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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워 1
963: 첫째 아들. 퀵 서비스 맨. 여자를 너무 안 좋아하는 문제아.
뭐시기: 시대가 요구하지 않는 건달. 셋째 아들.
순이: 줏어온 여자.
한진희: 과거가 복잡한 철없는 가장. 배다른 세 아들의 아비.
개 코: 둘째 아들, 애비를 우습게 아는 효자. 전갈 위의 하이에나.
막내: 뭐시기만 따르다 짤리는 참 아까운 건달.
병아리: 개 코를 빼앗길 수 없는 동네 꼬마
미스 서울(미니스커트): 얼굴은 예뻐 ‘미스 서울’에 당선된 여인.
미용사: 퇴물 냄새를 풍기지만 앳된 목소리.
훈탁: 뭐시기의 ‘형님’
코흘리개(쌍동이) 형제.
오토바이 수리점 주인과 그의 아내.
비뇨기과 여의사.
뭐시기의 동생들.
서울 건달들, 매춘 기둥들.
그 외 아파트 주민과 그럭저럭 해피하게 사는 도시인들.
씬 0. 프롤로그.
시내의 한복판인 광교 근처엔 서울을 대표하는 빌딩들이 많습니다.
대형 건물들의 운집에 어울리게 도로의 폭도 대단하지만 그 도로를 채우는 차들도 아주 많아요.
느.릿.느.릿. 배회 고양이에게 어울리는 움직임입니다.
제스처는 그렇지만 넓은 도로를 관통해 지나치는 고양이는 쫓길 수밖에 없어요.
저기 도심의 지하와 연결된 구멍이 있어요. (만일 없다면 아스팔트 공사를 하던 중에 우연히 생겨난 구멍이라고 치지요)
꼬리를 곧추 세운 고양이는 그리로 향합니다.
무슨 특별한 냄새를 맡은 것일 수도 있어요.
음침한 어둠에 어울리는 질퍽거림과 온갖 종류의 부패한 쓰레기들.
몇 십 년 전 복개된 10차선 찻길 지하의, 그로테스크한 터널을 달리기 시작합니다…….
이번엔 공중입니다.
지리적으로만 친다면 지금 고양이가 달리는 지하 터널 바로 위에 위치한 교각 위의 고가일 테지만 공중을 가로지르는 오토바이의 움직임이 보일 겁니다.
다가오고 다시 멀어지는 허공의 가로등 불빛과 함께 둥둥 떠다니며 잔상을 일궈냅니다.
시야를 방해하는 데는 피어오르는 시멘트 먼지들이 주위의 어둠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희뿌연 대기 속에 중장비들의 둔탁한 움직임이 저마다의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괴기스럽게 드러납니다.
조숙해 보이는 꼬마 여자아이가 호수를 들고 나와 물을 뿌립니다.
먼지를 향해서인지 포크레인을 향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철거를 작업 중인 중장비들에 대항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결코 위압적이지도 않은 포클레인의 동작에 초라하게 쓰러지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조차 합니다.
포클레인이 덤프트럭에 몇 삽을 실어내면 집 하나가 뚝딱 없어지는 마술 같은 상황입니다.
웬 초췌한 중년의 사내가 나뒹구는 가재도구들 속에서 아까부터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철사 줄 같은 걸 몇 개 집어 들고는 제일 굵어 보이는 놈을 골라냅니다.
먼지와 어둠에 잘은 안보이지만, 꼼지락대며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다시 고양이의 시선입니다.
여전히 미친 듯이 뛰어가는데, 갑자기 터널 천장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립니다.
벽을 타고 민첩하게 올라 지상으로 뛰쳐나옵니다.
기세등등했던 야생의 고양이는 우스꽝스럽게도 사내가 꼼지락거리며 만든 허술한 올무에 목과 다리 한쪽이 걸립니다.
앙칼진 소리를 내질러보지만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고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공중의 오토바이는 하늘로 쏘아 올리는 두타의 불빛을 뒤로하고 흉물스런 아파트를 지나칩니다.
헬멧의 창을 올리고 더욱 속력을 냅니다.
고개를 하늘로 살짝 젖히는 순간 마주치는 바람에 헬멧이 통째로 벗겨져 저 멀리 떨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무인 속도 단속기의 후레쉬 불빛이 섬광처럼 퍽 하며 번쩍입니다.
그 위로 자막 - 1st, '963'
사내는 철사 줄에 매달려 축 늘어진 고양이를 끌고 아파트로 향합니다.
무너진 집더미 사이로 오토바이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칩니다.
“저런 호로 새끼”
963, 동네 근처의 허름한 미장원으로 들어갑니다.
여주인이 머리를 감겨줍니다.
눈은 찡그리고 있지만 편안한 표정입니다.
(NAR) “그때 난 아팠다.
쓰러지고 다시 깨어나 하늘을 올려다보면 온통 세상은 시커맸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나 자길 아버지라고 했다. 누굴 찾아 나서긴 내가 처음이라고도 했다. 오토바이에 실려 흘리던 땀을 식혔다. 꿈인지도 모르겠다.”
사내는 아파트 내부 계단과 복도를 따라 걷다가 기와집 대문을 떼어온 듯한 나무 현관문 앞에 섭니다.
한참을 기다리다 결국 포기하고 뒤돌아섰던 어느 중년여인이 헉헉대며 뛰어옵니다…….
애점지를 위한 사내의 썰이 시작됩니다.
"결혼한 지 한 십 년은 됐겠네? 어디서 들었어?/네?/내가 용하단 얘긴 누구한테 들었냐고?/전에 부적을 써보긴 했는데……. 애점지는 선생님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제가 잘못 찾아 왔나요?/사실 자네 같은 경운, 부적이 문제가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아? 몰라? 혹시 부적의 기원을 아는가?"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어둠 속 복도를 따라 걷는 듯한 카메라 시선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면서 저 멀리 아파트 측면으로 난 출구로 빨려듭니다.
출구와 가까워지면서 보이는, 똑같이 생긴 바로 옆 아파트의 측면 계단에 어느새 사내와 중년 여인이 씹을 하고 있습니다.
바지만 대충 내린 벽치기입니다.
여인은 헉헉대고 사내는 처용 운운하며 부적의 기원을 설명합니다…….
"옛날, '처용'이라는 사내가 살고 있었네. 하루는 집에 들어와 보니 아내의 다리 옆에 또 다른 다리가 척 뻗어 있더란 말이지. '처용'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지./헉……. 헉……./이를 본 역신은 '처용'의 기백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지. 그 뒤로는 '처용'의 얼굴 그림만 봐도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네. 역신을 물리치기 위해 '처용'의 그림을 대문 앞에 붙여두던 것이 부적의 기원이라네……./헥……. 헥……./이번엔, 어, 확실히, 억, 떡두꺼비 한 놈, 윽, 내지를 테니까……. 으으윽 됐어, 끙…….”
옥상 위에 서있는 솟대를 중심으로 양 옆에 펼쳐진 도심의 질감이 아주 대조적입니다.
화려하다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고가 위를 질주하는 차량들의 날 쌘 흐름과, 흙먼지 속 둔탁한 중장비들의 철거 상황이, 묘한 분위기로 황학동의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물론 허공에서 불쑥 끼어드는 귀여운 여자애, 순이의 환타지 같은 등장까지 말입니다.
순이: 아이, 귀여워!
메인타이틀 ‘귀여워’
순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주위를 둘러보며 어리둥절해하는 한진희…….
헛것을 본 것 같다.
씬 1. 탄천 자동차 극장/밤.
무지 화면, 타이틀이 소개된다…….
무전기의 지직거리는 소음…….
카메라 멀어지면, 커다란 옥외 스크린을 중심으로 승용차들이 열을 맞춰 늘어서 있다.
레커차 한 대가 차량들의 맨 뒤에 시동을 켠 채 세워져 있고 개 코는 차안 시트에 누워 건성으로 영화를 보고 있다.
둔탁하게 생긴 무전기에선 주파수를 바꿀 때마다 갖가지 교신 소음들이 들려오고…….
희미하게 경찰들의 교신 소리가 들린다.
교통사고 소식이다. 잽싸게 일어나 레커차 위에 경광등을 올리는 개 코…….
극장에서 빠져나와 차선과 거꾸로 차를 몬다…….
마주 오던 차들이 급정거를 하기도 한다.
씬 2. 올림픽대로/밤.
기름과 피로 흥건한 사고 현장…….
승용차 몇 대가 구겨져 뒹굴고 있다.
