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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재 박 선생 행장〔近齋朴先生行狀〕
본관은 전라도(全羅道) 나주목(羅州牧) 반남현(潘南縣)이다.
증조는 휘태원(泰遠)으로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모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필리(弼履)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조모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선고는 휘사석(師錫)으로 공주 목판관(公州牧判官)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선비는 기계 유씨(杞溪兪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선생의 휘는 윤원(胤源), 자는 영숙(永叔)이며, 성은 박씨(朴氏)이니, 계통은 신라 시조로부터 나왔다. 반남 선생(潘南先生) 휘상충(尙衷)에 이르러서 문학과 절의로 고려 말에 명성이 있었다. 좌의정 평도공(平度公) 휘은(訔)은 훈업으로 본조(本朝)에서 현달하였다. 평도공의 현손은 사인(舍人) 휘소(紹)로, 사화가 장차 일어날 것임을 알고서 영남에 은둔하여 당시의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야천(冶川) 선생이라 일컬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문강공(文康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문강공의 아들은 휘응천(應川)으로 사재감 정(司宰監正)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손자는 휘동민(東民)이니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분이 동지중추부사 휘환(煥)을 낳으셨고, 이분이 좌부승지로 이조 참판에 추증된 휘세성(世城)을 낳았으니, 이분이 선생의 고조이시다.승지공은 기해예론을 당하여서 윤선도(尹善道)와 권시(權諰)를 배척하였으며, 권시를 돈유하라는 명을 받들지 않았다가 의금부에 내려 심리에 부쳐져서 위태로웠으니, 당시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목사공(牧使公박태원(朴泰遠)) 이하 3대는 대대로 문학과 행실을 이어서 선대의 아름다움을 능히 계승하였다. 유 부인(兪夫人)의 선고는 처사로 이조 참판에 추증된 휘 수기(受基)이며, 대종백(大宗伯예조 판서) 장숙공(章肅公) 휘 명홍(命弘)의 손녀이고, 문간공(文簡公) 농암(農巖) 김 선생(金先生) 휘 창협(昌協)은 그의 외조부이시다. 부인께서는 순수하고 고요하며 온화하고 온유하여 아녀자의 도리를 모두 갖추었으니, 영종(英宗영조) 10년(1734) 갑인 5월 5일 자시(子時)에 한성 사직동(社稷洞)의 집에서 선생을 낳으셨다.
선생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몹시 빼어난 자품을 품부 받아 살결이 맑고 깨끗하였고, 성품이 또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말을 배우자마자 이미 문자를 이해하였다. 아이들과 놀면서 희롱하거나 친압하지 않았고 담소함에 모두 문장을 이루었으며, 비록 완호하는 물건이 앞에 있더라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여겼다. 조비(祖妣) 이 부인(李夫人)께서는 여사(女士)로서 문식이 있어서 항상 선생을 품 안에 두고 입으로 《소학(小學)》과 옛 역사책들을 가르쳐주니, 선생은 이미 그 대의(大義)를 알았다. 부인께서 양잠과 길쌈을 부지런히 하자 선생께서는 〈양잠가(養蠶歌)〉를 지어 부인을 기쁘게 해드렸는데, 곡조가 절로 이루어져 집안사람들이 전송하였다.
스승에게 나아갈 나이에 이르기도 전에 문리가 툭 트여서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종일 글을 읽으면서 심지어는 먹고 자는 것을 잊는 데에 이르렀다. 총명함이 남보다 빼어나서 한 번에 수십 줄을 읽어 내려서 비록 거질이라고 하더라도 입만 열면 곧장 다 읽었으며, 읽은 것은 시간이 지나도 장자(長者)가 물으면 즉시 대답하되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꿩〔華蟲〕을 선물로 주었는데, 선생께서 즉시 종이를 가져다가 쓰기를 “역록연(歷錄然)하게 문채가 있다.”라고 하였다.‘역록(歷錄)’이란 글자는 《시경》 〈진풍(秦風)〉의 주(註)에 보이는데이를 꿩의 무늬에 옮겨와서 사용하였으니, 그 문사(文思)가 월등히 빼어난 것이 이미 이와 같았다.
차츰 자라서는 더욱 고문(古文)을 익혀서 심원하고 고아하여 곧장 작자의 정신과 골수를 꿰뚫었다.《남화서(南華書)》를 읽기를 좋아하여서 혹 천 번에 이르렀는데,정자(程子)가 《장자(莊子)》와 《열자(列子)》를 보지 않았던 뜻에 어긋난다고 하여서 마침내 다시는 읽지 않았다. 예원(藝苑)의 여러 공들이 선생의 저술을 보기를 청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내놓지 않으면서 말씀하기를, “어찌 사자(士子)로서 자신이 지은 문장을 당시의 재상에게 보이는 사람이 있겠는가.창려(昌黎)의 일을 내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항상 도학과 절의와 문장 이 세 가지로써 스스로 기약하여 입에서 끊이지 않았으며 때때로 격앙하여 감격해 분발하였고, 말이 사문(斯文)의 시비(是非)와신임 연간의 충역(忠逆)과《춘추(春秋)》의 대의(大義)로써 예컨대삼학사(三學士)와청음(淸陰)과동계(桐溪)가 수립한 바와 같은 것에 이르면,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혹자가 이를 시험하고자 하여서 그 뜻에 반대하면서 논란하면, 말소리와 얼굴색이 더욱 엄숙하고 의논이 더욱 준엄하여서 장자(長者)라도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북정론(北征論)〉을 지어서 복수하여 설원하려는 의리를 밝혔는데, 효효재(嘐嘐齋) 김용겸(金用謙) 공이 그 지취를 기특하게 여겨서 말씀하기를, “이는 우옹(尤翁송시열(宋時烈))의 글을 본 사람이로다.”라고 하였다. 선생께서는 스스로 “학문을 향하는 마음이 흥기한 것은 오로지 이 문집 덕분이다.”라고 하여서 번번이 우암(尤庵)의 문집을 지니고 다니셨다.
성균관에 나아가 유학할 때에 누차 높은 등급을 차지하여 동류들이 모두 한 수를 양보하였으나, 선생께서는 이욕(利慾)의 장에 발을 적셔서는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다시는 과거에 나아가지 않으셨다.숭절사(崇節祠)의 치제에 집사가 되었을 때에 상께서 친히 임하여 예(禮)를 보셨는데, 내시가 선생을 향하여 묻기를, “동공(董公)은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자, 선생께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시가 끈질기게 물었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았으니, 환관과 말하는 것을 꺼리셨던 것이었다.
늘 과명(科名)이 바르지 않으면 그때마다 과거에 나아가는 것을 멈추었다.신묘년에 국가의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하고서이를 경하하여 과거를 설행하였는데 역시 나아가지 않으셨다. 어떤 사람이 이를 힐책하면서 말하기를, “오랑캐에게 변무하였다고 하여 경과(慶科)에 응하지 않았으니, 만일 과거에 급제하여 입조한다면 장차전대(專對)하는 일을 사양할 것인가?”라고 하자, 선생께서 말하기를 “왕역(往役)은 진실로 감히 사양할 수 없으나, 과거라면 선비 된 자가 마땅히 자기의 지조를 행해야 할 것이니, 어찌 이를 나란히 두고서 동일시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정해년(1767, 영조43)에감해(監解)에 합격하였다. 선생께서는찬성공(贊成公)의 삼등(三登)의 임소에서부터 오느라시강(試講) 기일이 이미 촉박하였는데, 미처조흘(照訖)하지 못하였을 때에 상께서 편전에 납시어 시강(試講)하였다. 당시에 조흘하지 않고서 입격한 사람들이 몹시 많았는데, 모두 미봉하여서 구차하게 면하였으나 유독 선생께서 사실대로 보고하니, 상께서정거(停擧)를 명하였다. 회시(會試)에 이르러 정거가 풀리자 선생께서는 말하기를, “조흘하지 않았던 것은 비록 잘못을 인습한 것이었지만 끝내 마음에 편안하지 않았으니, 어찌 감히 처벌에서 풀려났다고 하여 무릅쓰고 나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계사년(1773, 영조49)에 또발해(發解)하였다. 당시에 과장이 혼란스럽다고 하여 조정에서 포졸들로 하여금 복시(覆試)의 시장(試場)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선생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옛사람 중에는 과장의 가시울타리를 보고서 과거를 폐한 사람이 있었는데, 하물며 포교(捕校)가 감시함에 있어서이겠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시권(試券)을 찢고서 돌아왔다.
임진년(1772, 영조48)에 당시 조정의 상황이 몹시 위태로운 것을 보고는 경사에 거처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마침 미호(渼湖) 김 선생(金先生김원행(金元行))을 장례 지내고서, 이어서 광릉(光陵)의 강가에서 세내어 살면서 독서하다가 오래 지난 후에 돌아오셨다.찬성공께서 별세하신 때에 이르러마침내 공령(功令)을 폐하고는 말하기를, “내가 지금 40세의 나이로 영달을 구한다면, 이는맹자(孟子)의 부동심(不動心)과 다르게 되는 것이다. 또 어버이께서 계시지 않으니 누구를 영화롭게 하겠는가. 하물며 과거보는 일은 재주를 자랑하여 써주기를 구하는 데에 가까우니, 선비로서 뜻이 있다면 무릅쓰고 나아가지 않는 것이 바로 첫 번째 의리이다.”라고 하였다.
갑진년(1784, 정조8)에 조정에서 재상들에게 각각 계방(桂坊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의망할만한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순암(醇庵) 오재순(吳載純) 공이 선생과 제헌(霽軒) 심정진(沈定鎭) 공을 천거하여 명에 응하였다. 정미년(1787, 정조11) 봄에 장차가순궁(嘉順宮)의 가례(嘉禮)를 행하려고 할 적에 상께서 김종수(金鍾秀) 공에게 선생에 대해 물으셨는데,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박(朴) 아무개는 경학으로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몹시 가난하여 거처하는 곳이 바람과 비도 가릴 수 없으며, 항상 오윤상(吳允常)과 강마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자년(1792, 정조16)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는 글을 올려 체직되었다. 어떤 사람이 “어찌하여 벼슬하지 않는가?”라고 묻자, 선생께서는 말하기를 “병이 있어 실로 억지로 힘쓰기가 어렵고, 또 아우와 조카가 봉급을 나누어주기에 굶어 죽는 것을 면할 수 있으니 가난을 면하고자 벼슬해야 할 의리가 없다. 감히 벼슬하지 않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계축년(1793, 정조17)에 좌상(左相) 김이소(金履素) 공이 또 선생을 천거하였다. 이해 가을에 우상(右相) 김희(金憙)가 차자를 올려 선생과 김재익(金載翼) 등 세 사람을 천거하되, ‘학문을 독실하게 하고 예(禮)를 좋아하여 법도로써 기준을 삼는다’는 것으로써 선생을 일컬어서 경연관을 맡길 것을 청하였다. 상께서 “초선(抄選)은 으레 빈청에서 회천(會薦)하거늘 차자를 올려 직접 청하였으니 이는 격식에 어긋난 것이다.”라고 하여서 차본(箚本)을 도로 내려 보냈다. 재상 김공이 마침내 글을 올려서 관례에 어두웠음을 자송(自訟)하고 또 말하기를 “천거한 사람들은 모두 한 시대의 명망을 지닌 사람들이니, 조정에서 마땅히 특례로 거두어 등용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당시에 이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일이 끝내 행해지지 않았다.
병진년(1796, 정조20)에 우상(右相) 윤시동(尹蓍東)이 선생의 학술이유선(儒選)에 실로 부합된다고 하여 힘껏 천거하였는데, 상께서 말하기를“고인(古人)이 두광국(竇廣國)을 재상으로 삼지 않은 것을 사사로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찌 난처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정사년(1797, 정조21) 김종수(金鍾秀) 공이원자궁(元子宮)이 장차 입학할 것이라 하여서또 선생에게 맡겨서 보도(輔導)하게 하도록 청하였으나, 상께서 이도 아울러서 듣지 않으셨다.
무오년(1798, 정조22) 봄에 강학청(講學廳)을 마련하여 요속(僚屬)을 선발하였는데, 우상(右相) 이병모(李秉模)가 선생을 천거하면서 아울러 7명을 거론하고 말하기를 “혹은 학문과 행실로서, 혹은 지조와 식견으로서 실로 이 직임에 부합되니, 청컨대 군함(軍銜)을 붙여서 이들로 하여금 모시고서 강학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께서 이를 윤허하고 원자에게 문안하게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병으로 사양하였다. 상께서 하교하여 나오기를 독촉하면서 말씀하기를 “이는 계방(桂坊)의 일례에 불과하니 사사로운 의리에 있어서도 나아가기 어려운 단서가 없다. 또 미관말직의 음관(蔭官)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처분을 내리고자 하나 우선 그렇게 하지 않으니, 속히 출사하라.”라고 하였다. 선생께서는 또 실제로 병이 들었다고 대답하시고는 끝내 명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상께서 반드시 초치하고야 말고자 하시어 거듭 문책하는 유지를 내리심에 그 말씀한 내용이 매우 엄하여서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없는 바가 있었다. 선생께서는 두렵고 황공하여서 사저에서 석고대죄 하고서 죄가 내리기를 기다린 것이 한 달여였는데, 성상의 노여움이 점차 격해져서 화(禍)를 장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자식과 조카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라서 심지어 땅에 엎드려 울부짖으면서 한 번 행차를 하여 가족을 살려줄 것을 원하였으나, 선생께서는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고서 스스로 반드시 죽을 것이라 여기셨다.
오랜 후에 상께서 선생이 뜻을 굳게 지키고 있음을 들으시고는 비로소 풀어서 용서하라는 하교를 내리셨다. 선생께서는 감격해 울면서 말하기를 “천신(賤臣)이 명을 어기고 불손한 죄에 대한 주벌을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 도리어 특별한 은혜를 입게 되어 죄주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 뒤이어 기리고 가상하게 여겨주셨습니다. 예로부터 신하로서 군부(君父)에게서 이와 같은 은혜를 얻은 사람이 다시 몇 명이나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몸이 죽기 전에 어떻게 은혜에 보답하기를 도모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직명이 아직 체직되지 않았다고 하여 허물을 이끌어서 자책하여서 집 밖을 나가지 않았고, 종유하는 이들이 강학을 청하면 사양하셨다. 이때에 요속(僚屬)들에게 나누어 하사한 것이 있었는데, 선생께서도 다른 예(例)에 의거하여 하사받으셨으나 또한 받지 않으셨으니, 곧 현직으로 자처하고자 하지 않으신 것이었다. 상께서 끝내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아시고는 특명으로 체직을 허락하였다.
선생은 평소 몸이 야위어서 병을 잘 앓으셨는데, 기미년(1799, 정조23) 정월에 이르러 전염병이 크게 유행할 적에 선생께서도 이 병에 걸려서 17일 자시(子時)에 취현방(聚賢坊) 정동(貞洞)의 집에서 고종명을 하였다. 이틀 전에 곁에 있는 이에게 말하기를“이불을 걷고서 나의 손과 발을 보아라.”라고 하였고, 또 “옮겨 받들라.”라고 하였으니, 정침(正寢)으로 옮겨 받들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선생께서는 이전 해에 문득강절(康節)이 66세에 지은 시에 “나로 하여금 10년을 물리게 한다면 조금이나마 일을 이룰 수 있겠건만, 천지 사이에 해가 다시 중천에 오는 이치가 없음에 어이 하랴.”라는 구절을 읊으며 말씀하기를 “강절과 같은 조예(造詣)로도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우리 유자(儒者)의 사업이 참으로 무궁하다.”라고 하였는데, 향년이 마침내 66세에 그치셨으니, 평소 하신 말씀이 바로 참언이었던 것이다. 조야(朝野)에서 슬퍼하고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사우(士友)들은 서로 조문하면서 말하기를 “사문(斯文)의 동량이 꺾였다.”라고 하였다. 장지가 거듭 미뤄져서 5월 9일에 비로소 과천현(果川縣) 내면(內面) 운만산(雲滿山) 후동(後洞) 인좌(寅坐)의 언덕에 하관하였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몹시 고상하여서 밝고 순수하며 영명하고 지혜로웠다. 얼굴빛은 장엄하고 말은 엄격하였으며 기운은 온화하고 마음은 평탄하였고, 올곧으면서도 각박하지 않았으며 엄하면서도 과격하지 않았다. 마음이 깨끗하여 겉과 속이 맑아서 마치빙호추월(氷壺秋月)과도 같았다. 어려서부터 도(道)에 가까워서 책을 연구하는 이외에 다른 일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장성하자 경사(經史)에 깊고 넓게 통달하였고 몸을 단속하기를 청고(淸苦)하게 하여서 행동하기를 반드시 예(禮)로써 하였고, 의(義)에 맞는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았으며, 지키는 바가 있으면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라 할지라도 이를 빼앗을 수가 없었다.부정함과 올바름을 분별할 때에는 분명하게 갈라놓기를 마치 예리한 칼로 두 동강을 내듯이 하였다. 외물로 마음에 구애받지 않아서, 늘 한 점의 티끌이라도 붙지 않게 하고자 하여 우뚝하게 큰 뜻을 지니고 있었다. 항상 개연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부인이 되지 않고 남자가 되어서 의관(衣冠)을 갖춘 나라에서 태어나야천(冶川)의 시(詩)와 예(禮)의 가학을 이어 받았으니, 내 어찌 스스로를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은 성인(聖人)과 똑같으니, 사람으로서 본성을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이를 온전히 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마침내 성리학에 온전히 뜻을 두어서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과사자서(四子書)를 가져다 읽으면서 밤낮없이 쉬지 않았고,낙건(洛建)의 여러 책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을 완색하여 체인(體認)하였다. 성인(聖人)을 독실하게 믿어서 ‘한 터럭만큼이라도 이르지 못하면 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자와 맹자 및 정백자(程伯子정호(程顥))의 소상(小像)을 서실에 봉안하고는 초하루와 보름에 공경히 바라보고 절하여 앙모하는 뜻을 표현하였다. 석담(石潭이이(李珥))과 화양(華陽송시열(宋時烈)) 두 선생을 흠모하여,광세지감이 매우 깊었다.
