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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년 8월 30일 일요일 소백산 비로봉 국망봉
고인돌 형님과 함께
산행 코스 : 삼가리 달밭골 – 비로봉 – 국망봉 – 돼지바위 – 불사조 바위 – 초암사
(하산 후 초암사 주차장에서 박 만수 님이 픽업하여 기차역까지 태워줌)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2317986
거리 12.9 km
소요 시간 7h 22m 39s
이동 시간 5h 55m 2s
휴식 시간 1h 27m 37s
평균 속도 2.2 km/h
최고점 1,460 m
총 획득고도 705 m
난이도 보통
어제 운악산 산행을 하면서 좀 아쉬운 생각이 들기에 고인돌 형님과 약속하여 소백산행을 결정했다. 각자 거주지에서 버스를 타고 풍기IC에서 만나기로 했다. 6시 50분에 출발하는 버스 시간에 맞춰 6시 10분 집에서 출발하여 천호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6시 40분에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했다. 6시 50분에 출발하는 우등버스(17,600 원)에는 승객이 두 명 뿐이다. 중간에 제천 졸음쉼터에서 잠시 정차하고 출발한 지 꼭 2 시간만인 8시 50분 풍기 IC 정류장에 도착했다. 고인돌 형님은 나보다 5분 늦게 도착하였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자고 하는데 나는 처음 가는 길이라 기왕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해보고 싶었다. 시내 버스 정류장까지 부지런히 걸으면 10분 걸린다고 했지만 중간에 과일가게와 빵 가게에 들러 약 30 분 정도 소요되는 것 같다. 하지만 9시 20분에 있다는 버스는 정작 9시 50분이나 되어서야 도착하였고 풍기 시내로 들어가 풍기역과 금계 저수지를 지나 10시 10분 삼가리 탐방 안내소에 도착했다. 여기가 버스 종점이다. 깨끗하게 관리되는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채비를 갖추고 산행을 시작한다. 고인돌 형님은 더운 날씨를 염두에 두고 반바지로 갈아 있었다.
삼가리 탐방안내소에서 달밭골 명품마을까지 2.2 km 이고 비로봉까지는 5.5 km 다. 이 삼가리 코스는 소백산 정상에 이르는 가장 짧은 길이라고 한다. 여전히 차가 다닐 수 있는 콘크리트 임도를 따라 조금 올라가는데 지나가던 SUV 차량이 서더니 타라고 한다. 차 앞 유리 안쪽에는 소백산 국립공원 허가 차량이라는 표식을 작은 아크릴 판에 써 놓았다. 요즘처럼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을 실시하는데 청하지도 않은 친절을 베풀어주는 일은 흔치 않다. 고인돌 형님이 고마움의 표시로 사과 하나를 건네었으나 착한 바리세인은 산행하는 사람들 고생을 알고 있다면서 극구 사양하다가 많이 있어 배낭 무게를 줄이려고 한다고 하니 마지못해 받는다. 초행길이라서 잘 몰랐는데 고인돌 형님은 한 시간 정도 시간을 줄였다고 좋아한다. 차는 비탈진 임도를 달려 거의 산 중턱까지 올라간다. 마침내 길 끄트머리에 달밭골 나눔터라는 간판이 달린 집까지 올라가 멈춘다. (알고 보니 이 착한 바리세인은 이 마을에서 터를 잡고 사시는 김 진선 나눔터 대표였다.)
좋은 분 덕분에 쉽게 2.2 km 를 올라왔다. 그러니까 비로봉까지 남은 거리는 3.3 km 다. 이 큰 소백산도 이렇게 쉽게 오르는 방법이 있구나. 산길도 국립공원답게 아주 잘 다듬어져 있다. 이미 수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닌 길이다. 반바지를 입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다.
비가 많이 내린 때문인지 물봉선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진한 분홍색 꽃을 피우고 바람에 흔들거린다. 옛날 집에 봉선화가 없을 때는 물봉선 꽃을 따서 손톱에 물을 들이기도 했었다. 봉선화 꽃과 잎을 따서 명반(또는 백반이라고 불렀다.) 조각과 함께 짓찧어 손톱에 붙이고 헝겊 쪼가리로 묶어 두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연한 주황색으로 물들었었다. 지금이야 갖가지 색깔의 매니큐어가 있고 또 얼마전부터는 네일 아트(nail art)라고 하는 것이 나와서 골목마다 가게가 생겨났는데 이런 손톱을 치장하는 행위의 원조는 역시 봉선화가 아닐까 한다.
