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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李箕鎭)
[문과] 숙종(肅宗) 43년(1717) 정유(丁酉) 정시(庭試) 병과(丙科) 2위(04/05)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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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군범(君範)
생년 정묘(丁卯) 1687년 (숙종 13)
졸년 을해(乙亥)【補】(주1) 1755년 (영조 31)
향년 69세
합격연령 31세
본인본관 덕수(德水)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후기 홍주목사, 평안도관찰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군범(君範). 호는 목곡(牧谷).
이식(李植)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신하(李紳夏)이다. 아버지는 양구현감 이당(李簹)이며, 어머니는 박원개(朴元開)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삼척부사 이번(李蕃)에게 입양되었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1717년(숙종 43)에 진사가 되었다. 같은 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홍문관에서 재직하였다.
1721년(경종 1) 헌납으로 있을 때,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된 연잉군(延仍君)에 대해 나쁜 말을 퍼뜨린 유봉휘(柳鳳輝)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신임옥사 때 파직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곧 등용되어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이듬해 시독관(侍讀官)이 되어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에 대한 논죄를 철저히 하여, 그 시비를 명백히 밝힐 것을 극언해 한때 영조의 노여움을 사기도 하였다.
1725년(영조 1) 승지를 지내고, 이조참의를 거쳤다. 1727년에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강화부 유수가 되었다. 그러나 왕세자의 관례 때 봉전문(封箋文)을 빠뜨린 사건으로 파면당했다.
그 뒤 향리에서 머물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 등 소론 일파가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 소현세자의 嫡孫)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급히 상경해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 반란이 평정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있다가 1729년 다시금 직책을 맡았다.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고, 이어 언관으로서 최고직인 대사간을 지냈으며, 경상도관찰사·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1년에 판의금부사·이조판서를 지냈다. 1744년 홍주목사를 거쳐 이듬 해 경기도관찰사·판의금부사를 지냈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749년에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1년 광주부유수로 「한봉도(汗峰圖)」를 지어 올렸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목곡집』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기진(李箕鎭))]
[진사] 숙종(肅宗) 43년(171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69위(99/100)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이조판서(吏曹判書)
[관인정보]
제수년월 1743 [계해(癸亥)]
[품관 정보]
품관 정2품
[과거 정보]
과거 숙종(肅宗) 정유정(丁酉庭)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비변사(備邊司)
[관인정보]
제수년월 1749 [기사(己巳) 7월 22일]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계하(啓下: 임금의 재가)
[출전]
『비변사선생안(備邊司先生案)』(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6005])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이력사항]
선발인원 05명 [甲1‧乙1‧丙3]
전력 진사(進士)
관직 제학(提學)
관직 이조판서(吏曹判書)
문과시제 전(箋):초송옥사유이선재론사사경진서인지풍(椘宋玉謝諭以善哉論事使更陳庶人之風)
타과 숙종(肅宗) 43년(171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69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번(李蕃)
[생부(生父)]
성명 : 이당(李簹)
[조부(祖父)]
성명 : 이신하(李紳夏)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식(李植)[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박원개(朴元開)[生]
본관 : 나주(羅州)【補】
[처부(妻父)]
성명 : 박권(朴權)
본관 : 미상(未詳)
[가족과거]
숙부(叔父) : 이여(李畬)[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정유식년사마방목(丁酉式年司馬榜目)』(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O 351.09 정유식])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이식(李植)
[문과] 광해(光海) 2년(1610) 경술(庚戌) 별시(別試) 병과(丙科) 4위(08/2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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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여고(汝固)
호(號) 택당(澤堂)
시호(諡號) 문정(文靖)
생년 갑신(甲申) 1584년 (선조 17)
졸년 정해(丁亥)【補】(주1) 1647년 (인조 25)
향년 64세
합격연령 27세
본인본관 덕수(德水)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 좌의정 이행(李荇)의 현손(玄孫)이다. 아버지는 좌찬성에 증직된 이안성(李安性)이고 어머니는 무송 윤씨(茂松尹氏)로 공조참판 윤옥(尹玉)의 딸이다.
이식은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1613년 세자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친 정7품에 해당하는 설서(設書)를 거쳐 1616년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이듬해에 선전관을 지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정계에서 은퇴하여 경기도 지평(砥平)으로 낙향했다. 그 후에 남한강변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호를 택당이라 한것은 여기 연유한다.
1621년 관직에 나오라는 명을 계속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왕의 명령을 어겼다는 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교분이 있었던 친구들이 조정의 주요직에 진출하게 되자 발탁되어 이조좌랑에 등용됐다. 이듬해에 부수찬·응교·사간·집의 등을 역임했다.
1625년(인조 3) 예조참의·동부승지·우참찬 등을 역임했고 다음해에 대사간·대사성(大司成)·좌부승지 등을 지냈고 1632년까지 대사간을 세 차례 역임했다. 임금의 종실을 사사로이 기리고 관직을 이유 없이 높이는 일이 법도에 어긋남을 논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간성현감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1633년에 부제학을 거쳐 1636년에 대제학이 되었고, 1640년에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식은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한다고 하여 중국의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 돌아올 때에 다시 의주(義州)에서 청나라 관리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1644년 예조·이조의 판서 등 조정의 주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646년 별시관(別試官)으로 과거 시험의 문제를 출제하였는데 그가 출제한 문제에 역모의 뜻이 있다고 하여 관직이 삭탈되기도 했다.
이식은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꼽혔으며 그의 문하에서 많은 문인과 학자가 배출됐다.