총명하고 박식함을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성명(性命)의 깊은 뜻과 전주(箋註)가 분분히 뒤섞인 부분에 있어서, 손을 대면 곧 이치가 마음과 계합되어 융회되어서 크게는 육합(六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도체(道體)와 작게는 만수(萬殊)로 흩어져 있는 묘용(妙用)을 명철하게 꿰뚫지 않음이 없어서 융회 관통하여극이 있는 데로 돌아감에,자득하여 밝힌 것이 대체로 모두 통달하여 두루 온전하였다.
격물(格物)과 물격(物格)을 논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물격은 이미 사물이 극에 이른 것인데, 격물을 ‘내가 사물에 이른 것’이라는 뜻이라고 하면 두 ‘격(格)’ 자에 차이가 있게 된다. 상하의 ‘격(格)’ 자는 마땅히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니, 내가 생각건대 격물은 사물로 하여금 이르게 하는 것이고, 물격은 사물이 이른 것이다. 두 ‘격(格)’ 자가 혹은 ‘물(物)’ 자의 앞에 있기도 하고 혹은 ‘물(物)’ 자의 뒤에 있기도 하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와 사물에게 있어서의 구분이 있는 것이지만 기실 차이가 없다. 또 격물을 ‘사(使)’ 자의 뜻으로 본다면 더욱 명백할 것이다. 《대학혹문(大學或問)》에 격물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사람들 가운데 알지 못하는 이가 없으나, 혹 그 정미하고 거칠고 가려지고 드러난 것으로 하여금 모두 다하여 남김이 없게 하지 못한다.〔人莫不知而或不能使其精粗隱顯窮極無餘〕’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주자(朱子)가 여기에서 이미 ‘사(使)’ 자를 쓴 것이다.김밀암(金密庵)이 격물을 ‘심(心)이 사물에 이른 것’이라고 하고 물격을 ‘사물이 심에 이른 것’이라고 한 것은정우복(鄭愚伏)의 ‘객을 청하여 객이 온 것이다.’라는 설과 비슷하니, 이는 따를 수 없다.”
명덕(明德)을 논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심(心)을 일컬어 명덕(明德)이라고 하는 것은 이(理)를 일컬어 태극(太極)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理)는 지극하여 더할 것이 없으므로 태극이라고 한 것이고, 심(心)은 신명(神明)하되 하늘에서 얻은 것이므로 명덕이라고 한 것이다. 이미 이(理)의 지극함을 태극이라고 하였고 보면 태극을 이(理)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미 심(心)의 신명함을 명덕이라고 하였고 보면 명덕을 심(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지선(至善)은 태극의 또 다른 명칭이다.’ 하였으니,나 또한 ‘명덕은 심(心)의 또 다른 명칭이다.’라고 하겠다. 명덕은 심(心)이고 심(心)은 명덕이니, 어찌 두 가지가 있겠는가. 명덕이란 것은 인심(人心)의 신명함의 묘(妙)인데 그것을 명명할 수가 없으므로 명덕으로써 지목한 것이니, 이것이 명덕이라는 명칭이 수립된 까닭이다.
격물,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은 모두 명명덕(明明德)의 일에 속하는데, 격물은 심(心)으로써 그것에 이르는 것이고, 치지는 심(心)의 지식을 지극히 하는 것이며, 성의는 심(心)의 발하는 바를 성실하게 하는 것이고, 정심은 비로소 심(心)을 곧장 말한 것이며, 수신은 몸을 주재하는 것이 바로 심(心)이다. 이 다섯 가지가 모두 심(心)을 벗어나지 않으니, 명덕이 심(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또 성(性) 역시 밝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심(心)은 화(火)에 배속되니 바로 광명한 물건으로, ‘명(明)’이라는 글자는 심(心)에 가장 적합하다. 그러므로 주자께서 명덕(明德)에 있어서 이와 같이 간파한 것이다.
혹자는 ‘「허령불매(虛靈不昧)」 네 글자가 이미 충분히 명덕의 뜻을 설명하였다.’라고 한 것이 진북계(陳北溪)의 말이지주자의 설이 아니라고 하여, 이를 고집하여 명덕이 전적으로 심(心)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주자와 진씨(陳氏)를 나눌 것 없이 오직 그 말이 이치에 타당한지를 볼 뿐이다.”
심(心)과 기질(氣質)을 논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심(心)은 기(氣)의 정상(精爽)이니정상은 심(心)의 전체여서 지각의 체용(體用)이 정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바, 정상이 바로담일(湛一)이다. 그러니 어찌 정상 위에 또 담일이 있어서 이를 심(心)의 본체로 여긴단 말인가. 혹자가 ‘담일은 본연의 기(氣)이니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이 서로 같고, 정상은 혈기에서 나온 것이니 성인과 범인이 서로 다르다.’라고 한 것은 분석은 비록 세밀하지만 근원에서 두 갈래를 만든 것이다. 심(心)은 하나일 뿐이니, 어찌 성인과 범인이 똑같이 지닌 심(心) 외에 또 성인과 범인 간에 서로 다른 심(心)이 있겠는가.
심(心)이 본래 선한 까닭은 기(氣)의 정상(精爽) 때문인데, 지금 ‘정상에는 맑고 혼탁하며 순수하고 잡박한 차이가 있다.’라고 한다면 이는 심(心)을 기질로 삼아서 심(心)에 선악이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옳겠는가. 심체(心體)의 허령(虛靈)은 바로 기(氣)의 정상으로, 정상은 바로 담일(湛一)이다. 그런데 지금 ‘정상은 담일이 아니고 담일이 바로 본체이다.’라고 한다면 허령이 심(心)의 본체가 될 수 없어서 허령 위에 또 담일이 있게 되니, 머리 위에 머리를 얹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최초의 담일(湛一)의 기(氣)가 모여서 심(心)이 되면 이것이 바로 이른바 정상(精爽)이니, 정상은 혈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정상에는 맑고 혼탁하며 순수하고 잡박한 차이가 없으므로,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심(心)이 같은 것이다. 이발(已發)하여 불선(不善)에 들어간 것으로 말하면 이는 기질이 끼어든 뒤의 심(心)이니, 심의 본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상은 단지 담일일 뿐이니, 어찌 혼탁하고 잡박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정상의 명칭은 본래 심(心)의 명목이니, 한마디 말로 단정한다면 정상은 본래 신명(神明)인바, 신명과 담일이 어찌 두 가지이겠는가. 장자(張子장재(張載))의 이른바 ‘기(氣)의 근본’이라는 것은 바로 주자의 이른바 ‘기(氣)의 정상’이라는 것이니, 비록 기(氣)를 논하고 심(心)을 논한 차이가 있지만 실제로는 같은 기(氣)인 것이다.
기질은 기(氣)의 근본이 아니고 오직 심(心)만이 기(氣)의 근본이기 때문에,신명하여 온갖 이(理)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지금 정상(精爽)을 ‘담일이 아니라 혈기 중의 정상이다.’라고 한다면 이른바 ‘담일’은 과연 어느 곳에 붙는단 말인가. 이를 구하고자 하더라도 찾을 길이 없게 된다. 인심(人心)을 형용하는 곳에서 정상을 가지고 말하면 혹 정상에 맑고 혼탁함이 있다고 오인하고, 허령(虛靈)을 가지고 말하면 혹 허령에 우열이 있다고 오인하여서 장차 심(心)과 기질로 하여금 구분이 없게 만든다. 그러니 어찌 담일을 가지고 심(心)을 말하여서 그 본체를 밝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철로 된 거울의 정추(精粗)의 비유는 그 말이 위태롭도다. 거친 철로 만든 거울은 비록 이를 힘써 연마할지라도 필시 정미한 철로 만든 거울만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범인(凡人)의 마음은 비록 극진히 다스리더라도 필시 성인(聖人)의 마음만 못하게 될 것이니, 범인이 성인이 될 길이 없게 될 것이다.율곡(栗谷)이 말하기를, ‘마음이 텅 비어 밝아서 기질을 변화시킨다.’라고 하였으니,기질의 변화는 전적으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만약 인심(人心)에 본래 악함이 있다면 텅 비어 밝을 수 없을 것이니, 어떻게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을 논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범과 이리의 인(仁)과 벌과 개미의 의(義)를 주자(朱子)가 ‘한 점의 밝음〔一點明〕’이라고 하였으니,‘밝음〔明〕’이라는 것은 이(理)의 같음이고, ‘한 점〔一點〕’이라는 것은 기(氣)의 다름이다. 범은 비단 인(仁)을 지녔을 뿐 아니라 의(義)를 지녔기도 하니,유곤(劉昆)이 홍농(弘農)의 태수가 되었을 때에 범이 새끼를 업고서 황하를 건너갔는바, 선한 사람을 피한 것은 의(義)이다.개미는 비단 의(義)를 지녔을 뿐 아니라 지(智)를 지녔기도 하니, 비가 올 것을 알고서 개밋둑을 쌓는 것은 지(智)이다. 개 또한 인(仁)과 의(義)를 지녔으니, 자기 새끼를 사랑하는 것은 인(仁)이고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은 의(義)이다. 그러니 어찌 다만 한 점의 밝음일 뿐이겠는가. 예컨대양이 꿇어앉아 젖을 먹는 것은 예(禮)이고,까마귀가 자라서 부모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는 것은 인(仁)이며,새가 기미를 보고 날아가는 것은 지(智)이다. 이는 진실로 모두 단지 그 일단만을 드러낸 것으로, 이 또한하나를 차지함에 넷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기러기가 두 암컷을 갖지 않음은 의(義)이고, 봄에는 반드시 북쪽으로 날아가고 가을에는 반드시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은 신(信)이며, 줄지어 가는 것은 예(禮)이니, 이것은 이미 그 셋을 보인 것이다.
그 발현한 것으로 말하자면 온전하지 않고, 받은 것을 말하자면 능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인(仁)은 넷을 포함하니, 어찌 인(仁)을 지니고서 의(義)ㆍ예(禮)ㆍ지(智)가 없는 경우가 있겠는가. 또한 어찌 인(仁)이 없으면서 의(義)ㆍ예(禮)ㆍ지(智)를 지닌 경우가 있겠는가. 물성(物性)에 오상(五常)이 없다면 사람의 덕이 비록 선할지라도 어찌 물건을 감동시키는 이치가 있겠는가.닭에게 인(仁)이 없다면 동소남(董邵南)의 행실이 어찌 닭으로 하여금 먹이를 먹여주도록 할 수 있었겠는가.고양이에게 의(義)가 없다면 북평왕(北平王)의 어짊이 어찌 고양이로 하여금 젖을 먹이게 할 수 있었겠는가.뱀과 참새에게 예(禮)가 없다면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옥환과 구슬을 물어오게 할 수 있었겠는가.돼지와 물고기에게 신(信)이 없다면 어찌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할 수 있었겠는가.
성(性)은 단지 하나의 선(善)이니, 일의 선한 것은 모두 오상(五常)에 관계된다. 지금 소가 밭을 갈고 말이 달리는 것은 바로 선의 일이지 악의 일이 아니니, 그렇다면 소가 밭을 갈고 말이 달리는 것은 곧 사람의 인(仁)과 의(義)이니, 여기에서 사람과 물건에 있어서 동일하게 성(性)이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성(性)은 근원이 하나인데 도(道)는 분파가 있으니, 그렇다면 성(性)은 같은데 도(道)는 같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도(道) 역시 같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도(道)는 이 성(性)의 자연을 따른 것이어서, 성(性)이 하나이면 도(道) 역시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性)과 도(道)가 같다.’라고 하는 것이다.성(性)과 도(道)가 이미 같은데, 물건이 사람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기(氣)에는 변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다른 기(氣)로서 맑고 혼탁하며 순수하고 잡박한 구분이며, 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사람과 물건의 다른 기(氣)로써 바르고 치우치며 통하고 막혀 있는 구별이다.혼탁하고 잡박한 것은 맑고 순수하게 할 수 있으나, 치우치고 막혀 있는 것은 바르고 통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물건은 끝내 사람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성인(聖人)이 소와 말에게 굴레를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밭을 갈고 달릴 수 있게 한 것은 또한 성(性)의 자연을 인한 것일 뿐이니, 바로 교(敎)가 성(性)과 도(道)의 안에 있는 것이다. 녹문(鹿門임성주(任聖周))이 ‘명덕은 사람과 물건이 같다고 할 수 없다. 천명지성(天命之性)을 사람과 물건이 같다고 한다면 심(心)은 작고 성(性)은 큰 것이 되니, 심(心)이 어떻게 성(性)을 담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의심할 만하다. 심(心)과 성(性)이 과연 형체가 있는 물건이라서 형체의 크고 작음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선생께서는 강론하시는 때에들어오는 쪽을 주인으로 여겨이기기를 구하거나, 기세를 타고서 이를 남에게 부린 적이 없었다. 항상 말씀하기를, “의리는 천하의 공공된 것이니, 어찌 스스로를 옳다 하여 남을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자기와 의견이 같은 것을 좋아하고 다른 것을 미워하는 것은 사사로운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종일 담론해 분변하고 누차 편지를 왕복하더라도 한결같이 공평하여 온화한 기운을 잃지 않으셨다. 만일 한 치의 훌륭한 점이라도 남에게 있으면 번번이 자신의 뜻을 굽히고서 따랐고, 혹 각자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여서 둘이 서로 내려놓지 않더라도 또한 조금도 마음에 거리끼지 않아서 교유하는 정이 쇠하지 않았다.
겸하여 예학(禮學)을 익혀서 “예(禮)는사덕(四德)중에 하나로 그 쓰임이 몹시 크다.”라고 하고서 이에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연구하고 같고 다름을 고증하여서 고금에 따른 적합함을 참작하고 상례(常禮)와 변례(變禮)의 절목을 궁구하였으니, 변별해 분석하여 절충한 것이 가지런히 체재가 있었다. 사람들이 의례(疑禮)와 변례(變禮)를 만나면 반드시 선생에게 나아가 질정하였다.
항상 “세교(世敎)가 쇠함에 상례(喪禮)가 먼저 무너졌으니, 조부모와 백부 및 백모, 숙부 및 숙모를 위해 상복을 입는 중에 혼인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극에 달하였다.”라고 탄식하였다. 혹자가 이를 논란하여 말하기를, “때를 놓치기가 어렵고, 또 혼인할 집에서 들어주지 않으니 어찌합니까?”라고 하자, 선생께서 말하기를 “이는 예방(禮防)이 무너진 것이니, 이와 같은 자와는 또한 혼인하기를 원치 않는다. 범사에 있어서 시세에 구애받는다면 예법이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이 옳겠는가.”라고 하였다. 세속에서 처음 상(喪)이 났을 때에 밥 세 그릇을 진설하고는 이를 저승사자를 위한 밥이라고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이는 신라와 고려 때에 불가를 높이던 습속에서 나온 것으로, 올바르게 죽는 예(禮)가 아니다.”라고 하여, 유계(遺戒)를 남겨서 이를 없앴다. 또한 부녀자가 죽으려 할 때에 모시는 여종이 불경을 외는 것은 올바르게 죽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또한 이를 일절 금하였다.
또 부모가 죽으면 머리를 풀어헤치는 것이 예(禮)가 아니라고 하여서 말하기를, “《가례(家禮)》는 《서의(書儀)》의 잘못을 인습한 것으로,이는 주자(朱子)의 본의가 아니다. 그러나 행해진 지가 오래되어 풍속을 이루어서 상례(喪禮)의 큰 절목이 되었으니, 만일 다스려 바로잡고자 한다면 반드시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투합하여 금령(禁令)을 드러내어서 설행한 뒤에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아래에 있는 사람이 제멋대로 바꾼다면 이는 망녕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예(禮)를 좋아하는 것은 진실로 높이 여길만한 것이지만, 번잡한 글과 말단의 절목에 한갓 얽매여서 본원에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삼백 예의(禮儀)와 삼천 위의(威儀)를 융회하여 관통하더라도 또한 실제로 터득하기를 기대하기 어려워서문(文)이 질(質)을 이기는 폐단을 열어놓기가 쉽게 될 것이다. 또 내가 다른 사람과 문답할 때에 보면 예(禮)에 대한 내용이 경(經)보다 많다. 경의(經義)라고 하더라도 내가 실로 물어오면 응해줄 수가 없으나, 또한 여기에서 세상에 제대로 독서를 하는 사람이 없음을 징험할 수 있다.”라고 하여, 배우는 이들에게 문구에 얽매이는 것을 경계하여서 경(經)을 먼저 익히고 예(禮)를 뒤에 익히도록 하였다.
항상 경세제민에 마음을 두어서 치도(治道)를 논할 때에 반드시당우(唐虞)와 삼대(三代)로써 기약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과 인재를 등용하는 법과 산업을 제정하고 민생을 풍족하게 하는 규모와 체제에 있어서 모두 연구하여 논하여 저술하였다. 반드시 교화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현능한 사람을 임명하고 아첨하는 이를 멀리하며, 사치를 금하고 쓸데없는 소비를 제거하며, 부화함을 없애고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높이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으며, 그 요점은 또 임금의 마음에 근본을 두어서, “인군의 마음이 바르면 천하가 바르게 된다.”라고 하였다.