사고 여파로 주변의 차량들은 꽉 막혀 있고, 구급차와 경찰차, 몇 대의 레커차들도 그 속에 같이 엉켜 질퍽대고 있다.
사고차들 앞으로는 길이 휑하니 뚫려 있는데, 저 멀리서 개 코의 레커차가 의기양양, 달려온다.
개 코, 사고차를 매달고는 경찰에게 가 능청스럽게 돈을 찔러준다.
현장 주변을 기웃거리며 눈치를 본다가 어수선한 틈을 타 사고 차들의 찌그러진 보닛 안에서 배터리들을 슬쩍한다.
음악을 틀고는 휙, 중앙선을 넘어 달리기 시작한다.
씬 3. 아파트/한진희의 집.
어둠침침한 집 안, 가스레인지 위의 커다란 솥에선 김이 나고 있고, 한진희와 963은 무를 다듬고, 양념을 하는 등 김치 담그기에만 열중하고 있다.
배터리 몇 개를 들고 들어오는 개 코, 낄낄대며 안을 둘러보고는 마루 한 구석의 배터리를 새로 가져온 배터리와 교체한다.
어두웠던 실내가 환히 밝아진다.
개 코: 이럴 때 보면 둘이 참 잘 어울려…….
한진희: (솥의 뚜껑을 열어보며) 도시에서 야성을 잃지 않는 건 고양이 밖에 없더란 말씀이야…….
한진희, 카세트 데크를 가져와 버튼을 누른다…….
몇 번 튕겨지며 작동이 안 되다가, 테잎이 돌아가며 느끼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빠로레빠로레…….’
김장에 열중하는 세 부자의 모습이 측은해 보이기도,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한진희는 노래 속, 아랑드롱의 말소리를 따라 흥얼대며 막걸리를 마시기도 한다.
개 코: (한진희를 보며) 낄낄, 어디서 여자나 하나 줏어다 줄까?
그 위로 자막 - 2nd, ‘개 코’
씬 4. 교도소 근처의 선술집.
선술집 내부의 형광등이 껌뻑거리며 켜진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얼굴로 밀린 설거지를 시작하는 주인 여자…….
출소한 차림의 뭐시기, 터덜터덜 걸어 들어온다.
비에 옷이 흠뻑 젖어있다.
입구에 쌓여 있던 박스에서 막걸리 한 통을 꺼내 흔든다.
주인여자: 혼자야?
뭐시기, 몇 모금 마시더니 얼굴이 그새 벌겋게 올라있다.
주인여자: (큼직한 두부를 내오며) 가족들은?
뭐시기, 길고도 시원하게 트림을 한다.
그 위로 자막 - 3rd, ‘뭐시기’
막내, 땀을 흘리며 허겁지겁 뛰어 들어온다. “형님!” 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한다.
막내: 아따 씨벌……. 한참 찾았소…….
우산을 접고 뭐시기 앞에 앉는다.
뭐시기: 형님은 밖에 계시냐?
문 위에 걸쳐진 발을 촤악- 헤치며 밖으로 나간다.
어슴푸레한 이른 아침이다.
선술집 앞엔 보슬비만 내리고 아무도 없다.
뭐시기, 얼굴이 일그러진다.
씬 5. 고속도로/오후.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고속도로…….
운전 중인 막내, 뭐시기를 힐끔 보고는 흐뭇해한다.
뭐시기, 뒷좌석에 쌓인 청첩장(훈탁 父의 회갑연)을 꺼내 본다.
창문을 열고 씁쓸한 얼굴로 얼굴을 내민다…….
뭐시기: 조촐허니 출소항께……. (시트를 뒤로 젖혀 눕는다) 뭐시기, 북적스럽지도 않고……. 나쁘진 않구먼. 그래 안 그래 이 새끼야…….
멀리 ‘서울’ 톨게이트가 보인다.
씬 6. 건달 합숙방.
깔끔한 실내…….
건달 동생들, 뭐시기의 양복을 다리고 있다.
뭐시기: (소리) 구겨지지 않게 잘 걸어 놓아라잉…….
뭐시기, 심각한 표정으로 만화책을 보고 있다…….
동생들은 비디오를 보고 있고…….
뭐시기, 가전제품마다 깜박거리고 있는 시계를 본다…….
“정말 겁나게 할 일이 없구만…….”
베란다로 나가 전화를 한다.
잘 다려진 양복을 입고 들어오는 뭐시기, 뻥튀기와 순대를 잔뜩 사들고 들어온다.
아무도 없다…….
뭐시기: 이 새끼들은 다 어디 갔어?
무료하게 앉아 벼룩시장을 보며 뻥튀기를 먹는 뭐시기…….
막내에게 전화를 한다.
뭐시기: 워디냐? 글쎄 너 지금 뭐하냐고?!
뭐시기 들어온다.
피로 얼룩진 신문지에 둘둘 쌓여있는, 연장을 허리춤에서 꺼내 침대 밑에 집어넣는다.
동생들, 슬슬 눈치를 보다 인사를 하고 나간다.
뭐시기, 방안에 나뒹구는 비디오 테잎들 속에서 하날 골라 데크에 집어넣는다.
벽에 기대, 웃기는, 건달 영화를 본다.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지켜보다가…….
전화벨 울리고…….
막내: (소리) 워쩔라고 또 연장질을 해부렀소? 그러길래 나가…….
뭐시기: 몰러 씨불놈아. 나 지금 피곤항께……. 전활 끊는다.
화면을 빨리 돌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찾아서 본다…….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며 토한다.
씬 7. 길/오후.
길게 뻗은 아스팔트의 후덕지근한 열기에, 춤을 추듯 일렁이는 도로 위의 차들…….
차들…….
파란 모자를 쓰고, 어깨에 수건을 두르고, 뻥튀기 담긴 봉지를 어깨에 걸치고, 씩씩하게 걷고 있는…….
순이의 모습이 멀리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진다.
딱성냥을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손가락으로 튕겨 하늘로 날린다.
뒤에서부터 순이의 머리채가 갑자기 휘어잡아 당겨지고…….
“이 년아! 이 쥐 부랄 만한 년이……. 어디 남의 구역에서……. 너 오늘 한번 죽어봐라…….”
화장을 한 40대의 여인이(역시 뻥튀기 봉지와 음료수가 가득 담긴 아이스박스를 든) 나자빠진 순이를 발로 마구 걷어찬다.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던 순이, 발딱 일어나 옷을 걷어붙이고는 맞붙어 싸운다.
개 코, 갓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저 멀리 순이의 모습이 보인다.
얼굴에 썬 크림을 바르고 있다.
개 코: (창문을 열고) 잘 있었냐?
순이, 차에 올라탄다.
껌을 꺼내 씹으며 차 안 구석구석을 뒤진다.
개 코가 사고차량에서 건진 듯한 물건을 만지작거린다가…….
순이: 근데 이거 좋은 건가 보네……. 어디서 났어?
개 코: 가만 냅둬 짜샤…….
차를 운전해 달리기 시작한다.
순이: 너 그거 알어? 널 보면 전갈 위에 올라탄 하이에나 같애……. (선글라스를 쓴다. 씹던 껌으로 풍선을 만든다) 으히히……. 근데 자기 아빠, 되게 밝히는 분인가 보다. 나 같은 영계 찾는 걸 보면…….
개 코: 지랄……. 주제에…….
순이: 아무튼 너도 참 효자다.
씬 8. 아파트 앞/밤.
아파트 근처 칙칙하던 분위기가 어느새 시원하게 밀려 있고 굽어진 병풍처럼 늘어선 아파트들의 적막감이 황량한 주변의 분위기와 함께 범상치 않게 느껴진다.
옥상 어딘가에 붉은 깃발을 단 솟대가 시커먼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로 개 코의 레카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도착한다.
순이: (조수석에서 내리며) 아휴, 오줌 매려. (담배를 물고 주위를 둘러본다) 우와, 동네 죽이네…….
아파트 1층 난간에 걸터앉은 병아리, 순이를 유심히 쳐다본다.
순이 그늘진 곳을 찾아 ‘쉬’를 한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씬 9. 아파트/한진희의 방/거실.
촛불이 밝혀져 있는 작은 방에 호랑이 산신령 그림이 불빛의 움직임에 따라 기괴하게 일렁거린다.
정좌해 있는 한진희의 뒷모습, 부적을 그리고 있다.
붓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침을 꼴깍 삼킨다.