문집으로는 『택당집』이 전하는데 한시의 모든 갈래에 두루 능숙했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체로 정경의 묘사가 뛰어나고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풍광을 읊은 시가 많다. 고체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오언율시에 특색을 발휘했다.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두시비해(杜詩批解)』 등을 저술했으며 『수성지(水城志)』·『야사초본(野史初本)』 등을 편찬했다.
김택영(金澤榮)에 의하여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의 문장은 우리나라의 정통적인 고문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는 「사간원차자(司諫院箚子)」 등의 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됐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686년 영의정에 추증됐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식(李植))]
[생원] 광해(光海) 2년(1610) 경술(庚戌)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2위(42/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20명 [甲1‧乙3‧丙16]
전력 생원(生員)
관직 문형(文衡)
관직 호당(湖堂)
문과시제 책문(策問):숭도학(崇道學)
타과 광해(光海) 2년(1610) 경술(庚戌)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12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안성(李安性)
[조부(祖父)]
성명 : 이섭(李涉)[生]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원상(李元祥)
[외조부(外祖父)]
성명 : 윤옥(尹玉)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심엄(沈㤿)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서제(庶弟) : 이수(李𣗳)[進]【補】(주3)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만력38년경술윤3월초6일식년사마방목(萬曆三十八年庚戌閏三月初六日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6024-169])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안항 : 『만력46년무오식년사마방목(萬曆四十六年戊午式年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6(1618)]) 내의 서제 이수(李𣗳)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九(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행(李荇)
[문과] 연산(燕山) 1년(149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5위(25/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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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택지(擇之)
호(號) 용재(容齋)
호(號) 청학도인(靑鶴道人)【補】(주1)
시호(諡號) 문정(文定)
생년 무술(戊戌) 1478년 (성종 9)
졸년 갑오(甲午)【補】(주2) 1534년 (중종 29)
향년 57세
합격연령 18세
본인본관 덕수(德水)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우찬성,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 지돈녕부사 이명신(李明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이추(李抽)이고, 아버지는 홍주목사 이의무(李宜茂)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교리(敎理) 성희(成熺)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 문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예문관 검열·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수찬를 거쳐 홍문관교리까지 올랐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 이어 함안으로 옮겨졌다가 1506년 초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교리로 등용되고, 이어 부응교로 승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문흥을 위해 재능있는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하였다.
1513년(중종 8) 다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가 이듬해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사섬시정(司贍寺正)을 거쳐 1515년 사간원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신진 사류인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그러나 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병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좌참찬·우찬성으로 승진하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으로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축출되면서 복관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행(李荇))]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甲3‧乙7‧丙23]
전력 유학(幼學)
관직 한림(翰林)
관직 호당(湖堂)
관직 문형(文衡)
관직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문과시제 책문(策問):인재(人才)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의무(李宜茂)[文]
[조부(祖父)]
성명 : 이추(李抽)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명신(李明晨)
[외조부(外祖父)]
성명 : 성희(成熺)[文]
본관 : 창녕(昌寧)【補】
[처부(妻父)]
성명 : 이조(李稠)
봉호 : 장산수(璋山守)
본관 : 전주(全州)【補】
[안항(鴈行)]
형(兄) : 이권(李菤)[武]【補】
형(兄) : 이기(李芑)[文]
제(弟) : 이령(李苓)[武]【補】
제(弟) : 이미(李薇)[文](주3)
[주 1] 호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卷之44, 연산시이화인(燕山時罹禍人), [이행(李荇)의 행장(行狀)](周世鵬)을 참고하여 호를 추가.
[주 2] 졸년 : 「『중종실록』 78권, 중종 29년(1534) 11월 11일」 기사와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卷之44, 연산시이화인(燕山時罹禍人), [이행(李荇)의 행장(行狀)](周世鵬)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3] 안항 : 『선원록(璿源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1047]) 권3, [太祖大王宗親錄](32~33쪽)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五(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명신(李明晨)
출생일 1392년(태조 1)
사망일 1459년(세조 5)
조선전기 통사랑, 사온서부직장, 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백부(伯扶).
증조부는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 이천선(李千善), 조부는 대제학 이인범(李仁範)이며, 아버지는 공조참의 이양(李揚)이다.
어머니는 공안부윤(恭安府尹) 하자종(河自宗)의 딸 진주하씨(晉州河氏)이며, 부인은 태조(太祖)의 부마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의 딸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1414년(태종 14) 벼슬길에 올라, 통사랑·사온서부직장(司醞署副直長)을 역임하였으며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지방관으로는 공주와 홍주의 목민관으로 있으면서 권농관(勸農官)과 병마절제사를 겸직하였다. 특히, 홍주에서는 선정을 베풀어 명관으로 칭송이 높았고, 김종직(金宗直)이 만시를 지어 이명신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시호는 강평(康平)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명신(李明晨))]
이천선(李千善)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774CC9CC120U9999X0
시호(諡號) 양간(良簡)
생년 ?(미상)
졸년 ?(미상)
시대 고려시대
본관 덕수(德水)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이천선(李千善)
생졸년 미상. 본관은 덕수(德水).
부친은 수 첨의정승(守僉議政丞) 이윤온(李允蒕)이다.
공민왕 때 기씨(奇氏) 일족을 목 베고 중국 조정에 아뢴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 사공 주국낙안백(守司空柱國樂安伯)에 제수되고 1356년(고려 공민왕 1)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 임명되고 다음해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가 되었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사람됨이 풍채가 아름다워 공민왕이 화상을 그려서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