사실은 조선후기의 회화가 호사가들 사이에 유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 경화세족 출신의 사대부와 중인 출신의 부유층에게 서화골동의 수집 취미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이 미술품을 수집함으로 화가들의 후원자가 되었다. 후원자가 갖고 있는 회화 취미는 미술의 사조에 많은 영향을 준다.
조귀명은 1724년에 쓴 글에서 그림에 관련하여 화가 이외에도 수집가와 감상자가 있다고 하였다. 사대부의 취미로서 여럿이 모여서 그림을 감상하였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유한준은 김광국의 수집품을 감상한 소감을 쓰면서 감상자, 애호가, 수집가, 관람가로 분류하였다. 이들이 미술품을 사들이므로 최대의 후원자가 되었다.
이들이 수집한 화적 중에는 중국회화가 많았다. 중국회화를 감상함으로 중국에서 유행하는 화풍을 우리나라에 유행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선대에서 수장하였던 작품은 그대로 가전으로 전해졌다. 한편으로 이들의 작품을 미술시장에 내놓으므로 수익을 챙기는 일이 많았다. 윤두서의 작품은 인기가 많아서 그 당시에 위작이 나돌았다. 그림을 구입하는 방식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화원화가에게는 미리 그림의 주제와 내용을 말해 주는 명령식 주문을 하였다. 사대부 화가는 주문을 받지 않고 임의대로 그리는 수가 더 많았다. 사대부 여기 화가들은 자신들의 그림을 서로 주고, 받는 물물교환 방식의 유통도 있었다. 화원화가는 사적으로 그림을 주문받아서 그려주는 일도 하였다.
정선의 제자인 마성린은 화가들이 그림 주문을 받아서 그림을 그리는 곳을 들렸던 일을 기록하였다.
“김홍도, 신한평, 김응환, 이인문, 한종일, 이종현 등 유명한 화가들이 강희언의 집에 모여서 주문받은 그림을 그렸다. 나는 그림을 좋아하였으므로 이곳을 드나들면서 감상도 하고, 화제를 써주기도 하였다.”
화원화가들이 모여서 그림을 꾸준히 그렸을 정도라면 미술시장이 꽤나 활성화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유통이 확대되면서 그림에 생계를 의존하는 화가들도 생겨났다. 그림의 가격도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인화가들이 직업화가로 나서는 일은 아직은 자제하고 있었다. 전기의 중개 활동은 그림에 안목이 모자라는 수요자와 화가를 연결하여 상거래를 이루게 하였다. 상거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화가와 수장가의 회화적 성향이 일치하여야 한다. 일치하기 위한 조건으로 회화의 시대 사조 내지 유행이 중요한 몫을 하였다.
전기는 문인화풍으로 흘러가는 회화의 사조와 감각적인 화풍을 찾는 수요층의 요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색화풍의 작가로 알려진 문인화가 김수철의 작품을 중개하는 것은 19세기의 문인화풍도 수요자의 요구에 의하여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기와 가까운 사이인 조희룡이 김정희와 차이를 보이는 것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국을 여행한 서양인의 기록에 의하면 19세기 후반에는 종각이나 육의전에는 그림을 파는 가게가 생겨서 세화로부터 문인화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화풍의 그림이 거래되고 있더라,고 하였다.
한산거사라고 호를 하고 있는 사람이 1848년에 쓴 시는 미술품 시장의 정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광통교 아래의 가게에는 각색 그림이 걸려 있구나. 보기 좋은 병풍 차(次)에 백자도, 요지연, 곽분양행락도며, 강남 금릉 경직도며, 한가한 소상팔경 신수도가 기이하다.”
광통교 부근의 가게에 형성된 가게에 판매되고 있는 미술품의 종류가 아주 다양함을 말하고 있다. 소상도와 같은 감상용 그림도 있지만, 언급된 그림을 보면 채색이 강한 민화풍 그림들이다. 중국에서 수입했으리라고 생각되는 작품의 이름도 보인다. 시장에 진열된 작품은 당시의 수요자의 취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화가들도 수요에 응하여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대수장가들이 비싼 돈을 주고 사들인 작품은 단순히 장식용 그림이 아니고 이름 있는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많았다. 19세기에는 이처럼 미술품 시장이 이중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기가 중개인 역할을 한 미술작품은 아무래도 시장의 가게에서 거래되는 미술품과는 다르다.
