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교회 신앙과 조선
함석헌
1. 무교회 신앙과 조선이라고 제(題)를 걸어놓음에 자연 무교회 신앙이란 어떤 것이냐 하는 데 대하여 한마디 말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러나 무교회론을 하자는 것이 본 목적이 아닌 이 시간에 있어서는 그것을 자세히 풀이 할 수는 없고, 오직 간단한 한마디로 이렇게 말하여둡니다. 무교회 신앙이란 직접으로 단순히 하나님만을 알자는 신앙이라고, 곧 예수께서 보여주고 바울이 가르치고 루터가 주장한 그대로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신앙 그대로를 가지자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본래 형용사가 붙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적(的) 신앙 무슨 주의 신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형용사가 붙으면 단순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여러 가지 형용사를 붙인 신앙의 주장이 있는 것은 모두 그 시대, 그 경우의 폐해에 비추어서 하는 말입니다. 오늘 이 제목을 내거는 때에도 당초는 신앙과 조선의 장래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저 신앙이라고만 하여 가지고는 지금의 형세를 맘속에 두고 생각할 때 시원하지 못한 것이 있는 고로 특히 무교회 신앙이라 했습니다. 어쨌든 무교회 신앙이라는 명사를 듣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의 진리를 믿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이 어찌 되었든지, 그리스도론이 어찌 되었든지 그러한 신학적인 토론에는 별로 깊은 흥미를 느끼지 않습니다. 세례의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기도에 의하여 성찬 떡이 변하여 그리스도의 살이 되며, 그것을 먹어서야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는다는 말을 상징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미신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인적 권위의 얽맴을 피하는 반항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계에 대하여 다시 프로테스트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는 자에 대하여 우리말에 어딘지 건방져 뵈는 데가 있는 것을 자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있어서 스스로 깨어진 질그릇 조각인 것을 스스로 고백하기를 서슴치 않는 자입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조선에 대하여 어떤 신념을 가지는가? 그 신앙을 가짐이 조선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교회가 우리를 대하여 흔히 하는 책망은 독선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보기 싫은 수도승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조선의 구원이 없이 우리 자신의 구원을 생각 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는 말을 읽을 때마다 감격하기를 마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 아래에 있어서 나는 무교회 신앙은 조선에 대하여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느냐? 무교회 신자는 조선의 구원사에 있어서 어떤 지위에 있는가를 말하여 보겠습니다.
2. 기독교는 싸움의 종교입니다. 싸움에도 공세적(攻勢的)싸움입니다. 세계 정복을 목적으로 삼는 싸움입니다. 이 세계를 죄악의 세력에서 빼앗아 진리에 복종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 함은 곧 그의 호령에 복종하여 죄악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제자를 보내어 전도하게 할 때에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였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10:34).
검을 주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러했습니다. 그는 길지 못한 지상 생애를 싸움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산 고기의 가는 곳에 반드시 물결이 이는 것같이, 산 범의 가는 곳에 반드시 바람이 일어나는 것같이, 저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충돌, 풍파가 있었습니다. 그는 문제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언제나 저 자신 편에 있었습니다. 저는 도전자였습니다. 정복자였습니다. 방화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세계를 도로 찾는데 있었습니다. 인류의 죄로 인하여 실수된 세계를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뺏아오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가지고 싸움이라고 인정하는 이에 있어서도 그 싸움이란 것을 몰려오는 핍박에 견디어 진리를 사수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소극적인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나가서 뺏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승천하려 할 때 이스라엘의 회복을 묻는 제자들을 보고 그는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하였습니다. 세계를 정복하는 ‘권능’(듀나미쓰)의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생각 없이 읽는 사람이라도「사도행전」의 각 페이지에 펄펄 끓는 열띤 전투정신이 넘치는 것을 못 볼 수는 없습니다. 종교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의 상류계급으로 시작되어 하층으로 내려오는 것이요, 또 하나는 반대로 하층사회에서 일어나 상류계급에 미치는 것입니다. 유교나 불교는 대체로 전자에 속한다 할 수 있고, 기독교는 후자에 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전자의 포교는 교화의 형식으로 되고, 후자의 그것은 정복으로 됩니다. 기독교는 권능에 의한 정복의 종교요, 교화의 종교가 아닙니다. 초대 교회가 로마제국과 싸워 이긴 것 같은 것은 그 뚜렷한 예입니다.