개 코: (소리) 괜찮은 걸로 줏어 왔어.
순이, 방으로 들어선다.
한진희, 계속 부적 그리는 데만 열중하며…….
한진희: (소리) 우리 둘째랑은 어떤 사인고? 솔직히 한번 말해 보거라.
순이: 그냥 길에서 만났어요.
한진희: (소리) 길에서? 아주 특별한 사이구나…….
한진희, 등을 돌려 순이를 바라본다.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란다.
한진희: 너, 너……. 혹시? 전에 그……. 귀여워? 아니 헛것?
거실…….
한진희, 순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막걸리와 맥주 몇 병을 놋쇠 주전자에 붇는다.
주전자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들이킨다.
개 코는 사고차량에서 건진 듯한 작물들을 정리하며 연신 히죽대고 있다.
순이: 까르르. 생각보다 참 진지하다. 나 여기서 살아도 된다고 하던데, 맞아요?
한진희: 반갑다. 내 술 한 잔 주마……. 그래 이름은 있냐?
순이: (술을 받으며) 네? 까르르……. 순이예요, 그냥 순이.
개 코: 왜 자꾸 술을 멕일라 그래? 낄낄…….
쾅쾅대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는지 쿵쾅거리던 중에 그냥 열린다.
아래 위 까만 옷을 입은 963이 들어온다.
거울로 가 담배에 불을 붙여 몇 모금 연기를 마신다.
매연 때문인지 얼굴도 까맣게 군데군데 얼룩져 있다. 눈가에 붙인 반창고를 떼어내고 말라있는 피딱쟁이를 뗀다.
개 코: (소리) 저거 또 술 쳐 먹은 거 같은데…….
왠지 불안해하는 한진희와 개 코…….
963, 노래를 흥얼대며 상 앞에 앉는다.
게슴츠레한 눈이 술에 잔뜩 취해있다.
주전자를 들이킨다.
963: (혀 꼬인 소리로 개 코에게) 라면 좀 삶아와라 너무 불지 않게……. 왜, 싫으냐? 똑바로 살아 임마. (순이에게) 넌 뭐냐? 너, 나 아냐? 모르면서 왜 쳐다봐…….
한진희: 누가 널 쳐다봤다고 그래…….
963: (순이 쪽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생글, 웃기만 하는 순이의 반응이 기분 나쁘다) 술 취했다고 무시하냐? 난 무시 받기 싫다. (밖으로 나가며) 너, 암내 피우지 말고 빨리 꺼져…….
순이: (생글생글) 왜? 난 여기가 마음에 드는데……. 까르르……. 까만 옷이 너랑 잘 어울린다, 얘…….
씬 10. 아파트 옥상/밤.
963, 옥상 바닥에 누워있다.
(NAR) "몇 번이나 이사를 다녔는지……. 항상 부서졌고……. 몸만 빠져 나와 또 다시 무너질 곳을 찾아 스며들었다. 반복되는 건 삶이 아니라 꿈이다……."
963,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입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난간으로 가 헛기침을 하며 몇 번 꽥꽥댄다.
도심을 내려다보며,
(NAR) "여긴 지옥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 이 곳으로 끌려왔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믿기로 결심했다.”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병아리, 눈물을 닦으며 걸어온다.
병아리: (걸어와서는, 다시 등을 돌리고서) 저기……. 헤프게 생긴 여자, 개 코 오빠랑 어떻게 알았다는데요? (계속 울먹이며) 나한테만 말해주면 안돼요?
963, 해줄 말이 없다.
병아리, 구석에 있는 덤블링 판으로 가 통통 튀어 오른다.
씬 11. 호텔 연회장 로비.
뭐시기, 로비의 한쪽 벽에 기대 서 있다.
웅성거리는 소음들.
“봉투들 봐라……. 훈탁 형님 준비 잘 혔네……. ”
“그래서 슈팅 아니냐…….”
“영택이 소식 들었냐? 그 놈 생활 정리 했대매…….”
“밥들 묵었냐?”
“안에 들어가 보자…….”
“회갑 잔치에 건달들 우루루 비디오 찍혀 불면 나중에라도 보는 사람들이 기분 좋겄냐?”
“니가 자식아, 형님이랑 나 사이를 몰라서 그러나본데…….”
카메라 느린 속도로 점점 멀어지면…….
수많은 건달들, 사투리가 제각각인 어깨들이 모두 핸드폰을 한 손에 들고 어슬렁거린다. 축의금 봉투를 몇 십장씩 건네는 손들…….
행사장의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새어 들리는 뽕짝 음악들…….
소음들 속에 뭐시기를 알아보며 건네는 인사들…….
대충 웃어 보이기만 하는 뭐시기…….
훈탁 거들먹거리며 로비로 나온다.
접수대에서 봉투를 챙긴다. 뭐시기, 훈탁 쪽으로 향한다.
씬 12. 연회장.
뷔페 음식이 차려진 주변으로 듬직한 젊은 건달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누군가의 신호에 음식들을 수북이 나르기도 한다.
훈탁과 뭐시기,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있다. 병풍 건달, 두부를 가져다 놓는다…….
훈탁: 어여 먹어…….
뭐시기: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형님…….
훈탁: (갑자기 싸대기를 날린다) 어여 먹으라고……. (주변의 노인네들을 보며, 많이 드시라는 제스처를 한다) 너 감옥엔 왜 갔어?
당황하는 뭐시기, 두부를 통 채로 삼킨다.
훈탁: (뭐시기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칼질하다 갔제? 넌 어떻게 된 놈이 나오자마자 또 연장을 써부냐? 너 거가 그립냐 시방? (담배를 비벼 끈다) 왜 그리 분위기 파악을 못 허냐고? 응? 응?
건달, 훈탁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닥거린다.
훈탁: 하여튼 씨벌……. 막내한테 몇 달 전부터 일 맡겨 논 거 있응께, 쫓아가서 그거나 해…….
뭐시기의 뒤통수를 때리고 간다.
혼자 남은 뭐시기, 무지하게 착잡하다.
등 뒤로 훈탁의 소리 들린다.
훈탁: (소리) 뭐시기 그 놈이 나대신 살다 나온 놈이요. 출소하자마자 험한 일 시킬 정도로 나가 인정머리 없는 놈은 아닝께……. 걱정 붙들어매고 그냥 좀 봐주소……. 한 두번 장사하요? 껄껄……. 아따 근데 남의 잔치에 빈 손으로들 왔소?
뭐시기, 슬쩍 돌아본다.
사복 하나가 봉투 몇 장을 내민다.
훈탁의 어깨를 툭 치고는 사라진다.
그런 훈탁을 보며 흐뭇해하는 뭐시기.
춤을 추던 노인네 하나가 뭐시기에게 다가와 웃으며 술을 따라준다.
씬 13. 거리/새벽.
뭐시기, 노래를 흥얼대며 운전을 한다.
천천히…….
빨리…….
지그재그로 가다가 후진을 하다가…….
지 꼴리는 대로 운전한다.
막내, 핸들을 붙잡으며 말린다.
막내: 면허증도 없는 양반이 뭔 추태요 이게…….
뭐시기: 술 마시니께 좋구만. 까지꺼 다 잊어불자. 나가 누구땜에 징역을 살았냐……. 알제? 좆도 씨벌.
계속 마신다.
막내: (술병을 뺏으며) 음주로 달려 들어가 덤탱이 쓸라 그라요?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하소…….
뭐시기: (웃는다) 너 시방 뭐라 그랬냐?
막내: 내 말이 뭐 틀렸소? 형님 나이가 지금 몇이오? 이제 그렇게 꼴리는 대로 했다간 이 생활 못허요. 동생들도 사탕이라도 사줘야 형님 대우하고 떠받들제……. 폼만 잡고 맨날 쓰잘 데도 없는 옛날 얘기만 한다고…….
뭐시기, 갑자기 핸들을 꺾어버린다.
건너편 가로수에 처박히는 차.
하얀 연기가 뿜어진다.
구겨진 차 문을 열고 내리는 막내, 일그러진 얼굴로 인도 변에 쭈그려 앉아 피 섞인 침을 뱉어낸다.
뭐시기, 옷에 떨어진 유리 조각들을 대충 털고는 막내에게 다가온다.
옆에 앉으며, 담배를 몇 모금 빨고는 막내 입에 물린다.
막내 외면한다. 뭐시기, 막내의 볼을 붙잡고 뽀뽀를 하려한다.
막내: 형님 나한테 와 그라요, 진짜…….
