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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강: 東學이란 무엇인가?
1. 대화
항상 이렇게 열렬하게 환영해 주어서 감사하다. 앞으로 두 번이면 제 강의가 끝난다. 시청자 여러분과 방청객 여러분께서 저와 깊은 교감을 하고, 이렇게 훌륭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강의이다.
한 사람의 강의가 TV에서 6개월간이나 계속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TV 강의는 긴장감이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많았으나 MBC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다. MBC에 감사의 박수를 부탁한다.
여기에 강의를 들으시러 6개월 동안 나오신 분들에게 제가 써서 드리지는 못하지만, 박사학위를 드리겠다.
제가 땀을 많이 흘리는 것이 안쓰러워서 한복을 만드시는 이영희 선생께서 이렇게 예쁜 모시옷 한 벌을 지어 보내주셨다. 옛날부터 모시 두루마기는 ‘모시고 다닌다.’고 했는데 귀하고 아름다운 옷을 보내주어서 감사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우리가 좋아하는 국회의원 한 분이 와 있다. 대전시 출신의 김원웅 의원을 잠깐 모셔보겠다.
김원웅(金元雄)
독립투사 아들로 중국 중경에서 태어나 대전고, 서울대 졸업. 대만정치대학 석사. 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3선)
도올: 본 강의를 들어보신 적 있나?
김 : 전부는 아니지만, 봤다. 동학 하면 와 닿는 것이 있는데, 우리 민족의 애환이 깃들여 있고, 지도자나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민초로부터 흘러나오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월드컵 4강 진출의 신화를 이룰 때 ‘꿈은 이뤄진다’는 플래카드를 보면서, 그 때 동학이 갖고 있던 끈질긴 생명력, 우리 민중의 갇혀져 있던 꿈이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동학은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우리 민중의 가슴속에 생명처럼 계속 살아나고 있다. 앞으로 우리 자랑스러운 아들딸들에게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이 있는, 꿈이 있는 나라를 넘겨주고 싶다면, 그 바탕이 동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올 : 정치인들이 소아를 버리고, 작은 문제를 가지고 꾸물대지 말아야 한다. 동학을 생각하면 우리 민족 전체의 애환을 생각해야 한다. 작은 문제에 구애받지 말고 서로 화합하여 대국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넓은 아량을 가지고 정치인들이 정치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2. 논학문
지난 시간에 수운이 득도하는 모습을 강의했다. 수운(水雲)이라는 사람의 세계에는 모순적인 것이 많다. 초월적인 인격자로서의 하느님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인격적인 신이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정반대의 모순되는 논리가 항상 같이 있다.
초월(trancendence) ↔ 내재(immanece)
수운은 정직하고 평범한 거 같으면서, 영부를 태워서 먹는다든지 하는 미신적인 면도 갖고 있다.
상식(common sence) ↔ 미신(superstition)
나중에 해월 선생이 이런 미신적인 것을 다 없애버린다. 수운의 사상을 알려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논학문(論學文)이라는 글이다. 함께 보자.
논학문(論學文)
<동경대전>의 두 번째 글
▶ 西洋之人(서양지인), 道成立德(도성입덕), 及其造化(급기조화), 無事不成(무사불성).
[서양 사람은 도성입덕하여, 그 조화에 미치어 일을 이루지 못함이 없다.]
서양 사람들은 도를 이루고 덕이 서 있어서, 세상 조화에 있어서 못하는 것이 없다. 이 사람들이 손을 대면 모두 대단하게 이룬다. 그 당시 서양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들어왔다.
▶ 功鬪干戈(공투간과), 無人在前(무인재전), 中國燒滅(중국소멸), 豈可無脣亡之患耶?(기가무순망지환야):
[무기로 침공함에 당할 사람이 없다하니 중국이 소멸하면 어찌 가히 순망의 환이 없겠는가?]
그래서 싸우면 당해낼 자가 없고, 중국이 소멸해버리니깐, 이 어찌 순망지환(脣亡之患)이 없을 것인가?
순망지환(脣亡之患)이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라는 좌전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이 없어지면 조선도 멸망할 게 뻔한 거 아니냐는 말이다.
중국은 아편전쟁(1640~42)으로 서양열강에 무릎을 꿇었고, 태평천국의 난(1850~64)으로 질서가 크게 무너졌다.
중국이 저렇게 멸망하는데, 어떻게 조선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느냐는 말이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도 망가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 都緣无地(도연무지), 斯人道稱西道(사인도칭서도), 學稱天主(학칭천주), 敎則聖敎(교즉성교).
[도무지 다른 연고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도를 서도라 하고, 학을 천주학이라 하고, 교는 성교라 하니,]
서양 사람들은 도를 말할 때는 서도(西道)라 하고, 학(學)으로 말할 때는 천주라 했다. 즉 배워야 할 것은 하느님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가르침으로 말할 때는 성교(聖敎)라 한다. 성스러운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 此非之天時(차비지천시), 而受天命耶?(이수천명야),
[이것이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것은 천시(天時)를 알고 천명(天命)을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 뭔가 대단한 체계가 있다는 말이다. 서학이라고 하는 것이 간단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서양 사람들이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서양을 긍정하고 있다.
▶ 擧此一一不已(거차일일불기), 故吾亦悚然(고오역송연):
[이런 것은 일일이 다 말할 수 없고, 그래서 나 역시 무서워졌다.]
이런 것을 일일이 들자면 끝이 없다. 그래서 나도 역시 무서워졌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생각할 적에,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우리 앞날을 생각할 적에, 이런 어마어마한 기독교가 중국을 이미 쓸어버리고, 탱크처럼 한국으로 밀고 들어오는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다.
▶ 只有恨生晩之際(지유한생만지제):
[다만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즈음에,]
단지 내가 늦게 태어난 것이 한(恨)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수보다 일찍 태어났더라면 이런 꼴이 되지 않았을 것인데,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당하기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일찍 태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했더라면, 뭔가 인류의 역사를 앞서 끌어갈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당하기만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 身多戰寒(신다전한), 外有接靈之氣(외유접령지기), 內有降話之敎(내유강화지교),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으되,]
그런데 어느 날, 몸이 막 떨리고 나서, 바깥에서 어떤 영험서린 기운이 다가와서 접하는 느낌이 있었다고 한다. 즉 그것이 밖에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이다. 공중에서 외난소리가 있었다고 했다.
안에서는 降話之敎, 즉 어떤 메시지가 들려왔다는 말이다. ‘나는 상제다, 너는 나를 모르느냐?’하면서 들려왔는데, 수운은 이것을 밖에서 들려온 이야기라고 하지 않고, 안(內)에서 들려왔다고 고쳤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밖으로는 어떠한 신령한 기운을 접했고, 소리는 사실 내 속에서 들려왔다고 한다. 內有降話之敎가 중요한 말이다. 포덕문에서 논학문으로 오면, 밖에서 외치던 소리가, 이제는 나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로 바뀌는 것이다.
▶ 視之不見(시지불견), 聽之不聞(청지불문), 心尙怪訝(심상괴아):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마음이 뭔가 의아스럽고, 불안했다고 한다.
▶ 修心正氣而問曰(수심정기이문왈):「何爲若然也?;하위약연야」
[수심정기하고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동학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말이 수심정기(修心正氣)이다. 수심정기를 다들 ‘守心正氣’라고 쓰는데, 물론 이 말도 수운은 썼다. 그러나 ‘修心正氣’가 더 수운의 오리지널한 생각이다.
