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가 어렸을 때 피해있던 박해시대의 교우촌
한덕골은 박해 시대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사적지다.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잠시 정착해 있던 곳이며, 최양업 신부의 넷째 동생 최신정(델레신포로)이 의지하여 성장했던 중백부 최영겸(베드로)이 살던 교우촌이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말 귀국한 뒤 한덕골 교우촌으로 가서 중백부 최영겸과 그곳에 살고 있던 최신정을 비롯하여 동생들을 두루 만나보면서 여러 날 쉬었다.
경기도 용인시 일대에는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와 관련된 성지가 많다. 미리내 성지를 비롯하여 한덕골, 은이 공소, 골배마실까지 김대건 신부의 생애가 이곳 용인군에 집중되어 있다. 이곳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4리 한덕골은 박해 시대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사적지다. 김대건 신부의 가족도 잠시 이곳에 정착해 있었다.
한국인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를 거쳐 용인 땅에 정착한 것은 대략 1827년 전후로 알려진다. 당시 그의 가족이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군 곳은 골배마실이 아니라 남쪽 산 너머에 있는 한덕골이었다. 이곳으로 피난 와서, 처음에는 기거할 집이 없어 마을 근처 성애골(현재는 매몰되었음) 골짜기에 들어가 산(生) 나무와 산 나무에 칡으로 얽어매고 억새풀을 덮고서 살았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원래 한덕골은, 윗마을 광파리골과 아랫마을 한덕골을 합쳐서 부르던 이름이며, 그중 교우촌은 윗마을 광파리골이다. 족보에 의하면 성 김대건 신부의 조부 김택현(金澤鉉, 宗元, 1766∼1830)과 숙부 김제철(金濟哲, 憲明, 1803∼1835)의 묘가 한덕골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성 김대건 신부 가족들의 한덕골 피난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김제준(金濟俊, 보명 濟麟, 1796~1839, 이냐시오)은 그후 가족들을 이끌고 1835년 무렵에 한덕골에서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최경환(崔京煥, 보명 永訥, 1805~1839, 프란치스코) 성인의 형 최영겸도 1832년 무렵에 이곳 한덕골로 이주해 왔으며, 1839년 이후에는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의 넷째 아우인 최신정(崔信鼎, 델레신포로)이 이 집에서 성장하였다.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귀국하여 이곳에 와서, 중백부 최영겸과 어린 동생들을 눈물로 상봉하였다. 최 신부는 그 이후에도 가끔 이곳에 들러 성사를 주곤 하였다. 이곳 한덕골 출신 순교자로는 성 김대건 신부와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을 비롯하여, 김 시몬(1870년 순교, 40세), 김 마리아(1866년 순교, 42세) 등이 있다. 김 시몬은 1866년 강원도 양구 하안 땅에 피난했다가 1870년 봄에 경포교에게 잡혀 서울에서 치명했으며, 김 마리아는 1866년에 한덕골에서 양주 포교에게 잡혀 치명했는데 구체적 상황은 알 수 없다.
■ 순교자
◆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1821∼1846)
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1836년 나 베드로(모방) 신부는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는 6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서울과 용인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 음력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김 신부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취조 중, 김 신부의 넓은 식견과 당당한 태도에 대관들은 그를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고 생각하였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의 처형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 찾아가는 길
+ ▲♡ 위 사진과 글 모두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에서 옮겨 온 내용입니다. |