미술시장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향전(香廛)과 지전(紙廛)에서도 미술품을 취급하였다. 한산거사의 시에 나타나는 류의 그림을 취굽하였을 것이다. 허련이 1866년에 서울의 안현(安峴)에 있는 시전을 지나가다가 자신이 그린 화첩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20여 년 전에 왕에게 그려서 바친 소치묵연(小痴墨緣)이었다. 가격을 물어보니 소치라는 유명한 사람이 그린 것이므로 비싸다,더라는 말을 증언으로 남기고 있다.
1890년에 모리스 쿠랑이라는 프랑스 사람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남대문 일대에 골동품 가게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였다. 미술시장에는 가짜도 유통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남태응의 글에 의하면 “윤두서의 진적으로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은 사대부의 집안보다 중로인(中路人=중인)에 더 많았다. 수표교에 사는 최씨 성을 가진 한 중인은 매우 많이 비축하여 권축을 이루었다. 이것으로 근래에 중인들이 가짜를 만들어서 공재의 도장을 찍어 작품의 진위를 혼란시켰다. 후에 속아서 사는 사람이 많았다.”
생애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 김준근의 풍속화가 서양에 수장되어 있음이 최근에 알려졌다. 그의 그림은 주로 개항지의 항구에서 외국에 팔려나간 것이다. 영국의 해군 대위인 캐번디쉬가 재물포에서 김준근의 풍경화 26점을 입수하였다고 하였다. 와국인을 상대로 한국의 풍속화를 관광상품처럼 팔았으리라고 하였다.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에서 이태리 총영사로 근무하였던 까를로 로제티는 조선의 풍물에 관한 글을 남겼다.
“광통교 부근에는 복제화와 종이를 파는 상점이 몰려 있다. 몇 전만 주면 용이나, 호랑이, 날개가 달린 말, 옛 전사를 환상적인 형상으로 그린 그림을 구할 수 있다. 이것을 문짝에 붙여 놓으면 집에서 악귀를 내쫓는다고 하였다. 복제화 중에는 옛 신화에 나오는 성현들과 수호신을 그린 것도 있다. 이것은 방에만 걸어 놓거나. 벽에 붙여 둔다. 이런 그림은 어느 집에나 같은 그림이 걸려 있다.”
이 글에 의하면 광통교 부근의 지전에서 세화나, 민화, 도석인물화를 판매하였다. 그림의 양식이 같았으므로 복제품이라고 말하였다. 도화서 화원들의 공식 업무로서 화훼영모화나 도석인물화, 세화를 많이 그렸다. 이들이 화원화가를 그만 두었을 때에 지전에 그림을 공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규모가 큰 지전에서는 그림의 도매상 역할도 하였다. 화가를 고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장승업도 광통교 일대에서 지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시중에 미술품 가게가 생기면서 대중들의 취향이 미술시장에 개입하게 되었다. 대중 취향의 그림은 지금까지 미술사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유명 화가가 그린 비싼 작품도 유통되고 있었다. 미술품의 수요층이 다양해지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도 다양해졌다. 지금까지 미술사에서는 감상화 위주의 고급 미술품을 대상으로 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그린 고급 미술품만이 다루어졌다. 그러나 고급 미술품만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광통교 시장에서 유통된 그림도 한국 미술사에서 다루어야 한다.
4) 벽오사와 예림갑을록(藝林甲乙綠)
예림갑을록은 유실되어 버렸고, 고유섭의 조선화론집성과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그 내용이 실려있다. 김정희가 당시의 대표적인 화가 8인과 서가 8인에 대한 비평문을 전기가 집성하여 쓴 글이 예림갑을록이다. 언제 이 비평이 있었으며, 누가 주도하여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마도 조희룡이 주도하였고, 참여한 서화가는 벽오사와 관계 있는 인물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예림갑을록을 통하여 김정희와 여항화가들과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김정희가 그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여항서화가는 김정희의 화론을 실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예로서 김정희의 비평을 받은 사람은 김계술, 이형태, 유상, 한응기, 전기, 이계옥, 유재소, 윤광석 등 8인이며, 화가로는 김수철, 이한철, 허련, 전기, 박인석, 유숙, 조중묵, 유재소이다. 이중에 이한철, 박인석, 유숙, 조중묵은 화원화가이다. 전기와 유재소는 그림과 서예에서 모두 평을 받았다.