마음을 닦고 그 기를 바르게 해서 묻는다. “어찌해서 내가 벌벌 떨고, 이상하게 되는 겁니까?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하고 공중에서 외치는 상제한테 물었다는 말이다.
▶ 曰(왈): 吾心卽汝心也(오심즉여심야), 人何知之!(인하지지),
[대답하시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그러니깐 하나님이 말하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고 한다. 이게 소위 말하는 인내천(人乃天)이 되는 것이다. 수운, 너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것을 어찌 알리오!
▶ 知天地(지천지), 而无知鬼神.(이무지귀신), 鬼神者(귀신자), 吾也.(오야):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라는 것도 나리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람들이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 귀신이 나라고 한다. 이게 굉장히 복잡하면서도 절묘한 이야기다. 그래서 동학이라는 게 어렵다.
최한기의 기학에서도 활동운화(活動運化)하는 천지 바깥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천지는 아는데, 귀신은 모른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천지를 물리적인 현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귀신이 있다고 한다. 천지에는 무언가 영험스러운 기운이 있다는 것이다. 그 영험스러운 기운을 압축한 존재가 바로 ‘나의 마음’이다.
천지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귀신인데, 그 귀신은 바로 ‘나’다. 그리고 귀신인 ‘나의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고 한다. 최수운의 논리는 중층적이고 복잡하다. 현대 신학적으로 보아도 굉장히 복잡하다.
▶ 吾亦幾至一歲(오역기지일세), 修而度之(수이탁지), 則亦不无自然之理(즉역불무자연지리):
[나 또한 거의 한 해를 닦고 헤아려 본즉, 또한 자연한 이치가 없지 아니하므로]
1년 동안을 잘 생각해보니, 그게 무슨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거기에 어떤 자연스러운 이치가 있다는 말이다.
▶ 轉至辛酉(전지신유), 四方賢士進我(사방현사진아), 而問曰(이문왈): 今天靈降臨先生(금천령강림선생), 何爲其然也(하위기연야),
[신유년에 이르러 사방에서 어진 선비들이 나에게 와서 묻기를 ‘지금 천령이 선생님께 강림하였다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신유년에 이르러, 사방에서 지식인들이 모여들어서 자기에게 묻기를, 하늘의 영이 당신한테 강림했다고 하는데, 그게 어찌된 일이오?
▶ 曰(왈): 受其无往不復之理(수기무왕불복지리):
[대답하기를 ‘가고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이치를 받은 것이니라.’]
수운이 답하길, 나는 ‘무왕불복지리’를 받은 것뿐이라고 한다.
▶ 曰(왈): 然則何道以名之?(연칙하도이명지).
[묻기를 ‘그러면 무슨 도라고 이름합니까?’]
그러면 당신의 도는 무엇이라고 이름을 하오리까? 당신이 무왕불복지리라고 했는데, 그것을 무슨 도라고 이름을 지으리까?
▶ 曰(왈): 天道也(천도야):
[대답하기를 ‘천도이니라.’]
이때 말한 게 ‘천도’이다.
여기의 천(天)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하다. 이 사람이 생각하는 천(天)은 천지의 자연적인 이치로서의 천(天)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인격적인 존재자인 상제(上帝)일 수도 있다. 이 사람은 하늘님이라고 했다. 기독교도 天主라고 했다.
천도의 ‘도’는 그냥 길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그냥 살아가는 게 아니라, 길이 있어서 가는 것이다. 우리는 길을 따라 산다. 아무렇게나 사는 게 아니다.
자신의 도는 어떠한 보편적인 하늘님에 관한 도라는 뜻이다. 그래서 천도라고 했다.
▶ 曰(왈): 與洋道無異者乎(여양도무이자호):
[묻기를, 양도와 다른 것이 없습니까.]
그러면, ‘서양의 양도하고 다른 게 있습니까?’하고 묻는다. 왜냐하면 서양 사람들도 천주학이라고 하면서 하늘님의 도를 말하지 않느냐? 그것과 뭐가 다릅니까?
▶ 曰(왈): 洋學如斯而有異(양학여사이유이), 如呪而無實.(여주이무실),
[대답하기를, 양학은 우리 도와 같은 듯 하나 다름이 있고, 비는 것은 같으나 실지가 없느니라.]
서양의 천주학, 양학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말하는 것과 뭔가 비슷한 거 같지만, 다르다고 한다. 서양의 기독교도 주기도문과 같은 주문이 많지만, 그것은 실(實)하지 않다고 한다. 뭔가 허(虛)하다는 말이다. 알맹이가 없다는 말이다.
▶ 然也運則一也(연야운즉일야), 道則同也(도즉동야), 理則非也(이즉비야):
[그러나 운인 즉 하나요, 도인 즉 같으나 이치인즉 아니니라.]
그러나 천지 대자연이 움직이는 운(運)으로 보면 하나고, 도(道)로 보면 같다고 한다. 말이 아주 묘하고 어렵다. 그런데 리(理)로 보면, 서도는 틀렸다고 한다.
도로 보면, 같은 하늘님에 관한 도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도로 보면 그 내용이 같다고 한다. 하지만 이치로 보면, 서양의 서도는 틀렸다고 한다.
▶ 曰(왈); 何爲其然也(하위기연야):
[묻기를 어찌하여 그렇게 됩니까?]
‘그럼 왜 서양 것은 틀리고, 당신 것은 맞다고 하십니까? 그게 어찌해서 그렇습니까?’ 하고 묻는다.
▶ 曰(왈): 吾道無爲而化矣(오도무위이화의):
[대답하기를 우리 도는 무위이화라.]
그러니깐 하는 말이, 같은 천도라도 내가 말하는 도는 無爲而化라고 한다.
서양의 하느님은, 자기가 인격적으로 앉아서 지배하고 조작하면서, 자기를 싫어하면 벌하고, 야단치는, 무언가 爲가 있는 하나님이지만, 자신이 말하는 하늘님은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한다. 함이 없이 모든 것을 한다는 말이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 曰(왈): 同道言之(동도언지), 則名其西學也?(칙명기서학야):
[묻기를 도가 같다고 말하면 서학이라고 이름 합니까?]
그러니깐 어떤 사람이 묻는다. ‘아까 도로 말하면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천주학도 천도를 말하고, 당신도 천도를 말하고 있으니깐, 당신 것도 서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하고 말하니깐,
▶ 曰(왈): 不然(불연). 吾亦生於東(오역생어동), 受於東(수어동),
[대답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내가 천지의 도로 말하면, 같은 하늘님에 관한, 같은 도라고 했지만, 내 도는 서학이라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나는 서양에서 난 것이 아니라 동쪽에서 났다. 아주 굉장히 간단한 이야기다. 나는 동쪽, 이 조선반도에서 태어나서, 이 조선반도에서 천도를 받았다고 한다.
▶ 道雖天道(도위천도), 學則東學.(학즉동학):
[도는 비록 천도나 학인즉 동학이라.]
도로 말하면 천도이지만, 학으로 말하면 동학이라고 한다.