그런 봉선화는 오래 전부터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함께 해왔다. 일제시대 애환을 노래한 <울밑에선 봉선화>는 요즘 중년 이상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다. 고인돌 형님과 잊어버린 가사를 찾아가며 겨우 1절을 노래하며 산을 오른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데 벌써 하산하는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겨우 10시 반 밖에 안되었는데 내려오는 걸 보면 아마도 해돋이라도 볼 요량으로 일찍 올랐던 모양이다. 조망이 어떻더냐고 물으니 안개가 짙게 끼어서 제대로 된 조망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있으니 나아질 거라며 ‘즐산 안산’을 빌어준다.
조금 더 올라가니 중간 쉼터가 있다. 길에 움푹 파인 돌이 있는데 원시적인 절구 모양이다. 절구를 원시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옛날 시골에서 사용하던 돌절구에 비해 크기가 아주 작고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큰 돌에 구멍을 파고 그 안에 곡식을 넣은 다음 나무나 돌로 된 공이(절굿대)로 갈거나 두드리면 곡식 낟알이 분리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절구는 아마도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해오던 도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큰 규모의 마을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이런 식으로 매일 조금씩 낟알을 빻아서 밥을 지어먹은 것이다. 마침 쉼터에서 쉬고 있는 아주머니와 얘기하다 보니 예전에 이 곳에 여러 채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올려다보니 큰 돌로 쌓은 석축이 보인다. 짐작컨데 이 곳에서 화전을 일궈먹던 달밭골 사람들이 1987년 소백산이 18번째 국립공원이 되고 나서 이 아래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부터는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된다. 길 옆으로 키가 큰 노송(老松)이 더러 보이지만 대부분 신갈나무 등 낙엽 활엽수가 자란다. 경사가 덜한 곳은 돌을 깔아 놓았고 급경사로 위험한 곳은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안전을 도모했다.
이런 급경사길이 끝나는 곳에 작은 쉼터가 있는데 옆에는 집채만한 바위가 나무에 가려져 있다. 양반바위라고 한다. 참 특이한 이름이다. 내가 과문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어디에서도 ‘양반’이란 단어가 들어간 바위나 지명을 들어보니 못했다. 조선시대 소수서원, 도산서원 등 서원을 중심으로 양반 계급을 길러냈던 경상도를 면하고 있는 땅이라서 그런가? 양반들이 소백산에 오를 때 이 곳까지 견여(肩轝)를 타고 올라와 여기부터는 평평해진 길을 걸어서 올라갔다는 뜻인가?
양반바위부터는 길이 완만하다. 그리고 얼마 안가 오른쪽 바위 아래 작은 약수터가 나온다. 풍기나 영주에서 온 사람들인 듯 서너 명의 산꾼들이 물맛이 좋다며 한 컵 씩 받아 마신다. 움푹 파인 곳에 물이 고여 넘치는데 그 물로 손을 씻고 그 위 돌 틈에 컵을 받쳐 물을 받는다. 사람들은 이런 물을 석간수(石澗水)라 하여 최고의 약수로 쳐준다. 지금은 비가 흠뻑 내린 뒤라서 물이 철철 넘쳐 흐르는데 갈수기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산구절초와 쑥부쟁이 꽃이 보인다. 속이 노란 꽃잎이 하얀 산구절초와 속이 노랗고 꽃잎이 파란 쑥부쟁이다. 높은 산에 가야 만날 수 있는 꽃들인데 이제 정상이 가까워지고 있슴을 알려주는 것 같다.
나무계단 끝에 있는 작은 쉼터에서 고인돌 형님이 빵쪼가리로 새를 불러보지만 주변에 먹을 것이 풍부한 계절인 탓인지 아니면 얼마전에 산꾼들에게 혼이 났었던지 멀찍이 나뭇가지에 앉아 경계심을 풀지 않는다.
계단을 다 올라간 안부에 작은 돌무덤이 있다. ‘고 조광래 조난 추모비’라는 비석을 세워놓았다. 산행을 하다 보면 이런 저런 추모비를 많이 만난다. 대부분 산행을 하다 조난을 당했거나 큰 병을 얻어 친구들보다 일찍 세상을 뜬 고인을 위해 산 친구들이 만들어 놓은 추모비다. 자료를 찾아보니 풍기의 산악회 회원이었던 이 사람은 1985년 주왕산 3폭포에서 빙벽 등반을 하다가 조난당해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있든 없든 산을 사랑했던 사람이 산길에 묻혀 지나가는 산사람들의 마음에서 살아나는 것 같다.