인재가 옛날과 같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시며 말하기를, “이는 과거(科擧)가 이를 해쳤기 때문이니, 심술(心術)을 무너뜨리고 세교(世敎)를 해치는지라, 마땅히 개혁해야 함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자(士子)가 과거 시험에 응하는 것은 마치 처자가 몸을 드러내는 것과 같으니, 몹시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다. 만일 자중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과거에 나아가지 않는 것을 올바른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삼대(三代) 이후로빈흥(賓興)의 제도가 없어서 과목(科目)으로 인재를 취하니 이것이 아니면 벼슬에 나아갈 길이 없다. 집안을 맡은 책임과 부형(父兄)의 기대 등 관계된 바가 몹시 많아서 비록 자유로울 수 없지만, 뜻을 세움이 견고하다면 어찌 학문하는 방도가 없겠는가. 이는 당사자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만일 배운 바가 없다면 장차 어디에서 손을 빌려서 임금을 섬기겠는가. 벼슬에 나아가려는 자는 더욱 배우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말하기를, “주자(朱子)의 공거(貢擧)에 대한 의론은 끝내정자(程子)의 학교에 대한 차자만 못할 듯하다.”라고 하였다.
높은 관리가 유화(儒化)를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늘 탄식하면서 말하기를,“학교는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인륜이 밝지 않으면 백성들이 예의(禮義)를 알지 못하고, 백성들이 예의를 알지 못하면 금수와 같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이를 걱정하여서 학교를 만들어 이들을 가르쳐서 인륜을 밝힌 것이다. 인륜이 밝지 않으면 백성들을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반드시 사람의 도리로써 백성들을 이끌어서윗사람을 친히 여기고 어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알게 하고, 훌륭한 인재와 백성들은 마땅히 시서(詩書)와육예(六藝)로 가르쳐서 국가를 위해 쓰이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모두 딱 들어맞고 절실하면서도 평탄하고 실질적인 것이었다.
치도(治道)의 요체에 통달하고 시무를 알았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에 늘 마음을 두어서, 모든 민생의 질고(疾苦)와 홍수와 가뭄, 재해와 역병에 관련된 것들을 마치 자신의 몸이 아픈 것처럼 근심하였으니, 그 인애(仁愛)가 넓음이 또 이와 같았다. 그러나 만약 학문에 근본을 두지 않고 또 능히 때를 헤아리고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여서 사업과 공적으로 자처하는 사람이 있으면 몹시 그릇되게 여겨서 “이와 같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면 망녕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선생께서 관직을 사양하고 자신의 뜻을 지키면서 일생동안준양시회(遵養時晦)하는 것을 보고 혹 사무(事務)를 익히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선생의 흉중의 경륜(經綸)이 범위가 성대하여서 이를 내어서 시행함이 있었다면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비호하며 세상을 도야하고 풍속을 이루었을 것이니, 애당초 멀리 떠나가서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 아님을 실로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말씀하기를 “염락(濂洛)의 현인들이 모두 왕을 보좌할 재주를 지닌 인물들이었고 또 경세제민을 즐겨 말한 것이 많지만, 그 말이 흩어져서 나와서 책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직유반계(柳磻溪)가 저술한 《수록(隨錄)》이 예악(禮樂)과 형정(刑政), 관방(官方)과 법제(法制)에 있어서 세세한 절목들이 모두 베풀어져 찬연하게 한 왕대(王代)의 법을 이루었으니, 실로 《주례(周禮)》의 뒤를 잇는다. 지금 세상에서 이를 시행하여서 세상을 다스려 성세를 이루도록 보좌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라고 하고,저암(著庵) 유한준(兪漢雋) 공에게 입전(立傳)하기를 권하였다.
선생께서는 늘 왕실에 마음을 두고 세도(世道)를 근심하여서 선정(善政)을 들으면 반드시 흠송하고 감축하였으며, 혹 정사에 과실이 있으면 근심하고 탄식하면서 잠들지 못하여 왕왕 눈물을 흘리는 데에 이르렀다. 늘정묘(正廟) 병신년 3월 10일의 전교를 읊으면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의 성학(聖學)의 고명함이 천고에 우뚝하여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의리에 엄격하신 것이 이와 같으니, 천신(賤臣)인 이 사람이 이를 금석(金石)처럼 믿는다.”라고 하였다. 오인(午人남인(南人))이 재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참담하여 즐거워하지 않기를 마치 천진교(天津橋)의 두견새 소리를 들은 것처럼 하였는데,임자년 이후에 이르러모두 선생의 기미를 아는 명철함을 추숭하였다.
선생께서는 사승(師承)을 말미암지 않고 스스로 학문을 할 줄을 알았으니, 명리(名理)를 넓혀 밝힌 것이 모두 홀로 터득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자신하지 않으셔서 동시대의 현자들과 두루 교유하여 의심나는 바를 질정하셨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선생과 밀암(密菴) 김지행(金砥行) 공과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공과 같은 분들을 존경하여서 섬겼는데, 미호에 있어서는 더욱 독실하게 믿어서 스승으로 삼아 의지하였다. 삼산재(三山齋) 김이안(金履安) 공과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 공과 영재(寧齋) 오윤상(吳允常) 공과 같은 분들과는 늘절절시시(切切偲偲)하였다.남에게서 취하여 선(善)을 행하는 것이 진실한 정성에서 나와, 마치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먹고 마시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므로 제현(諸賢)들이 모두 흠모하며 중시하면서 사문(斯文)이 의탁할 곳으로 삼아서진수(進修)의 차제를 기꺼이 고하여 주었으니, 그 연마하고 훈도하여서 덕을 이루는 데에 이른 것이 또 이와 같았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 이(理)를 궁구하여 선(善)을 밝히고 몸에 돌이켜서 실천하며, 경(敬)을 지켜서 내면을 기르고 의(義)를 체인하여 외면을 단속하였다. 일찍이 말씀하기를,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와 역행(力行) 이 세 가지를 하나라도 빠뜨려서는 안 되며, 경(敬)은 또 온갖 선(善)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책에 있어서는 읽지 않는 바가 없었으되, 육경(六經)에 더욱 심취하여 순환하여 익숙히 읽고 읽으면 반드시 외워서 마치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매번 책상에 임하여 책을 펼칠 때마다 손을 씻고 단정히 모으고서 어깨와 등을 움직이지 않고 마음과 눈이 모두 이르러서 정신과 뜻이 무젖어 곧장 책과 하나가 되었으며, 성음이 마치 금석에서 나온 것과 같아서 듣는 이들이소호(韶頀)와도 같다고 하였다.
경전의 뜻에 있어서 신묘하게 계합되고 정신으로 이해하여서 억지로 탐구하지 않고서도 곧장 관건을 뽑아내어 툭 트여서 창달하였다. 견해가 뛰어나서 막히고 구애되는 병통이 없었고, 또 반드시 주자(朱子)의 설을 근거로 삼아서, 견강부회하고 천착하여서 직접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그 변별하고 풀이한 것이 대체로 모두 편안히 이치가 순하여서 정미하고 통투하면서도 명백하여 더이상 남은 여지가 없었다. 질환으로 인하여 입언(立言)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성경(聖經)의 뜻을 발휘하여서 후대의 사람들을 계도하고 도우려던 뜻이 끝마쳐지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편지로 문답한 것을 보면 왕왕 이전의 사람들이 미처 궁구하지 못했던 점이 있으니, 유편(遺編)을 보면 알 수 있다.
배우는 이들을 지도함에 있어서도, 마음을 스승으로 삼아서 홀로 도달한 것을 미루어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세상의 유학자들이하학(下學)에 힘쓰지 않고 단번에 상달(上達)을 말하는 것을 항상 병통으로 여기셨으므로, 견해가 이르지 못하는 이치를 가지고서 말하지 않고, 먼저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소학(小學)》을 가르쳐서 반드시 근본을 돈독하게 하고 실질에 힘쓰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또〈권독소학문(勸讀小學文)〉을 지어서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히셨다.
학문에 뜻을 두고서부터 전혀 쓸데없는 편찬이나 저술을 하지 않으셨고, 혹 저술하는 바가 있으면 단지 글과 글자가 이치에 순하기만을 구하였으므로, 초년과 만년에 저술하신 바가 마치 두 손에서 나온 듯 달랐다. 늘 말씀하기를, “글은 좋게 하고자 하면 내용이 이미 공허해져서 도(道)와의 거리가 멀 뿐만이 아니게 된다. 주자(朱子)께서 잡서(雜書)를 보아서 정력을 분산시키는 것을 경계하셨으니, 하물며 무용한 문장을 지어서 문장을 꾸미는 데에 마음을 쏟는다면 그 몸과 마음을 해치는 것이 응당 어떠하겠는가. 옛날에는 문(文)과 도(道)가 하나였는데, 후세에는 문과 도가 둘이 되어서 부화함이 성행하고 본질이 멸망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도학(道學)은 이(理)이니 이(理)는 줄어드는 때가 없고, 문장은 기(氣)이니 기(氣)는 쇠하는 때가 있다. 만일 지금 사람이 옛사람의 학문을 한다면 그래도 거의 미칠 수 있지만, 옛사람의 글을 짓는다면 결단코 성취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시는 문장을 지을 적에 아름답게 꾸미고 옛것을 모방하지 않으셨고, 어렸을 때에 저술한 글을 모두 취하여 불태우면서 말씀하기를, “말이 들뜨고 과장되니, 남겨서 자손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임종에 맏아들이 문고(文稿)를 끝내 어떻게 할 것인지 여쭙자, 선생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이 어찌 아까워할만한 것이겠느냐.”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높고 넓은 견식으로 본말과 경중의 구별을 살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여기에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문집이 있어서 세상에 전해지지만제경(諸經)의 차략(箚畧)은 모두 미처 다시 정리하지 못하였으니, 만약 “고묘한 도(道)와 정미한 의(義)가 발한 것이 여기에 그칠 뿐이다.”라고 한다면 이는 선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선생께서는 부모님을 섬김에 있어서 사랑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고 하찮은 일이라도 반드시 경서의 가르침을 따랐다. 거상을 함에 있어서 예(禮)를 다하여서 삼 년 동안 이를 드러내어 웃은 적이 없었다. 모친상을 당하여 심상(心喪)을 할 때에 마침 합부인(閤夫人)의 병환이 매우 위급하여 가인(家人)이 선생에게 급히 와 줄 것을 청하였는데, 당시에 곁에 가족이 없었는데도 선생께서는 내외의 경계를 굳게 지켜서 끝내 내실에 들어가서 부인을 보지 않았고, 의원이 오자 또한 여종으로 하여금 대신 진찰하게 하였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사모하듯 독실하게 사모하기를 종신토록 하루같이 하였으며, 새벽에 일어나면 가묘에 배알하는 것을 심한 병이 아니면 폐하지 않았다. 기미년(1799, 정조23) 상원(上元)에 이르러 병환이 위급해졌음에도 가인(家人)에게 명하여 제철의 음식을 서둘러 장만하여 사당에 올리게 하였다. 생일을 만날 때마다 비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할 듯이 하였고 술과 고기를 올리게 하지 않았으며, 환갑에 이르러서 가인(家人)이 간단한 잔치를 추설(追設)하고자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기일에도 평상시의 식사를 올리게 하지 않았고, 치재(致齋)할 때에는 빈객을 접견하지 않았으며 수업을 하지 않으셨다. 제사를 받들 때에 정성과 예(禮)가 모두 지극하여 공경하고 삼갔으며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밤에는 옷에서 띠를 풀지 않았고, 제사가 끝나면 하루 종일 울음을 삼키셨다. 일찍이 말씀하기를, “기(忌)라는 것은 슬픔을 머금어서 다른 일에 미치지 못함을 이른 것이다. 이날에는 오직 슬퍼하고 사모하면서 밤을 다하여야 하니, 어찌 다른 일에 미칠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기제를 지낸 후에 재계를 마쳤다고 하여 출입하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니, 이것을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에 시장에서 사온 술과 소고기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말씀하기를, “성인(聖人)께서는 시장에서 사온 술과 포를 먹지 않으셨으니,하물며 제사에 올리는 데에 있어서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제수에는 또한 빚진 돈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말씀하기를, “이잣돈은 본래 이익을 중시하는 것이고, 무겁게 거두어들이는 것은 인(仁)하지 않은 데에 가까우니, 이는인자(仁者)의 곡식으로 제사를 올리는 의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말씀하기를, “자식이추양(追養)하는 것은 오로지 제사를 지내는 일에 달려 있다. 모든 제찬(祭饌)은 또한 집안의 재력에 걸맞게 해야 하니, 제물(祭物)이 넉넉하지 못하더라도 오직 정성만이 신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속세에서는 기름으로 지진 제수를 많이 사용하여 마치 연회의 음식과도 같고 또한 반드시 높이 괴어 올려서 심지어는 떡을 담은 그릇이 신주보다도 배를 넘게 만들며 제물의 수에 절도가 없어서 어지럽게 나열하니 몹시 외람되고 잡박하다.”라고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기제(忌祭)는 바로 후현(後賢)이 의리로써 일으킨 것이니 단지 정(情)을 펴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요 이로써 추양(追養)을 다하기에는 부족하다. 오직 정제(正祭)라야 비로소 제사를 행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예(禮)에서 말한 ‘사(士)가 제사를 지내지 못하면, 겨울에 갖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 갈옷을 입지 않는다.’라는 것은 바로 사시(四時)의 정제(正祭)를 가리킨 것이다. 지금 사람들 중에 가난하여 이를 거행할 수 없는 사람은 진실로 있지만, 재력이 미칠 수 있는 사람도 오직 기제(忌祭)와 묘제(墓祭)만을 올리니, 이는 애초에 예(禮)의 뜻을 밝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예(禮)에 행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세 가지이니, 관례(冠禮)와 친영(親迎)과 시제(時祭)가 그것이다. 그런데 혹 예가(禮家)가 이를 권하는데도 따르지 않으며 문중의 장로가 이를 가르치는데도 행하지 않으니, 습속이 이미 고질이 되어서 어찌할 수가 없다. 조정에서 정하여 법령을 만들어 나라의 사대부들로 하여금 이 세 가지 예(禮)를 행하여서 감히 혹시라도 어기지 못하게 한다면, 고례(古禮)를 회복하여 풍속을 돈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풍속에 다리머리를 하는 제도〔髢制〕를 늘 비루하다고 여겨서 글을 지어 예(禮)에 맞는 것이 아니라고 논척하였다. 그러므로 며느리의 계례를 할 때에 황조(皇朝)의 쪽을 찌는 제도〔髻制〕를 적용하였다. 무신년(1788, 정조12)에 조정에서 다리머리 올리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펴자 부녀자들의 머리 장식에 모두 족두리를 사용하니, 사람들이 비로소 선생께서 행하신 바를 탄복하였다. 선생께서는 “쪽을 찌는 제도는 다리머리와 다르므로 비록 금하는 물건은 아니지만, 마땅히 그 시기의 왕의 제도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여서, 쪽머리를 없애고 족두리를 착용하게 하였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의 예절을 정하여 저술하여〈태재록(汰哉錄)〉이라 하고서 이를 일가의 법칙으로 삼으셨다.
계씨(季氏)인충헌공(忠獻公)과 우애가 도타워서훈지(壎篪)가 서로 부합되어천륜간의 지기(知己)라고 허여하였다. 충헌공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선생은 근심으로 애태우며 잠들지 못하였고 혹은 한밤중에 일어나 울었으며, 몸소 약을 구하여 치료해서 낫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지극한 정성이 이른 것이라고 하였다. 서모(庶母)를 대할 적에 몹시 삼갔으며, 서매(庶妹)들을 시집보낼 때에 혼수를 후하게 장만하여주고 전장(田庄)을 팔아서 쓰고자 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정성스럽게 은혜를 다한 것이 이와 같았다. 서제(庶弟)가 요절하자, 광지(壙誌)를 짓고 오래도록 애도하고 슬퍼하였다. 부인과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여서 출행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절하였다. 부인의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상(喪)에 삼 년 동안 내실에 거처하지 않았으며, 부인의 4대조와 방친(傍親)의 기일에 미쳐서도 그렇게 하였다.
외아들이 늦게 태어났으나의로운 방도로 가르쳐서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았다. 부인의 상중에 과거공부를 하지 못하게 하니, 혹자가 “과체(科體)의 의의(疑義)는 시부(詩賦)와는 다르다.”라고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그래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또 글씨를 익히는 것을 경계하면서 말씀하기를, “최마(衰麻)의 상복을 입은 몸으로 어찌못가에서 희학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그 올바른 가르침이 이와 같았다. 조카를 자기 자식처럼 아껴서 늘 가르치기를, “예로부터 외척들 가운데 그 집안을 보전하는 자가 드물었던 것은 바로 은총을 탐하고 권세를 빙자하여 마침내 은총을 저버리고 나라를 저버려서 스스로 패망에 이르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니,복철(覆轍)을 경계할 만하다. 우리 집안이 한미하였는데외람되이 왕가와의 혼인을 맺게 되었으니,이는 실로선조의 남은 경사에서 온 것이다. 너희들은 다만 마땅히졸렬함을 지켜서말을 삼가고 경망스러운 교분을 맺지 않아야 하며, 책을 읽고 수신하여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간곡하게 경계하고 신칙하는 말이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종족을 화목하게 대하고 벗과의 도리를 중시하여 각각 그 정의(情誼)를 다하였다. 상(喪)을 들으면 반드시 고기를 먹지 않으셨고, 달려가 문상할 수 없으면 자신의 집에서 곡하되, 반드시 가마(加麻)하고서 제문을 지어 제사하면서 말씀하기를, “이것이 죽음을 애도하는 예(禮)이다.”라고 하였다. 비복(婢僕)들을 다스릴 때에 엄격하게 하면서도 은혜를 두어서, 죄가 있으면 사리로써 타일러서 스스로 고쳐서 새로워지게 하였고, 그래도 고치지 않은 뒤에 회초리를 치셨다. 남녀의 구별을 삼가서 비록 여종이라 할지라도 남자와 직접 물건을 주고받게 하지 않으셨다.