뭐시기: 없는 동안에 대가리 많이 컸구나…….
막내: 말 나온 김에 나가 한 말씀만 더 합시다…….
뭐시기, 손바닥으로 막내의 면상을 후려친다.
뭐시기: 그래 나도 참 쪽팔리다…….
씬 14. 집 부엌/방.
한진희와 순이, 시멘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빨간 다라이에 잔뜩 쌓인 그릇들을 같이 설거지한다.
순이는 딱 달라붙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다.
한진희: (고개를 끄덕끄덕) 난 자꾸 순이 너와의 만남이 운명적이라고 생각한다. 난 워낙 영험해서 처음 보는 순간 그걸 느꼈다. 너 말 까라.
순이: 말을 왜 까……. 요?
한진희: 내게서 권위가 느껴질까봐 그런다.
한진희, 순이의 팔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둘의 등 뒤로 중년 여인 몇이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등산복 차림들이다…….
그 중에는 배가 슬쩍 부른 여자도 있다.
다함께: (소리) 저, 계세요?
한진희: (순이를 끌고, 거실을 거쳐 방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영업 안 해. 얼른 문 닫고 나가! (방에 앉히며) 자, 순이야……. 우리 불 끄자.
순이: 뭐? 대낮부터 무슨 불을 꺼?
씬 15. 아파트 앞/옥상.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우산 속의 병아리, 민들레 홀씨를 불어 날린다.
CUT TO.
순이, 비를 맞으며 한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에 묘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뻥튀기 기계를 끌고 온다.
썰렁했던 옥상의 난간에 스티로폴과 버려진 가재도구들로 만들어진 화분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고 그 위로 보슬비가 내린다.
씬 16. 오토바이 수리점/아침.
아파트 근처의 허름한 오토바이 센터.
오토바이 짐받이를 용접하는 963…….
가게 안을 청소하던 사 십 대의 주인 남자,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와 963의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어 소리를 들어보고는 액셀러레이터를 당겨본다…….
머플러에서 흰 연기만 쏟아져 나온다.
주인: 그래 돈은 좀 모았냐? 브이 맥스 그 놈은 부스터란 게 따로 달려 있어……. 4단 박고 알피엠이 육 천만 넘어서면 오토바이 출력이 바로 두 배가 되거든……. 그럼 아주 작발나는 거지…….
가게 안에 딸린 작은 방문이 벌컥 열린다.
주인의 아내가 빨간 다라이를 앞에 놓고 구슬 꾀기를 하다 말고 소리를 지른다.
아내: 미친 놈 또 헛소리하네……. 빨리 마늘이나 까 이 빙신아.
아이들, 방안을 기어 다니며 빽빽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주인: 그럼 애새끼고 마누라고 다 없어…….
씬 17. 교차로/낮.
교차로의 신호등이 노란색으로 바뀌자 쏜 살 같이 튀어나가는 택배 오토바이들…….
서쪽의 차로에서 가로질러 질주하던 963의 오토바이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튀어나가던 오토바이들의 맨 앞에 나선다.
963, 급하게 방향 회전을 해서인지 뒤에 실려 있던 박스 몇 개가 교차로 한가운데에 떨어진다…….
바닥을 뒹굴던 종이 박스가 열리면서 안에 접혀있던 프린트(도트프린터의) 용지가 한 칸 씩 한 칸 씩 빠져 나와 꼬리를 이으며 날린다.
서둘러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963, 빠르게 지나치는 오토바이들을 피하며, 바람에 날리는 용지의 끝을 잡으려 쫓아가지만…….
종이들은 허둥지둥 대는 963을 약 올리며 끝도 없이 펼쳐진다.
교차로 어느 고층 건물 위로 ‘미스 서울’이 모델을 한 대형 간판이 크레인에 매달려 올려진다…….
무전기 소리: (스피드코리아 총무) 963, 현재 위치는……. 963……. 963……. 야 임마! 빨리 송신 안 할래!
신호가 바뀌었는지, 사방에서 ‘빵빵’대고, 963을 포위하며 점점 몰아세우는 차량들…….
도시의 소음들…….
씬 18. 고층 빌딩 안.
이빨에 담배를 물고 건물로 들어서는 963, 커다란 박스를 들고 건물 로비를 지나친다.
가뜩이나 무거운 박스가 앞을 가려 힘겨워 보인다. 정장을 한 로비의 안내 직원(남)이 다가와 가로막는다.
안내 직원: 어디 가시죠?
963: 18층…….
말을 하다가 담배가 입 밖으로 나와 떨어진다.
안내 직원: (무표정하게 바닥의 꽁초를 주우며) 안내 데스크에서 출입 사유와 주민등록번호를 기록하셔야 합니다.
안내 직원, 963 앞을 지키고 서서 비킬 생각을 안 한다.
963,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홀수, 짝수’ 전용의 엘리베이터 두 대가 나란히 있다.
짝수 전용 엘리베이터는 내려 올 생각을 안 한다.
홀수 전용도 한참 지나서야 도착하고 우루루 타는 넥타이들…….
963도 하는 수 없이 홀수 전용에 올라탄다.
19층에 내리는 963…….
커다란 통유리로 된 사무실 내부가 보이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직원 몇이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고 있다……. 963, 내려가는 계단을 찾으려 이쪽저쪽 둘러보지만, 찾을 수가 없다.
963: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창문 앞에 앉아 잡담하는 직원들에게) 저……. 비상계단이?
남자: 사무실 안에 들어가야 있어요…….
다시 수다 떠는 직원들…….
963,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1층에 다시 내리는 963, 시계를 본다.
멀리서 안내직원이 963을 예의주시한다.
963, 짝수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16층…….
963, 인터폰 앞에 서서 조그맣게 붙어있는 안내문을 읽어보고는, 네자리 번호를 계속 해서 눌러보지만 통유리는 열릴 생각도 않는다……. 수첩을 꺼내 번호를 뒤적이다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다.
963: ‘스피드 코리안’데요……. 못 들어가니까 전화를 했죠……. (소리를 지른다) 눌렀어요……. ‘뭐? 우물 정자’요!
소리 없이 자동문이 열리고 직원들 몇이 지들끼리 깔깔대며 밖으로 나온다.
963: (NAR) 항상 웃을 준비만 하는 놈들……. 썰렁한 개그가 득세하는 건 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이다. 화가 난다. 언젠가 테러가 일어날 거다.
씬 19. 황학동 먹자 골목/낮.
분주히 장사 준비를 하는 주인…….
뭐시기, 막내, 건설업자들과 양주를 마시고 있다.
막내와 건설업자는 도면 같은 걸 펴들고 진지하게 얘기중이다.
서로간의 대화에는 별 관심도 없는 뭐시기, 착잡한 얼굴로 혼잣말 하 듯 중얼댄다.
(NAR): 그래……. 나가 건달 되고 서울 와서, 십 년 동안 철거밖에 한 게 더있나……. 난 사실 다른 건 몰러……. 씨벌……. 형님, 고마우요…….
씬 20. 아파트 입구/낮.
뻥튀기 기계 손잡이에 달린 압력계의 바늘이 위험 표시인 빨간 숫자 근처에서 흔들거린다.
‘뻥’소리가 들리고 안개처럼 광장을 메우는 연기…….
기계에서 터져 나온 뻥튀기 알갱이들이 밖으로까지 새어 나와 사방에 흩날린다. 귀를 막고 있던 코흘리개 형제.
신났다고 뛰어다닌다.
순이, 지나가는 주민들에게 빨간 다라이 속의 뻥튀기를 나눠준다.
저 멀리 산비탈을 내려오는 뭐시기와 막내의 모습이 보인다.
코흘리개 형제, 손가락을 입에 넣고 꼼지락대며 순이를 멀뚱하게 바라본다.
순이: (고개를 쓰다듬는다) 코흘리개네? 뻥튀기 좋아해?
코흘리개 형제들, 순이의 눈앞으로 불쑥 생 이빨을 뽑아 내민다.
소리를 내지르는 순이.
낄낄거리는 코흘리개 형제…….
난간 위의 병아리, 분바른 얼굴로 표독하게 쏘아본다.
순이: (병아리를 올려다보며) 어머, 너, 쪼그만 게 참 조숙하네. 엄마 어디 가셨니? 그릇 좀 가져올래?
병아리, 순이의 얼굴로 침을 뱉고는 안으로 쏙 들어간다.
다시 나타난 코흘리개들, 순이의 엉덩이를 만지고 킬킬대며 도망친다.