이 돌무덤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눈 앞이 밝아진다.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이 코 앞에 나타난다. 비로봉을 중심으로 설치된 나무 데크 위에서는 산님들이 핸드폰을 들고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의 눈이 향하고 있는 뒤쪽을 바라보니 풍기면 쪽에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장관이 연출된다. ‘’바로 이 맛이야!’’ 구름에 가려지지 않고 모든 것이 다 보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안개가 듬성듬성 끼어서 펼쳐지는 색다른 풍경은 산을 자주 찾는 사람이나 처음 찾아온 사람이나 귀한 추억 거리를 만들기에 충분하다.
정상에 오르니 오른쪽 국망봉 방향으로는 짙은 안개가 국망봉을 완전히 가렸다. 그 경계 앞쪽으로는 짙푸른 녹음이 펼쳐져 확연한 대비를 이룬다. 공기는 선선하게 불어 마치 금방이라도 가을이 찾아올 것 같다. 연화봉쪽은 그냥 모든 산 봉우리가 안개속에 덮여 있다. 맑은 날에는 도솔봉과 흰봉산 그리고 연화봉 등줄기가 시원하게 벋어 있는데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이 안개에 묻혀 있다.
소백산 산행의 백미는 정상 주변에 넓게 펼쳐진 초원이다. 축구장으로 치면 4~5개는 될 것 같은 넓은 풀밭은 영화에서 보는 알프스 초원을 연상시킨다. 군데 군데 철쭉 나무가 있지만 그 흔한 신갈나무나 물푸레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다. 풀밭 아래쪽에 인공으로 조림한 분비나무 숲이 있고 이 분비나무 숲이 울타리인 양 그 아래에는 수령이 수 백 년은 됨직한 주목 군락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잘 어우러져 하나의 멋진 그림을 펼쳐 보인다.
풀밭에는 갖가지 여름꽃들이 아우성이다. 긴 사초과 풀잎 사이로 꽃대를 죽 올리고 피어 있는 것들은 산구절초와 쑥부쟁이다. 푸른 초원에 하얗게 피어있는 꽃이 돋보인다. 둥근이질풀도 선홍빛 꽃이 듬성듬서 피어서 바람에 흔들거린다. 정상에서 어의곡 갈림길로 가는 중간에 있는 바위 언저리에는 왜솜다리가 아직도 성성하다. 7월에 한창 피었을 일월비비추는 꽃이 다 지고 열매가 익어간다. 송이풀과 흰송이풀도 뒤질세라 앞다투어 피어난다. 모두 가을이 오기 전에 씨앗을 맺어야 한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시작되면 이 모든 풀들이 두터운 눈으로 덮인 채 깊은 잠에 빠져들 것이다.
어의곡 갈림길과 비로봉 중간에 있는 작은 바위 봉우리에 올라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산을 오르면서 과일로 배를 속였으니 허기가 드는 것은 아니지만 바위에 앉아 배낭에 담아온 빵과 과일을 펼쳐 놓고 여유를 부려본다. 그 사이 연화봉쪽 산 안개도 조금씩 옅어지면서 잠깐 잠깐씩 도솔봉의 자태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소백산의 풍경이다.
바위 아래에는 한 무리의 남녀 산꾼들이 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속세의 코로나 예방수칙은 통하지 않는다. 서로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실한 믿음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나 보다. 아직 산악회를 통한 감염 사례가 없는 것을 보면 그들의 믿음에 근거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직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환자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으니 언제 어디서나 조심하는 것이 정답이다.
주목 군락쪽으로 이어지는 물길 따라서 주변 풀밭과는 다르게 함박꽃나무 군락이 펼져져 있다. 아마 이 바위봉우리를 경계로 어의곡쪽과 비로봉쪽의 사면에서 흐르는 물이 모여서 작은 물길을 만들다 보니 물을 좋아하는 나무들이 잘 자라는 모양이다. 철없는 꽃들은 어디에나 있다. 이미 오래전에 개화기가 지난 함박꽃나무가 꽃을 피웠다.