인류사상 최초로 동학이라는 말이 쓰인 것이 여기다. 이전에는 동학(東學)이라는 말이 없었다. 이전에는 수운도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만 했다. ‘무근대도’라고만 하고, ‘하늘님’이라고만 했지, 동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無極大道: 극이 없는 대도
그런데 서학으로 지목을 받고, 영남의 유림들까지 서학쟁이라고 하면서, 서학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게 단순한 변명은 아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내 도는, 도로 말하면 천주교와 같이 천도, 하늘의 도를 말하는 것이지만, 학으로 말하면, 천주교는 서학이고, 내 것은 동학이라고 한다. 여기서 동학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과거부터 천주교를 서학이라고 했으니깐, 그 말에 반해서 단순하게 동학이라고 했다고 알면 안 된다. 동학이라는 말에는 수운의 이론적인 논리가 있는 것이다.
도는 천도인데, 학으로 말하면, 그 도를 인식하는 방법과 내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無爲而化, 勞而不功.
같은 하늘님을 말하지만, 내 하늘님은 무위이화(無爲而化), 함이 없이 이 세상을 변하게 하고, 노이부공(勞而不功), 노력은 하지만 공은 없고,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그것은 오로지 말씀을 할 때, 내 마음 속에서 내유강화지교(內有降話之敎)라고 한다.
그리고 천지를 바라볼 적엔 단순한 물리적 천지가 아니라, 생명적 천지를 말한다. 저 천지에 귀신이 있지 않느냐? 그 귀신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나는 동학을 볼 때, 눈물이 안 나올 수 없다. 얼마나 감동적인가?
천지를 바라볼 때, 천지에 귀신이 가득하다고 보면서도, 귀신이 도깨비불처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그 귀신이 곧 내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곧 천지의 귀신을 모두 담은, 그렇게 귀한 하느님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우리가 얼마나 권위 있게 살겠는가?
21세기가 되었어도 서양에 아직 이것만한 사상이 없다. 그 당시 우매한 백성들이 기독교로 빨려 들어갈 때, 이미 유교로도 불교로도 우리나라를 구해볼 길이 없었다.
儒道佛道 누천년에 運이역시 다했던가 -교훈가-
서학에 빠져 들어가는 민중들에 대해서 수운 선생은 서학의 장점은 받아들이자고 했다. 그러면서 신을 대면하려고 노력해 보고, 그래서 결국 만났다. 그리고 1년을 고민고민하다가, ‘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이 나의 하나님이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학즉동학(學則東學)이라는 말이 중요한 말이다.
▶
況地分東西(황지분동서), 西何謂東(서하위동), 東何謂西?(동하위서):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라고 이르겠는가.]
여기서 좀 강하게 이야기한다. 땅도 동서를 갈라서 이야기하는데, 왜 서를 동이라고 하고, 동을 서라고 하겠느냐고 한다. 서학과 동학은 다르다!
3. 주문이란?
▶ 曰(왈): 呪文之意何也?(주문지의하야):
[묻기를 주문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 다음에 ‘주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
당신이 주문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쓸데없는 주문을 지어서, 사람을 홀리고, 그따위 짓을 하느냐고 까는 것이다. 이게 굉장히 치열하다.
이 양반이 쓴 것을 보면,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반론을 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반론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수운은 자기가 스스로 반론을 하고 있다. 도대체 네가 뭐냐고 하고 있다. 주문은 무슨 얼어빠진 주문이냐고 한다.
이 다음에 주문을 한 자 한 자(字) 설명한다. 여기 중요한 것이 나온다. ‘侍天主’라는 것이다. 侍天主, 造化定이라고 할 때, 시천주가 핵심이다.
강령주문 : 至氣今至, 謂爲大降. (8자)
본 주문 :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13자)
시(侍)는 모실 시다. 시천주는 하늘님을 모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문 21자를 다 해설했는데, 천(天)자만 은근 슬쩍 빼버렸다. 왜냐하면 여기서 천(天)이라는 글자를 해설해 버리면, 우리가 너무 수운의 언어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천(天)만 빼버렸다.
曰: 氣者(기자), 虛靈蒼蒼(허령창창), 无事不涉(무사불섭), 无事不命(무사불명), 然而如形而難狀(연이여형이난상), 如聞而難見(여문이난견), 見亦渾元之一氣也.(견역혼원지일기야), [기라는 것은 허령이 창창하여 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일에 명령하지 아니 함이 없으나, 그러나 모양이 있는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듯하나 보기는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한 한 기운이요.]
사실 기(氣)를 설명하면서 천에 대한 해설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면서 이 양반은 천(天)에 대한 해설을 뺐다.
▶ 侍者(시자), 內有神靈(내유신령), 外有氣化(외유기화):
[「시」라는 것은 안에 신령(神靈)이 있고 밖에 기화(氣化)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
내가 모셨다고 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내면에 신령스러움이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신령한 존재라는 말이다.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몸의 내면에는 어떠한 신령한 마음이 있고, 이 우주의 신령스러움을 알아차릴 수 있는 신령함이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밖에는 우주의 기가 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밖에는 우주의 기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밖으로는 기화의 세계가 있고, 안으로는 신령함이 있어서, 그 신령함과 기화의 세계가 항상 끊임없이 서로 통한다고 하는 것이 모신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게 아주 절묘한 것이다. 아주 심오한 사상이다.
‘나’라는 존재의 내면에 신령함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의 세계가 있어서 그것이 항상 끊임없이 교류되고 소통하는 것이 모신다고 하는 것이다.
▶ 一世之人(일세지인), 各知不移者也.(각지불이자야):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
各知不移者也는 해설이 좀 어려운데, 그러한 것이 항상 그러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교섭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아는 것이 바로 모신다는 뜻이다. 오늘은 이렇게만 해설한다.
그 다음에 천(天)을 빼고, 주(主)를 해설한다.
4. ‘한울’의 오류
천도교에서 상당히 잘못한 것이, 천(天)을 ‘한울’이라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수운 선생은 용담유사에서 그렇게 쓴 적이 없다. 이것은 야뢰 이돈화라는 사람이 잘못 만들어 놓은 것이다.
@ 야뢰(夜雷) 이돈화(李敦化:1884~?)
천도교 교리조직가. <부인지> <신인간> 잡지를 발행. <개벽>은 야뢰가 발행인으로 되어있지만 실제 소춘 김기전의 창간.
우리는 수운 선생의 가르침을 수운 선생의 말씀대로 알아야 한다. <용담유사>에는 2가지밖에 안 썼다. ‘하늘님’ 아니면, ‘하늘님’ 밖에 없다. ‘날’이 지금은 ‘늘’이 되었다. 그래서 ‘하늘님’밖에는 쓸 수가 없다.
그런데 수운 선생이 ‘하늘님’이라고 한 것을 야뢰가 ‘신인간’인가 하는 곳에서 ‘한’은 큰 것을 말하고, ‘울’은 울타리라고 하면서 잘못 쓴 것이다.
이건 정말 잘못된 것이다. 이건 바로 잡아야 한다. 용담유사에 있는 그대로 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천(天)이라고 하는 것을 하늘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主)는 ‘님’이다. 그래서 천주(天主)하고 한 것이다. 기독교는 하느님 아니면 하나님이라고 한다. 과거 개역성경에서는 하나님으로 했다. 지금의 공동번역에서는 하느님으로 한다.
개역한글판 : 하나님
공동번역판 : 하느님
하나님은 유일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ㄴ 앞에서 ㄹ 받침이 탈락하는 수는 있으나 그것도 전혀 필연적 현상은 아니다.