순이, 코흘리개 동생을 잡아 번쩍 들어 안는다.
바지를 벗기고 볼기짝을 찰싹찰싹 때린다.
뭐시기, 계단 중간에 서서, 눈을 끔벅거리며 순이를 쳐다보고 있다.
씬 21. 동네 시장/오후.
후줄그래한 체육복 차림의 한진희, 조리방법 등을 가게 주인들에게 하나하나씩 물어보며, 찬거리들을 잔뜩 산다.
씬 22. 아파트 근처/석양.
아파트 주변을 둘러보는 뭐시기와 막내…….
아파트 뒤편의 계단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땀을 식히는 뭐시기와 막내.
뭐시기: (신문을 건성으로 들춰본다……. 성 클리닉 광고들만 가득하다) 신문들 꼬라지 하고는……. (몇 장 더 넘겨보다가 오늘의 운세를 본다) “정의는 우연에 종속되는 법. 미운 오리가 똥통에서 백조를 만나 찬란한 운명을 날개짓 헌다?” 까는 소리하고 있네…….
시장바구니와 비닐 봉투를 양손에 하나씩 든 한진희, 그 앞을 지나치다가 뭐시기의 소리를 듣고는.
한진희: 모든 생명은 다 그 운세를 따라가는 법! 잊었던 혈육을 만나 기똥찬 상봉을 한다는 보기 드문 길운이란다…….
한진희, 몇 걸음 더 걷다가 우뚝 멈춰 선다.
뭐시기 쪽을 돌아본다.
한진희: 하! 하! 하!
씬 23. 아파트 근처 비탈길/석양.
뻥튀기 알갱이가 반쯤 채워진 봉지를 들고 지나는 순이.
‘18세 순이’를 흥얼댄다.
오토바이를 타고 오던 963, 순이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춘다.
순이가 뒤를 돌아보자 악셀레이터를 강하게 당긴다.
쏜살처럼 지나가는 963의 오토바이.
순이: (뒤에서) 야!
씬 24. 아파트 옥상/현관/석양.
상에서 덤블링하는 병아리.
병아리의 시선은 뛰어 오를 때마다 밑의 현관을 향하고 있다.
개 코의 레카차, 현관 앞에 먼지를 일으키며 도착한다.
병아리, 어느새 현관에서 뛰어나와 개 코에게 쪼르르 달려간다.
병아리: (헥헥대며) 오빠가 데려온 여자, 오토바이 뒤에 타고 가는 거 내가 봤어. 정말이야. 막 신나는 얼굴이던데……. 그리고 내가 찌개 끓여놨어. 가서 같이 먹자. 응?
그런 병아리를 가소롭게 쳐다보는 개 코.
씬 25. 집/거실.
초조한 얼굴의 한진희, 거실을 왔다갔다하며 안절부절못한다.
개 코,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연결이 안 되는지 그냥 끊는다.
담배에 불을 붙여 몇 모금 빨고는 한진희에게 건네준다.
개 코: 핸드폰도 꺼놨어. 삐삐도 안 되고…….
한진희: 순이 걔가 틀림없이 오토바이 뒤에 타고 있었단 말이지? 아무튼 이 놈의 호로 새끼를 그냥…….
개 코, 열 받은 한진희를 보고 즐거워하며 실실 쪼갠다.
보글보글…….
부엌으로 가 끓고 있는 찌개 맛을 본다.
순이: (소리) 오토바이가 왜 좋아?
963: (소리) 할 말 없으면 그냥 가만이나 있어.
씬 26. 내부 순환로/석양.
순이, 오토바이의 짐받이에 서있다.
자세를 바꿔 몸을 뒤로 향한다.
통수로 마주 오는 세찬 바람에 머리칼이 얼굴을 감싼다.
순이: 너한테 어울려……. 정말.
흰 연기를 뿜으며 덜컹이다가 멈춰서는 963의 오토바이…….
터널 안…….
자동차들 빠르게 지나친다.
963,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려고, 밀며 뛰어다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다.
씩씩대다 결국 포기하는 963, 쪽 팔린 지 혼자 오토바이를 끌고 간다.
뒤쳐져 따라가던 순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친다.
순이: 야! (목에 걸고 다니던 커다란 수건을 내밀며) 땀 좀 닦아…….
터널 앞, 주위는 어둑해져 도심의 불빛이 피어나고, 까매진 수건을 다시 받은 순이, 이번에는 앞장서서 걸어간다.
963, 오토바이를 끌고 뒤따라간다.
순이: 좋겠다, 너……. 원래 이런 때가 좋은 기회인 거야. 쑥맥은 아닌 것 같고……. 그럼 음흉한 거 밖에 더 있어? 까르르…….
내리막길 앞…….
963, 오토바이에 오른다.
말없이 순이가 타길 기다린다.
순이: (뒤에 올라타며) 뭐든 어울리는 게 좋은 거랬어. (963의 허리에 손을 꼭 감는다) 아까 나,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니 뒤에서…….
내려가는 힘으로 천천히 굴러가는 오토바이…….
씬 27. 편의점 앞/밤.
순이, 오토바이 핸들에 찝개로 끼워져 있는, 작은 크기의 메모장(오토바이 특송 ‘스피드코리아’가 인쇄된)을 꺼내본다…….
닳아빠진 표지에는 ‘허약한 꿈’이라고 또박또박 제목이 쓰여 있다.
한 장씩 훑어보던 순이, 어느 대목에선가는 깔깔대기도 한다. 963, 술을 사들고 온다.
메모장을 뺏어 조끼 호주머니에 넣는다.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 있는 둘…….
963, 데킬라를 병째 마신다.
작은 소금 봉투를 찢어 손 등 위에 뿌린다.
레몬을 까서 즙을 손등 위에 짜고는 땟국물을 핥아먹는다.
순이는 맥주를 홀짝인다.
순이: 왜 그래? (웃으며) 무슨 고백할 거 있는 사람처럼…….
963: 그냥……. 말하기 편할라고……. 술 취해야 말을 재밌게 할 수 있거든……. 바보처럼……. (그새 취했는지 약간은 격앙 되서) 푸하하……. 오토바이에, 아니 내 뒤에 여잘 태운 건 니가 처음이야.
순이: 까르르…….
순이: 이제 보니 여자 꼬시는데 선수구만? (963에게 안주를 먹여준다. 어색해하며 받아먹는 963) 여자 친구도 많겠다, 너? 그치? 없어? 너 잘 생겼잖아.
963, 계속 술을 마신다.
순이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하면서…….
순이, 뻥튀기에 침을 발라 하트(나비, 별, 꽃…….) 모양을 만들어 963에게 준다.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963의 팔짱을 낀다.
963: 난 여자 안 좋아해, 정말…….
팔꿈치 상처의 딱정이를 떼어낸다.
피가 배어난다.
순이: 어머, 진짜구나 니 아빠가 너보고 또라이라구 그러던데……. 나 같은 여자도 안 좋아해?
963: 너 같은 여자가 뭔데?
순이: 까르르…….
963, 마지막 남은 술을 들이붓는다.
순이: 술 먹으면 꼴리잖아, 여자랑 자고 싶어지잖아……. 수컷들은 다 그렇던데…….
963: 좆도. (반쯤 풀린 눈으로 쬐려본다) 너 나한테 왜 그래?
순이: 몰라서 물어?
963: (순이의 시선을 피하며)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 편안해……. 아늑해……. 잠이 와……. 그러다가 난 가끔 이상한 걸 봐……. 누구한테도 얘기한 적이 없는데 그건 아마도 미래 같은 거야…….
순이: 푸하하……. 오토바이 타면서도 조나보네? (캔을 비우고는 일어선다) 그러니 꿈이 허약하지……. (돌아보며) 아무래도 니가 날 좋아할 거 같아.
씬 28. 아파트 근처 언덕/밤.
발정 난 고양이들.
암수 한 쌍이 얽혀 서로를 핥아준다.
농염하다.
화환을 들고 지나가는 막내와 뭐시기의 실루엣.
막내: 긍께 그 양반이 서울 어디선가 부적 판다던 그, 그 도망간 형님 아부지라고라? 참말로 웃겨부네……. 근데 기껏 튄 게 하필 여기여? 허허……. 참말로 웃겨부네.
인서트.
막내의 상상.
달 밝은 밤…….
메밀밭을 헤치며 도망치듯 뛰어가는 젊은 시절의 한진희.
개나리봇짐을 움켜쥔 채, 가끔씩 뒤돌아보기도 하면서…….