국망봉
한 시간 넘게 이 비로봉 언저리에서 꽃과 안개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노닐다가 1시 40분 국망봉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 사이 국망봉쪽의 안개는 더욱 영역을 넓혀서 어의곡 갈림길까지 차지하였다. 우리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 신선이 된다.
이제 이 길도 서 너 번 지나다녔기에 익숙하다. 어의곡 삼거리에서 국망봉까지 2.7 km 로 짧은 길이다. 능선은 험준한 바위로 되어 있어 산길은 능선 아래를 타고 지나간다. 키 큰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한 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투구꽃이 이제 피어나고 있다. 꽃 망울은 노란색이다. 좀 이른 것은 벌써 파란색 꽃이 피었다. 꽃 속에 은빛 수술이 마치 은단 알갱이처럼 보인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독초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물론 독초라는 개념은 이 풀을 사람이 섭취했을 때 극심한 고통을 불러일으키며 심지어 혈압을 상승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몇 해전에 가평 칼봉산에 산행을 갔다가 투구꽃의 어린 잎사귀를 방풍나물이라고 하는 윤이의 말을 믿고 한 봉지 가득 뜯어왔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윤이는 나물을 무치겠다고 이 투구꽃 어린 잎을 삶아서 맛을 보더니 기겁을 한다. 속이 타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파리 한 줄기를 나에게 가져와 입에 넣어주기에 아무 생각없이 받아먹었는데 아뿔싸 그 줄기가 지나간 입과 목이 타는 듯이 뜨겁고 아프다. 우리는 그제서야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그게 바로 미나리아재비과 초오(草烏)속에 속하는 투구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아주 소량을 먹어서 큰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먹었던 것을 토하고 아산 병원 응급실로 가야하나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하고 궁리하다가 말았지만 정말 비싼 수업료를 낸 격이었다.
주변에는 투구꽃과 마찬가지로 미나리아재비과 초오속에 속하는 독초인 진범(蓁䒮)도 덩굴 중간 중간에 옹기종기 모여 예쁜 꽃을 피우고 있다. 꽃 모양이 꼭 오리처럼 생겼다.
주변을 둘러보며 여유를 부리는데 갑자기 나뭇잎에 물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구름 속에 들어와 신선놀음이라도 해보렸더니 진짜 신선들이 시샘을 하는 모양이다. 비가 쏟아진다. 요즘 들어 매번 산행중 비를 맞는 일이 잦다 보니 채비를 단단히 하였다. 배낭 속에 든 우비를 꺼내 입기는 불편하여 우산을 펼쳤다. 그런대로 몸이 조금만 젖어 움직이는데 불편하지 않다.
우리나라에만 자란다는 특산종 구실바위취 열매 달린 모습도 보고, 마치 병을 닦는 병솔처럼 생긴 촛대승마도 만났다. 그리고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는 바위떡풀 꽃도 예쁘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좀 더 여유있게 살펴보며 가겠지만 빗방울이 굵어지니 마음도 조급해진다.
잠시 능선 위를 지나면서 나무가 없는 풀밭으로 나오니 풀의 식생이 또 다르다. 둥근이질풀(Geranum Koreanum) 꽃이 작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잎 모양이 쥐의 손 모양을 닮은 쥐손이풀과에 속한다. 서양에서는 꽃이 지고 난 뒤 열매 맺은 모양이 마치 학(鶴)의 부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Korean Cranesbill (학의 부리)라고 부른다. 이질풀이라는 이름은 장염 등 설사에 효과가 있는 약초로 불리는 이름이다. 달리 노관초(老官草)라는 생약명으로도 불린다. 이런 약초로서의 효과는 차치하고 무리지어 피어 있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풀밭 한 켠에 하얀 꽃이 피어 있다.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나물 어수리다. 다른 산형과 식물의 꽃에 비해 윗면이 평평하고 꽃잎도 가장자리에 핀 것이 부메랑처럼 생겼으며 크기도 조금 더 커서 쉽게 구분이 된다. 잎도 다른 산형과 식물처럼 깃꼴이지만 약간 둥그스름하기 때문에 구분이 어렵지 않다.
아직도 원추리 꽃이 드물지만 여러 개 피어 있어 눈이 즐겁다. 흔한 꽃이지만 이런 고산에서 만나는 원추리는 귀티가 난다.