하늘님에서 ㄹ이 탈락할 수는 있다. 따라서 하느님까지는 가능하다. 예를 들면, 우리가 불나비라고 할 때, 부나비가 된다. ㄴ 앞에서 ㄹ이 탈락한 것이다.
'하늘님'을 ‘하느님’이라고 얘기할 수 있으나, ‘한울님’은 잘못된 것이다. 19세기 말기까지 우리 민중들은 전부 ‘하늘님’이라고 불렀다.
19세기말기까지 조선 민중은 하늘님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그런데 왜 지금 ‘하늘님’이라는 말을 안 쓰냐 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인 ‘하늘’이라는 말에 ‘님’자를 붙이면 뭔가 유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님’보다는 뭔가 다른 말을 써야 했다.
그래서 천도교에서는 바보같이 ‘한울님’이라는 엉터리 말을 만들고, 기독교도 하느님으로 변화를 한 것이다. 그런데 19세기말기까지 우리는 분명하게 ‘하늘님’이라고 했다. 저 푸르고 창창한, 이것을 우리가 ‘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5. 주문 해설
▶ 主者(주자), 稱其尊(칭기존), 而與父母同事者也.(이여부모동사자야):
[‘주’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
하늘이라고만 해도 되는데, 왜 주라는 것을 붙였냐? 그것은 우리가 보통 부모를 부모님이라고 부르지 않냐는 것이다. 여기 공기가 있으면, 공기님이라고 해도 된다. 그것은 그냥 존경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것을 초월적 인격신이니 하면서 개소리를 하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을 ‘님’화 시켜서 ‘하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부모’를 볼 때, ‘부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하늘의 님화는 반드시 초월적 인격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수운은 인격신관의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한다. ‘하늘님’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왜 우리가 ‘님’이라고 붙였느냐? 그것은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때, ‘님’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님’이라고 하면, 하늘에 털보할아버지가 있고, 그런 존재자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뭐든지 우리가 귀한 마음이 있으면, 부모에게도 부모라고 하지 않고, 부모님, 아버님이라고 이야기하듯이 그저 하늘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수운 선생의 원래적 표현인 ‘하늘님’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천(天) 주(主)
하늘 님
천주라고 해서 서학(西學)에서 말하는, 하늘 꼭대기에 앉아서 모든 사람을 감시하면서 ‘나를 믿으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하늘님이 아니라, 그저 옛날부터 청수 한 그릇 떠놓고, 깨끗한 공기, 맑은 물, 이런 것을 모시면서 느끼면서 ‘하늘님! 비나이다, 비나이다.’라고 했던 하늘님! 그 하늘님을 너의 마음에 받아드리면 그것이 동학이라고 한다.
‘侍天主’라는 것은, 우리 인간은 ‘하늘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게 모시면 조화가 정해진다고 한다.
인간은 侍天主의 존재이다.
▶ 造化者(조화자), 无爲而化也(무위이화야), 定者(정자), 合其德(합기덕), 定其心也(정기심야),
[조화라는 것은 무위이화요. 정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요,]
조화라는 것은 함이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조화가 정해진다고 하는 것은 뭐냐? 그 덕을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바르게 정하는 것이다.
▶ 永世者(영세자), 人之平生也(인지평생야), 不忘者(불망자), 終想之意也(종산지의야), 萬事者(만사자), 數之多也(수지다야), 知者(지자), 知其道(지기도), 而受其知也(이수기지야):
[영세라는 것은 사람의 평생이요, 불망이라는 것은 생각을 보존한다는 뜻이요. 만사라는 것은 수가 많은 것이요. 지라는 것은 그 도를 알아서 그 지혜를 받는 것이니라.]
영세는 천지가 창조되어 천지가 끝날 때까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세는 한 인간의 평생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우주의 시작과 끝은 한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라고 한다.
영세라는 것은 영원한 하늘나라가 아니고, 사람이 태어나서 죽은 것이니깐 그 평생 동안 수신정기하며 살자는 것이다. 영세라는 것은 한 사람의 평생이라고 한다.
불망이라는 것은 항상 잊지 않고 ‘하늘님’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늘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신다는 것은 뭐냐? 나의 마음 속에는 신령스러움이 있고, 밖에는 항상 기화의 세계가 돌아가고 있으며, 이것은 항상 끊임없이 교섭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망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잊지 말아야 하고, 항상 우리 마음에 보존하고 살자고 하는 것이다.
만사를 안다는 것은 ‘하늘님’의 도를 알고, 깨달은 것을 내 마음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안다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주문 21자를 만들어 놓고, 이렇게 치열하게 한 자, 한 자 해설을 한다. 해설을 하고 마지막에 결론을 이야기한다.
▶ 故明明其德(고명명기덕), 念念不忘(염념불망), 則至化至氣(즉지화지기), 至於至聖.(지어지성),
[그러므로 그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에 이르느니라. ]
고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지지덕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덕을 항상 밝히고 또 밝히고, 항상 생각 생각마다 그걸 잊지 않고, 지극한 기운으로 화하는데 이르게 되면, 우리는 지극한 성인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동학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굉장히 종교적인 색채를 가지고 나왔지만, 결국 끌고 간 곳은 모든 사람이 성인의 길로 가는 것이었다.
吾道博而約(오도박이약), 不用多言義(불용다언의):
내 도는 너르나 간결하고, 많은 말이 필요없다. -수운-
6. 동학이란?
동학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전부, 동학의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잘못 해석해서, 초월적인 하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주문을 외우고, 立身하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부를 태워 마시면, 검던 얼굴이 희게 되고, 머리털도 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런 걸 바라는 게 동학이 아니다.
그럭저럭 먹은부가 수백장이 되었더라
칠팔삭 지내나니 가는몸이 굵어지고
검던낯이 희어지네 - 안심가 -
동학이라고 하는 것은 초월과 내재, 인격성과 비인격성, 유신론과 무신론, 유일신론과 범신론, 이런 모든 적대적인 관계를 어떻게 해소할지 고민했다.
처음에 수운은 서학적인 하느님을 만났다. 그리고 자꾸만 의심했다. ‘서학을 가르치리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아니라고 한다.
자신은 이 땅에서 태어나서 이 땅에서 도를 받았는데 하늘님도 내 하늘님을 찾아야지 어떻게 서양에서 하늘님을 받느냐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받은 도만이 하늘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서학이나 자신이 말하는 도는 다 같이 천도를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치와 방법과 모든 내용이 다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는 서학으로 갔고, 하나는 동학으로 갔으며, 둘은 분명히 다르다고 한다.
21세기에 와서 고민해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벌써 2세기 전에, 그렇게 혼란한 시기에, 저 경주 용담에서 태어난 어느 시골 서생이 이러한 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깨달음을 얻고, 신념을 가지고 죽음을 선택했다.
도망갈 수도 있었다. 피해서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신념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결국 수운은 대구 감영에서 참수가 된다. 그것이 수운의 최후였다.
수운의 비전은 단순한 비전이 아니다. 아직도 전 인류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모순적 고민을 벌써 2세기 전에 풀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오늘 이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도, 이제 ‘하늘님’에 대해서도 주체적으로 우리말과 우리 생각과 우리 삶의 비근한 가치관을 가지고, 다시 배우고 다시 찾아나가야만 우리나라 정치도 잘 될 것이고, 우리나라 문화예술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씀드린다.