우리 조선에 올 때도 그러했습니다. 일전에도 어떤 좌석에서 누가 기독교 교직자의 자제에 불품행자(不品行者)가 많은 원인을 설명하여 말하며, “목사란 사람들이 본래 그전에 망나니들인데 갑자기 기독교로 개선한 사람들이므로 자기는 비록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으나 생리적으로 되는 유전은 일조일석에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자제에는 본래의 못된 것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제의 악행이 부모에게서 유전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근래의 신진교양의 목사말고 제1세의 목사들 중에 망나니류의 사람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처음에 핍박이 심했던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미워한 때문도 있겠지만 또 그것을 믿는 자가 대개 천하고 나쁜 사람들이었던 것이 큰 원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정복을 당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고, 천주학장이, 예수장이, 미친놈, 죽일 놈의 비방 공격을 들어가며 용감히 싸워 정복의 걸음을 걸어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그대로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사상적으로 반대를 하는 소수 외에는 일반의 상식으로는 고상한 인격수양에 기독교 교양이 가장 좋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의 지도적 세력의 지위에선 조선의 기독교는 그 까닭으로 벌써 전투의식을 잃었습니다. 이 외양적으로 세상을 이긴 기독교는 도리어 세속주의의 국물을 먹고 취하여 본래의 사명을 잊었습니다. 이것은 조선만 아니라 세계적입니다. 16세기의 개혁운동이 지나간 후는 국부적으로는 다소 예외도 있었지만 세계의 대세로는 기독교와 세상과는 휴전 상태에 있습니다. 기독교가 완전 승리를 하여서가 아닙니다. 적과 타협을 하여서입니다. 유리 단추알을 가지고 남양, 아프리카 토인의 땅을 속여 사는 상인들은 값싼 자유주의의 도금문자를 가지고 단순한 크리스천들을 매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크리스천들은 물질문명의 호화로 배가 불러 무거워서 활동불능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조선에 있어서도 초기의 빛나는 역사가 지나간 후 기독교라면 무식한 노인의 천당을 부르는 일이나, 비교적 부유한 개인의 수양밖에 되는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또 한번 변하려 합니다. 자기의 교회를 포로 상태에서 구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나오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진리의 용사로서의 신자의 의미가 강조되는 때가 또 오는 듯합니다. 취한 술이 깨고 비장한 성군가(聖軍歌)로써 전진의 의기를 일으킬 때가 오는 듯합니다. 세계에 넘치는 비상시 기분은 그 시대가 오는 것을 말하는 선포인 듯합니다. 기독교가 그 본래의 생명을 가지는 한 싸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이 싸움은 세계적입니다. 빙산이 솟는 남북극으로부터 야자수 그늘 깊은 적도 지방에 이르기까지 이 싸움 없는 곳은 없습니다. 빛과 어둠의 구별이 있는 곳은 선악의 싸움이 있는 곳입니다. 그 전선은 하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뻗쳤습니다. 겨우 수천 리, 수백 리, 어떤 때는 실로 손바닥만 한 땅을 얻기 위하여 서로 다투는 이 세상에 있어서 이것은 상상만 하여도 장쾌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 전투원들이라니까, 기운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이 전선상에서의 자기의 지위를 명확히 인식함으로써만 시작이 됩니다. 우리 섰는 지점의 중대성이 알려진 후에 비로소 각오는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조선은 이 그리스도의 전선에서 어떤 지위에 서느냐?
우리 가지는 신앙의 가르침에 의하면 조선은 이 전선상 가장 중요지점에 섭니다. 군사가 싸움을 할 때는 그 전선의 어느 부분이나 중요치 않은 곳이 없습니다. 물샐 틈이라도 있으면 큰일입니다. 그러나 다 그렇게 중요한 중에도 특별히 전체 전국의 승패 대세를 결정하는 어떤 지점이 있습니다. 명치(明治) 37,8년 일・노전쟁에 있어서 가장 참혹했던 것은 여순(旅順) 싸움인데 그 여순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203고지입니다. 여순(旅順)은 극동의 요새지이니만큼 러시아도 단단한 설비로 죽기로써 싸웠으므로 그 싸움은 참 끔찍했습니다. 그런 것이 전 항내를 굽어보는 203고지를 점령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승리는 일본의 것으로 결정되게 되었습니다.