정신없이 개울물을 건넌다.
미끄러져 물에 빠지기도 한다.
뭐시기와 막내, 잠시 멈춰 서 하늘을 올려보다가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막내: 그나저나 이것이 잘하는 짓인지 모르겄소, 시방 작업에서 빠진 다음에 찾아오는 것이 어떻겄소?
뭐시기: 이 아파트가 아무래도 뭔 인연은 인연이여 (침을 뱉는다) 그렁께 일단은 비밀로 하고……. 혹시 아냐? 또랑도 치고 가재도 잡을지…….
막내: 서울 한복판에서 뭔 놈의 또랑이고 가재여……. 내 참…….
씬 29. 아파트.
서로 다른 밝기의 실내등이 몇몇 집을 밝히고 있다.
쾡하게 뚫려있는 빈집들의 베란다에서 비둘기들이 푸덕이며 날아간다.
순이: (소리) 나 정말 죽는지 알았어, 정말 뿅 갔어……. 집에 오니까 갑자기 배고프다.
씬 30. 집.
집으로 들어오는 순이.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963도 담배를 물고 따라 들어온다.
한진희: (963에게 윽박지른다) 우리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알기나 해? 어디 갔었어. 빨리 말해 임마!
순이 (소리): (한진희에게) 뭐해? 배고프다는데…….
옷을 털고, 양말을 집어던지고, 세수를 하는 963…….
한진희, 963을 졸졸 쫓아다니며 추궁하듯 소리친다.
한진희: 빨리 말 안 해?
963, 관심 없는 척 세수만 한다…….
(NAR) 말해줘라……. 순이야.
순이: (소리) 정말이지, 눈물 찍 콧물 찍, 미친 듯이 달리다 왔단 말이야.
한진희: (순이 쪽으로 다시 와) 순이야……. 거, 쪼다 같고 능력 없는 것들이나 괜히 오토바이 같은 거 타면서 우쭐대는 거야.
순이: 나랑 좀 친해졌다고 아무한테나 질투하는 거야?
한진희: 하!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개 코: (발톱을 깎다 963에게) 야! 후까시 넌 니가 멋있는지 알지? 순이야, 너 도둑고양이들이 임산 모한테 아주 치명적인 병균을 옮긴단 얘기 못 들었냐? 새끼를 까면 백 프로 또라이야.
한진희: 넌 또 뭔 소리 하는 거야?
뭐시기: (소리) 여기가 한진희씨 댁 맞을까라?
뭐시기, 번들번들한 실크 정장에 반짝 구두를 신고 문 앞에 서있다.
순이를 비롯한 가족들 전체가 갑작스런 뭐시기의 출현과 마주한다.
개 코: 어째 반가운 손님은 아닌 것 같다.
뒤따라 들어오는 막내, 커다란 화환을 내려놓는다.
절도 있게 인사를 하고 나간다.
석연치 않은 얼굴로 뭐시기를 한 참 쳐다보던 한진희, 963과 개 코도 차례로 둘러본다.
뭐시기, 한진희의 시선을 쫓아 963과 개 코를 둘러보다가 구석에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는 순이를 보고는 깜짝 놀란다.
한진희: (소리) 개 코야, 방에다 방석 좀 깔아놔라.
씬 31. 집/방.
한진희, 촛불을 켠다.
비좁은 방에 모두 엉거주춤하게 서있다.
뭐시기는 순이를 곁눈질하며 계속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바닥에 앉는 한진희, 괜히 헛기침을 한다.
뭐시기: 아버님, 절부터 받으시씨요. 그렁께……. 한자, 진자, 희자. 맞으신지라?
한진희: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러다가) 성씨에는 ‘자’자를 붙이는 게 아니다.
개 코, 꼬질꼬질한 방석을 내온다.
단추를 채우고 절 받을 채비를 하는 한진희.
뭐시기, 절을 하려다말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반쯤 열려 벌어진 한진희의 바지 쟈크에 시선을 고정한다.
한진희: (뭐시기의 시선을 쫓아 바지 쟈크 쪽을 유심히 보다가) 고장 난 지 오래다, 이거…….
말하고 나서도 왠지 이상하다.
순이: (슬그머니 963의 팔짱을 끼며) 까르르……. 고장 난 거라고?
뭐시기, 한진희에게 넙죽 절을 올린다.
한진희: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 인사들 해라…….
어리둥절한 963, 개 코…….
순이만 들뜬 얼굴로 뭐시기와 눈을 맞추고 있다.
한진희: 어험……. (963, 개 코를 보며) 저 놈들이 싸가지는 별로 없지만, 그러려니 생각하고, 잘 지내라.
뭐시기: 반갑소……. 나가 참말로 보고 싶었던 형제들잉께, 잘 지내 볼랍니다. (씨익 웃으며 형제들을 본다. 963, 순이의 팔짱을 풀고는 밖으로 나간다) 건강은 괜찮으신지라? (한진희, 점잖게 고개를 끄덕인다) 저야, 뭐……. (길게 한숨을 내쉰다) 내리는 비는 그냥 맞고, 야속하면 그냥 웃고, 슬플 땐 거울도 보고……. 뭐시기, 전 길게는 얘기할 줄 모릅니다. 전 행동하는 건달이지 생각하는 건달이 아닙니다요.
개 코, 낄낄거린다.
순이: 깡패였구나? 몇 살이에요? 얘네 보단 좀 들어 보이네…….
뭐시기: 근데 누구십니까?
한진희: 이 자식이, 오자마자……. 넌 알 거 없다.
뭐시기: 우리 세계는 나이로 먹어주기 땜시……. 그랑께……. 나가 내 나이를 실제 나이보다, 몇 살 더 얹었지라.
순이: 그러니까……. 나이를 속인 죄로 얼굴이 삭았다? 어~그랬다?
씬 32. 아파트 베란다.
한진희와 순이, 어디론가 가고 있는 형제들을 내려다본다.
한진희: 왜 그랬어?
순이: 응? 응~ 올라오다가 만났어.
한진희: 그래 그게 그렇게 재밌디?
순이: 근데 처음 보는 아들이 불쑥 찾아왔는데 왜 놀라지도 않아?
한진희: 반가웠으면 놀랐겠지……. 너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순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이는 셋 다 같은데 정말 친형제란 말야? 그게 말이 되나?
한진희: 순이야, 내 말 똑바로 들어라. 내가 사실은 소문난 박수였다. 오래된 일이지만……. 소싯적에, 아주 소싯적에 말이다. 내게 신이 내렸었단다.
순이: 카아- 죽인다.
짝 짝…….
느린 템포로 박수를 친다.
한진희: (순이의 손을 냉큼 잡아 방으로 끌고 들어간다. 서랍을 뒤져 사진 액자를 꺼내 보여준다) 이걸 봐라 (감회에 젖어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순이에게 건네준다. 사 진에는 알록달록한 무복을 입고 작두를 타는 한진희의 모습이 있다) 이름 좀 날리니까 오라는 데가 많았다.
순이: 어머! 그래서?
한진희: 그저 젯밥에만 관심 있는 예펜네들이 자주 찾곤 했지……. (귓속말로) 나중엔 나한테 신이 내린……. 자지라고 하더라……. (창밖을 내다보며) 그래서 신.자.들이 많았지……. 남편을 잃은 세 자매가 있었다. 그 방면에 소문이 자자한 무당이 불려가 푸닥거릴 해주었다. 여기 끝나면 저기서 부르고, 방문이 벌컥 열리고 또 부르고, 그 날 박수는 자매들의 액땜을 밤새도록 해줬다. 순이, 내가 왜 애들 술 마시라고 내보냈는지 알아?순이, 배시시 웃는다.
씬 33. 황학동 먹자 골목/밤.
동네 할머니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있다.
재잘대며 꾸부정하게 뛰어다니는 할머니들의 동심이 적막한 동네를 훈훈하게 한다.
색색깔의 털모자를 쓴 할머니의 사투리를 가만히 들으며 실실 쪼개는 뭐시기, 포장마차 밖에서 통화중이다…….
뭐시기: 걱정 붙들어매고……. 일단은 빈집들부터 아작을 내부러.
포장마차 주인: (뭐시기에게 아는 체를 한다) 여기 사시나 봐요. 어제도 오셨었죠?
뭐시기: (당황하며) 내 얼굴이 좀 평범한께……. (서둘러 말을 돌린다) 그럼, 무게 잡는 자네가 첫째고, 촐랑대는 자네가 둘째면, 뭐시기 나가 셋째가 되는가?