1. 대화
항상 이렇게 열렬하게 환영해 주어서 감사하다. 앞으로 두 번이면 제 강의가 끝난다. 시청자 여러분과 방청객 여러분께서 저와 깊은 교감을 하고, 이렇게 훌륭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강의이다.
한 사람의 강의가 TV에서 6개월간이나 계속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TV 강의는 긴장감이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많았으나 MBC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다. MBC에 감사의 박수를 부탁한다.
여기에 강의를 들으시러 6개월 동안 나오신 분들에게 제가 써서 드리지는 못하지만, 박사학위를 드리겠다.
제가 땀을 많이 흘리는 것이 안쓰러워서 한복을 만드시는 이영희 선생께서 이렇게 예쁜 모시옷 한 벌을 지어 보내주셨다. 옛날부터 모시 두루마기는 ‘모시고 다닌다.’고 했는데 귀하고 아름다운 옷을 보내주어서 감사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우리가 좋아하는 국회의원 한 분이 와 있다. 대전시 출신의 김원웅 의원을 잠깐 모셔보겠다.
김원웅(金元雄)
독립투사 아들로 중국 중경에서 태어나 대전고, 서울대 졸업. 대만정치대학 석사. 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3선)
도올: 본 강의를 들어보신 적 있나?
김 : 전부는 아니지만, 봤다. 동학 하면 와 닿는 것이 있는데, 우리 민족의 애환이 깃들여 있고, 지도자나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민초로부터 흘러나오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월드컵 4강 진출의 신화를 이룰 때 ‘꿈은 이뤄진다’는 플래카드를 보면서, 그 때 동학이 갖고 있던 끈질긴 생명력, 우리 민중의 갇혀져 있던 꿈이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동학은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우리 민중의 가슴속에 생명처럼 계속 살아나고 있다. 앞으로 우리 자랑스러운 아들딸들에게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이 있는, 꿈이 있는 나라를 넘겨주고 싶다면, 그 바탕이 동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올 : 정치인들이 소아를 버리고, 작은 문제를 가지고 꾸물대지 말아야 한다. 동학을 생각하면 우리 민족 전체의 애환을 생각해야 한다. 작은 문제에 구애받지 말고 서로 화합하여 대국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넓은 아량을 가지고 정치인들이 정치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2. 논학문
지난 시간에 수운이 득도하는 모습을 강의했다. 수운(水雲)이라는 사람의 세계에는 모순적인 것이 많다. 초월적인 인격자로서의 하느님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인격적인 신이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정반대의 모순되는 논리가 항상 같이 있다.
초월(trancendence) ↔ 내재(immanece)
수운은 정직하고 평범한 거 같으면서, 영부를 태워서 먹는다든지 하는 미신적인 면도 갖고 있다.
상식(common sence) ↔ 미신(superstition)
나중에 해월 선생이 이런 미신적인 것을 다 없애버린다. 수운의 사상을 알려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논학문(論學文)이라는 글이다. 함께 보자.
논학문(論學文)
<동경대전>의 두 번째 글
▶ 西洋之人(서양지인), 道成立德(도성입덕), 及其造化(급기조화), 無事不成(무사불성).
[서양 사람은 도성입덕하여, 그 조화에 미치어 일을 이루지 못함이 없다.]
서양 사람들은 도를 이루고 덕이 서 있어서, 세상 조화에 있어서 못하는 것이 없다. 이 사람들이 손을 대면 모두 대단하게 이룬다. 그 당시 서양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들어왔다.
▶ 功鬪干戈(공투간과), 無人在前(무인재전), 中國燒滅(중국소멸), 豈可無脣亡之患耶?(기가무순망지환야):
[무기로 침공함에 당할 사람이 없다하니 중국이 소멸하면 어찌 가히 순망의 환이 없겠는가?]
그래서 싸우면 당해낼 자가 없고, 중국이 소멸해버리니깐, 이 어찌 순망지환(脣亡之患)이 없을 것인가?
순망지환(脣亡之患)이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라는 좌전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이 없어지면 조선도 멸망할 게 뻔한 거 아니냐는 말이다.
중국은 아편전쟁(1640~42)으로 서양열강에 무릎을 꿇었고, 태평천국의 난(1850~64)으로 질서가 크게 무너졌다.
중국이 저렇게 멸망하는데, 어떻게 조선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느냐는 말이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도 망가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 都緣无地(도연무지), 斯人道稱西道(사인도칭서도), 學稱天主(학칭천주), 敎則聖敎(교즉성교).
[도무지 다른 연고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도를 서도라 하고, 학을 천주학이라 하고, 교는 성교라 하니,]
서양 사람들은 도를 말할 때는 서도(西道)라 하고, 학(學)으로 말할 때는 천주라 했다. 즉 배워야 할 것은 하느님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가르침으로 말할 때는 성교(聖敎)라 한다. 성스러운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 此非之天時(차비지천시), 而受天命耶?(이수천명야),
[이것이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것은 천시(天時)를 알고 천명(天命)을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 뭔가 대단한 체계가 있다는 말이다. 서학이라고 하는 것이 간단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서양 사람들이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서양을 긍정하고 있다.
▶ 擧此一一不已(거차일일불기), 故吾亦悚然(고오역송연):
[이런 것은 일일이 다 말할 수 없고, 그래서 나 역시 무서워졌다.]
이런 것을 일일이 들자면 끝이 없다. 그래서 나도 역시 무서워졌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생각할 적에,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우리 앞날을 생각할 적에, 이런 어마어마한 기독교가 중국을 이미 쓸어버리고, 탱크처럼 한국으로 밀고 들어오는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다.
▶ 只有恨生晩之際(지유한생만지제):
[다만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즈음에,]
단지 내가 늦게 태어난 것이 한(恨)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수보다 일찍 태어났더라면 이런 꼴이 되지 않았을 것인데,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당하기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일찍 태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했더라면, 뭔가 인류의 역사를 앞서 끌어갈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당하기만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 身多戰寒(신다전한), 外有接靈之氣(외유접령지기), 內有降話之敎(내유강화지교),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으되,]
그런데 어느 날, 몸이 막 떨리고 나서, 바깥에서 어떤 영험서린 기운이 다가와서 접하는 느낌이 있었다고 한다. 즉 그것이 밖에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이다. 공중에서 외난소리가 있었다고 했다.
안에서는 降話之敎, 즉 어떤 메시지가 들려왔다는 말이다. ‘나는 상제다, 너는 나를 모르느냐?’하면서 들려왔는데, 수운은 이것을 밖에서 들려온 이야기라고 하지 않고, 안(內)에서 들려왔다고 고쳤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밖으로는 어떠한 신령한 기운을 접했고, 소리는 사실 내 속에서 들려왔다고 한다. 內有降話之敎가 중요한 말이다. 포덕문에서 논학문으로 오면, 밖에서 외치던 소리가, 이제는 나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로 바뀌는 것이다.
▶ 視之不見(시지불견), 聽之不聞(청지불문), 心尙怪訝(심상괴아):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마음이 뭔가 의아스럽고, 불안했다고 한다.
▶ 修心正氣而問曰(수심정기이문왈):「何爲若然也?;하위약연야」
[수심정기하고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동학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말이 수심정기(修心正氣)이다. 수심정기를 다들 ‘守心正氣’라고 쓰는데, 물론 이 말도 수운은 썼다. 그러나 ‘修心正氣’가 더 수운의 오리지널한 생각이다.