저 유명한 나폴레옹의 운명을 결정한 워털루 싸움의 승패도 ‘몬산잔’이라는 조그마한 고지로 인하여 결정이 되었습니다. 적장 웰링톤이 재략으로 보아서 도저히 나폴레옹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마는 그가 이긴 원인은 오직 침착한 영국인 기질을 나타내어 그 고지를 지켜 반석같이 움직이지 않은 데 있다는 것입니다. 질 줄 모르던 나폴레옹도 몇 번 돌격을 거듭하여 그 고지를 빼앗아 보았으나 영군의 맹렬한 역습을 받아 도저히 지탱해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양군의 시체로 덮인 그 고지는 드디어 영국군의 점유한바 되고 거기다 뜻밖에 독일의 원군이 와서 프랑스군은 전멸을 당하고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의 길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만일 나폴레옹이 일찍부터 그 고지를 뺏기에 성공하여 원군이 오기 전에 영군을 향하여 총공격을 하였다면 승리는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 의심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전 세계적 신앙의 싸움에서 볼 때 조선은 그리스도 대 사탄의 이 세계 전선에 있어서 203고지요, ‘몬산잔’이란 것입니다. 기독교가 만일 조선을 신앙화하면 세계는 구원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인류의 운명은 가엾은 것입니다. 조선 사람의 손에 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우리의 무식을 웃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광신이라고 욕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것입니다. 어림없는 망상입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하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고 조선 사람의 손에 세계 운명이 달렸다는 신념을 가지지 못했다면 저의 신앙은 껍질이요,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하냐? 우리는 세계의 불의를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계 사람에게 버림을 당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김은 무엇으로써 입니까?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려고 공자나 맹자처럼 열국(例戚)의 궁정을 찾아다녔습니까? 아니했습니다. 겨울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같이 역사상에 찬란히 빛나는 숱한 영웅들처럼 피끓는 젊은이들을 모집하여 혁명군을 일으켰습니까? 아니했습니다. 도도히 수천만 말의 경세론(經世論)을 발표했습니까? 큰 학교를 건설했습니까? 굉장한 부흥회를 하였습니까? 모두 다 아니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였습니까? 저가 세상을 이길 때 어떠한 군사의 힘으로써 했습니까? 갈릴리 호수를 서성거리는 그를 따라가 보았다면 우리는 그가 한 줌만 한 어부와 더불어 있음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거리를 통하는 그를 쫓아가 보았다면 우리는 그가 소경, 벙어리, 절름발이, 반신불수, 세리, 전과자, 창녀, 정신병자의 떠들고 밀치고 싸우고 하는 중에 둘러싸인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군대입니다. 그가 군사를 모집함에는 애국심을 자아내는 선동적 문구를 쓰지 않았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마태복음, 11:28)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태복음, 8:20)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가복음, 2:17)
그리스도가 세상을 정복하려 할 때에 애쓴 것은 높고 두드러진 인물을 만나자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끌날 같은 젊은이를 얻자는 데 있지도 않았습니다. 사회의 하수구에 내려가 이들 지저분한 찌꺼기를 주워 모으는 데 있었습니다. 남들이 손도 대지 않으려는 것을 친구로 대접하며,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이 하수구가 그리스도에게는 203고지요, ‘몬산잔’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로써 이것을 지켰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업신여겨 구더기 같은 인생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 구더기 같은 중생의 꾸물거리는 그 하수구야말로 사탄의 견루(堅壘)를 폭격시킬 뇌관을 묻을 곳입니다.
이런데 조선이란 오늘날 세계에 있어서 하수구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공창가입니다. 세계의 모든 불의가 다 여기 모였습니다. 유교의 찌꺼기, 불교의 마른 뼈다귀, 동양 문명의 썩은 주검, 서양 문명의 살무사, 모든 것이 다 여기 있습니다. 넉넉한 사람들이 안심하고, 안락한 가정생활을 하기 위하여 모든 정욕에 불타는 짐승 같은 것들을 우리가 받아 치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203고지라는 것입니다. 세계의 운명이 우리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반드시 조선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우리 사명이 열립니다. 가령 우리가 정치가를 생각한다면 어떤 것을 참말 위대한 정치가라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 생각은 몰라도 내 생각으로는 사회의 억눌린 계급의 민중을 살 길로 지도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상류사회를 위한 시설을 아무리 잘하고라도 하층에 짓밟히고 억눌린 민중이 있으면 국가는 위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운명은 하층민의 손에 달린 것이지 결코 상층민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정자의 재능의 척도는 하층사회에 대한 시설에 있습니다.