비평을 한 년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날자는 6월 24일, 6월 28일, 6월 29일, 7월 7일, 7월 9일, 7월 14일로 적혀 있어서 하루에 모두 한 것이 아니고, 6일에 나누어서 평하면서 서예에 3일, 회화에 3일에 나누어서 평을 하였다. 회화에 대해서 살펴보면 8인의 화가는 중인 계층의 여항화가이거나 화원화가이었다. 이들이 대표적인 사대부 서화가인 김정희의 평을 구했다는 것은 문인화의 바람이 화원화가에게도 불어 닥쳤음을 알 수 있다.
이때 평을 받은 작품은 모두 24점이었다. 작품의 제목이 주는 분위기는 스산한 가을의 정취를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었다.(풍엽심유도, 추강만촉도, 추산심처도 등) 서정적인 분위기를 짙게 나타내고 있다. 김정희에게 평을 받기 위한 작품이었으므로 김정희가 선호하는 분위기의 그림를 그렸을 것이다.
김정희가 이들의 작품을 평한 요지를 살펴보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원말 사대가의 문인화풍을 높이 평가 하였다. 평에서 ‘원인풍치(元人風致)가 있다,’라든지, 원나라 사람의 ‘깊고, 윤택한 기운이 없다;라느니, 하고 평하였기 때문이다.
동인(東人=우리나라)의 습기를 범했다고 평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의 화풍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요즘의 화법은 태창 일파로부터 시작하였다.’ 라고 한 것이라든지, ‘석도나 운남전 등 제가와 같음이 없다’라는 평에서 청초의 사왕오운가 개성이 강한 유민화가의 화풍을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정희가 비평의 근거로 삼았던 화풍은 문인화풍이므로 김정희 비평은 남종문인화풍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중인 화가들이 건필(乾筆)과 검묵(儉墨)으로 원나라 화가의 거칠고 간략한 화풍을 흉내만 내고 있고, 그림의 깊은 의미를 모른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형사보다는 필의를 중요시하는 자신의 화론을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당시의 화가들이 깊은 의미를 모르면서 흉내만 낸다고 꼬집었던 것이다.
김수철의 작품을 평하면서 ‘솔이지법(率易之法)이라고 말하였다. 한국회화사에서 김수철은 이색화풍으로 표현한 화가라고 말한다. 김수철의 극도로 생략된 표현을 김정희는 긍정적으로 평하였다.
김정희가 예림갑을록에서 비평한 내용은 당시의 회화론이 문인화론에 극도로 경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항화가들은 그와 같은 김정희 화론을 적극적으로 따랐다. 문인화론에 의하면 그림은 손재주만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권기와 문자향을 나타내려면 풍부한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직업화가들은 이와 같은 화론을 따라서 그림을 그리기가 힘에 겨웠다.
이 평에서 보듯이 김정희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그림을 폄하하였고, 모화사상에 젖어서 한국 회화를 중국지향으로 유도하였다. 김정희의 화론을 가장 충실하게 따랐고, 죽을 때까지 지속한 화가는 허련이었다. 그 밖에도 여러 화가들이 김정희를 따랐다.
유재소(1829-1911)는 벽오사의 중요한 동인이었다. 전기와 제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유재소는 명대의 문인화가인 심주를 많이 모방하였다. 유숙과도 아주 친했다. 미법산수도와 추계산수도에는 미법산수화풍을 비롯하여 다양한 화풍을 섭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기, 김수철의 화풍과도 가깝다. 미법산수도는 붓을 옆으로 뉘어서 큼직큼직하게 점을 찍어나가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예림갑을록에서 언급한 화가 중에 이한철, 유숙, 조중묵은 대표적인 화원화가이다. 조중묵에 대한 평에서 색칠이 너무 진하여 먹도 많이 사용하였으므로 남을 주기 위해서 그린 그림이라고 평하였다. 이 그림의 평에서 화가들이 주문자의 취향에 맞추어서 그렸음을 보여 준다. 또 수완만 익숙하다는 평을 함으로 전문화가가 습기로 그렸다고 평하였다.
박인석은 김정희의 평으로 보아서 남종산수화풍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윤광석은 노자상을 도석인물화의 형식으로 그리므로 남종화풍을 보여준다.
김정희는 예림갑을록에서 보여 준 중인화가들에게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고 사대부 여기 화가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묵란이나 묵죽을 많이 그렸다. 난초를 그린 화가로는 이하응(흥선대원군)이 있다. 이하응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방윤명, 김응원, 나수연 등이 있다. 이로서 조선 말기에는 완당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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