마음을 닦고 그 기를 바르게 해서 묻는다. “어찌해서 내가 벌벌 떨고, 이상하게 되는 겁니까?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하고 공중에서 외치는 상제한테 물었다는 말이다.
▶ 曰(왈): 吾心卽汝心也(오심즉여심야), 人何知之!(인하지지),
[대답하시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그러니깐 하나님이 말하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고 한다. 이게 소위 말하는 인내천(人乃天)이 되는 것이다. 수운, 너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것을 어찌 알리오!
▶ 知天地(지천지), 而无知鬼神.(이무지귀신), 鬼神者(귀신자), 吾也.(오야):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라는 것도 나리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람들이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 귀신이 나라고 한다. 이게 굉장히 복잡하면서도 절묘한 이야기다. 그래서 동학이라는 게 어렵다.
최한기의 기학에서도 활동운화(活動運化)하는 천지 바깥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천지는 아는데, 귀신은 모른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천지를 물리적인 현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귀신이 있다고 한다. 천지에는 무언가 영험스러운 기운이 있다는 것이다. 그 영험스러운 기운을 압축한 존재가 바로 ‘나의 마음’이다.
천지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귀신인데, 그 귀신은 바로 ‘나’다. 그리고 귀신인 ‘나의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고 한다. 최수운의 논리는 중층적이고 복잡하다. 현대 신학적으로 보아도 굉장히 복잡하다.
▶ 吾亦幾至一歲(오역기지일세), 修而度之(수이탁지), 則亦不无自然之理(즉역불무자연지리):
[나 또한 거의 한 해를 닦고 헤아려 본즉, 또한 자연한 이치가 없지 아니하므로]
1년 동안을 잘 생각해보니, 그게 무슨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거기에 어떤 자연스러운 이치가 있다는 말이다.
▶ 轉至辛酉(전지신유), 四方賢士進我(사방현사진아), 而問曰(이문왈): 今天靈降臨先生(금천령강림선생), 何爲其然也(하위기연야),
[신유년에 이르러 사방에서 어진 선비들이 나에게 와서 묻기를 ‘지금 천령이 선생님께 강림하였다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신유년에 이르러, 사방에서 지식인들이 모여들어서 자기에게 묻기를, 하늘의 영이 당신한테 강림했다고 하는데, 그게 어찌된 일이오?
▶ 曰(왈): 受其无往不復之理(수기무왕불복지리):
[대답하기를 ‘가고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이치를 받은 것이니라.’]
수운이 답하길, 나는 ‘무왕불복지리’를 받은 것뿐이라고 한다.
▶ 曰(왈): 然則何道以名之?(연칙하도이명지).
[묻기를 ‘그러면 무슨 도라고 이름합니까?’]
그러면 당신의 도는 무엇이라고 이름을 하오리까? 당신이 무왕불복지리라고 했는데, 그것을 무슨 도라고 이름을 지으리까?
▶ 曰(왈): 天道也(천도야):
[대답하기를 ‘천도이니라.’]
이때 말한 게 ‘천도’이다.
여기의 천(天)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하다. 이 사람이 생각하는 천(天)은 천지의 자연적인 이치로서의 천(天)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인격적인 존재자인 상제(上帝)일 수도 있다. 이 사람은 하늘님이라고 했다. 기독교도 天主라고 했다.
천도의 ‘도’는 그냥 길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그냥 살아가는 게 아니라, 길이 있어서 가는 것이다. 우리는 길을 따라 산다. 아무렇게나 사는 게 아니다.
자신의 도는 어떠한 보편적인 하늘님에 관한 도라는 뜻이다. 그래서 천도라고 했다.
▶ 曰(왈): 與洋道無異者乎(여양도무이자호):
[묻기를, 양도와 다른 것이 없습니까.]
그러면, ‘서양의 양도하고 다른 게 있습니까?’하고 묻는다. 왜냐하면 서양 사람들도 천주학이라고 하면서 하늘님의 도를 말하지 않느냐? 그것과 뭐가 다릅니까?
▶ 曰(왈): 洋學如斯而有異(양학여사이유이), 如呪而無實.(여주이무실),
[대답하기를, 양학은 우리 도와 같은 듯 하나 다름이 있고, 비는 것은 같으나 실지가 없느니라.]
서양의 천주학, 양학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말하는 것과 뭔가 비슷한 거 같지만, 다르다고 한다. 서양의 기독교도 주기도문과 같은 주문이 많지만, 그것은 실(實)하지 않다고 한다. 뭔가 허(虛)하다는 말이다. 알맹이가 없다는 말이다.
▶ 然也運則一也(연야운즉일야), 道則同也(도즉동야), 理則非也(이즉비야):
[그러나 운인 즉 하나요, 도인 즉 같으나 이치인즉 아니니라.]
그러나 천지 대자연이 움직이는 운(運)으로 보면 하나고, 도(道)로 보면 같다고 한다. 말이 아주 묘하고 어렵다. 그런데 리(理)로 보면, 서도는 틀렸다고 한다.
도로 보면, 같은 하늘님에 관한 도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도로 보면 그 내용이 같다고 한다. 하지만 이치로 보면, 서양의 서도는 틀렸다고 한다.
▶ 曰(왈); 何爲其然也(하위기연야):
[묻기를 어찌하여 그렇게 됩니까?]
‘그럼 왜 서양 것은 틀리고, 당신 것은 맞다고 하십니까? 그게 어찌해서 그렇습니까?’ 하고 묻는다.
▶ 曰(왈): 吾道無爲而化矣(오도무위이화의):
[대답하기를 우리 도는 무위이화라.]
그러니깐 하는 말이, 같은 천도라도 내가 말하는 도는 無爲而化라고 한다.
서양의 하느님은, 자기가 인격적으로 앉아서 지배하고 조작하면서, 자기를 싫어하면 벌하고, 야단치는, 무언가 爲가 있는 하나님이지만, 자신이 말하는 하늘님은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한다. 함이 없이 모든 것을 한다는 말이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 曰(왈): 同道言之(동도언지), 則名其西學也?(칙명기서학야):
[묻기를 도가 같다고 말하면 서학이라고 이름 합니까?]
그러니깐 어떤 사람이 묻는다. ‘아까 도로 말하면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천주학도 천도를 말하고, 당신도 천도를 말하고 있으니깐, 당신 것도 서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하고 말하니깐,
▶ 曰(왈): 不然(불연). 吾亦生於東(오역생어동), 受於東(수어동),
[대답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내가 천지의 도로 말하면, 같은 하늘님에 관한, 같은 도라고 했지만, 내 도는 서학이라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나는 서양에서 난 것이 아니라 동쪽에서 났다. 아주 굉장히 간단한 이야기다. 나는 동쪽, 이 조선반도에서 태어나서, 이 조선반도에서 천도를 받았다고 한다.
▶ 道雖天道(도위천도), 學則東學.(학즉동학):
[도는 비록 천도나 학인즉 동학이라.]
도로 말하면 천도이지만, 학으로 말하면 동학이라고 한다.