집안이 평소 가난하여 작은 집이 텅 비어 있었고 거친 밥도 이어가지 못하여서 부엌에서 밥을 짓지 못하고 굴뚝에서 불을 때지 못한 것이 혹은 열흘이 넘는 지경에 이르고는 하였다. 뜰을 엿보면 고요하여 마치 아무도 없는 듯하였으며 오직 푸른 풀만이 뜰에 가득하고 이끼가 계단을 덮었다. 서실에 들어가면 책이 책상에 가득한데 옷깃을 단정히 하고 꼿꼿이 앉아서는 글 읽는 소리가 양양하여 항상 흔연히 스스로 즐거워하고는 하였으니, 보는 이가 놀랍게 여기면서 “가난함이 이처럼 심한데 즐거워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라고 하였다. 부들자리 하나로 수십 년을 깔아서 앉은 곳이 해져서 밑바닥이 보였으니, 사람들이 이를관유안(管幼安)이 평상을 뚫었던 일에 비유하였다.
평상시에 거처할 때에 마치 재계하듯이 하여서 위치를 가지런히 정돈하였으며, 성품은 또 깨끗함을 좋아하여 하루에도 여러 번 손을 씻었다. 일찍이 폐족(廢族)과 담을 사이에 두고 거처하면서 마음에 항상 미워하였었는데, 어느 날 그 집의 밤이 정원으로 떨어져 아이종이 이것을 주워서 올리자, 선생께서 장차 입에 가까이 가져가시려다가 문득 의심스러워서 어디서 얻은 것인지를 물었다. 아이종이 “아무개 집의 밤입니다.”라고 하자, 선생께서는 먹지 않고 땅에 던져버리셨으니, 그 바르고 꼿꼿함이 세속을 월등히 벗어나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구차히 취하지 않으셨던 것이 어린나이였을 때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사양하고 받는 데에 있어서 삼가서 만약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종일토록 즐거워하지 않으셨으니, 집안사람들이 감히 의롭지 않은 것을 올리지 못하였으며 또한 그 뜻을 차마 해치지 못하였다. 거상 중에 세찬(歲饌)을 바친 사람이 있자 선생께서는 이를 돌려보내시며 말씀하기를, “거상하는 사람은 세찬의 의식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흉년을 만나 장차 제사를 빠뜨리게 되자 집안사람이 받아서 제사음식에 이바지하기를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말씀하기를, “이는 예(禮)로써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이가 서읍(西邑)을 다스리게 되어 명주를 보내서 겨울 추위를 막게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또한 이를 사양하면서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될 때에는 받지 않는 것이 유쾌하다.”라고 하였으니,얼음과 소태나무의 지조를 굳게 지킴이 이와 같았다.
가순궁(嘉順宮)이 입궐할 때에본방(本房)의 지친들이 으레 연례(宴禮)에 참여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병을 이유로 입궐하지 않으셨으며, 후에 사사로이 가순궁을 뵙기를 명하였으나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다. 처지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하여입을 닫고그림자를 감추어서 경솔히 다른 사람을 접견하지 않았으며, 또한 스승의 도(道)로써 자처하지 않으시면서 말씀하기를, “척리(戚里)의 몸이 되어서졸렬함을 지키고자 한다면마땅히 스스로 교유를 적게 해야 할 것인데, 교유의 광대함으로는 강회(講會)만 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마침내 학도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나, 만일 의심하여 논란하는 바가 있으면 응답해주시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속마음을 다하여 밑바닥까지 다하였으니, 공업과 교화가 다른 사람에게 미친 것이 또한 깊었다.
성품이 포용하기를 좋아하여서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셨으나, 다른 사람의 옳지 않은 점을 보면 마치 자신을 더럽힐 듯이 여기셨다.홍국영(洪國榮)의 척속(戚屬)들과 사이가 소원하지 않았었는데, 금강(錦江)에서 서로 만남에 그가 경박하고 음설한 것을 보시고는 편지를 보내 이를 나무라자, 홍국영이 크게 노하여 절교를 고하였다. 선생께서 젊었을 때에민홍섭(閔弘燮)과 함께 수학하였는데, 민홍섭이 아산(牙山)을 방문하였을 때에 편지를 보내어 선생이 와서 만나보기를 요청하였다. 선생께서는 당시자사(子舍)에 있으셔서병을 칭탁하여 가지 않으셨는데, 민홍섭 역시 절교하였다.심상운(沈翔雲)과 심익운(沈翼雲)과는 그들의 허물을 괘념치 않고서 문예로써 널리 교유하였다. 어느 날 성찬을 가지고 선생에게 와서 함께 맛보고자 하였는데, 선생께서 체증을 칭탁하여 드시지 않자, 심상운이 도외시하는 것을 스스로 알고는 마침내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홍낙임(洪樂任)과 교유를 맺었으되 또한 더불어 접견하여 말하지 않으셨는데, 훗날 이 네 사람이 모두 패퇴하였다. 선생께서는 말씀하기를, “내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내 성품이 졸렬하여 높은 관리를 보기를 싫어했던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도(道)를 지키기를 몹시 엄하게 하여서, 항상 이단의 학문이 정학(正學)에 젖어드는 것을 근심하였다.모기령(毛奇齡)을 통렬히 배척하여 말하기를, “그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비방한 것이 몹시 패려하니, 진실로 이는 맹자(孟子)에게서 허물을 찾는 것이다. 이른바《중용》과 《대학》에 대한 설은 더욱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가 어찌 일찍이 꿈에서라도 주자(朱子)의 지위에 이른 적이 있겠는가. 바로 사문난적이니, 마땅히 그 책을 불태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서양의 부정한 학술을 배척하여 말하기를, “그 폐해가 불가와 도가보다도 심하다. 남녀에 구별이 없는 것은 바로부자간에 암컷을 공유하는 것이고, 제사가 무익하다고 하는 것은승냥이와 수달만도 못한 것이다. 또 거처와 의복을 평민과 똑같이 하고, 과거에 응하여 벼슬을 구하며, 통혼하고 동료가 되어서 은밀히 서로 유인하여 점차 젖어들어 함께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 해로움이 더욱 크다. 이는 바로 문 안의 적으로서 그 화(禍)가 맹렬한 불보다도 세차서 장차 나라를 바꾸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신유년에 이르러서그 말이 크게 징험되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정학(正學)이 밝지 못하면 사설(邪說)이 더욱 치성하게 된다. 이를 막는 방도는 오직 우리 당(黨)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에 달려 있으니, 비유컨대 참된 근원이 이미 굳건하다면 나쁜 기운은 저절로 물러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화이(華夷)의 구별을 엄격하게 하여서, ‘갑신년 이후 신주(神州)가 매몰됨에오직 한 조각 맑고 깨끗한 땅이 그래도 자뢰할 수 있었는데, 인심이 평안함에 익숙해지고 보고 듣는 것에 익숙해져서 와신상담의 뜻이 날로 멀어지고 달로 잊혀져간다.’ 하여서 깊이 우려하고 길게 탄식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춘추(春秋)》에 ‘융(戎)이 범백(凡伯)을 공격하였다.〔戎伐凡伯〕’라고 하였는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말하기를, ‘잡았는데 공격하였다고 한 것은 이를 과장한 것이니, 이적(夷狄)이 중국(中國) 사람을 잡은 것과는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이적이면서 중국 사람을 잡는 것도 불가한데 하물며 천자의 대부를 잡아서야 되겠는가. 천자의 대부를 잡는 것도 불가한데 하물며 천자의 지위를 훔쳐서야 되겠는가. 《춘추》를 읽은 사람은 이를 본다면 또한 이적이 중화를 어지럽히는 것이 천지의 큰 변고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노련(魯連)은 일개 선비였는데도 진(秦)나라를 황제로 섬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으니,하물며 동방의 중화에 살면서 오랑캐를 섬기는 것이 부끄러워할 만한 것임을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여서,항상 이 의리를 읊으면서 집안의 계책으로 삼아서 마치 종신토록 잊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였다.
“‘요순(堯舜)보다 훌륭하다.〔贒於堯舜〕’라는 네 글자는 바로 재여(宰予)가 공자(孔子)를 찬미한 것인데,이병모(李秉模)가 감히 제멋대로 이를 가한(可汗)을 칭미하는 말에 가하였다.비록 ‘왕역(往役)이 처지상 급박하다.’라고 하지만 만일 찬송해 기리고자 한다면 어찌 할 말이 없을 것을 근심하겠는가. 그런데 반드시 이 네 글자로 개와 양 같은 오랑캐에게 빗대었으니,이업(李鄴)이 오랑캐의 형세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던 짓일지라도 응당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송사(宋史)》에서 금(金)나라의 군주 옹(雍)을 이적(夷狄) 가운데 요순(堯舜)과 같은 군주라고 한 것은 비록 그 신하가 찬미하여 서술한 것을 근거로 하여서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이것 또한 참람한 짓이다. 그런데 공자를 찬미한 네 글자로써 칭술한 것에 이르러서는, 고금의권의 문자(權宜文字)에서 감히 나오지 않았던 바이다. 공자는 만세의 스승으로 천자가 북면(北面)하여 스스로를 제자라고 칭하니, 그 존경하는 것이 이보다 높을 수는 없고, 만맥(蠻貊)과 같은 오랑캐에 미치더라도 공자를 존경하고 친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거늘, 유독 이병모가 이를 인용하여 오랑캐에게 아첨하면서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으니, 이는 성인(聖人)을 업신여긴 것이다. 이를 배척하지 않는다면 성인(聖人)의 도가 땅에 떨어지고 민이(民彝)가 무너지고 멸할 것이다.”
선생께서는 “유자(儒者)의 몸이 되어서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을 입고공자(孔子)의 가르치신 말씀을 외우면서 이 사람에게 천거를 받았으니, 이는 내 몸과 명예를 더럽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죽음을 맹세하고 출사하지 않았으나, 본래의 정상을 미처 다 드러내지 못하여서 형적이 절로 오만한 것으로 귀결되었으니, 성상의 노여움이 진동하여 형벌이 장차 내려지려 함에 화기(禍機)가 순식간에 닥쳐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의 뜻을 굳게 지켜 시종 변치 않으면서 말하기를, “만일 성인(聖人)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의리로 하여금 나를 말미암아서 대략이나마 펴질 수 있게 한다면, 죽을지라도 전혀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마치영해(嶺海)와 정확(鼎鑊)이 눈앞에 닥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정묘(正廟정조)께서 밝은 지혜로 본심이 다른 곳에 있지 않음을 굽어살펴서 선생이 원래의 뜻을 지키려 하는 것을 보전할 수 있게 해주시어, 이에 눈과 서리가 단비와 이슬로 바뀌고부월(斧鉞)이 화곤(華衮)으로 변하였으니,아아 성대하도다.
선생은 훌륭한 재능과 덕행을 지니시고서 침체되고 곤액을 겪어서, 옛 성왕(聖王)의 도를 펼칠 뜻을 가슴에 거두어 감춘 채로 별세하게 됨에 이것이 선생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 묻히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사림들이 한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엄하며미완(微婉)한 올바른 가르침을 따르고서질(敍秩)과 명토(命討)의 큰 도리를 드러내어서 한 몸으로 만세의 기강을 부지하고 한 마음으로 임금의 노여움을 돌이켜서, 마침내 임금께서 그 마음을 아시고 그 아름다움을 이루어주시는 하교를 입게 되었다. “이 의리를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하물며 나의 경우에 있어서이겠는가.”라고 하신 말씀은 성군의 가르침이 해와 별처럼 찬란하니, 이것이 어찌 단지 선생에게 천고에 드문 특별한 예우가 될 뿐이겠는가. 설사 선생으로 하여금 낭묘(廊廟)의 지위를 얻고하전(廈氈)에 올라서어수지교(魚水之交)처럼 군신간에 의기투합하여 구름과 해처럼 높은 임금의 교화를 돕게 하였던들, 그 군주의 알아줌을 얻은 성대함이 또한 어찌 이보다 더하였겠는가. 그렇다면 또한 불우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한창 벼슬에 나아가지 않을 때에, 사람들이 모두 처지와 분수에 맞는 도리를 가지고서 논란하였다. 선생께서는 말하기를, “처지는 외척(外戚)의 사의(私義)이고,거취는 사대부의대방(大防)이다. 만약 작은 일에 관계된 것이라면 내 한 몸의 염우(廉隅)를 근심할 것이 없겠으나, 이것은 대의(大義)가 관계된 바이니 어겨서는 안 된다. 또 내가 언관(言官)이 아닌데 상소하여 탄핵하고, 반유(泮儒)가 아닌데 통문을 보내어 성토한다면, 이는 바로 지위를 벗어나서 일을 논하는 것이니, 결단코 해서는 안 된다. 지금 강학청의 직함이 온 것은 나에게 해당되는 일이니, 의리상 마땅히 나아가서는 안 되는데 나간다면 장차 어떠한 사람이 되겠는가. 이것이 내가 임금의 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이니, 어찌 좋아서 하는 일이겠는가. 바로 부득이한 점이 있어서인 것이다. 그러나 구구한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을 성상께서 밝게 비추어 임하여 계시니,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선생의 이 말씀을 본다면, 스스로 헤아리신 바가 성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생께서는 평소 한가하고 고요함을 좋아하여서 도성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밤낮으로 자연을 그리셨으나, 힘이 부쳐서 거행하지 못하여 항상 울적해하셨다. 또한 호(號)를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항상 시내 언덕에 집을 세우고자 하시면서 이를 근재(近齋)라고 이름 붙이셨으니, 학자들이 근재 선생이라 칭하였다.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처사 휘 시관(時筦)의 따님으로, 선원(仙源) 문충공(文忠公) 휘상용(尙容)이 그 5세조이시다. 부인은 밝은 식견과 고아한 지조를 지녀서 시아버지께서 병이 중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올렸으며, 지아비에게 학문을 하기를 권하였으니, 선생께서곤궁하면서도도(道)를 지켜서 덕(德)을 이루는 데에 이르게 된 데에는 내조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 선생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선생보다 18년 일찍 별세하였으니, 선생께서 행장을 지어서 그 현숙함을 갖추어 서술하셨다. 1남을 낳았으니 종여(宗輿)로 서흥 부사(瑞興府使)이며, 지극한 행실이 있어서 능히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였다. 종여의 아들 운수(雲壽)는 지금 거창 부사(居昌府使)이다. 운수의 아들은 제근(齊近)이고, 1녀는 어리다.
아아, 선생께서는 세상에 드문 호걸의 자품을 지니고서 지난 현철들의 참되고 올바른 학문을 사모하여서, 문장을 통하여 도(道)에 들어가고박문(博文)을 말미암아 약례(約禮)로 돌아와서,영준하고 빼어난 기운을 거두어규구준승(規矩準繩)의 가운데에 두셨다. 그리하여 찬연(鑽硏)하는 공부를 근심으로 인하여 혹시라도 그치지 않았으며,진수(進修)하는 용기를 노쇠하였다 하여서 스스로 느슨하게 하지 않으셨다. 수양함이 깊어지고 쌓은 것이 두터워지는 때에 이르러서는 굳세고 엄하였던 것이 너그럽고 평이해지고 각박하고 엄려했던 것이 펼쳐지고 편안해져서, 넓게 펼쳐지면서도 깊고 조밀해지고 온화하고 순박하면서도 간단하고 평이해져, 정미하고 순수한 기운이 풍모에서 드러나고 화순한 뜻이 담소에서 넘쳐났다. 그 덕을 보면 마치난초 향기가 스미고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과 같고, 그 기상을 헤아리면 마치못처럼 깊고 높은 산처럼 우뚝하여서,저절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경애하고 두려워하게 하였다.
학문은 천인(天人)의 묘리를 궁구하였으되 일상생활의 떳떳한 도리의 바깥을 넘어가지 않았고, 오로지 내면에 마음을 썼으되 한결같이 경(敬)에 근본을 두었다. 그리하여 처음과 끝을 관통하고 상하를 관철함에 잠시 동안에도 혹 끊어짐이 없어서 차츰 순일하여 잡되지 않은 경지에 이르러서, 지식은 사물을 두루 포괄하면서도 빠뜨리지 않았고 행실은 평탄함과 험난함을 겪으면서도 변하지 않았다.고명한 데에전심치지하여서 날로 새로워져서 위로 천리에 통달하여 그원대함을 이루었으니,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성(誠)일 따름이었다. 성인의 도(道)가 높아지지 않음을 근심하고 부정한 학설이 제멋대로 횡행함을 두려워하여공성(孔聖)이 난적(亂賊)을 토벌한 의리를 종주로 삼고추맹(鄒孟)이 잘못된 행동을 막은 가르침을 계술하여, 자신의 출처의 대절(大節)을 한결같이 마음속의 《춘추(春秋)》로써 재량하고,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선성(先聖)의 도(道)를 보호하고 이적을 물리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아서,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을 내던지고 필생동안자정(自靖)하여서 선성(先聖)에게 자신의 뜻을 바친 것으로 말하면,이것은 선생께서 행한 사업에 보이는바 깊고 간절하여 분명히 드러나니, 어찌 빈말로서 베풀 곳이 없는 것과 같겠는가.장차 도(道)의 맥(脈)을 무궁한 후세로 늘이고 대의(大義)를 천하에 펼치게 되었으니, 선생과 같은 분은 진실로 공문(孔門)의 충신이자 대명(大明)의 유민인 것이다.
