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버드나무 / 임두환
세월 참 빠르다. 가던 길 멈추고 잠시 뒤돌아본다. 붙잡고 싶었던 그리움과 매달리고 싶었던 욕망도 놓치고 싶지가 않다. 봄철이라고 들떠있던 때가 엊그제였는데 어느새 겨울의 문턱이다. 세월이기는 장사 없다고 했던가? ‘나이는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니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가을철, 산불진화대원으로 선발되어 ‘한국소리문화전당’주변에서 근무할 때였다. 진화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장덕사’와 ‘오송제(五松堤)’를 거쳐 전당 앞까지 순찰을 했다. 땀도 흐르고 피곤하여 쉼터를 찾다보니 ‘능원’식당 주변에 왕버드나무 군락지가 있었다. 예사롭지 않아 가까이 다가서 보니 아름드리 왕버드나무 18그루가 어깨를 같이하였다. 그들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수령 400여년, 둘레2.8m, 수고16m로 1982년에 전주시청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누가 언제 어떤 연유로 심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변에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문학비와 창암(蒼癌) 이삼만(李三晩)사적비, 극작가 박동화(朴東和)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이곳이 풍수지리 상 명당(明堂)이구나 싶었다.
버드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뿌리가 물을 정화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연못이나 우물 같은 물가에 많이 심었다. 버드나무는 종류도 많아 크게 나누면 왕버들, 갯버들, 능수버들, 수양버들로 구분한다. 왕버들은 수백 년을 살 수 있고 우람하여 ‘뭇 버들의 왕’이라 해서 ‘왕버드나무’라 부르는 듯하다. 왕버드나무가 우람한 남성이라면 능수버들과 수양버들은 가냘프게 한들거리는 아름다운 여인이라고나 할까.
만고풍상을 겪으며 모진세월을 견디느라 줄기에는 옹이가 수 없이 박혀 있고, 뒤틀리다 못해 구부러지고 껍질은 헌옷가지를 걸친 듯 너덜거렸다. 문득 어린 시절 할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한마디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험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기를 깨닫고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한 듯 했다. 쓸모없는 가지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꼭 필요한 곳에는 새순을 돋게 하여 삶을 유지해 나갔다.
우리 집안은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삶의 무게는 더없이 버거웠다. 할아버지는 집안 식구를 건사하려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피땀을 흘리셨다. 그런데도 내 부모에게 물려준 재산은 산골짜기 다랑이 논과 비탈진 밭뙈기가 전부였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나에게 큰 버팀목이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이던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두환아, 잘 들어라! 재산을 잃는 것은 하루아침이지만 머릿속에 들어있는 글은 평생 간다고 하더라.”
하시며, 집안 형편이 어렵지만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시던 염원은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
내 할아버지도 젊어서는 호랑이라도 잡을 듯 힘이 장사였는데 모진세월을 겪다보니 허리가 구부정하고, 발뒤꿈치는 갈라지고, 손마디가 굵어져 옹이처럼 보였다. 어쩌면 할아버지와 왕버드나무의 모습은 너무 흡사해 보였다. 온갖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던 삶의 원동력은 가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서였으리라.
내 자신도 이제 허울에서 벗어나 내면을 가꾸어야 할 성 싶다. 나이가 들수록 젊은 날의 화려했던 기억과 경력은 퇴색해진다. 그렇다면 제 2의 인생을 어떻게 해야 잘 산다고 할 것인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는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다. 우리 주변에는 기피대상 인물들이 더러 있다. 그게 바로 ‘꼰대’다. ‘나 때는 말이야!’라며 과거를 내세우며 구태의연한 말만 늘어놓으니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내 자신도 꼰대라고 하면 자유롭지를 못하다.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다.
성공한 사람의 달력에는 ‘오늘’이라는 단어가 적혀있고, 실패한 사람에게는 ‘내일’이라는 단어가 적혀있다고 한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커피는 따뜻할 때 마셔야 제 맛이고, 인생은 이 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흐르는 강물과 흐르는 시간은 잡을 수 없다. 내 인생을 좀 더 알차게 가꾸기 위해서는 지금 이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야할 터인데…. 생각이 깊어진다.
이제 왕버드다무와 헤어질 시간이다. 같이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세월은 바람과 같으니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고. 보채지 말고 느긋하고, 상대에게 상처 주지 말고 이웃과 함께하라.’는 교훈을 얻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왕버드나무는 지금 이 순간도 길손에게 쉼터를 내주고 있다. 너그럽게 감싸 안아주는 그의 깊은 아량에 내 마음 숙연해진다. 버드나무는 붉은 태양과 푸른 하늘 향해 한 생(生)을 뻗어 올리고 있다. 더 높은 곳에 희망을 두고 살아간다.
[임두환] 수필가. 2008년 《대한문학》등단.
행촌수필 부회장, 전북수필, 영호남수필 이사.
* 수필집 《뚝심대장 임장군》 《오늘, 지금 이 순간》
* 행촌수필문학상
왕버드나무가 주는 교훈을 깊이 읽으셨네요. 퇴직 후에 수필을 쓰시며, 생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줄곧 찾아 성실하게 일하시는 모습이 참 좋아 보입니다. 자연 속에서 사유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일은 얼마나 고귀한지요. 나무가 주는 말에 귀를 열어 들었으니, 그렇듯이 나이 들어가면 더없겠습니다.
첫댓글 성공한 사람의 달력에는 오늘 이라는 단어가 적혀있다
왕버드나무와 대화를 하시니
아주 훌륭하십니다
감사합니다!
그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하세요~~
성공한 사람의 달력에는 "오늘"이, 실패한 사람의 달력에는" 내일"이라는 단어가 적혀있다는 이야기, 새겨들을 말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