인류사상 최초로 동학이라는 말이 쓰인 것이 여기다. 이전에는 동학(東學)이라는 말이 없었다. 이전에는 수운도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만 했다. ‘무근대도’라고만 하고, ‘하늘님’이라고만 했지, 동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無極大道: 극이 없는 대도
그런데 서학으로 지목을 받고, 영남의 유림들까지 서학쟁이라고 하면서, 서학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게 단순한 변명은 아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내 도는, 도로 말하면 천주교와 같이 천도, 하늘의 도를 말하는 것이지만, 학으로 말하면, 천주교는 서학이고, 내 것은 동학이라고 한다. 여기서 동학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과거부터 천주교를 서학이라고 했으니깐, 그 말에 반해서 단순하게 동학이라고 했다고 알면 안 된다. 동학이라는 말에는 수운의 이론적인 논리가 있는 것이다.
도는 천도인데, 학으로 말하면, 그 도를 인식하는 방법과 내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無爲而化, 勞而不功.
같은 하늘님을 말하지만, 내 하늘님은 무위이화(無爲而化), 함이 없이 이 세상을 변하게 하고, 노이부공(勞而不功), 노력은 하지만 공은 없고,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그것은 오로지 말씀을 할 때, 내 마음 속에서 내유강화지교(內有降話之敎)라고 한다.
그리고 천지를 바라볼 적엔 단순한 물리적 천지가 아니라, 생명적 천지를 말한다. 저 천지에 귀신이 있지 않느냐? 그 귀신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나는 동학을 볼 때, 눈물이 안 나올 수 없다. 얼마나 감동적인가?
천지를 바라볼 때, 천지에 귀신이 가득하다고 보면서도, 귀신이 도깨비불처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그 귀신이 곧 내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곧 천지의 귀신을 모두 담은, 그렇게 귀한 하느님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우리가 얼마나 권위 있게 살겠는가?
21세기가 되었어도 서양에 아직 이것만한 사상이 없다. 그 당시 우매한 백성들이 기독교로 빨려 들어갈 때, 이미 유교로도 불교로도 우리나라를 구해볼 길이 없었다.
儒道佛道 누천년에 運이역시 다했던가 -교훈가-
서학에 빠져 들어가는 민중들에 대해서 수운 선생은 서학의 장점은 받아들이자고 했다. 그러면서 신을 대면하려고 노력해 보고, 그래서 결국 만났다. 그리고 1년을 고민고민하다가, ‘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이 나의 하나님이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학즉동학(學則東學)이라는 말이 중요한 말이다.
▶ 況地分東西(황지분동서), 西何謂東(서하위동), 東何謂西?(동하위서):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라고 이르겠는가.]
여기서 좀 강하게 이야기한다. 땅도 동서를 갈라서 이야기하는데, 왜 서를 동이라고 하고, 동을 서라고 하겠느냐고 한다. 서학과 동학은 다르다!
3. 주문이란?
▶ 曰(왈): 呪文之意何也?(주문지의하야):
[묻기를 주문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 다음에 ‘주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
당신이 주문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쓸데없는 주문을 지어서, 사람을 홀리고, 그따위 짓을 하느냐고 까는 것이다. 이게 굉장히 치열하다.
이 양반이 쓴 것을 보면,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반론을 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반론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수운은 자기가 스스로 반론을 하고 있다. 도대체 네가 뭐냐고 하고 있다. 주문은 무슨 얼어빠진 주문이냐고 한다.
이 다음에 주문을 한 자 한 자(字) 설명한다. 여기 중요한 것이 나온다. ‘侍天主’라는 것이다. 侍天主, 造化定이라고 할 때, 시천주가 핵심이다.
강령주문 : 至氣今至, 謂爲大降. (8자)
본 주문 :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13자)
시(侍)는 모실 시다. 시천주는 하늘님을 모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문 21자를 다 해설했는데, 천(天)자만 은근 슬쩍 빼버렸다. 왜냐하면 여기서 천(天)이라는 글자를 해설해 버리면, 우리가 너무 수운의 언어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천(天)만 빼버렸다.
曰: 氣者(기자), 虛靈蒼蒼(허령창창), 无事不涉(무사불섭), 无事不命(무사불명), 然而如形而難狀(연이여형이난상), 如聞而難見(여문이난견), 見亦渾元之一氣也.(견역혼원지일기야), [기라는 것은 허령이 창창하여 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일에 명령하지 아니 함이 없으나, 그러나 모양이 있는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듯하나 보기는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한 한 기운이요.]
사실 기(氣)를 설명하면서 천에 대한 해설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면서 이 양반은 천(天)에 대한 해설을 뺐다.
▶ 侍者(시자), 內有神靈(내유신령), 外有氣化(외유기화):
[「시」라는 것은 안에 신령(神靈)이 있고 밖에 기화(氣化)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
내가 모셨다고 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내면에 신령스러움이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신령한 존재라는 말이다.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몸의 내면에는 어떠한 신령한 마음이 있고, 이 우주의 신령스러움을 알아차릴 수 있는 신령함이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밖에는 우주의 기가 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밖에는 우주의 기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밖으로는 기화의 세계가 있고, 안으로는 신령함이 있어서, 그 신령함과 기화의 세계가 항상 끊임없이 서로 통한다고 하는 것이 모신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게 아주 절묘한 것이다. 아주 심오한 사상이다.
‘나’라는 존재의 내면에 신령함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의 세계가 있어서 그것이 항상 끊임없이 교류되고 소통하는 것이 모신다고 하는 것이다.
▶ 一世之人(일세지인), 各知不移者也.(각지불이자야):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
各知不移者也는 해설이 좀 어려운데, 그러한 것이 항상 그러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교섭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아는 것이 바로 모신다는 뜻이다. 오늘은 이렇게만 해설한다.
그 다음에 천(天)을 빼고, 주(主)를 해설한다.
4. ‘한울’의 오류
천도교에서 상당히 잘못한 것이, 천(天)을 ‘한울’이라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수운 선생은 용담유사에서 그렇게 쓴 적이 없다. 이것은 야뢰 이돈화라는 사람이 잘못 만들어 놓은 것이다.
@ 야뢰(夜雷) 이돈화(李敦化:1884~?)
천도교 교리조직가. <부인지> <신인간> 잡지를 발행. <개벽>은 야뢰가 발행인으로 되어있지만 실제 소춘 김기전의 창간.
우리는 수운 선생의 가르침을 수운 선생의 말씀대로 알아야 한다. <용담유사>에는 2가지밖에 안 썼다. ‘하늘님’ 아니면, ‘하늘님’ 밖에 없다. ‘날’이 지금은 ‘늘’이 되었다. 그래서 ‘하늘님’밖에는 쓸 수가 없다.
그런데 수운 선생이 ‘하늘님’이라고 한 것을 야뢰가 ‘신인간’인가 하는 곳에서 ‘한’은 큰 것을 말하고, ‘울’은 울타리라고 하면서 잘못 쓴 것이다.
이건 정말 잘못된 것이다. 이건 바로 잡아야 한다. 용담유사에 있는 그대로 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천(天)이라고 하는 것을 하늘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主)는 ‘님’이다. 그래서 천주(天主)하고 한 것이다. 기독교는 하느님 아니면 하나님이라고 한다. 과거 개역성경에서는 하나님으로 했다. 지금의 공동번역에서는 하느님으로 한다.
개역한글판 : 하나님
공동번역판 : 하느님
하나님은 유일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ㄴ 앞에서 ㄹ 받침이 탈락하는 수는 있으나 그것도 전혀 필연적 현상은 아니다.