앞서 간 고인돌 형님은 보이지 않고 주변은 짙은 안개에 조망이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산길 주변은 온통 쑥부쟁이와 구철초 꽃으로 덮여 있다. 가을이 오기 전 짧은 여름날을 한 톨도 헛되게 쓸 수 없다. 찬 바람이 불면 미련없이 계절에게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땅 위에 쓰러질 것이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악착같이 사는 모습이 저처럼 아름다운 꽃으로 빛나는 것이다. 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처절한 삶의 투쟁이다.
고인돌 형님은 국망봉 바위에 앉아 안개에 파묻힌 비로봉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리면 행여나 안개가 걷히고 소백산 산줄기가 신선한 모습으로 고개 들고 일어설 것을 기대한다. “박 대감, 오늘은 신선봉이나 민봉으로 가도 소용 없겠어. 그 쪽은 바위 봉우리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끝내주는데 이렇게 안개가 끼어 있으니 가보나 마나겠어.” 충분히 예상했던 말이었다. 시간도 오후 3시가 다 되어가니 구인사에서 6시경에 출발하는 막차를 타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초암사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초암사 코스로 하산하다.
초암사 삼거리에서 4.1 km 내리막 길이다. 초반에 아주 급한 내리막 나무계단을 걷는다. 앞서 가던 고인돌 형님이 푸른 이끼로 온 몸을 두른 큰 바위를 가리키며 돼지바위라고 알려준다. 누가 일부러 만든 것도 아닐 터인데 정말 돼지처럼 생겼다. 해마다 풍기의 사업가들이 이 바위에 제물을 받치고 제를 지낸다고 한다. 돼지는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짐승으로 알려져 있다. 돼지꿈을 꾸면 복이 들어온다고 하고 그런 돼지를 복돼지라 부른다.
돼지바위에서 조금 더 내려가니 조금 넓은 평지 뒷편에 또 하나의 큰 바위가 뾰족하게 서 있다. 봉(鳳)바위다. 옛날 신라시대에 이 바위 앞에 석륜암(石崙庵)이라는 암자가 있어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그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돼지든 봉황이든 이렇게 바위를 두고 상상해서 신성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영역이다. 다른 동물들은 나무나 바위에 신이 깃들었다고 믿지 않는다. 이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기적이다. 이로써 인간은 상상을 하고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석륜사터에서 나무계단을 조금 내려가니 계곡이 나타난다. 비가 많이 내린 것도 아닌데 계곡에 물이 철철 넘쳐흐른다. 고인돌 형님은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 내려가고 나는 멀찍이 떨어져 그 뒤를 따르는 형국이다. 길 가에 눈빛승마가 만발했다. 키가 1.5 미터는 되어보이는데 꽃대가 옆으로 활짝 별어져 더욱 화려하게 보인다.
초암사(草庵寺)
일단 계곡으로 내려서면서부터는 길의 높낮이가 없이 평탄하고 걷기에 편안하다. 초암사 주차장까지 2 km 남은 지점에서 갑자기 밧방울이 굵어진다. 우비를 갖춰입고 또 한참 내려가니 비로사로 가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에 이른다. 그리고 곧바로 초암사가 나타난다.
초암사(草庵寺)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세울 때 절터를 찾아 다니던 중 이 곳에 초막을 짓고 머멀렀던 곳이다. 부석사를 지은 후 이 곳에 절을 세웠으나 그 이후의 연혁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고 1935년 김 상호 스님이 초가집을 짓고 법당을 지켰으나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그 뒤 이 영우 스님이 법당을 다시 세우고 민 덕기 스님이 주석하다가 비로사로 자리를 옮겼다.
1982년 비구니 보원(寶元)스님이 주석하면서 크게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 대덕광전, 삼성각, 요사채, 종각 등을 차례로 세워 지금의 가람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보원 스님이 초암사를 중창한 이야기는 마치 옛날 이야기처럼 전해오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보원은 1911년 경북 군위에서 태어났다. 17살 때 안동의 권씨 집안에 시집을 왔는데 혼례를 치른지 10일만에 남편은 공부한다고 일본으로 떠나갔고 그 후 3년만에 공부를 마치고 온 남편은 후실을 두었다.
후실에게서 4남매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들 뒤치닥거리는 보원 스님의 몫이었다. 집안일 건사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스님은 작은 부인이 낳은 아이들 키우는데 지극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스님이 70세가 되던 1982년 회갑날 푸짐한 잔칫상 앞에서 스님은 벌떡 일어나 좌중에게 뜻밖의 다짐을 선언하였다.
