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그 그로츠
그로츠(1893-1959)
독일 화가로서 베를린 태생이다. 1898년에 스톨프로 이사를 갔고, 1900년에 아버지가 죽었다. 1909년에 삭슨 주의 국립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13년 몇 달 간 파리를 여행했다. 이때 처음으로 책의 삽화 그림을 그렸다. 1917년에 베르린 다다를 창립하는데 참여했다.
사회 풍자성이 강한 풍자 화가로 출발하여 소묘도 삶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표현하였다. 특히 프로이센 군대의 특권 계급의 부패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1920년에 그로츠는 뮌헨에서 첫 개인 전시회를 가졌다.
1917-20년 사이에는 베를린 다다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신즉물주의 운동을 선도한 화가가 되었다. 부르주아지 자본가와 사회 지도자 계급들(소위 유지라고 부르는) 풍자하므로 좌익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게오르그 그로츠(1893~1959)는 1920년대 중반 나이트클럽, 카바레 등 향락에 물든 베를린의 현실을 공격했다. 그는 베를린 향락의 밤을 즐기는 사람들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그는 권위에 대한 끊임없는 반감 속에 특히 1차 세계대전 후 막 부상한 히틀러와 나치당을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1932년에는 뉴욕에서 ‘뉴욕인’이라는 제목의 수채화집을 출판했다.
1930년대에 퇴폐 화가로 몰리므로 1933년에 미국에 정착하였다. 이후로는 풍자적인 그림보다는 묵시론적인 시각에서 낭만적인 풍경화와 정물화를 그렸다.
1937년에는 구겐하임의 지원금으로 개인 화실을 열고 수강생을 모집하여 지도했다.
1938년에 독일 나치로부터 독일 시민권이 말소되고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39년에는 그로즈의 많은 작품들이 퇴폐적인 작품이라 하여 나치스에 의해 불태워졌다.
1941-42년에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46년에는 미국에서 자서전을 발간했다.
1959년 5월 28일에 베를린으로 돌아왔으나 7월 6일에 사망하였다.
정치적 풍자화가로 명성을 날린 화가이다. 그가 그린 그림 하나(사회의 기둥들)을 감상하면서 그의 그림 양식을 보기로 하자.
그로츠는 1920년대 연극, 음악, 문학, 건축,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베를린 문화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으로 민중을 도덕적으로 교육하고 개혁하고자 했다.
‘사회의 기둥들(73페이지)’은 그 당시 몰락의 길을 가고 있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현실을 가차 없이 폭로했다. 화면 맨 앞 맥줏잔과 펜싱 검을 들고 있는 남자는 귀족 정치주의자다. 뺨은 칼에 벤 상처 탓에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으며 귀가 없다. 또 눈에는 불투명한 외알 맹인용 안경을 쓰고 있다. 맹인용 안경은 그가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기병대 제복으로, 이 옷은 독일 민족주의를 상징한다. 열린 그의 머리에는 법조항과 동방의 기사가 있는데 법조항은 그가 법학도로서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화면 왼쪽 머리에 요강을 쓰고 있는 남자는 신문을 놓치지 않으려고 가슴에 꼭 붙들고 있다. 이 남자는 당시 정치가이자 언론의 최고 권력자인 알프레드 후겐베르크다. 그는 히틀러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는 평화의 상징인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지만 그 종려나무 잎에는 피가 묻어 있다. 그 옆으로 사회민주주의당 소속의 국회의원이 있다. 그의 머리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똥이 가득 차 있으며 손에는 깃발과 사회주의 전단을 들고 있다. 그 위로 살찐 성직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술에 취해 코가 빨갛다. 성직자 뒤로 철모를 쓴 군인들에 의해 도시가 불타고 있다. 하지만 성직자는 현실을 외면하고 평화를 위한 설교를 하고 있다. 그는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데도 그것을 외면하고 있는 교회의 위선적인 태도를 상징한다.
그로츠는 이 작품에서 사법부, 언론, 의회, 교회 등 전후 독일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했다. 나치에 미움을 산 그로츠는 나치가 권력을 잡자 미국으로 건너간다. 나치가 퇴폐미술이라는 이유로 몰수했지만 이 작품은 그로츠가 죽기 전에 1958년 베를린 국립 미술관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