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외포리 선착장에서 약 1시간 30분, 볼음도, 아차도를 경유하여 마지막 도착 섬이 주문도. 매우 한적한 섬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조선시대부터 구한말까지 중국으로 가는 전진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서양 문물이 첫발을 디딘 곳이고 영국 성공회 신부들이 최초로 포교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주문의 바닷가 뚝방길을 걷노라면 해당화 군락지 및 끝없이 펼처진 갯벌과 모래사장이 도보객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주문도 선착장에 도착하면 12코스가 시작되는데 코스 전체를 도보하려면 사전에 식당 및 민박을 미리 예약을 하여야 한다. 마을길을 걷다보면1905년 설립된 한옥 모양의 서도중앙교회와 해당화 군락지를 볼수 있으며,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않은 뒷장술 해변과 대빈창 해변의 모래사장과 끝없는 갯벌이 장관이다.
서도 중앙교회 건물은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지은 한옥 예배당. 1902년 감리교 전도사 윤정일이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이곳 주문도리에 들어왔고, 1905년에는 교회와 신도가 마음을 모아 영생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이 교회를 새로 지었는데 1978년 주문교회에서 서도 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루고 있다. 우리 전통 목조건물의 가구형식을 바탕으로 서양교회를 지었다는데 큰 의미를 지닌다.
주문도는 면적 4.626㎢, 해안선길이 12.6㎞다. 1999년 12월 말 현재 162가구에 435명의 주민이 거주한다. 최고봉은 봉구산(烽丘山:147m). 강화도에서 서쪽으로 39㎞ 거리에 있으며, 부근의 볼음도(乶音島)·말도(唜島)·아차도(阿此島)와 함께 서도면을 구성한다. 조선시대 후기에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이 섬에서 임금에게 하직하는 글을 올렸다 하여 아뢸 주(奏), 글월 문(文)을 써서 주문도(奏文島)라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주문도(注文島)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교동지(喬桐誌)》에 따르면, 1906년 이전에는 교동군(喬桐郡) 송가면 서도리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을 폐지함에 따라 강화군에 편입되었다. 섬 중앙에서 남서쪽을 향하여 구릉성 산지가 뻗어 있고, 그 양쪽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발달하여 논으로 이용된다. 섬의 중심부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고,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다
당일치기로 이른아침 마련해선 09;10분 주문도행 페리에 올랐다.
멀리 가까이 섬을 끼고 돌아 주문도 길 왕복 세 시간 반이 산뜻한 즐거움을 줬다. 갈메기 때들을 벗삼은 뱃길하며 푸른 하늘에 낀 흰 구름이 여유로움을 자아냈다. 11시에 주문도 내려 땡볕 속을 두어시간 남짓 걸어 귀로에 오른 것은 오후 두점.
길 바닥에 도시락을 펴놓고 펼쳐진 갯벌과 바다를 구경하는 기분이란 만점 그대로를 새기게 했다. 마늘을 대려 왔다면 좋았을 것을 .....몰래 생각을 날렸다. 때를 맞춰 한번 더 와야하겠다고 작정. 주먹에 들만한 갯돌하나를 주어들고 바닷내음을 담았다.
한 옛날 임경업의 중국행 나눌이를
즐기던 섬돌가를 이제와 돌아보곤
자꾸만 가는 맘길에 바다내음 선하네
작성자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