석쇠 위에는 여러 종류의 조개들이 입을 벌리며 불에 익고 있고…….
개 코는 조개를 뒤집고 있고 963은 자기 혼자 술을 따른다.
개 코: 왜, 맘에 안 드냐? 꼬우면 니가 먼저 찾아왔어야지…….
뭐시기: 근데 니들 둘도 배가 다른 종자냐?…….
개 코: 뭐가 어때서?
뭐시기: 엄니들은 다 돌아갔고?
개 코: 우린 그딴 거 관심 없다. 그게……. (턱짓으로 963을 가리키며) 쟤랑 나랑 유일한 공통점이다.
뭐시기: 엄청 맘에 들어 분다. 집안 분위기가 원래 그리 발랄한가?
개 코: 그건 얘한테 물어봐. (963에게) 너……. 그 년이랑 했냐? 낄낄…….
뭐시기: 그 년이란 게 혹시?
963: 소주 하나 더 줘요.
개 코: 한 번 따먹더니 꽤나 센치하구만. 그래서 걔랑 러브하기로 했냐? 좋겠다……. 한심한 놈.
963, 주먹을 날린다.
나동그라진 개 코의 얼굴에 술잔을 붇고는 나가버린다.
개 코: (일어나 앉는다. 얼굴 위로 술이 흘러내린다. 뜬금없이) 난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일단은 목표가 옳아야 하고 그 다음엔 그 길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뭐시기: (진지하게) 난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일단은 뭐시기가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엔 뭐시기허게 살아야 한다고…….
씬 34. 아파트 측면 계단.
963: (NAR) “깡패 새끼……. 만들고 세우기보단 부수고 쓸어버리는 걸 좋아한다. 아버지의 자식이다.”
아파트 아래에는 막내가 건달 동생들을 이끌고 가재도구들을 쌓아놓고 있다.
카메라 외벽을 따라 올라가면…….
담배에 불을 붙이는 뭐시기,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실실 웃는다.
순이, 옆에 와 앉는다. 놀라는 뭐시기, 그러다 멋쩍게 다시 웃는다.
순이, 뭐시기가 피던 담배를 뺏어 핀다.
순이: 왜 깡패 됐는데?
뭐시기: 나가 잘 할 수 있는 게 뭐……. 그냥……. 좆같은 놈들……. 설쳐대는 꼬라지……. 친구들도 다 건달이라……. 사투리 다르다고 무시하는 놈들도 재수 없고……. 영어 못항께 학교에서 짤려불고……. 아따, 갑자기 생각할라니까 기억이 잘 안 나부리네…….
순이: 그래 그럼.
뭐시기: 다 답답항께, 다 때려 부술라고, 나도 철학이 있응께……. 난 후회 같은 건 안 혀. 연거푸 심호흡만 해댄다…….
순이, 뭐시기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뭐시기, 순이의 눈빛이 어색한 게 쑥스럽다.
순이: 뭐해? 얼른 가서 자.
씬 35. 아파트 골목/새벽.
희미한 가로등 불빛…….
차안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개 코, 콧노래를 부르며 레카차 외벽을 걸레로 닦는다.
차에 타는 개 코, 라디오 소리를 줄이고는 무전기를 켜고 주파수를 돌린다.
병아리가 잠에서 들깬 얼굴로 현관에서 쪼르르 달려 나온다.
병아리: 요즘 내가 밤만 되면 뭐하는 줄 알아? (닫으려는 문을 막아서고는) 쓰고 또 쓰고 그러다 찢어버려. 내 마음을 표현 못해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지를 써보지만 결국은 다 찢어. 내가 그렇게 싫어, 짜증나?
개 코: (거품을 닦아내려 윈도우 브러쉬를 작동한다) 짜증은 안 나.
병아리: 근데, 왜, 요즘 나한테 관심이 없어?
개 코: 요즘 학교 안 가니?
병아리: 가봤자 배울 것도 없다고 그랬잖아……. 그리고 내가 그 여자보다 못한 게 뭐야?
개 코, 기가 차다는 듯 피식 웃는다.
순이, 뻥튀기 봉지를 들고 걸어 내려온다.
순이: 개 코야, 나 좀 태워주라 (병아리에게) 넌 왠일이야? 어머, 오늘도 분 발랐네.
병아리: 넌 개 코라고 부르지 마. 그건 내가 붙여준 거야
눈물을 글썽거린다.
날이 밝아져 있고……. 밤새 누군가의 짐들이 아파트 밖으로 내던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뭐시기가 한진희를 도와 짐들을 아파트 안으로 옮겨 나른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던 할머니의 털모자가 흙이 묻어 가재도구들 밑에 깔려 있다.
씬 36. 길/낮.
순이, 뻥튀기 봉지를 어깨에 메고 중앙선을 따라 걷는다.
신디로퍼 ‘GIRL JUST WANT TO HAVE FUN'…….
흐르고……. 순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가 내린다…….
씬 37. 동물원/오후.
신디로퍼의 신나는 음악소리가 짱짱 울린다.
비 때문인지 야외 우리에는 동물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순이, 실망한 얼굴로 터벅터벅 걷는다.
뻥튀기를 길에 뿌린다.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따라온다.
벤치에 앉아 텅 빈 우리들을 바라본다.
멀리 낙타 두 마리가 야외 우리에 나와 있다.
순이, 반가와 뛰어간다.
뻥튀기를 봉지 채 던져준다.
내부 청소를 하던 관리인들이 밖으로 나와 순이에게 욕을 한다.
씬 38. 공중전화 부스/석양.
여전히 비는 내리고…….
순이, 963에게 전화를 한다.
“……. 메시지 녹음은 1번”……. 삑
순이: 낙타랑 낙타 새끼가 있었대. 낙타 새끼가 낙타 엄마한테, “엄마, 우리는 왜 등에 혹이 있어?”, 하고 물었더니…….
씬 39. 남산 순환도로/석양.
오토바이 위의 963, 꽉 막힌 정체 속을 가다 서다 반복한다.
우비 위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신호등 앞에 선 963,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조끼 주머니의 핸드폰에서 메시지 알림 불빛이 반짝인다…….
963의 VISION.
다리를 절뚝이던 오토바이 센터 주인의 일가족 넷이, 여자아이, 센타 주인, 남자 아이, 부인의 순서로 한 대의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바람처럼 지나친다.
모두가 들뜬 얼굴로 행복해 보인다.
빨간 고무 다라이를 들고 있던 부인이 머리띠를 푼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물풀처럼 날린다.
속도에 사물이 불분명해지면서 원색의 색감만이 남는다.
다라이 속의 구슬들이 강냉이로 변하고 다시 눈발처럼 공중에 날린다.
씬 40. 집/방.
부스럭거리는 소리, 쟈크 올라가는 소리…….
어색한 시간이 잠시 흐르고…….
불이 켜진다.
사무룩한 한진희, 궁색하게 앉아있다.
순이, 이불 속에서 얼굴을 삐쭉 내민다.
순이: 금방 다시 킬 거 왜 껏어?
우물쭈물하던 한진희, 형광등 줄을 당겨 다시 끈다.
한진희: 신이 내리면 말이다……. (우물쭈물하다가) 언제부터인가 내겐 꿈이 있었다. 무당이 접신을 한다는 건 결국 이 한심한 세상과 그걸 방관하는 모든 놈들을 긍휼히 여겨 싸그리 잿더미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데…….
순이: (소리) 의미는 나중에나 찾고 불이나 키시지 그래…….
씬 41. 집/부엌.
순이, 거울도 안보고 화장을 한다.
개 코, 그런 순이를 한참을 쳐다보다가…….
개 코: 안 나갈 거야? 빨리 좀 해라…….
순이: 나 바쁘니까 너 먼저 나가. 참, 가위 어딨니?
개 코, 순이에게 다가가 등 뒤로 포옹을 한다.
개 코: 너 언제까지 여기 있을 작정이야? 어째 아예 눌러 앉을 태세다?
병아리, 집으로 들어와 곧장 부엌으로 간다.
병아리: 야, 너!
스프레이를 뿌리다 말고 벙찌는 순이…….
개 코는 엉거주춤 순이에게서 떨어진다.
병아리: 내 말 안 들려? 너!
손가락질.
병아리, 개 코에게 조그만 스티커 사진을 건넨다.
그리고는 순이 쪽으로 씩씩대며 달려간다.