아아, 선생께서 수립하신 바가 진실로 탁월하지만, 이는 진실로 도(道)를 독실하게 믿음에 의리를 환하게 보아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았던 데서 말미암은 것으로, 하루아침에 강개하여 인습해 취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니, 평소의 올바른 수양과 위대한 식견으로 사사건건 하나의 옳음을 추구하여서 출처의 사이에 마땅히 한 터럭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없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또한 학문의 일부분으로서,교화를 도타이 하는 큰 덕 가운데 내처럼 흐르는 작은 덕인 것이니, 만일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에서 구하지 않고 단지 하나의 절목으로만 결단한다면 이 어찌 선생을 얕게 아는 것이 아니겠는가. 전(傳)에 이르기를“독실하게 믿으면서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음으로써 지키면서 도를 잘 행해야 한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 빈천이 절개를 옮겨놓지 못하며 위엄과 무력이 지조를 굽히게 하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선생께서 거의 이에 가까우시다.
선생께서역책(易簀)하신 지 9년 뒤에 그 맏아들이 실기(實記) 한 편을 서술하여 나에게 행장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는데, 맏아들도 별세하고 말았다. 내가 일찍이 선생의 지우와 아껴주심을 입어서 선생의 문하에 출입한 것이 거의 10여 년이 되었으나, 후진으로서 어리고 몽매하여서 선생의 덕(德)을 깊이 살피지 못하였고 은미한 말씀과 정미한 의리를 또 계발하지도 못하였으며, 한두 가지 옛날에 들은 것도 모두 나날이 잊어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항상 배움에 따라서 식견이 진전되어서 필력을 펼쳐 선생의 훌륭한 덕을 만에 하나라도 천양하기를 바랐었는데, 병들어 죽어가는 차라 남은 가르침을 뒤미처 생각하여서 선생을 불후하게 하기를 도모할 수가 없게 되었다. 풍전등촉이 갑자기 이르러서 영영 유명(幽明)간의 부탁을 저버릴까 두려워, 참람하고 망녕됨을 잊고서 위와 같이 찬술하여 덕(德)을 아는 군자를 기다리는 바이다.
[주-D001] 태원(泰遠):
박태원(朴泰遠, 1660~1722)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경구(景久), 호는 회와(悔窩)ㆍ일우(一愚)ㆍ송담(松潭)이다. 1689년(숙종15)에 진사가 되고, 같은 해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1697년 휘릉 참봉(徽陵參奉)을 거쳐 부평 현감(富平縣監)ㆍ황주 목사(黃州牧使)ㆍ합천 군수(陜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반남박씨오세유고(潘南朴氏五世遺稿)》가 있다.
[주-D002] 필리(弼履):
박필리(朴弼理, 1687~?)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경옥(景玉), 호는 성암(醒庵)이다. 1735년(영조11)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1740년 당상(堂上)에 올라 승지에 임명되었고, 그 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이르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주-D003] 사석(師錫):
박사석(朴師錫, 1713~1774)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성우(聖虞)이다. 안구(安絿)를 사사하였고, 1738년(영조14)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1755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고, 이듬해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1762년 예장도감(禮葬都監) 감조관(監造官)에 선발되었으며, 공주 판관(公州判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찬성공유고》 가 있다.
[주-D004] 상충(尙衷):
박상충(朴尙衷, 1332~1375)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성부(誠夫),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정랑에 이르렀다. 1367년(공민왕16) 성균관 생원의 수를 늘리고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를 마련하여 생원을 교수하게 하였는데, 이때 김구용(金九容)ㆍ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경술(經術)의 사(士)로 교관을 겸하였고, 뒤에 전교령(典校令)이 되었다. 1375년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책에 반대하여 친명책을 주장하였고, 뒤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을 쓸 것을 주장하였는데, 그해 간관 이첨(李詹)ㆍ전백영(全伯英)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 이인임과 지윤(池奫)의 주살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귀양을 가다가 별세하였다.
[주-D005] 은(訔):
박은(朴訔, 1370~1422)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앙지(仰止), 호는 조은(釣隱),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1385년(우왕11) 문과에 급제해 1392년(공양왕4) 관직이 개성부소윤(開城府少尹)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들어서 지금주사(知錦州事) 등의 벼슬을 하다가 태조의 다섯째 아들 방원(芳遠)에게 충성을 약속하고서 1398년(태조7)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 때에 지춘주사(知春州事)로서 방원의 집권을 위해 지방 군사를 동원하였으며, 1400년(정종2) 제2차 왕자의 난에 지형조사(知刑曹事)로 있으면서 역시 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다. 1401년 태종 즉위 후 형조ㆍ호조ㆍ병조ㆍ이조의 4조 전서(典書)를 두루 역임하고, 좌명 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 그 뒤 한성부 윤ㆍ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ㆍ전라도 관찰사ㆍ형조 판서ㆍ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주-D006] 소(紹):
박소(朴紹, 1493~1534)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언주(彦胄), 호는 야천(冶川),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무오사화(戊午士禍) 뒤에 사림의 사기가 침체되어 있을 때에 가야산에 들어가 학업에 힘썼다. 1518년(중종13) 향공(鄕貢) 3과에 모두 장원하고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이듬해 식년 문과에서 장원하였다. 1522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그 뒤 정언(正言)ㆍ필선(弼善) 등을 역임하였으며 1529년 평안도 암행 어사로 파견되었다가 사간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훈구파를 탄핵하려다가 사성(司成)으로 좌천되었으며, 1530년 파직되어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주-D007] 응천(應川):
박응천(朴應川, ?~1581)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혼중(渾仲)이다. 1543년(중종38) 성균시에 합격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고, 태인 현감(泰仁縣監)ㆍ호조 정랑을 거쳐 봉산 군수(鳳山郡守)가 되었다. 대구ㆍ이천ㆍ수원 등지의 부사(府使)와 광주(廣州)ㆍ양주(楊州)의 목사를 거쳐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ㆍ사재감 정(司宰監正)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주-D008] 동민(東民):
박동민(朴東民, 1556~?)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군각(君覺)이다.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주-D009] 환(煥):
박환(朴煥, 1584~1671)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여술(汝述), 호는 수우(守愚)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김현성(金玄成)에게 사사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벼슬하지 않다가, 그 뒤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6품직에 특제(特除)되어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ㆍ인제 현감을 지냈다. 정묘호란 이후 군자감(軍資監)ㆍ장흥고(長興庫)의 주부(主簿)를 거쳐 지평 현감(砥平縣監)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 현의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수성군(守城軍)과 합류하였다. 그 뒤 금구(金溝)ㆍ양천(陽川)ㆍ단양(丹陽)의 수령을 두루 역임하고, 1663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주-D010] 세성(世城):
박세성(朴世城, 1621~1671)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만기(萬基)이다. 1648년(인조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1년(효종2)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에 사관을 거쳐 홍문관 정자ㆍ예문관 검열ㆍ봉교 등을 역임하였다. 1653년 겸설서(兼說書)ㆍ전적ㆍ감찰ㆍ정언 등을 역임하고, 그 뒤 암행 어사로 나갔다가 이어 필선(弼善)ㆍ병조 정랑ㆍ수리도감도청 장령ㆍ군기시 정ㆍ삭녕 군수(朔寧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1) 동부승지로 있을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문제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1665년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남양 부사ㆍ동부승지ㆍ형조 참의ㆍ우부승지ㆍ호조 참의ㆍ양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주-D011] 승지공은 …… 되었다:
승지공은 박윤원(朴胤源)의 고조인 박세성(朴世城)을 가리킨다. 1659년(효종10)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기년(朞年)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3년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기해예송(己亥禮訟)이 벌어졌다. 이때 윤선도(尹善道)와 윤휴(尹鑴)를 비롯한 남인(南人)들은 삼년복을 주장하고,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서인(西人)들은 효종을 서자(庶子)로 간주하여 기년복을 주장하였다. 결국 송시열 등 서인들이 주장한 기년복으로 채택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윤선도가 상소를 올려 복제에 대해 논하면서 예(禮)를 정한 여러 사람들을 비방하자 대각에서 그를 논척하였는데, 우윤(右尹)으로 있던 권시(權諰)가 윤선도를 구제하다가 규탄을 받고 축출당하였다. 이에 현종이 동부승지로 있던 박세성에게 옛 법제를 그대로 두겠다고 전유하게 하였는데, 박세성이 대간이 탄핵을 정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서 그 명을 받들어 행하지 못한다고 아뢰자 현종이 노하여 박세성을 의금부에 하옥하게 하였다. 결국 박세성은 삼사(三司)가 간쟁하고 대신(大臣)들이 청한 끝에 사면되었다. 《西溪集 卷9 左副承旨朴公墓誌銘》
[주-D012] 역록(歷錄)이란 …… 보이는데:
《시경집전》 〈진풍(秦風) 소융(小戎)〉에 “병거라 수레 뒤턱이 얕으니 다섯 곳을 묶은 굽은 끌채로다.[小戎俴收, 五楘梁輈.]”라고 한 주(註)에, “목(楘)은 역록연하게 문채가 드러나는 모양이다.[歷錄然文章之貌也.]”라고 하였으니, 이를 가리킨다.
[주-D013] 남화서(南華書):
장주(莊周)가 지은 《장자(莊子)》의 이칭으로, 《남화경(南華經)》 혹은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 한다.
[주-D014] 정자(程子)가 …… 뜻:
정자는 이천(伊川) 정이(程頤)로, 《주자어류》 권93에 “명도는 불교와 노장의 책을 보았는데, 이천은 《장자》와 《열자》도 보지 않았다.[明道曾看釋老書, 伊川則莊列亦不曾看.]”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주-D015] 창려(昌黎)의 일:
창려는 나라의 문장가인 한유(韓愈)를 가리키며, 한유의 선조가 창려에 살았으므로 이렇게 일컬은 것이다. 창려의 일이란 한유가 진사시에 급제하고 나서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자, 벼슬을 구하기 위해 당시 재상이었던 조경(趙憬)ㆍ가탐(賈耽)ㆍ노매(盧邁)에게 편지를 올려 스스로를 추천하여 벼슬을 구했던 것을 말한다. 이때 보낸 편지가 《한창려집(韓昌黎集)》 권16 〈상재상서(上宰相書)〉 등에 보인다.
[주-D016] 신임 연간의 충역(忠逆):
신축년(1721, 경종1)과 임인년(1722) 두 해에 걸쳐 노론(老論)과 소론(小論) 간에 뒷날 영조(英祖)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의 세제(世弟) 책봉과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두고 대대적인 인명 살상을 초래한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났는데, 이때의 충(忠)과 역(逆)을 가리킨다. 남인(南人) 역관의 딸인 희빈(禧嬪) 장씨(張氏) 소생인 경종은 남인에 동정적이던 소론의 보호를 받아왔는데, 경종이 즉위하자 과거 그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노론은 위기를 느껴 그의 병약함과 후사(後嗣)가 없음을 빌미로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추진, 이를 관철시키고 나아가 대리청정까지 추진하다가,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등이 목호룡(睦虎龍)을 사주하여 노론의 사대신(四大臣)인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를 역모로 무고케 함으로써 사대신 이하 노론 일파를 극형에 처하게 하였다.
[주-D017] 춘추(春秋)의 대의(大義):
《춘추》의 대의는 오랑캐를 물리치고 주(周)나라 왕실을 높이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신을 가리키며, 나아가서는 오랑캐인 청나라를 물리치고 명나라를 존숭하는 정신을 가리킨다.
[주-D018] 삼학사(三學士):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하고 끝까지 척화(斥和)를 주장한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세 사람을 이른다.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에서는 척화론자들을 체포하여 신병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오달제와 윤집은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섰으며, 홍익한은 1637년(인조15) 2월초 평양에서 회군하는 청군에 잡혀 심양(瀋陽)에 끌려갔다. 이들은 청나라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척화의 대의를 끝까지 주장하다가 모두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처형당했다.
[주-D019]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ㆍ석실산인(石室山人),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병자호란 때 주전론을 주장하였으며, 1639년(인조17)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간 심양(瀋陽)에서 고초를 받고 돌아왔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北伐)을 추진할 때 이념적 상징으로 추앙되었다.
[주-D020]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으로,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이조 참판으로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였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5년만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주-D021] 숭절사(崇節祠):
중국의 태학(太學) 유생 가운데 귀감이 되는 인물들을 제향한 곳으로 문묘(文廟)의 동쪽에 있다. 숙종(肅宗) 때에 이를 세우도록 명한 뒤 1724년(영조1)에 세워졌다. 진(晉)나라의 태학생 동양(董養)과 당(唐)나라의 태학생 하번(何蕃), 송(宋)나라의 태학생 진동(陳東)ㆍ구양철(歐陽徹)을 제사 지냈으며, 1760년(영조36)에는 어필로 ‘사현사(四賢祠)’ 세 글자를 써서 내려 현판을 걸도록 명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 京都》
[주-D022] 신묘년에 …… 변무(辨誣)하고서:
신묘년은 1771년(영조47)으로, 이때에 주린(朱璘)의 《명기집략(明紀輯略)》에 실린 태조(太祖)의 종계(宗系)와 목조(穆祖)의 사적(事蹟) 가운데 잘못된 점과 진건(陳建)의 《황명통기(皇明通紀)》에 실린 종계에 대한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고 주문(奏文)을 지어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변무한 일이 있었다. 《英祖實錄 47年 5月 27日, 9月 24日》
[주-D023] 전대(專對):
사신이 되어 상황에 따라 자신의 판단대로 대응하는 것을 이른다. 《논어》 〈자로(子路)〉에 공자(孔子)가 “《시경》 삼백 편을 외우더라도, 정사를 맡겨줌에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며 사방으로 사신 가서 자기 마음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비록 시를 많이 외운들 어디에 쓰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亦奚以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4] 왕역(往役):
군주가 직책을 맡겨 국가의 일을 맡기면 왕명에 따라 이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가서 부역함은 의이고, 가서 만나 봄은 의가 아니다.[往役, 義也; 往見, 不義也.]”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군주가 부득이하게 국가의 일을 위하여 부를 때에는 개인의 사정을 돌보지 말고 나아가서 일하는 것이 의리에 합당하다는 의미이다.
[주-D025] 감해(監解):
본래 감해는 감시(監試)에 합격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한 것을 가리킨다.
[주-D026] 찬성공(贊成公)의 …… 오느라:
박윤원의 부친 박사석(朴師錫)이 1764년(영조40) 12월에 삼등 현령(三登縣令)에 제수되어서, 박윤원은 당시에 아버지의 임소인 삼등의 자사(子舍)에 있다가 시강(試講)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德隱遺稿 卷2 祖考近齋先生府君年記》 《錦石集 卷10 先考贈議政府左贊成府君墓誌》
[주-D027] 조흘(照訖):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이 과장을 나오기 전에 성균관에서 호적을 대조하는 일을 말한다.
[주-D028] 정거(停擧):
유생(儒生)에게 일정 기간 과거(科擧)의 응시(應試)를 정지시키는 처벌을 말한다.
[주-D029] 발해(發解):
문과의 초시(初試)에 합격하는 것을 말한다.
[주-D030] 찬성공께서 …… 이르러:
박윤원의 부친 박사석(朴師錫)이 1774년(영조50) 10월에 별세하였다. 《德隱遺稿 卷2 祖考近齋先生府君年記》
[주-D031] 맹자(孟子)의 부동심(不動心):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맹자가 “나는 40세에 마음을 동요하지 않았노라.[我四十不動心.]”라고 하였는데, 집주(集註)에 “40세는 막 벼슬할 나이이니, 군자의 도가 밝아지고 덕이 확립되는 때이다. 공자가 40세에 의혹하지 않은 것 또한 부동심을 말씀하신 것이다.[四十彊仕, 君子道明德立之時. 孔子四十而不惑, 亦不動心之謂.]”라고 하였다.
[주-D032] 가순궁(嘉順宮):
수빈(綏嬪) 박씨(朴氏, 1770~1822)의 궁호로,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사친(私親)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원호(園號)는 휘경(徽慶), 시호는 현목(顯穆)이다. 박윤원의 아우인 판돈녕부사 박준원(朴準源)의 딸로서 박윤원에게는 조카가 된다.
[주-D033] 초선(抄選):
의정 대신(議政大臣)과 이조의 당상관이 회합하여 경연관으로 적합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을 말한다.
[주-D034] 유선(儒選):
유학에 뛰어난 유현(儒賢)을 선발하는 것을 말한다.
[주-D035] 고인(古人)이 …… 않겠는가:
두광국(竇廣國)은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비(妃)인 두황후(竇皇后)의 동생이다. 문제가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고서 정승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이 내가 두광국에게 사정(私情)을 둔다고 할까 두렵다.”라고 하여 결국 그만두었으니, 외척에게 사사로이 관직을 준다는 혐의를 두려워하여 임명하지 않은 것이다. 《通鑑節要 卷8 漢紀 文帝 後元 2年》 훗날 사람들이 문제가 두광국을 정승으로 삼지 않은 것이 오히려 공정한 것이 아닌 사사로운 뜻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는데,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사친(私親)인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박윤원의 질녀였으므로 정조가 문제와 두광국의 일을 이와 같이 인용한 것이다.