하늘님에서 ㄹ이 탈락할 수는 있다. 따라서 하느님까지는 가능하다. 예를 들면, 우리가 불나비라고 할 때, 부나비가 된다. ㄴ 앞에서 ㄹ이 탈락한 것이다.
'하늘님'을 ‘하느님’이라고 얘기할 수 있으나, ‘한울님’은 잘못된 것이다. 19세기 말기까지 우리 민중들은 전부 ‘하늘님’이라고 불렀다.
19세기말기까지 조선 민중은 하늘님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그런데 왜 지금 ‘하늘님’이라는 말을 안 쓰냐 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인 ‘하늘’이라는 말에 ‘님’자를 붙이면 뭔가 유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님’보다는 뭔가 다른 말을 써야 했다.
그래서 천도교에서는 바보같이 ‘한울님’이라는 엉터리 말을 만들고, 기독교도 하느님으로 변화를 한 것이다. 그런데 19세기말기까지 우리는 분명하게 ‘하늘님’이라고 했다. 저 푸르고 창창한, 이것을 우리가 ‘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5. 주문 해설
▶ 主者(주자), 稱其尊(칭기존), 而與父母同事者也.(이여부모동사자야):
[‘주’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
하늘이라고만 해도 되는데, 왜 주라는 것을 붙였냐? 그것은 우리가 보통 부모를 부모님이라고 부르지 않냐는 것이다. 여기 공기가 있으면, 공기님이라고 해도 된다. 그것은 그냥 존경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것을 초월적 인격신이니 하면서 개소리를 하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을 ‘님’화 시켜서 ‘하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부모’를 볼 때, ‘부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하늘의 님화는 반드시 초월적 인격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수운은 인격신관의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한다. ‘하늘님’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왜 우리가 ‘님’이라고 붙였느냐? 그것은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때, ‘님’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님’이라고 하면, 하늘에 털보할아버지가 있고, 그런 존재자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뭐든지 우리가 귀한 마음이 있으면, 부모에게도 부모라고 하지 않고, 부모님, 아버님이라고 이야기하듯이 그저 하늘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수운 선생의 원래적 표현인 ‘하늘님’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천(天) 주(主)
하늘 님
천주라고 해서 서학(西學)에서 말하는, 하늘 꼭대기에 앉아서 모든 사람을 감시하면서 ‘나를 믿으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하늘님이 아니라, 그저 옛날부터 청수 한 그릇 떠놓고, 깨끗한 공기, 맑은 물, 이런 것을 모시면서 느끼면서 ‘하늘님! 비나이다, 비나이다.’라고 했던 하늘님! 그 하늘님을 너의 마음에 받아드리면 그것이 동학이라고 한다.
‘侍天主’라는 것은, 우리 인간은 ‘하늘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게 모시면 조화가 정해진다고 한다.
인간은 侍天主의 존재이다.
▶ 造化者(조화자), 无爲而化也(무위이화야), 定者(정자), 合其德(합기덕), 定其心也(정기심야),
[조화라는 것은 무위이화요. 정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요,]
조화라는 것은 함이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조화가 정해진다고 하는 것은 뭐냐? 그 덕을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바르게 정하는 것이다.
▶ 永世者(영세자), 人之平生也(인지평생야), 不忘者(불망자), 終想之意也(종산지의야), 萬事者(만사자), 數之多也(수지다야), 知者(지자), 知其道(지기도), 而受其知也(이수기지야):
[영세라는 것은 사람의 평생이요, 불망이라는 것은 생각을 보존한다는 뜻이요. 만사라는 것은 수가 많은 것이요. 지라는 것은 그 도를 알아서 그 지혜를 받는 것이니라.]
영세는 천지가 창조되어 천지가 끝날 때까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세는 한 인간의 평생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우주의 시작과 끝은 한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라고 한다.
영세라는 것은 영원한 하늘나라가 아니고, 사람이 태어나서 죽은 것이니깐 그 평생 동안 수신정기하며 살자는 것이다. 영세라는 것은 한 사람의 평생이라고 한다.
불망이라는 것은 항상 잊지 않고 ‘하늘님’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늘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신다는 것은 뭐냐? 나의 마음 속에는 신령스러움이 있고, 밖에는 항상 기화의 세계가 돌아가고 있으며, 이것은 항상 끊임없이 교섭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망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잊지 말아야 하고, 항상 우리 마음에 보존하고 살자고 하는 것이다.
만사를 안다는 것은 ‘하늘님’의 도를 알고, 깨달은 것을 내 마음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안다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주문 21자를 만들어 놓고, 이렇게 치열하게 한 자, 한 자 해설을 한다. 해설을 하고 마지막에 결론을 이야기한다.
▶ 故明明其德(고명명기덕), 念念不忘(염념불망), 則至化至氣(즉지화지기), 至於至聖.(지어지성),
[그러므로 그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에 이르느니라. ]
고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지지덕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덕을 항상 밝히고 또 밝히고, 항상 생각 생각마다 그걸 잊지 않고, 지극한 기운으로 화하는데 이르게 되면, 우리는 지극한 성인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동학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굉장히 종교적인 색채를 가지고 나왔지만, 결국 끌고 간 곳은 모든 사람이 성인의 길로 가는 것이었다.
吾道博而約(오도박이약), 不用多言義(불용다언의):
내 도는 너르나 간결하고, 많은 말이 필요없다. -수운-
6. 동학이란?
동학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전부, 동학의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잘못 해석해서, 초월적인 하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주문을 외우고, 立身하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부를 태워 마시면, 검던 얼굴이 희게 되고, 머리털도 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런 걸 바라는 게 동학이 아니다.
그럭저럭 먹은부가 수백장이 되었더라
칠팔삭 지내나니 가는몸이 굵어지고
검던낯이 희어지네 - 안심가 -
동학이라고 하는 것은 초월과 내재, 인격성과 비인격성, 유신론과 무신론, 유일신론과 범신론, 이런 모든 적대적인 관계를 어떻게 해소할지 고민했다.
처음에 수운은 서학적인 하느님을 만났다. 그리고 자꾸만 의심했다. ‘서학을 가르치리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아니라고 한다.
자신은 이 땅에서 태어나서 이 땅에서 도를 받았는데 하늘님도 내 하늘님을 찾아야지 어떻게 서양에서 하늘님을 받느냐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받은 도만이 하늘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서학이나 자신이 말하는 도는 다 같이 천도를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치와 방법과 모든 내용이 다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는 서학으로 갔고, 하나는 동학으로 갔으며, 둘은 분명히 다르다고 한다.
21세기에 와서 고민해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벌써 2세기 전에, 그렇게 혼란한 시기에, 저 경주 용담에서 태어난 어느 시골 서생이 이러한 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깨달음을 얻고, 신념을 가지고 죽음을 선택했다.
도망갈 수도 있었다. 피해서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신념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결국 수운은 대구 감영에서 참수가 된다. 그것이 수운의 최후였다.
수운의 비전은 단순한 비전이 아니다. 아직도 전 인류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모순적 고민을 벌써 2세기 전에 풀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오늘 이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도, 이제 ‘하늘님’에 대해서도 주체적으로 우리말과 우리 생각과 우리 삶의 비근한 가치관을 가지고, 다시 배우고 다시 찾아나가야만 우리나라 정치도 잘 될 것이고, 우리나라 문화예술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씀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