“이 못난 사람이 권씨 집안에 시집와서 60평생을 살았는데 이제까지 나를 위해 잘 보살펴준 김 씨 아우에게 호적을 물려주고 본인은 출가하여 내 갈 길을 가려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좋으면 박수 한 번 치이소.”
뜻밖의 선언에 사람들은 잠시 당황하였으나 달리 말릴 만한 구실도 염치도 없는지라 사람들은 숙연한 분위기에서 박수를 치며 스님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영주 석륜선원에서 영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이듬해 (1982년) 인천 용화사 전강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고 보원(寶元)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수원에 있는 청련암에서 영선 스님을 모시며 지내는데 꿈에 동자승이 절을 청소하는 모습을 보았다. 동자승은 스님을 보더니 왜 진작 오시지 이제사 오십니까? 하면서 반기는 모습이었다.
보원 스님은 소백산에 훌륭한 도인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는데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초암사에 와 보니 3층석탑과 부도만 남아 있고 다 무너져가는 법당이 꿈에서 보았던 그 모습과 너무나 똑 같았다.
이에 보원 스님은 절을 다시 세우겠다는 원을 두고 주변 마을과 도시를 찾아 탁발을 다녔다. 멀리 풍기나 순흥까지 하루 종일 수 십 리 길을 걸어 탁발을 다니고 버스비를 아끼려고 걸어서 돌아오곤 하였다. 그렇게 탁발과 수도정진을 하는데 몸이 천근 만근 무거워짐을 느꼈다. 너무 고된 일정에 몸에 탈이 난 것이다. 이 때 보원 스님은 ‘병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화두를 갖고 몸을 살피면서 정진을 계속해 나갔다. 하루는 그렇게 정진하다가 깜빡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천상의 사람이 나타나 몸을 개미보다도 더 작게 만들더니 스님의 몸 속으로 들어가 핏줄을 옮겨다니면서 깨끗하게 청소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스님은 몸이 깃철처럼 가벼워지면서 잔병치례 한 번 하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이런 소문이 인근에 퍼지면서 고을 유지들과 기관에서는 크고 작은 지원을 아끼지 않아 보원 스님은 불사를 일으킨지 6년만에 대웅전을 완공했고 그 이후로 30여년간 대적광전 삼성각과 요사채 그리고 종각까지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보원 스님은 “껍데기 불사는 내가 시작했지만 이제 주지 용운 스님이 법을 세워 속불사를 잘 세우실겁니다.” 하시며 초암사가 명실공히 천년 고찰이 되기를 소망하였다. 스님은 초암사 중수를 다 마치고 100 세가 되는 2010년 10월 9일 새벽에 잠자는 듯 조용히 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스님은 “갈 때 남의 신발 신고 가지 마라. 남의 업보 짊어지고 가게 된다.” 라는 법문을 세우셨다 한다.
초암사는 우리나라 국보 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282호 목조아미타불좌상이 출토된 절이라고 한다.
풍기 박선생
초암사를 지나면서 비는 잠시 주춤했지만 여전히 부슬거린다. 주차장에서 비를 피하며 잠시 기다리니 박 선생님이 도착한다. 지난 번 소백산 산행할 때 주목 감시초소에서 만난 뒤로 두 번째 만남이다. 그 사이 박 선생님은 단양 군청을 방문하여 불법적인 단속에 대해 다시 한 번 항의하였다고 한다. 그의 요지는 이렇다.
“그날 단속반들이 들이닥쳐 버너 연료를 다 압수했는데 그렇다면 비상으로 먹을 거라도 제공했어야 한다. 이튿날 먹을 것이 하나도 없이 허기져서 만일 기저질환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큰 일이 날 것 아닌가? 당신들의 가족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하고 처신하라.”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하자 그는 추석 때 풍기 인산축제가 열리는데 국악과 서양악기의 합주 공연이 있어 다 같이 모여서 연습을 해야 하기에 시간이 없다면서 우리를 풍기역에 내려주고 가셨다.
오후 7시 식사를 마치고도 시간이 많이 남는다. 기차역 대합실에 들어가 여유 있게 몸도 씻고 옷도 갈아입고 시간을 보내고 8시 15분발 청량리행 무궁화 열차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