[주-D036] 원자궁(元子宮)이 …… 하여서:
훗날 순조가 되는 수빈(綏嬪) 박씨(朴氏)의 소생인 정조의 아들이 1790년(정조14)에 태어나 이때에 8세가 되었다.
[주-D037] 이불을 …… 보아라:
부모가 남겨준 몸을 훼손시키지 않고서 죽는 것을 말한다. 《논어》 〈태백(泰伯)〉에, 증자가 병이 들자 제자들을 불러 말하기를, “이불을 걷고서 내 발을 살펴보고 내 손을 살펴보아라. 《시경》에 이르기를, ‘두려워하고 삼가서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며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라.’ 하였는데, 이제야 내 몸이 다치는 죄를 면할 수 있게 되었구나. 제자들아![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라고 하였다.
[주-D038] 강절(康節)이 …… 구절:
강절은 북송의 학자인 소옹(邵雍, 1011~1077)으로, 자는 요부(堯夫), 시호는 강절이다. 이 구절은 소옹의 〈노거음(老去吟)〉이라는 시에 보인다. 《擊壤集 卷15》
[주-D039] 빙호추월(氷壺秋月):
얼음으로 만든 호리병에 밝은 가을달이 비친 것과 같이 티 없이 고결한 정신을 뜻하는데, 등적(鄧迪)이 주자(朱子)의 스승인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인품을 형용한 말이다. 《宋史 卷428 李侗列傳》
[주-D040] 맹분(孟賁)과 …… 없었다:
모두 중국 고대의 용사(勇士)이다. 맹분은 제(齊)나라 사람으로 살아 있는 소의 뿔을 맨손으로 뽑았다고 하며, 하육은 위(衛)나라 사람으로 천 균(鈞)의 무게를 들 수 있는 힘을 지녔었다고 한다. 한(漢)나라의 충신(忠臣)이었던 급암(汲黯)의 절의(節義)를 칭송하면서 “맹분과 하육이라 할지라도 그의 뜻을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雖賁育, 不能奪之矣.]”라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50 汲黯傳》
[주-D041] 야천(冶川)의 …… 가학:
야천은 박윤원의 선조인 박소(朴紹, 1493~1534)로, 야천은 그의 호이다. 시(詩)와 예(禮)의 가학이란 선조와 부모로부터 전수받은 가학(家學)을 이른다. 공자가 그의 아들 이(鯉)에게 시와 예를 배워야 한다고 훈계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論語 季氏》
[주-D042] 사자서(四子書):
공자(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논어》, 《대학》, 《중용》, 《맹자》를 가리킨다.
[주-D043] 낙건(洛建):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또는 그들의 학문인 정주학(程朱學)을 말한 것으로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는 낙양(洛陽)에서, 주자는 복건(福建)에서 살며 강학하였으므로 이렇게 일컬은 것이다.
[주-D044] 광세지감: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감회를 이르는 말이다.
[주-D045] 극이 …… 돌아감에:
원문의 ‘귀극(歸極)’은 《서경》 〈홍범(洪範)〉에 “그 극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고, 그 극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會其有極, 歸其有極.]”라고 한 데에 보인다. 극이 있는 곳이란 황극(皇極), 즉 세상을 다스리는 바른 표준을 말한다.
[주-D046] 격물(格物)과 …… 말하였다:
아래의 내용은 《근재집(近齋集)》 권7 〈여임치공(與任穉共)〉 첫 번째 편지에 보인다.
[주-D047] 김밀암(金密庵)이 …… 것:
김밀암은 김지행(金砥行, 1716~1774)으로, 밀암은 그의 호이다. 《밀암집(密菴集)》 권18에 실린 박윤원이 지은 김지행의 묘갈명(墓碣銘)에 김지행이 격물을 논하여, “격물은 심(心)이 사물에 이른 것이요, 물격은 사물이 심에 이른 것이다.[格物卽心到物, 物格卽物到心.]”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주-D048] 정우복(鄭愚伏)의 …… 설:
정우복은 정경세(鄭經世, 1563~1633)로, 우복은 그의 호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212 〈유사(遺事)〉에 송시열이 어느 날 정경세에게 “하교에 이른바 격물과 물격은 바로 객을 청하여 객이 온 것과 같다고 하신 말씀은 과연 정론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정경세가 “나는 바꿀 수 없는 설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는 바로 객을 청하는 것을 격물에, 객이 온 것을 물격에 비유한 것이다.
[주-D049] 명덕(明德)을 …… 말하였다:
아래의 내용은 문단별로 각각 《근재집(近齋集)》 권5 〈여밀암김공(與密庵金公)〉 9번째 편지, 권24 〈정지록(貞智錄)〉, 권25 〈대학차략(大學箚畧)〉에 보인다.
[주-D050] 선유(先儒)가 …… 하였으니:
이는 옥계 노씨(玉溪盧氏)의 말로, 《대학혹문(大學或問)》의 소주(小註)에 보인다.
[주-D051] 혹자는 …… 말이지:
진북계(陳北溪)는 송(宋)나라 유학자인 진순(陳淳)으로 진북계의 말은 《북계대전집(北溪大全集)》 권36에 보이는데, 여기에 “허령 두 글자는 대체로 본체의 밝은 곳을 형용한 것이다. 단지 허령불매라는 네 글자가 이미 충분히 명덕의 뜻을 설명하였다.[虚靈二字大概形容本體明處. 只虚靈不昧四字說明徳意巳足矣.]”라고 하였다.
[주-D052] 심(心)과 …… 말하였다:
아래의 내용은 《근재집(近齋集)》 권9 〈답이선장(答李善長)〉 24번째 편지와 권24 〈정지록(貞智錄)〉에 보인다.
[주-D053] 심(心)은 기(氣)의 정상(精爽)이니:
이 말은 《주자어류(朱子語類)》 권5에 보인다.
[주-D054] 담일(湛一):
이 말은 장재(張載)의 《정몽(正蒙)》 〈성명(誠明)〉에 보인다. 여기에서 “담일(湛一)은 기(氣)의 근본이고, 공취(攻取)는 기의 욕구이다.[湛一, 氣之本, 攻取, 氣之欲.]”라고 하였는데, 주자가 이를 해석하여 “담일이란 외물에 감촉하기 전의 담연하고 순일한 상태이니, 이것이 기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주-D055] 신명하여 ……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마음을 다하는 자는 성(性)을 안다.[盡其心者知其性也.]”라고 한 구절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석에 “심(心)은 사람의 신명(神明)이니, 이 때문에 온갖 이(理)를 갖추고 있으면서 만사(萬事)를 응하는 것이다.[心者, 人之神明, 所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하였다.
[주-D056] 철로 …… 비유:
이는 한원진(韓元震)이 명덕(明德)과 심(心)의 관계를 두고 거울에 비유해서 했던 말을 가리키는데, 《남당집(南塘集)》 권13 〈여윤서응(與尹瑞膺)〉에 “이를 거울에 비유하자면, 명덕은 거울의 밝은 속성을 말한 것과 같으니, 밝은 속성을 가리켜 말한다면 밝음은 어느 거울이나 똑같지 않은 바가 없다. 심(心)은 거울 자체를 말한 것과 같으니, 오로지 거울 자체만 말한다면 거울을 이루는 철(鐵)마다 정추(精粗)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밝은 속성을 가리켜 말한다면 똑같다고 이를 수 있지만 거울 자체를 가리켜 말한다면 똑같다고 이를 수 없는 것이다.[譬之鏡, 明德猶言鏡之光明也, 指言光明, 則光明無不同矣. 心猶言鏡也, 專言鏡, 則鐵之精粗有不同矣. 故指明而言, 則可謂之同, 而指鏡而言, 則不可謂之同也.]”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주-D057] 율곡(栗谷)이 …… 하였으니:
율곡은 이이(李珥)의 호로, 이 말은 《성학집요(聖學輯要)》 제6장 〈교기질(矯氣質)〉에 보이는바, 여기에 “사람만이 비록 맑고 혼탁하며 순수하고 잡박한 차이가 있으나 마음이 텅 비어 밝아서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惟人則雖有淸濁粹駁之不同, 而方寸虛明, 可以變化.]”라고 하였다.
[주-D058] 인성(人性)과 …… 말하였다:
아래의 내용은 《근재집(近齋集)》 권24 〈정지록(貞智錄)〉과 권8 〈답이선장(答李善長)〉 5번째 편지에 보인다.
[주-D059] 범과 …… 하였으니:
《주자어류(朱子語類)》 권4에 “이(理)는 다르니, 예컨대 벌과 개미에게 군신간의 질서가 있는 것은 오직 의(義) 한 점에만 밝은 것이고, 범과 이리에게 부자간의 은애(恩愛)가 있는 것은 오직 인(仁) 한 점에만 밝은 것이어서 그 밖의 덕목에는 다시 미루어가지 못한다.[理不同, 如蜂蟻之君臣, 只是他義上有一點子明, 虎狼之父子, 只是他仁上有一點子明, 其他更推不去.]”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주-D060] 유곤(劉昆)이 …… 의(義)이다:
후한(後漢) 때 유곤(劉昆)이 홍농 태수(弘農太守)로 있을 적에 어진 정사를 베풀자 범들이 모두 새끼를 등에 업고 황하를 건너가서 범으로 인한 우환이 없어지게 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109 劉昆列傳》
[주-D061] 양이 …… 예(禮)이고: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장공(莊公) 4년조에 “그렇다면 무엇을 써야 할꼬? 대추, 밤을 써야 하며, 말린 고기를 써야 할 것이다.[然則曷用? 棗栗云乎, 腶脩云乎!]”라고 한 주(註)에 “경은 새끼 양을 쓰니, …… 새끼 양은 붙잡아도 울지 않고, 죽여도 부르짖지 않으며, 젖을 먹을 때는 반드시 꿇어앉아 먹으니, 마치 의리에 죽고 예를 아는 것 같음을 취한 것이다.[卿用羔, …… 羔取其執之不鳴, 殺之不號, 乳必跪而受之, 類死義知禮者也.]”라고 하였다.
[주-D062] 새가 …… 것:
원문의 ‘색거(色擧)’는 《논어》 〈향당(鄕黨)〉에 “새가 사람의 안색을 보고 날아가서 빙빙 날아돈 뒤에 내려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63] 하나를 …… 것: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5 〈입관어록(入關語錄)〉에 “하늘에 다섯 가지 기(氣)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은 오성(五性)을 구비하고 있지 않음이 없으니, 하나를 차지함에 넷을 소유하게 된다. 초목의 경우에는 누런 것은 토(土)의 성을 얻음이 많고, 흰 것은 금(金)의 성을 얻음이 많다.[天有五氣. 故凡生物莫不具有五性, 居其一而有其四. 至如草木也, 其黃者得土之性多, 其白者得金之性多.]”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주-D064] 닭에게 …… 있었겠는가:
동소남(董邵南)은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주경야독하면서 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고 한다. 한유(韓愈)가 동소남에 대해 지은 〈동생행(董生行)〉이라는 시에, “아, 동생(董生)이여. 효도하고 사랑함을 남들은 알지 못하고 오직 천옹(天翁)이 알아 상서를 내고 길조를 내림을 시기가 없이 하였도다. 집에 개가 새끼를 낳아 밖으로 나가 먹이를 구하자, 닭이 와서 그 새끼를 먹이되 뜰 안에서 쪼아 벌레와 개미를 주워 먹여도 먹지 않고 소리 내어 슬피 우니, 닭은 방황하며 머뭇거리며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서 날개로 덮어 주며 어미개가 돌아오길 기다리도다.[嗟哉董生! 孝且慈, 人不識, 唯有天翁知, 生祥下瑞無時期. 家有狗乳出求食, 雞來哺其兒, 啄啄庭中拾蟲蟻, 哺之不食鳴聲悲, 彷徨躑躅久不去, 以翼來覆待狗歸.]”라고 한 내용이 《소학(小學)》 〈선행(善行)〉에 보인다.
[주-D065] 고양이에게 …… 있었겠는가:
한유(韓愈)가 지은 〈묘상유설(猫相乳說)〉에, 사도(司徒) 북평왕(北平王) 마수(馬燧)의 집에 있던 고양이 두 마리가 같은 날에 각각 새끼를 낳았는데, 한 고양이가 바로 죽어서 그 새끼들이 젖을 먹지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그러자 다른 고양이가 그 소리를 듣고 가서 그 새끼들을 물어다 자기 우리에 놓고는 마치 제 새끼처럼 젖을 먹여 길렀다고 한다. 한유는 이 일을 두고서 “고양이는 사람이 기르는 가축으로 인(仁)과 의(義)의 성품을 지닌 것이 아니니, 길러준 사람에게 감동한 것일 것이다![夫貓, 人畜也, 非性於仁義者也, 其感於所畜者乎哉!]”라고 하여, 북평왕의 공덕(功德)이 이와 같은 상서로움을 불러왔다고 하였다. 《唐宋八大家文鈔 卷10 貓相乳》
[주-D066] 뱀과 …… 있었겠는가:
옛날에 수후(隋侯)가 다친 뱀을 치료해 주었는데 그 뱀이 밤에도 환히 빛나는 구슬을 가져다주어서 은혜를 갚았고, 양진(楊震)의 부친 양보(楊寶)가 올빼미에게 쫓겨 나무에서 떨어진 누런 참새를 구해주었더니 이를 날려 보낸 날에 서왕모(西王母)의 사자인 황의동자가 와서 보답으로 흰 옥환 4개를 주었는바, 이는 자손이 귀하게 될 징조였다고 한다. 《搜神記 卷20》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주-D067] 돼지와 …… 있었겠는가:
《주역》 〈중부괘(中孚卦)〉의 괘사(卦辭)에 “중부는 돼지와 물고기면 길하니, 큰 냇물을 건넘이 이롭고 정함이 이롭다.[中孚, 豚魚吉, 利涉大川, 利貞.]”라고 하였는데, 그 단전(彖傳)에 “‘돼지와 물고기면 길함’은 신의가 돼지와 물고기에까지 미친 것이다.[豚魚吉, 信及豚魚也.]”라고 하였다. 곧 그 덕이 훌륭하여 돼지와 물고기 같은 미물까지 감동시킴을 말한 것이다.
[주-D068] 성(性)은 근원이 …… 것이다:
《중용장구》 첫 장에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품절해 놓은 것을 교(敎)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주희(朱熹)가 “사람과 물건이 태어남에, 각기 부여 받은 바의 이(理)를 얻음으로 인하여 건순(健順)과 오상(五常)의 덕을 삼으니, 이른바 성(性)이라는 것이다. …… 사람과 물건이 각기 그 성(性)의 자연을 따르면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각기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도(道)라는 것이다. …… 성(性)과 도(道)가 비록 같으나 기품이 혹 다르기 때문에 과하거나 불급한 차이가 없지 못하므로, 성인이 사람과 물건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인하여 품절하여 천하에 법이 되게 하셨다. 이것을 일러 교(敎)라고 하니, 예악과 형정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 人物各循其性之自然, 則其日用事物之間, 莫不各有當行之路, 是則所謂道也. …… 性道雖同, 而氣稟或異. 故不能無過不及之差, 聖人因人物之所當行者而品節之, 以爲法於天下, 則謂之敎. 若禮樂刑政之屬是也.]”라고 해석하였다. 여기에서 언급된 성(性)과 도(道)에 대하여 나흠순(羅欽順)은 《곤지기(困知記)》 권상(卷上)에서 “성(性)은 명(命)에 의해 같고 도(道)는 형(形)에 의해 다르니, 반드시 동이의 사이를 분명히 안다면 천과 지, 인과 물의 이치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抵性以命同, 道以形異, 必明乎異同之際, 斯可以盡天地人物之理.]”라고 하여 성(性)은 인(人)과 물(物)이 같고 도(道)는 인과 물이 다르다고 주장하였는데, 박윤원은 이에 대해서 성(性)과 도(道) 모두 인(人)과 물(物)이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참고로 성삼층설을 제창한 한원진(韓元震)은 초형기(超形器)의 차원에서는 성(性)도 같고 도(道)도 같으며, 인기질(因氣質) 이하의 차원에서는 성(性)도 다르고 도(道)도 다르다고 주장하였으며, 인물성이론을 견지한 임성주(任聖周)는 성(性)과 도(道) 모두 인(人)과 물(物)이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한원진의 글은 《남당집(南唐集)》 권27 〈나정암곤지기변(羅整菴困知記辨)〉, 임성주의 글은 《녹문집(鹿門集)》 권19 〈녹려잡지(鹿廬雜識)〉 참조.
[주-D069] 변할 수 있는 …… 구별이다:
《대학혹문(大學或問)》 권1 〈경 1장(經一章)〉에 “그 이(理)를 가지고 말하면 만물은 하나의 근본이어서 진실로 인(人)과 물(物), 귀(貴)와 천(賤)의 차이가 없지만, 그 기(氣)를 가지고 말하면 그 바르고 통한 기를 얻은 것이 인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 기를 얻은 것이 물이 되니, 이 때문에 귀하기도 하고 천하기도 하여 가지런하지 못한 것이다.[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者爲物, 是以或貴或賤而不能齊也.]”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주-D070] 들어오는 …… 여겨:
원문의 ‘입주(入主)’는 들어가면 주인으로 여기고 나오면 종으로 여긴다는 뜻의 ‘입주출노(入主出奴)’에서 온 말로, 믿고 따르는 학설은 주인으로 여기고 배척하는 학설은 종으로 여김을 뜻한다. 이는 본래 당(唐)나라 문장가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나오는 말로, 공자(孔子)가 죽은 뒤에 유학(儒學)이 쇠퇴함을 말하면서 “도덕과 인의를 말하는 자가 양주(楊朱)로 들어가지 않으면 묵적(墨翟)으로 들어가고, 노자(老子)로 들어가지 않으면 불가(佛家)로 들어가서 저기로 들어가면 여기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들어가는 쪽을 주인으로 여기고 나가는 쪽을 종으로 여기며 들어가는 쪽을 따르고 나가는 쪽을 더럽게 여겼다.[其言道徳仁義者, 不入於楊, 則入于墨, 不入於老, 則入于佛, 入于彼, 必出乎此, 入者主之, 出者奴之, 入者附之, 出者汚之.]”라고 하였다.
