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 큰스님 - 염불참선
보통은 참선은 조금 더 고도한 사람들,
차원이 높은 사람들이 참선하고
염불은 차원이 낮은 사람들이 염불한다.
이렇게 보통은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참선 가운데도 염불이 들어있고
또 염불 가운데도 참선이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로 우리 근본 성품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불심(佛心)이나 또는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불성(佛性)이나
또는 법법(法)자 성품성(性)자 법성(法性)이나
똑같은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같은 뜻을 그때그때 중생의 그릇 따라서
시기상응(時期相應)한 법문을 하시기 때문에
표현만 다른 것이지 의미는 똑 같습니다.
즉 그와 같이 참선(參禪)한 법도
꼭 참선이 정도가 높은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나가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나의 본래가 바로 부처기 때문에
본래의 부처자리,
모든 것은 근본성품이 있고 또 상이 있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근본본체(根本本體)가 있고
또는 활용할 용(用)이 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본체와 용이 있고
본체와 또는 근본성품과 그런 상이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현상적(現象的)인 것은
이것은 하나의 상인 것이고
현상적으로는 안보이지만은
현상의 근본적인 성품은 이것은 본체(本體)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본래로 부처고
일체존재(一切存在)가 근원적인 자리에서는
부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가 아님이 없다는 부처의 자리를
우리가 떠나지 않으면 모두가 다 참선입니다.
염불을 하던 경을 외우든 또는 가만히 명상을 하고 있든
우리 마음이 이것저것
산란스러운 현상적인 것에 끌리지 않고서
우리 마음을 가다듬어서 꼭 그 불심(佛心)자리,
불심자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참선(參禪)입니다.
참선하는 법이 큰스님들한테 화두(話頭)를 받아서
무슨 화두를 의심하고 그런 법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만이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화두해서 없을 무(無)자,
무자 화두가 보통은 가장 많습니다.
무자화두를 우리가 든다 하더라도
무자화두를 들면서
그 무(無)! 무! 무! 무! 이렇게 무자화두를 들고만 있지
그 마음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의 본래의 자리,
마음의 근본성품(根本性品) 자리를 떠나버리면
그때는 참선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른바 불심(佛心)을 떠나버리면 참선이 아닙니다.
불심을 떠나지 않고서 불심에 입각해야
그래야 참선이란 말입니다.
화두를 의심하지 않고 염불을 하든
또는 주문을 외이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의 상(相)이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그 성품을 떠나는가
안 떠나는가 그것에 매였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령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염불(念佛)을 한다 합시다.
염불을 한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 하면서 불심자리,
불성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마음을 불성자리에다 두고서
관세음보살 한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그때는 참선입니다.
염불참선(念佛參禪)이란 말입니다.
염불도 하다보면 싫증이 나서 하기 싫을 때도 있겠지요.
그런 때는 염불을 않고서
그냥 가만히 명상(瞑想)에 잠긴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자기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돌아보고서 자기한테 갖추고 있고
우주(宇宙)에 충만해 있는 불성자리를 생각하면서
가만히 명상해도 그때는 바로 참선입니다.
그런 증거로 일본은
지금 묵조참선(黙照參禪)이 있고 말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묵조란 것은 잠자코 가만히 불성자리를 비춰본단 말입니다.
그런 참선하는 조동종,
묵조하는 잠자코 비추어 보는 참선법이 있고
또 그런가 하면은 아까 말씀드린 화두를
큰스님들한테 화두를 타가지고서
화두에 다가 의심(疑心)을 품고 말입니다.
계속 의심하는 그런 법도 있단 말입니다.
그것은 임제종(臨濟宗)이라 하는
종파(宗派)에서 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종파는 화두를 의심하는 화두가 아니라 모
두가 다 부처니까 차라리 염불화두라.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염불을 화두로 해서 하면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하는 황벽종(黃檗宗)이란
종파도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한국은
그런저런 복잡한 것이 다 안 들어 왔단 말입니다.
고려(高麗)때 중국(中國)서 한동안 들어오고
조선시대 때는 중국하고 교류가 끊어져 버리니까
고려 때 들어온 화두 하는, 화두 의심하는 법,
그것만 딱 남아서 이조오백년 동안에
딱 화석(化石) 되어 버려서 굳어버렸단 말입니다.
지금 한국선방은 어디가나
화두를 의심하는 그런 선법만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참선법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세계적인 안목을 항시 가져야 씁니다.
또는 역사적인 의식이 있어야 됩니다.
역사의식이나
또는 세계적인 안목을 갖는다고 생각 할 때에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 참선은 어떠한 것인가?
본래 참선이란 것은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을 여의지 않는 것이
이것이 참다운 참선이란 말입니다.
화두를 의심하든 또는 화두를 의심하지 않든
또는 염불을 하든 염불을 않든
그런 것은 그런 상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공부하는 마음 자세가 불심 자리를 안 여의면
그때는 다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마음이
자유스럽고 공부하기가 쉽겠습니까.
출처: 淸華 大宗師 법문마당『金剛輪』
첫댓글 참선 가운데도 염불이 들어있고, 또 염불 가운데도 참선이 다 들어있다.~
1일 1경이라도 읽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법법(法)자 성품성(性)자 법성(法性)이나 같은 뜻이다.~
청화 큰스님 - 염불참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