순이: 아니, 요……. 도토리만한 년이 어따 대고 혀 짧은 소리야? 이 년이…….
병아리: (구석의 자동차 밧데리를 끌고 와 그 위에 올라선다. 마주 선 둘의 키가 비슷하다) 너는?
순이: 뭐야?
싱크대의 밥주걱을 집어 따귀를 때린다.
병아리: 쌍 년!
순이의 머리채를 잡는다.
순이: 아 야……. 이 년이…….
병아리: 너, 오늘……. 죽어……. 봐!
두 년, 마루에서 뒹군다.
한진희, 튀어나온다.
본다…….
말릴 정황이 아니다.
싸움은 쉽게 끝나고…….
차례로 울면서 나간다.
담배를 무는 한진희…….
개 코, 스티커 사진을 보다가 씨익 웃는다.
사진 속에는 파란 하늘과 구름을 배경으로, 병아리가 정면을 향해 귀여운 얼굴로 활짝 웃고 있고, 그런 병아리를 경멸스럽게 바라보는 개 코의 옆얼굴이 있다…….
개 코: 똑같은 것들이, 내, 기도 안 차서…….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고는) (nar) 그런 대로 귀엽네…….
마루엔 밥주걱만 있다.
씬 42. 옥상/오전
화장은 뒤범벅, 머리칼은 사방으로 삐쭉삐죽…….
그런 순이가 헝클어진 963의 머리칼을 잘라준다.
‘서걱서걱’ 웃통을 벗고 있는 963, 행복하다.
순이: 말 좀 해라……. 무슨 도 닦니? 너, 술 한잔 마실래?
씬 43. 거리/오후.
충무로, 줄지어선 오토바이 대리점들…….
963, 기웃거리며, 훔쳐보듯 오토바이를 구경하며 천천히 지나친다.
가게 주인들, 반길 양 다가오면, 963은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
963, 반들반들한 검정색의 차체에 투박한 근육질을 한, 남성적인 이미지로 당당하게 서있는 오토바이(V-MAX) 앞에 멈춰 선다.
담배를 물고 후까시를 잡고는 한참을 들여다본다.
주인: 뭐, 찾는 거 있어?
963: 헬멧 좀 사려고……. 칼라 들어간 걸로 크기는 좀 작아야 되고…….
씬 44. 집/마루.
한진희의 상상.
오토바이 위에 누워있는 둘……. 순이는 963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신음하고 있고, 963은 굶주린 똥개처럼 혀를 낼름이며 헐떡이고 있다.
순이: (소리. 기겁하며) 정말이야, 내가 미쳤냐? 그런 애송이랑……. .
개 코, 963의 검정 조끼를 입고 수첩을 읽고 있고, 한진희는 낙담한 얼굴로 눈을 내리 깔고 있다.
개 코: (순이에게 다그치듯이) 걔가 일기랍시고 써놨잖아. 너 그 날 들어올 때, 얼굴이 뻘겋게 익은 게, 아무 일 없었다는 건, 기본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야. 누굴 속일라 그래?
한진희: “서로를 탐닉했다?” 계속 읽어봐라.
뭐시기, 선물 보따리를 들고 들어온다.
바닥에 뒹구는 밥주걱을 밟는다.
인사를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안 갖는다.
머쓱하게 웃음 짓다가 슬그머니 자리에 낀다.
개 코: (963의 어눌한 말투를 흉내 내며) “난 아다줄을 끊은 셈이다. 그래서 너무 좋다. 순이는 내가 담배를 피는 동안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뻑간 것 같다. 내 동정을 순이에게 바쳐 아주 자랑스럽다”
순이: 까르르……. 걔 너무 웃긴다. 순진한 척,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깔깔깔…….
개 코: (읽는다) “순이의 처녀막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 무서웠다.”
모두들 (뭐시기도) 기가 차서 웃는다.
순이를 쳐다보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한진희: (그제서야 안심하는 얼굴로) 뭐가 어쩌구 어쨌다고? 정말 한심한 호로새끼 구나…….
대문 밖에서 가족들을 엿보고 있는 963.
손엔 예쁜 헬멧을 들고 있다.
큰소리로 깔깔대는 순이의 소리가 들린다.
개 코: (다시 읽는다) “난, 여자랑 자고 싶다.” 이 새끼 순 희망 사항만 써놨구나. (계속 읽으며) “+월 ++일 날씨 좋음. 정우성이 ‘본투킬’에서 타던 브이맥스를 샀다. 센타 주인이 구백 달라는 거 하나도 안 깎고 다 줬다. 브이맥스는 역시 대단한 놈이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을 태우고 바람을 향해 질 주 했다. 악셀 페달을 최고로 감았다. 점점 모든 사물들이 안으로 휘어져 보인다……. 둥글게 둥글게 타원형이 되더니 모든 게 모아져 한 점으로 향한다……. (낄낄대다가) 아, 정말 브이맥스를 갖고 싶다. 열심히 일하자, 돈 많이 벌자”
순이: 왠지 애가 좀 어설픈 거 같긴 하더라. 그래, 돈 많-이 벌어라, 쪼다 같은 놈아.
뭐시기: (쇼핑백을 내밀며) 백화점 아가씨들이 젤로 좋은 거라고 골라주던데, 보디가드라고 합디다……. 딴 거 보다도 이름이 맘에 들어서……. 나가 돈을 좀, 뭐시기, 특별허니 벌 것도 같고……. 개 코야 요즘 아파트 한 채 얼마 하면 사나? 전기도 잘 들어오고 한강이 쫘악- 내려다보이는 놈으로다…….
순이: 너도 혹시 일기 쓰냐?
씬 45. 아파트 쓰레기장/밤.
시동 걸린 봉고차가 아파트 앞에 헤드라이트를 켠 채 서있다.
현관을 나서는 963, 오토바이에 앉아 시동을 건다. 잘 안 걸린다.
아파트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오토바이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봉고차 문이 열리고 막내와 동생 건달들, 연장을 챙겨 내린다…….
막내: (주위를 훑어보고는) 오늘은 이쪽 라인으로다 정리해 불라니까……. 소리 안 나게끔 조심조심 혀라……. 여자들 건들지 말고…….
헤머 등 연장을 든 막내와 동생들, 한진희의 아파트 건물 옆 동으로 뛰어 들어간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들, 희미하게 들린다.
씬 46. 스피드 코리아/밤.
963, 비틀대며 ‘스피드 코리아’ 사무실로 들어간다. 더듬거리며 불을 켠다.
아가씨랑 옷을 벗고 씨름 중이던 사무실 총무, 963에게 짬뽕 그릇을 집어던진다.
씬 47. 아파트 앞/낮.
코흘리개들, 아파트 앞에 쌓인 가재도구들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을 고른다.
씬 48. 황학동 벼룩시장/오후.
코흘리개 형제, 주워 온 물건들을 사격장 주인에게 내밀고는 코르크 총알 몇 개를 받는다.
인형, 비누곽, 사진액자, 간단한 장식물 등이 표적물들 중 빈칸에 올려진다…….
몇 방 쏘고는 사격장에서 나와 근처 술집으로 가 앵벌이를 한다.
코흘리개 형, 여기저기 술을 마시는 손님들에게 굽신대며 손을 벌린다.
적선을 하는 손님들이 있자 동생도 쪼르르 달려가 손을 내민다.
씬 49. 집/거실.
순이, 한진희, 개 코, 마루에 앉아 고스톱을 친다. 서로가 아무 말이 없다.
한진희: 아이고 허리야……. (손에 든 화투패를 쭈욱 훑다가) 광 팔 놈이 없으니까 죽지도 못하는구나.
개 코: 후까시 이 새끼 요새 왜 안 들어오는 거야? 내일이 그 놈 생일일텐데……. (순이의 화투패를 쓸쩍 훔쳐보다가) 너 혹시 아는 거 없냐?
순이: 나 났어. 네 장 들었어……. (화투패를 까며) 그만 칠래.
순이 일어선다.
개 코, 집밖으로 나가는 순이를 유심히 본다.
씬 50. 길/아침.
한산한 도로…….
순이, 뻥튀기 봉지를 들고 차들 사이를 다닌다.
멀리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웠던 음료수 아줌마가 보이자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간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차량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하나 둘씩 켜지고…….
갓길을 달리는 레카차.
개 코, 서서히 차를 몰며 누군가를 찾고 있다…….
순이의 모습이 차들 사이로 보인다.
일 하는 게 왠지 힘들어 보인다.
개 코, 순이 앞으로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