[주-D071] 사덕(四德):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가리킨다.
[주-D072] 가례(家禮)는 …… 것으로:
주희(朱熹)의 《가례》 권4 〈상례(喪禮)〉 초종(初終)조에 “이에 옷을 갈아입고 음식을 먹지 않는다.[乃易服不食.]”라고 한 주에 “처와 자식, 며느리, 첩은 모두 관과 윗옷을 벗고 머리를 푼다.[妻子婦妾皆去冠及上服被髮.]”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마광(司馬光)의 《서의(書儀)》 권5 〈상의1(喪儀一)〉 역복(易服)조에 “초혼하였으면, 처와 자식, 며느리, 첩은 모두 관과 윗옷을 벗고 머리를 푼다.[旣復, 妻子婦妾皆去冠及上服被髮.]”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주-D073] 삼백 …… 위의(威儀):
《중용》에 성인(聖人)의 도(道)를 찬탄하며 “크고 넉넉하도다. 예의가 삼백 가지이고, 위의가 삼천 가지이다. 훌륭한 사람을 기다린 뒤에 행해진다.[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 待其人而後行.]”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註)에 “예의는 경례이고, 위의는 곡례이다.[禮儀, 經禮也; 威儀, 曲禮也.]”라고 하였다.
[주-D074] 문(文)이 …… 폐단:
《논어집주》 〈옹야(雍也)〉에 “질이 문을 이기면 촌스럽게 되고, 문이 질을 이기면 겉치레만 잘하게 되니, 문과 질이 적당히 배합된 뒤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라고 한 경문에 대한 주에 “문(文)이 이겨 질(質)을 없애는 데 이른다면 그 근본(根本)이 없어지는 것이니, 비록 문(文)이 있은들 장차 어디에다 베풀겠는가? 그렇다면 그 겉치레만 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촌스러움이 나은 것이다.[文勝而至於滅質, 則其本亡矣, 雖有文, 將安施乎? 然則與其史也, 寧野.]”라고 하였다.
[주-D075] 당우(唐虞)와 삼대(三代):
당은 요(堯) 임금, 우는 순(舜) 임금의 국호이며 삼대는 하(夏)ㆍ은(殷)ㆍ주(周) 세 왕조로, 모두 태평성대를 가리킨다.
[주-D076] 빈흥(賓興)의 제도:
주(周)나라 때에 인재를 선발하던 제도로, 향대부(鄕大夫)가 그 고을의 소학(小學)에서 인재를 천거하여 빈객으로 예우하고 국학(國學)에 들어가게 한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향학(鄕學)의 세 가지 일로써 만민을 가르쳐 빈객으로 예우하여 천거한다.[以鄕三物, 敎萬民而賓興之.]”라고 하였다.
[주-D077] 주자(朱子)의 …… 의론:
주희(朱熹)가 과거 제도에 대해서 논한 글로, 조정에 올리지 않은 사의(私議)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69 〈학교공거사의(學校貢擧私議)〉에 보인다. 주자는 여기에서 과거를 준비하는 자들이 경전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과문을 짓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다면서 과거 제도의 폐단에 대해 지적하고, 사부(詞賦)를 혁파하고 경전, 성리학과 제자서, 역사서, 시무(時務)를 시험하여 인재를 취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여러 주(州)의 정원을 고르게 할 것과 덕행과(德行科)를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D078] 정자(程子)의 …… 차자:
정이(程頤)가 학제(學制)를 살펴서 이에 대해 철종(哲宗)에게 건의한 글을 가리킨다. 이 글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교는 예의를 앞세우는 곳인데, 달마다 시험을 보아 경쟁하게 하는 것은 전혀 가르쳐서 기르는 방도가 아닙니다. 청컨대 시험을 월과로 고쳐서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학관이 불러서 가르치게 하고, 다시는 고하(高下)를 상고하여 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존현당을 지어서 천하의 도덕이 있는 선비들을 맞이하며, 향공의 정원을 줄여 이익으로 유혹되는 일을 없애며, 번문을 생략하여 위임하기를 오로지하며, 행검을 장려하여 풍교를 돈후하게 하여야 합니다.[學校, 禮義相先之地, 而月使之爭, 殊非敎養之道. 請改試爲課, 有所未至, 則學官召而敎之, 更不考定高下. 制尊賢堂以延天下道德之士, 鐫解額以去利誘, 省繁文以專委任, 勵行檢以厚風敎.]” 《小學 善行》 《二程文集 卷8 三學看詳文》
[주-D079] 높은 …… 말하기를:
아래의 인용한 내용은 《근재집(近齋集)》 권22 〈흥학교설(興學校說)〉에 보인다.
[주-D080] 윗사람을 …… 의리: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임금께서 어진 정치를 행하기만 한다면 이 백성들이 그 윗사람을 친근하게 여기고 어른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것이다.[君行仁政, 斯民親其上, 死其長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81] 육예(六藝):
학생을 교육하는 여섯 가지 과목으로,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를 말한다.
[주-D082] 준양시회(遵養時晦):
때를 따라 힘과 덕을 기르며 자신을 숨김을 이른다. 《시경》 〈주송(周頌) 작(酌)〉에 “아, 성대한 왕의 군대여, 도를 따라 힘을 기르며 때로 몸을 감춘다.[於鑠王師, 遵養時晦.]”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83] 염락(濂洛):
염계(濂溪)와 낙양(洛陽)을 함께 일컫는 말로, 송(宋)나라의 성리학자인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ㆍ정이(程頤)가 거주하던 곳인데, 성리학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D084] 유반계(柳磻溪)가 저술한 수록(隨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을 말한다. 반계는 유형원으로,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이다. 1654년(효종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문과에 떨어지자 벼슬하려는 뜻을 버리고 전라도 부안군(扶安郡) 우반동(愚磻洞)으로 이거하여 거의 20년에 걸쳐 《반계수록》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통치 제도에 관한 개혁안을 중심으로 저술한 책으로, 26권 13책의 분량이며, 토지ㆍ교육ㆍ임용ㆍ군사제도 등에 대한 개혁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주-D085] 저암(著庵) …… 권하였다:
유한준(兪漢雋)이 저술한 유형원(柳馨遠)에 대한 전(傳)이 유한준의 《자저(自著)》 권15 〈유형원전(柳馨遠傳)〉에 보인다.
[주-D086] 정묘(正廟) …… 전교:
병신년은 정조(正祖)의 즉위년인 1776년으로, 영조(英祖)가 이해 3월 5일에 승하한 뒤 5일이 지난 3월 10일에 정조가 중외(中外)의 신료들과 기로(耆老), 군민(軍民) 등에게 내린 전교를 말한다. 《承政院日記 英祖 52年 3月 10日》
[주-D087] 근본을 …… 의리: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사친(私親)이 있다고 할지라도 정식 왕통(王統)만을 근본으로 인정하여서 두 근본을 두지 않는 의리를 말한다. 정조(正祖)는 사친(私親)이 사도세자(思悼世子)이지만 사도 세자가 폐위된 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주-D088] 참담하여 …… 하였는데:
송(宋)나라 때의 학자 소옹(邵雍)이 치평(治平) 연간에 낙양(洛陽)의 천진교 위에서 두견새가 우는 소리를 듣고 참담하여 즐거워하지 않자, 함께 있던 객이 그 까닭을 물었다. 이에 소옹은 낙양에 이전에는 없던 두견새가 온 것은 지기(地氣)가 남에서 북으로 이동한 것으로 장차 혼란해질 조짐이어서, 앞으로 몇 년 내에 임금이 남쪽 인사를 재상으로 등용하게 되면서 남쪽 사람들이 변경을 일삼을 것이라 천하에 연고가 많아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희령(熙寧) 초에 이르러 이 말이 징험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宋名臣言行錄 外集巻五 邵雍》
[주-D089] 임자년 이후에 이르러:
임자년은 1792년(정조16)으로, 이때에 영남 유생(儒生) 이우(李㙖) 등 1만여 명이 연명(聯名)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듬해에는 남인 채제공(蔡濟恭)이 사도세자를 무함한 이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는바, 이 일련의 일들을 가리킨다. 《日省錄 正祖 16年 閏4月 27日, 17年 5月 28日》
[주-D090] 절절시시(切切偲偲):
붕우 간에 간곡하게 권면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로(子路)〉에, 자로가 선비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며 화락하면 선비라 이를 만하다. 붕우 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고, 형제간에는 화락하여야 한다.[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91] 남에게서 …… 것:
원문의 ‘취인위선(取人爲善)’은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대순은 이보다도 더 위대함이 있었으니, 선을 남과 함께하여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르시며, 남에게서 취하여 선을 행함을 좋아하셨다.[大舜有大焉, 善與人同, 舍己從人, 樂取於人以爲善.]”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92] 진수(進修):
‘진덕수업(進德修業)’의 줄임말로, 덕을 진전시키고 업(業)을 닦는다는 뜻인바, 《주역》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보인다.
[주-D093] 소호(韶頀):
순(舜) 임금의 음악과 탕왕(湯王)의 음악으로, 모범이 되는 훌륭한 음악을 가리킨다.
[주-D094] 하학(下學)에 …… 것:
하학이란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일을 뜻하며, 상달이란 오묘한 천리(天理)에 통달함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으면서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워 위로 천리(天理)에 통달하니, 나를 알아주는 이는 하늘일 것이다.[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라고 하였다.
[주-D095] 권독소학문(勸讀小學文):
이 글은 《근재집(近齋集)》 권23 〈권독소학문〉에 실려 있는데, 배우는 이들에게 《소학》을 반드시 먼저 읽기를 권하는 글이다.
[주-D096] 제경(諸經)의 차략(箚畧):
이는 박윤원(朴胤源)이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의례(儀禮)》 등의 소주(小註)와 고주(古註)를 주자(朱子)의 주와 비교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의미 등을 요약해서 적은 글로, 현재 《근재집(近齋集)》 권23과 권24에 보인다.
[주-D097] 성인(聖人)께서는 …… 않으셨으니:
《논어》 〈향당(鄕黨)〉에 “시장에서 사온 술과 포를 먹지 않으셨다.[沽酒市脯不食.]”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주-D098] 인자(仁者)의 …… 의리: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부모가 별세하셨으면 반드시 인자의 곡식을 구하여 이것으로 제사한다.[父母旣沒, 必求仁者之粟以祀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99] 추양(追養):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제사를 지내 뒤미처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통(祭統)〉에 “제사는 부모님에게 다하지 못한 봉양을 추후에 하여서 효도를 계속하는 것이다.[祭者, 所以追養繼孝也.]”라고 하였다.
[주-D100] 예(禮)에서 …… 것: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환공(桓公) 8년 조에 “봄 제사를 사(祠)라 하고, 여름 제사를 약(礿)이라 하고, 가을 제사를 상(嘗)이라 하고, 겨울 제사를 증(烝)이라 한다. …… 사(士)가 이 네 가지를 지내지 못하면 겨울에 갖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 갈옷을 입지 않는다.[春曰祠, 夏曰礿, 秋曰嘗, 冬曰烝. …… 士不及玆四者, 則冬不裘夏不葛.]”라고 하였다.
[주-D101] 태재록(汰哉錄):
이 글은 《근재집(近齋集)》 권24에 보인다.
[주-D102] 충헌공(忠獻公):
박준원(朴準源, 1739~1807)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평숙(平叔), 호는 금석(錦石), 시호는 충헌이다. 박윤원(朴胤源)의 동생이다. 1786년(정조10)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에 셋째 딸이 수빈(綏嬪)에 봉해지자,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거쳐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ㆍ공조 좌랑ㆍ보은 현감이 되었다. 1790년에 수빈이 원자(元子)를 낳자 호산(護産)의 노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1800년에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에 의하여 호조ㆍ형조ㆍ공조의 판서와 금위대장(禁衛大將) 등 삼영(三營)의 병권(兵權)을 잡게 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주-D103] 훈지(壎篪)가 서로 부합되어:
형제 사이의 화목과 조화를 비유할 때 쓰는 표현으로, 훈은 질나발, 지는 젓대를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하인사(何人斯)〉의 “맏형은 훈을 불고 둘째 형은 지를 분다.[伯氏吹壎, 仲氏吹篪.]”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104] 의로운 방도로 가르쳐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3년 조에 보이는 말로,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방자하게 굴자, 현대부(賢大夫)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충간하기를, “신은 듣자오니 자식을 사랑하되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臣聞愛子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하였다. 이 말은 《소학(小學)》 〈계고(稽古)〉에도 실려 있다.
[주-D105] 과체(科體)의 의의(疑義):
의의는 과거시제(科擧試題)의 일종으로, 의(疑)는 경전(經傳)의 의심나는 곳을 논술하여 풀이하는 것이며, 의(義)는 경전의 의의(意義)를 해설하는 것이다.
[주-D106] 못가에서 …… 있겠는가:
서법을 익히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로, 후한(後漢) 때 초성(草聖)으로 일컬어졌던 장지(張芝)가 글씨를 익힐 적에 집안에 있는 모든 의백(衣帛)에다 반드시 글씨를 쓴 후에 이를 빨곤 했으므로, “못가에서 글씨를 연습하여 못물이 다 검게 되었다.[臨池學書, 池水盡黑.]”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晉書 衛恒傳》
[주-D107] 복철(覆轍):
수레바퀴가 뒤집힌 자취라는 뜻으로 앞서의 실패를 비유해서 이르는 말이다.
[주-D108] 외람되이 …… 되었으니:
박윤원(朴胤源)의 동생인 박준원(朴準源)의 셋째 딸이 1787년(정조11) 정조와 혼인을 맺어 수빈(綏嬪)에 봉해진 것을 말한다.
[주-D109] 선조의 남은 경사: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110] 졸렬함을 지켜서:
질박함을 지킨다는 뜻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켜 재주를 자랑하거나 벼슬하지 않음을 이른다. 진(晉)나라 도연명의 〈귀원전거(歸園田居)〉에 “남쪽 들판에서 황폐한 밭 일구며 졸렬함을 지켜 전원으로 돌아왔다.[開荒南野際, 守拙歸園田.]”라고 하였다.
[주-D111] 관유안(管幼安)이 …… 일:
관유안은 삼국 시대의 위(魏)나라 학자 관녕(管寧)으로, 유안은 그의 자이다. “관녕이 한 나무 평상에 앉았었는데, 50여 년이 되도록 일찍이 다리를 뻗은 적이 없어 그 평상 위에 무릎이 닿은 곳이 모두 뚫어졌다.[管寧嘗坐一木榻, 積五十餘年, 未嘗箕股, 其榻上當膝處皆穿.]”라는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卷11 魏志 管寧傳》 《小學 善行》
[주-D112] 얼음과 소태나무의 지조: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쓴 소태나무를 씹으면서 굳게 지키는 절조를 말한다.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3년 동안 자사로 있으면서,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쓴 소태를 씹었노라.[三年爲刺史, 飮氷復食蘗.]”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白樂天詩集 卷1 三年爲刺史》
[주-D113] 본방(本房):
임금의 장인댁(丈人宅)을 가리킨다.
[주-D114] 입을 닫고:
원문의 ‘색태(塞兌)’는 욕심이 나오는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막는 것이다. 《도덕경(道德經)》 52장에 “입을 막고 문을 닫으면 종신토록 수고롭지 않게 된다.[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라고 보인다.
[주-D115] 척리(戚里):
왕실의 외척을 말한다. 본래 중국 장안의 마을이름인데, 한(漢)나라 때에 내척과 외척이 많이 살았으므로 전하여 외척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D116] 졸렬함을 지키고자 한다면:
질박함을 지킨다는 뜻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켜 재주를 자랑하거나 벼슬하지 않음을 이른다. 진(晉)나라 도연명의 〈귀원전거(歸園田居)〉에 “남쪽 들판에서 황폐한 밭 일구며 졸렬함을 지켜 전원으로 돌아왔다.[開荒南野際, 守拙歸園田.]”라고 하였다.
[주-D117] 홍국영(洪國榮):
1748~178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덕로(德老)이다. 영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ㆍ사서(司書)가 되었고, 벽파(僻派)의 탄압 속에서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을 보호한 공로를 세웠다. 정조가 즉위한 뒤에 두터운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를 지내고 도승지에 올라 대제학ㆍ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누이동생을 정조의 빈(嬪)으로 들이고,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의 아들인 담(湛)을 완풍군(完豐君)에 봉하여 왕의 후계자로 삼기를 도모하는 등 세도정권의 유지에 힘쓰다가 효의왕후(孝懿王后) 독살 시도가 발각되어 축출되었다.