주부의 자격은 방치장이나 옷치장보다 쓰레기통에 더 잘 나타나는 것이요, 경성부윤(京城府尹)의 치적은 종로가상이나 본정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수도 설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신이 다 건강 한 것 같아도 냄새나는 발가락 하나를 잘 위하지 못하면 그 건강이 통 틀어지는 것같이 전 세계 문제를 다 해결하고라도 한 구석에 학대받은 소민족이 있으면, 그 문명은 병든 문명입니다. 세계를 구하는 누가 있다면 그는 죄인, 병인을 불러 구하는 그리스도 밖에 될 것 없습니다.
크리스천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203고지나 몬산잔 위에 십자가를 꽂아놓는 것입니다. 남들은 다 귀한 것을 위하여 다투지만 크리스천은 천한 것을 위하여 다투어야 합니다. 남들은 다 쓸데 있는 물건을 얻으려 애쓰지만 크리스천은 쓸데없는 물건을 위하여 애써야 합니다. 남들은 다 재능 있는 인물을 구하지만 크리스천은 악한 무뢰배를 찾아야 합니다. 남들이 다 사회적으로 큰 사업을 하여 공헌하려 하는 때에 크리스천은 하수구를 점령하기 위하여 싸워야 합니다. 크리스천! 저는 음욕에 미친 하나의 사나이를 서로 끌려하는 창녀와 같이 따뜻한 사랑의 품과 위로의 말을 가지지 못하는 왜곡된 심정의 소유자들을 서로 맞아들이려 싸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한 조각의 썩은 고기를 다투는 축생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의 명하는 바인 담에는 할 수 없습니다. 역사가 증명을 합니다. 뿌리가 깊은 데 비례하여 가지가 올라가는 것같이 버림을 당한 민중 층에 내려가는 만큼 그만큼 구원운동은 힘 있어 집니다. 유럽에 처음 복음이 들어 갈 때 먼저 만난 것은 빌립보 강변의 무명의 여인들이었고 그 전도와 기초가 선 것은 그때 문명 도시인 아덴이 아니오 고린도며, 고린도에서도 부민이 아니오, 도망인 브리스길라의 입신(入信)으로부터 시작입니다. 그 밖에 역사에 있어서도 때로 혹 제왕이나 귀인을 통하여 기독교가 들어간 일이 없지 않으나 언제나 민중 층에 뿌리를 박지 못하면 자라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는 글자 그대로 성한 사람에게는 쓸데가 없고, 의인은 부르지 않습니다.
5. 그러나 이 203고지를 탈취하고, 십자가를 그 위에 세울 자는 누구입니까? 무교회 신앙을 가진 자밖에 없습니다. 병인에 동정하는 자는 같은 병인이요, 결사대에 응모하는 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자신에 병통을 느끼는 것이 없고 스스로 위험을 느끼지 않는 교회 신자에게 전투의지는 없습니다. 인간지혜의 기계를 가지고 이 고지를 점령할 수는 없습니다. 제 목숨을 신에 맡기고 육탄이 되어 스스로 떨어지는 자가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조선을 복음화 시키는 것은 떠드는 교리 선전으로 될 것이 아니라, 묵묵히 남모르는 동안에 지하도를 파는 것으로써만 될 수 있습니다. 남들이 책망하여 말하기를 무교회 신자는 냉랭하다 합니다. 개인주의적이라 합니다. 과연 스스로 그것을 고백합니다. 나 자신 스스로 내 손이 너무 흰 것을 슬퍼합니다. 그러나 그는 무교회 신앙이 그릇되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아직 의뢰하는 것이 있고 순 무교회적이 되지 못하여서입니다. 무교회 신자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이 황야에 떨어진 마적의 아들들 같은 것입니다. 저에게 인정미의 부족함은 그 출생의 세로 그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마적으로 그냥 자라게 하십시오.
막북만리(漠北萬里)를 필마로 질타왕래(叱咤往來)할 때 누가 저를 냉하다 하겠습니까? 누가 저를 산승(山僧) 같다 하겠습니까? 무교회 신자를 무교회 신앙대로 자라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군의 편의대(便衣隊)로 자라게 하십시오, 평신도대로 소인(素人) 전도자대로 자라게 하십시오, 기독교계의 고아대로 자라게 하십시오, 법의(法衣)를 아니 입겠다는 완명(頑冥)을 그대로 두십시오, 그것이 저로 하여금 하수구의 잠행사업(潜行事業)을 쉬이 하게 할 것입니다. 지하도 굴착공사를 쉽게 할 것입니다. 몬산잔 점령의 기회를 더 많이 얻게 할 것입니다.
성서조선 1936. 2월 85호
저작집30; 18-189
전집20; 3-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