[주-D118] 민홍섭(閔弘燮):
1735~1777.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재(大哉)이다. 문과에 급제 후 관직에 나아가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으나, 홍술해(洪述海)의 아들인 홍상범(洪相範)과 홍상길(洪相吉)이 자객 전흥문(田興文)과 호위군관 강용휘(姜龍輝) 등을 시켜 비수와 철편을 지니고서 존현각(尊賢閣)의 용마루에 올라가 정조를 살해하도록 하였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던 사건에 민홍섭도 연루되어 처벌되었다.
[주-D119] 자사(子舍)에 있으셔서:
자사는 각 고을의 관아에서 수령의 자제가 거처하던 곳을 이른다. 박윤원의 부친인 박사석(朴師錫, 1713~1774)이 1763년(영조39) 5월에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 부임하였다. 《近齋集 卷28 先考公州牧判官府君行狀》
[주-D120] 심상운(沈翔雲)과 심익운(沈翼雲):
심상운(1732~1776)의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봉여(鳳汝)이다. 심익운(1734~?)의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붕여(鵬如), 호는 지산(芝山)이다. 심상운의 동생이다. 심상운과 심익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으나, 심상운은 훗날 정조가 된 세손을 해치려 했다는 탄핵을 받았고 심익운은 패륜(悖倫)한 죄로 탄핵을 받아 함께 서인으로 폐출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심상운은 정조가 즉위한 후에 친국을 받고 사사되었다.
[주-D121] 홍낙임(洪樂任):
1741~180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숙도(叔道), 호는 안와(安窩)이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아들로 영조 때 문과에 장원하여 정언(正言)ㆍ문학(文學)ㆍ사서(司書)ㆍ승지(承旨) 등의 벼슬을 지냈다. 1801년(순조1) 신유사옥 때에 체포되어 제주도에 안치되었다가 그해 5월에 사사(賜死)되었다.
[주-D122] 모기령(毛奇齡):
1623~1713. 명말청초의 학자로, 자는 대가(大可), 호는 추청(秋晴)이다. 양명학(陽明學)의 영향을 받았으며 고증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인용은 방대했지만 상세하게 확인하지 않아 오류가 많다는 비판을 받았다. 《사서개착(四書改錯)》을 지어 주자를 비판하였다.
[주-D123] 중용과 …… 설:
모기령(毛奇齡)이 《중용》과 《대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남긴 글로, 예컨대 그의 〈중용설(中庸說)〉, 〈대학증문(大學證文)〉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주-D124] 부자간에 …… 것:
음란함으로 인륜을 어지럽히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오직 금수만은 예가 없기 때문에 부자간에 암컷을 공유한다.[夫唯禽獸無禮, 故父子聚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125] 승냥이와 수달:
제사를 지내는 짐승으로 알려져 있다. 《예기》 〈왕제(王制)〉에 “수달이 물고기로 제사한 뒤에 우인이 택량에 들어가며, 승냥이가 짐승으로 제사한 뒤에 사냥을 한다.[獺祭魚, 然後虞人入澤梁, 豺祭獸, 然後田獵.]”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엄릉 방씨(嚴陵方氏)의 주에 “수달이 물고기로 제사하는 것은 맹춘(孟春)의 달이고, 승냥이가 짐승으로 제사하는 것은 계추(季秋)의 달이다.”라고 하였다.
[주-D126] 신유년에 이르러서:
신유년은 1801년(순조1)으로, 이해에 천주교도를 탄압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른바 신유박해(辛酉迫害),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 불린다. 천주교는 정조의 관대한 정책에 의해 18세기 말에 전국적으로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으나 정조가 죽은 뒤 순조가 즉위하자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본격적으로 탄압하였다.
[주-D127] 갑신년 …… 매몰됨에:
갑신년은 숭정(崇禎) 17년인 1644년으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한 것을 말한다. 이해 3월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포위하여 함락시키자, 명(明)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즉 숭정제(崇禎帝)가 자금성의 북쪽에 있는 경산(景山)으로 가서 처첩과 딸들을 죽이고 목을 매달아 자결하였다. 신주는 중국의 미칭(美稱)으로 ‘적현신주(赤縣神州)’의 줄인 말이다. 《사기》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중국을 적현신주라 하는데 적현신주의 안에 구주(九州)가 있으니, 하우(夏禹)가 만든 구주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보인다.
[주-D128] 춘추(春秋)에 …… 하였다:
“융(戎)이 범백(凡伯)을 벌(伐)하였다.”라는 말은 은공(隱公) 7년 조에 보이는데, 천자가 주(周)나라의 향사(鄕士)인 대부(大夫) 범백을 노(魯)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빙문하였는데, 융(戎)이 초구(楚丘)에서 길을 막고 데리고서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주-D129] 노련(魯連)은 …… 여겼으니:
노련은 노중련(魯仲連)이라고도 하는데,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로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나 얽매여 사는 것을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고 조(趙)나라에 은거한 인물이다.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여러 제후들이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감히 조나라를 구원하지 못하였다. 위(魏)나라의 안희왕(安釐王)은 조나라를 구원하고자 군대를 보냈는데, 진나라가 위협하자 위군은 진군하지 못하였다. 위나라에서는 신원연(新垣衍)이란 변사(辯士)를 조나라에 보내, 진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는 계책을 말하게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노중련이 “저 진(秦)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자칭하고 죄악으로 천하에 정사를 한다면, 나는 동해에 뛰어들어 죽을 뿐이요, 내 차마 그 백성은 될 수가 없다.[彼卽肆然而爲帝, 過而爲政於天下, 則連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50리 뒤로 물렸다고 한다. 《史記 卷83 魯仲連鄒陽列傳》
[주-D130] 항상 …… 하였다:
이 부분은 《매산집》 권38에 실려 있는 〈근재박선생묘지명(近齋朴先生墓誌銘)〉에서는 이 아래의 문단의 마지막 부분에 적혀 있으나, 여기에서는 우선 이 글의 원문의 순서를 따라서 번역해두었음을 밝혀둔다.
[주-D131] 요순(堯舜)보다 …… 것인데: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재아가 말하였다. ‘나로서 부자를 관찰하건대 요순보다 훨씬 훌륭하시다.’[宰我曰: 以予觀於夫子, 賢於堯舜遠矣.]”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재아는 공자의 제자인 재여(宰予)이다.
[주-D132] 이병모(李秉模)가 …… 가하였다:
이병모(1742~1806)가 1796년(정조20) 진하사(進賀使)로 청(淸)나라에 들어가 황극전(皇極殿)에 시를 지어 바치기를, “비루한 한(漢)ㆍ당(唐)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요순보다 어진 임금을 다행히 몸소 만났도다.[陋矣漢唐何足道, 賢於堯舜幸躬逢.]”라고 하였는데, 이를 가리킨다. 가한(可汗)은 왕을 뜻하는 중세 몽골어 ‘khan’의 음역어이다. ‘카칸’ 또는 ‘칸[汗]’으로 약칭하기도 하는데, 본문에서는 청 인종(淸仁宗)을 가리킨 것이다. 1798년에 원자(元子)를 위한 강학청(講學廳)이 설치되어 좌의정으로 있었던 이병모가 박윤원(朴胤源)을 서연관으로 천거하였는데, 박윤원이 ‘저 사람은 춘추의 죄인이다.’라고 하고는 출사하지 않았다. 《正祖實錄 22年 1月 11日》 《純祖實錄 3年 3月 26日》 《艮齋集 後編續 卷7 全齋先生語錄》
[주-D133] 왕역(往役):
임금의 명에 따라가서 부역에 종사하는 것을 이른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서인이 임금이 불러 부역을 시키면 가서 부역을 하고, 군주가 자신을 만나보고자 하여 부르면 가서 보지 않음은 어째서입니까?[庶人召之役則往役, 君欲見之, 召之則不往見之, 何也?]”라고 보인다.
[주-D134] 이업(李鄴)이 …… 짓:
송 휘종(宋徽宗) 때 급사(給事) 이업이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금나라 사람은 말을 타는 데는 용과 같고, 걷는 데는 호랑이와 같으며, 물을 건너는 데는 물개와 같고, 성에 올라가는 데는 원숭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가 오랑캐의 형세를 너무 과장해서 말했다고 하여, 그를 사여급사(四如給事)라 칭하였다. 《星湖僿說 卷23 四如給事》
[주-D135] 송사(宋史)에서 …… 것:
금(金)나라의 군주 옹(雍)은 금나라의 세종(世宗) 완안옹(完顔雍)을 가리키는데, 그의 성품이 인후(仁厚)하여 군병을 일으키지 않아서 북인(北人)들이 소요순(小堯舜)이라 일컬었다는 기록이 《송사전문(宋史全文)》 권27하 〈송 효종8(宋孝宗八)〉에 보인다.
[주-D136] 권의 문자(權宜文字):
권의란 사정상 임시로 대처함을 뜻하는데, 여기서 권의 문자는 청(淸)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위하여 지은 글들을 가리킨다.
[주-D137] 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을 입고:
법복이란 법도에 맞는 옷으로, 《소학》 〈명륜(明倫)〉과 《효경(孝經)》 〈경대부장(卿大夫章)〉에 공자가 증자(曾子)에게 “선왕의 법도에 맞는 옷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않으며, 선왕의 법도에 맞는 말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않으며, 선왕의 덕행이 아니면 감히 행하지 않는다.[非先王之法服, 不敢服; 非先王之法言, 不敢道; 非先王之德行, 不敢行.]”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주-D138] 영해(嶺海)와 정확(鼎鑊):
영해는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 지방으로 귀양을 가는 것을 뜻하며, 정확은 죄인을 삶아 죽이는 큰 솥으로 혹독한 형벌을 가리킨다.
[주-D139] 부월(斧鉞)이 화곤(華衮)으로 변하였으니:
형벌이 영예로 변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부월은 출정하는 대장(大將)에게 임금이 손수 주던 큰 도끼로, 이것을 가지고 전쟁 중에 형륙(刑戮)을 임의대로 행할 수 있었으므로, 인신하여 형벌을 뜻하며, 화곤은 고대 왕공(王公)과 귀족의 복장으로, 지극한 영예를 뜻한다. 진(晉)나라 범녕(范甯)의 〈춘추곡량전 서(春秋穀梁傳序)〉에 “《춘추》의 한 글자의 칭찬이 화곤을 받는 것보다도 영광스럽고, 한마디의 비판이 시장에서 맞는 회초리보다도 욕되다.[一字之褒, 寵逾華袞之贈, 一言之貶, 辱過市朝之撻.]”라는 말이 나온다.
[주-D140] 미완(微婉):
은미하고 완곡하게 한다는 뜻으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31년의 “《춘추》에서 칭한 것을 보면, 은미하면서도 밝게 드러나게 하고 완곡하면서도 분명히 구별되게 한다.[春秋之稱. 微而顯. 婉而辯.]”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141] 서질(敍秩)과 명토(命討):
서(叙)는 군신ㆍ부자ㆍ형제ㆍ부부ㆍ붕우의 차례를 말하고, 질(秩)은 존비와 귀천에 대한 등급의 높고 낮은 품질(品秩)을 말하며, 명(命)은 하늘이 덕이 있는 이를 명하면 관작을 주는 것이고, 토(討)는 하늘이 죄 있는 사람을 토벌하면 형벌을 내려 징계하는 것을 가리킨다. 《書經 皐陶謨》
[주-D142] 하전(廈氈):
하(廈)는 큰 집이고 전(氈)은 가는 털방석으로, 원래는 임금이 거처하는 대궐 또는 왕좌를 일컫는데, 여기서는 경연의 강석(講席)의 뜻으로 쓰였다.
[주-D143] 어수지교(魚水之交):
임금과 신하가 서로 감응하여서 의기투합하는 것을 말한다.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얻고 나서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주-D144] 처지는 외척(外戚)의 사의(私義)이고:
박윤원(朴胤源)의 동생인 박준원(朴準源)의 셋째 딸이 정조와 혼인을 맺어 수빈(綏嬪)에 봉해졌으므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주-D145] 대방(大防):
중요한 일이나 어떤 원칙의 넘지 못할 한계를 이르는 말로 흔히 예법(禮法)을 비유한다.
[주-D146] 상용(尙容):
김상용(金尙容, 1561~1637)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을 터뜨려 순절하였다.
[주-D147] 곤궁하면서도:
원문의 ‘고궁(固窮)’은 의리를 고수하면서 곤궁한 처지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곤궁해도 편히 여기며 의리를 고수하지만, 소인은 곤궁하면 본분을 잊는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148] 박문(博文)을 …… 돌아와서:
박문은 문(文)을 널리 배움이고 약례는 예(禮)로써 요약함을 이른다. 《논어》 〈옹야(雍也)〉 “문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博學於文, 約之以禮.]”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149] 규구준승(規矩準繩):
규는 원(圓)을 만드는 기구이고, 구는 방형(方形)을 만드는 기구이며, 준은 측평기(測平器)이고, 승은 먹줄인바, 표준이 되는 법도(法度)를 뜻하는 말이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성인이 이미 시력을 다하시고 규ㆍ구ㆍ준ㆍ승으로써 계속하시니, 방ㆍ원ㆍ평ㆍ직을 만듦에 이루 다 쓸 수가 없다.[聖人, 旣竭目力焉, 繼之以規矩準繩, 以爲方員平直, 不可勝用也.]”라고 하였다.
[주-D150] 진수(進修):
‘진덕수업(進德修業)’의 줄임말로 덕을 진전시키고 업(業)을 닦는다는 뜻인바,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보인다.
[주-D151] 난초 …… 것:
높은 덕을 비유한 말로,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선(善)한 사람과 같이 지내는 것은 마치 지란(芝蘭)이 놓인 방안에 들어가 오래 향기를 맡으면 그 향기를 느끼지 못하지만 저절로 선에 훈화(熏化)된다.”라고 한 말이 있으며, 《근사록(近思錄)》에 주광정(朱光庭)이 명도(明道) 정호(程顥)를 만나 한 달 동안 함께 지내고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나는 한 달 동안 봄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光庭在春風中坐了一箇月]”라고 한 말이 보인다.
[주-D152] 못처럼 …… 우뚝하여서:
훌륭한 인품을 비유한 말로, 진(晉)나라 석숭(石崇)의 시 〈초비탄(楚妃嘆)〉에 “용맹한 장왕이여, 못처럼 깊고 산처럼 우뚝하도다.[矯矯莊王, 淵渟岳峙.]”라고 하였다.
[주-D153] 고명한 데에:
‘고명(高明)’이란 《중용장구》 제27장에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미암는 것이니, 광대함을 이루고 정미함을 다하며, 고명함을 다하고 중용을 말미암는다.[君子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154] 원대함:
원문의 ‘구대(久大)’는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의 “친함이 있으면 오래할 수 있고 공이 있으면 크게 할 수 있으며, 오래할 수 있으면 현인의 덕이요 크게 할 수 있으면 현인의 업이다.[有親則可久, 有功則可大, 可久則賢人之德, 可大則賢人之業.]”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주-D155] 공성(孔聖)이 …… 의리:
공성은 공자(孔子)로,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세상이 쇠하고 도가 미약해져서 부정한 학설과 포학한 행동이 또 일어나서 신하가 제 임금을 시해하는 자가 있고, 자식이 제 아버지를 시해하는 자가 있었다. 공자께서 이것을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으셨다.[世衰道微, 邪說暴行有作, 臣弑其君者有之, 子弑其父者有之. 孔子懼, 作春秋.]”라고 하였으며, 이에 대해 주자(朱子)는 주(註)에서 “공자께서 《춘추》를 지어 난신적자를 주벌하였다.[作春秋, 以討亂賊.]”라고 하였다.
[주-D156] 추맹(鄒孟)이 …… 가르침:
추맹은 맹자(孟子)로, 맹자가 추나라에서 출생했기에 이렇게 일컬은 것이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 또한 인심을 바로잡아 부정한 말을 그치게 하고, 잘못된 행동을 막으며, 음탕한 말을 내쳐서 세 성인을 계승하고자 하노니,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내가 마지못해서이다. 능히 양주, 묵적의 도를 막을 것을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이다.[我亦欲正人心, 息邪說, 距詖行, 放淫辭, 以承三聖者, 豈好辯哉? 予不得已也. 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라고 하였다. 잘못된 행동은 이단(異端)의 언행을 말한 것이다.
[주-D157] 자정(自靖)하여서 …… 것:
자정은 스스로 분의(分義)에 맞게 처신하여 지조를 지킴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서경》 〈상서(商書) 미자(微子)〉에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게 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자신의 뜻을 선왕에게 바친다.[自靖, 人自獻于先王.]”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주-D158] 이것은 …… 같겠는가:
이 부분은 《사기(史記)》 권13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공자의 《춘추(春秋)》 저술을 두고,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빈말에 기재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실제 행한 일에서 나타내는 것이 깊고 간절하여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만 못하다.[我欲載之空言, 不如見之於行事之深切著明也.]’ 하였다.”라고 한 말을 원용한 것이다.
[주-D159] 교화를 …… 덕:
이 부분은 《중용장구》 제30장에 “만물이 함께 길러지면서 서로 해치지 않으며, 도가 함께 행해지면서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작은 덕은 냇물의 흐름과 같고, 큰 덕은 교화를 도타이 하니, 이것이 바로 천지가 위대한 까닭이다.[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小德, 川流; 大德, 敦化. 此天地之所以爲大也.]”라고 한 부분을 원용한 것이다.
[주-D160] 독실하게 …… 한다:
이 말은 《논어》 〈태백(泰伯)〉에 보인다.
[주-D161] 부귀가 …… 못한다:
이 말은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보인다.
[주-D162] 역책(易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이르는 말로, 증자(曾子)가 임종 시에 자신이 깔고 누운 대자리가 신분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즉시 자리를 바꾸었던 일에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上》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김성은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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